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깥은 여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이별, 상실, 또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관계된 이야기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감과 고통,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린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계곡물에 휩쓸린 제자를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삶은 계속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일 수 있다.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 ;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때론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해야할 필요가 있다' 라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는 시의 이미지가 내내 머릿속에서 중첩되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中
그리고 또 하나의 이미지;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모나드(單子).
각자의 닫힌 세계에 살고 있는 구(球)안의 삶.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공감한다고 하나,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감정이지 타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내면의 고통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다가도, 그것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혹은 타인을 향해 말은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써만 말을 하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또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외로운,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Individual, 라이프니츠의 단자 Monad)" 의 우화일 수도 있다.
김애란의 글은 참으로 화.려.하다. 겉치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말 한마디 마디마다 꽃이 생명을 움트며 피어나듯(華), 말들이 엮어져 마디를 이루며 자라난 사슴의 뿔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듯(麗), 마음을 울리며 감동을 자아 낸다.
* 華 : 피어 있는 한송이의 꽃을 본떠 만든 글자
* 麗 : 鹿(사슴 록)을 써서 뿔 부분을 강조한 사슴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
* * * * * * * * * *
■ 도서 요약 ■
[ 입동 ]
사고로 어린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몰아 닥친, 소중한 아이를 잃어버린 사건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죄책감, 무력감, 절망속에서 솓아나는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을때 하지만 바깥의 시간은 나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가고 세상은 무심한 듯 또 그렇게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공감한다고 하나,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감정이지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의 고통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기 일쑤이지 않는가
“자정 넘어 아내가 도배를 하자 했다.”
어쨋든 살아 남아 있는 이들은 소중한 사람의 상실과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한다. 상실은 짧은 순간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 이후의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날들은 시간이 되고 또 계절이 된다.
[ 노찬성과 에반 ]
"절벽 아래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찬성은 갓길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저기, 아직 사람이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사고(?)로 아버지는 떠나고, 어느 지방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 아이 노찬성.
어느날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늙은 개 한마리를 발견하여 집에 데려온다. 사람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운다는게 말이 되느냐는 할머니의 타박과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책임' 지겠다고 장담을 하여 결국 반려견이자 친구로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늙고 병든 반려견 '에반' 은 오래 가지 못하고 아이 곁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반려견 '에반'의 죽음을 준비하려는 어린 찬성의 노력과 책임감. 그러나 녹록치 않은 현실의 장벽과 유혹들...
[ 건너편 ]
헤어지는 연인들;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함께 해온 연인. 여전히 공시생인 이수와 경찰 공무원이 된 도화.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헤어지는데 이 말 외에 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는가?
[ 침묵의 미래 ]
한 언어의 실사용자가 10명 미만인 소멸어 사용자인 경우 언어박물관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전시되어 산다는 설정.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말은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써만 말을 하는,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지 못한, 어찌보면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Individual, 라이프니츠의 단자 Monad)" 의 우화일 수도 있다.
[ 풍경의 쓸모 ]
시간이 흐르고 서로 얽히면서 삶이 되고, 현재의 삶은 과거를 불러오고, 또 과거는 현재를 복기한다.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더블폴트의 삶을 살게 된 남자 ; 지방 대학의 강사인 정우는 강의를 마치고 함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낸 대학교수 대신해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 그 교수는 이후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과는 달리 정우의 교수임용에 강하게 반대하게 됨을 옛 은사와의 통화를 통해 듣게 된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가 재혼을 한 아버지. 아버지는 재혼한 여자의 병 때문에 아들에게 손을 빌리기 위해 연락을 취해 온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의 연락이 마땅치 않은 정우... 어머니, 와이프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순간 들어온 휴대전화의 부고 문자...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 처럼, 서로 엇갈리는 삶들...
[ 가리는 손 ]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아이들이 밀치며 때린 노인이 쓰러지며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의 목격자인 화자의 아들 재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인다.
하지만 사건을 담은 영상을 보면 재이는 사건의 가담자가 아니라 목격자이다. 아이를 믿으려는 엄마. 하지만 엄마의 믿음에도 한가닥 의심이 자리하고 있다.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발견한 순간 엄마는 자신이 모르던 아이의 다른 면을 느끼게 된다.
그 낯설음, 놀람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엄마가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 '내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편견의 한 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방식대로 아들(타인)을 바라보다가 그 존재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이질감과 간극의 차이.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휴대전화의 음성서비스(Siri)와 이야기를 나누는 주인공. 시리에게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주인공이 붙들고 있던 질문은 결국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 그 원망과 질문 빠져 있는 화자에게 죽은 제자의 누나가 보내온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줄곧 외면하려고 했던 어떤 모습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라는 이해와 위안. 남편의 제자 지용이 계곡물에 잠겨 죽기 전 손을 내밀어 움켜잡은 건 차가운 물이 아닌 사람의 온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