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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01, 2025

책, 『모비딕 Moby-Dick; or The Whale』 by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의 소설 『모비딕 Moby-Dick; or The Whale』 의 줄거리(너무 유명하여 모두들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 이지만)를 간략히 축약하자면 ; 

작중의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다리 한쪽을 잃은 에이해브(Ahab) 선장이 지휘하는 피쿼드호를 타고 낸터킷을 출발하여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다. 낸터킷에서 출항한 고래잡이 배 피쿼드호는 대서양을 건너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으로 항해한 후 태평양에 이른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딕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그는 바다에서 만나는 다른 고래잡이 배 선장들에게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고 다닌다. 그리고 드디어 흰 고래, 모비딕을 만나 고래 등에 작살을 꽂지만 그 작살 밧줄에 목이 걸려 바다로 떨어진다. 모비딕에게 들이 받힌 피쿼드호와 보트들이 바닷속으로 침몰하여 이슈메일을 제외한 모든 선원들이 바닷물 속에 잠겨 사망한다. 나, 이슈메일은 야만인 이교도 선원인 퀴케그의 관이었던 구명부표에 의지해 표류하다가 주변을 순회하던 다른 고래잡이 배 레이첼호에 의해 구조된다. 

고래잡이라는 내용으로 본다라면 단순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모비딕은 단순한 해양모험소설이 아닌 수 많은 상징과 은유를 품은 다면적인 소설이다. 기독교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와 다양한 인물들이 뒤엉킨다. 광기어린 에이허브 선장과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극단적인 대립, 선원 공동체내의 종교, 인종, 계층간 갈등, 각기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인 캐릭터와 심리가 복합적으로 뒤얽힌 장엄한 서사시이다. 

1851에 출간된 모비딕은 출간 당시 평론가들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대중적/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소설이었다. 출간 당시 모비딕은 지적재산권 보호 등의 문제로 영국에서 먼저 출간 되었는데, 영국에서 출간된 판본에는 원고 전달 상의 문제로 한쪽 짜리 분량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가 빠져 버렸다. 그 에필로그에는 침몰한 피쿼드호와 보트에서 살아남은 이슈메일이 구조되는 경위가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영국 평론가들은 피쿼드호가 침몰하면서 화자인 '나'를 포함해 모든 선원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죽어버린 '나'가 이야기를 쓸 수 있느냐며 문제 제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엉터리다, 소설 문법도 모르는 자가 쓴 책이다' 라는,, 오늘날 보면 어이없는 평가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멜빌 탄생 100주년을 맞이 하면서 그의 소설은 미국 평론가와 작가들에게 재 평가 되기 시작하였다. 모비딕은 획기적인 퓨전풍 스토리텔링, 독창적인 작품 구조,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 이야기와 상징의 절묘한 조합, 인생의 신비를 둘러싼 깊은 종교적, 철학적 탐구, 뛰어난 유머감각과 풍자, 열린 결말 등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의 작품으로 재평가 되면서 미국 평론가와 문학계로부터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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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Ahab 선장의 추격과 복수의 대상으로 상정된 흰 고래,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자는 소설의 해제에서 색깔이 흰 고래는 한가지로만 해석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 독자가 부여하는 빛에 따라 상징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흰 고래의 상징은 종교, 신화, 사회, 심리, 철학적 측면에서 각각 신, 괴물(악, 악마적존재), 부당한 사회제도(예. 노예제), 심리적 트라우마, 존재의 신비(궁극적 진리)로 해석했다. 모비딕 자체가 어떤 상징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기 보다는,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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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구는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딕을 잡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특별히 명령하여 제작한 작살에 세 이교도; 타슈테고, 퀴케그, 다구의 피를 묻히며 마지막 죽음의 담금질을 하며 외치는, "주의 이름이 아니라 악마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는 대사이다. 이 구절은 한글로 번역된 글자 보다는 라틴어로 읽었을 때가 더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Ego non baptizo te in nomine Patris, sed in nomine diaboli"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도 같은 결의! 신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모비딕을 파괴하겠다는 결심의 선포! 하지만 그 작살은 이슈메일이 암시하였 듯이 결국은 Ahab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작살이 된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르고 태어난다. 하지만 고요하고 은밀하며 늘 우리 곁에 있던 삶의 위험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제가 갑자기 방향을 튼 죽음과 마주할 때다"

그 목에 둘러진 밧줄, 작살에 묶인 밧줄은 Ahab 를 바닷속 심연으로 끌고 들어 간다.  

어찌보면 Ahab의 영혼은 모비딕에게 다리 하나를 물여 뜯겼을 때 이미 바닷 속 심연에 가라앉았다고 볼 수 있다. 

"바다는 조롱하듯이 그의 유한한 육체만 물 위에 띄웠고, 영원한 영혼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모비딕의 등에 꽂힌 작살의 밧줄은 심연에 가라앉은 그 영혼을 찾아 육체를 데려가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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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설속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Deleuze의 Ahab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자. 들뢰즈는 에이허브를 단순히 복수심에 미친 광인이 아닌, 복수를 넘어서는 고래와의 동일화, 단지 복수심에 모비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형시켜 가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 즉 고래되기(becoming-whale) 로 이해한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에이허브 선장처럼 고래를 쫓다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線)을 넘어갑니다. 궁극적으로 죽음과 자살을 구분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속(加速) 같은 것이 있는지..."

들뢰즈는 에이헙은 자신의 한계를 끊임 없이 확장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인물이라 평가한다. 과정에서 자신을 변형 시키고 무한한 존재의 힘과 합일, 또는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가속 시키는 정열적 인간, 그것이 들뢰즈가 바라보는 Ahab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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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간의 상업/산업적 탐욕에 의해 무참히 학살 당한 고래에 대한 사죄는 별도로 필요하다. 
인간의 고래들에 대한 학살의 죄는 어떻게 용서 받을 것인가?

히스코드 윌리엄스 Heathcote Williams 글로 고래에게 헌시를 바친다.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 그들의 왕국, 
   푸른 심연속에서 고래는 노래한다.
   시간을 초월한 그들의 숨결,
   별빛 처럼 깊은 그들의 눈.

   오, 고래여.
   너의 노래는 자연의 힘을 말하고,
   공유된 의식의 세밀함을 전하며,
   고래의 꿈, 조상의 전설,
   이상적인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의 작살이 너의 심장을 꿰뚫었다.
   포경선은 너의 피로 바다를 물들였다. 
   한때 바다를 울리던 너의 합창은,
   이제 침묵 속으로 스러진다.

   오, 거대한 방랑자여
   너의 고통은 우리의 죄다.
   너의 노래가 다시 바다를 채우길..."

어느 날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차가운 쇠붙이와 날카로운 창이 날아 들어 너의 피와 너의 기름을 원했지. 고요했던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고 너의 노래는 절규가 되어 메이리 쳤다. 인간의 타락과 탐욕이 앗아간 고요한 바다의 영혼. 부디 용서해 주오. 인간의 사악한 영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