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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01, 2025

책, 『테크노퓨달리즘 Technofeudalism』 by Yanis Varoufakis

「테크노퓨달리즘 Technofeudalism」 : 기술봉건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용어는, 소수의 Big-Tech 기업들이 진입장벽이 높은 독점적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여 과거 봉건 사회의 영주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플랫폼 사용자들이 그 플랫폼의 자발적 농노로 자처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저자 야니스 바루파키스 Yanis Varoufakis는 현 시대의 빅테크 기업들이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두 기둥-'시장' 과 '이윤'-을 그들의 독점적 플랫폼과 클라우드 지대로 대체하고, 사용자들은 그들의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자발적 노예'가 되어 전통적인 의미의 '자본주의'에서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의 체계로 전환되었다고 설명한다. 

"...내가 '클라우드 자본 cloud capital' 이라 부르는 자본의 돌연변이가 자본주의의 두 기둥인 시장과 이윤을 파괴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시장과 이윤은 여전히 세상에 두루 퍼져 있디. 사실 시장과 이윤은 봉건제 하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간 그 이윤과 시장이 우리 경제, 사회 체제의 중심에서 쫓겨나고 주변부로 밀려나 한계에 몰리더니 결국 대체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엇으로 대체되었을까? 자본주의의 매개체인 '시장 Market' 은 디지털 거래 플랫폼으로 대체되었다. 디지털 거래 플랫품은 마치 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차라리 (봉건시대의) '영지 fieldom'라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자본주의의 엔진인 '이윤'은 봉건시대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지대 rent' 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특히 플랫폼과 클라우드에 더욱 폭넓게 접속하려면 내야하는 어떤 유형의 지대(rent) 가 있다. 나는 그것을 '클라우드 지대 cloud rent'라 부른다. 그 결과 공작기계, 건물, 철도, 전화망, 산업로봇 등 전통적인 자본의 소유자들은 오늘날 진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임금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내지만 예전과 달리 지배자가 아니다... 전통적인 자본가는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한 '신흥 봉건 영주 owners of cloud capital' 라는 새로운 계급의 가신이 되었다. 그 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대부분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권력과 부에 무임금 노동으로 봉사하며, 기회가 주어질 때 간간히 임금 노동을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이전 계급인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먼저 1장에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특성인 상품-화폐-자본과 기술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2장에서는 '클라우드 자본'이 탄생하기 이전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개괄, 클라우드 자본이 탄생하기 위한 조건인 테크노스트럭쳐와 인터넷의 역사를 짚어 본다. 3장에서는 인터넷이라는 공유지의 등장에서 부터 초기 자본주의에서 나타났던 토지 인클로저 Enclosure 현상에 빗댈 수 있는 인터넷의 사유화(Internet enclosure)와 기술(예, 알고리즘, AI 등)를 동원한 클라우드 자본의 형성과정을 돌아보고, 4장과 5장에서는 클라우드 자본의 출현에 따라 전통적 자본주의가 클라우드 영주-가신-농노 체계라는 테크노퓨달리즘으로 대체되는 과정과 그 구조를 분석한다. 6장에서는 현 세계의 두 양극인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인 경쟁과 갈등을 테크노퓨달리즘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 7장에서는 테크노퓨달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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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저자의 주장대로, 과연 자본주의는 죽고 기술봉건주의(또는 그 용어가 무엇이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되었나? 

이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경제/사회체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명명하고 있는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와 규정에 따라 달라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경제-사회체계는 '자본'을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돌아가는 세계라는 인식이자 합의이다. 자본주의 본질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하였듯이 임노동-잉여가치-상품--화폐-자본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역사상의 다른 경제-사회체계와의 비교를 통해서 정의할 수도 았다. 그 대상이 바로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사회체계인 봉건주의이다. 그 핵심은 과거 봉건영주의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토지의 소유권에 따른 '지대 rent' vs, 서유럽 국가에 의한 전세계적인 식민지화와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자본에 의한 상품생산과 '이윤 profit' 에 있다. 이는 사회의 생산/재생산과 지배권력의 기반이 소수 귀족들의 봉토에 있느냐 아니면 자본에 의한 상품생산에 있느냐의 차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BIg-Tech 기업 등의 클라우드 자본은 자본주의의 작동체계 보다는 과거 봉건적 지대경제 체계로 전환되었다라는 점에서 (전통적) 자본주의가 죽고 기술봉건주의로 대체되었다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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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구성체를 자본주의로 명명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으로 명명할 것인가? 그 '무엇'에 대한 용어나 명명이 어느게 맞고 틀리다를 다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라고 본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것이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고 전환 중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저자가 이야기 하는 클라우드 '자본'의 성격/특성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클라우드 자본'의 특성 중에 지대경제적 성격이 있음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클라우드 자본이라는 것은 과거 오프라인 시대의 백화점 등과 같은 Local 유통업자들이 국지적 범위에서 취하던 상업 '지대'가 인터넷과 기술의 활용을 통한 온라인 유통업으로 전환되면서 Global 차원으로 확대/변환된 것일 뿐, 그 성격 자체가 다른 새로운 변종 자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과연 자본의 위계질서에 변동이 있느냐 하는 점도 고려해 볼 요소이다.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우위로 변화한 것은 맞는데, 과연 클라우드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는 것일까? 클라우드자본에 유통자본과 금융자본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아직까지는 Big-Tech 기업으로 대변되는 클라우드자본이 금융자본의 우위에 있다라고 판단하기에는 성급한거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오히려 저자가 4장에서 언급하였듯이, '금융 초군주 financial uber-lords' 라는 BlackRock, Vanguard, State Street 의 Big 3 금융자본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중 90%가 넘는 기업의 대주주로서 실질적으로 미국 자본주의를 소유한 집단이라면, Technofeudalism 이라기 보다는 Financialfeudalism 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책,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기에서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부에서는 걸리버가 자신과 가족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난파 당하여 걸리버가 소인국인 릴리펏에 도착한 일. 그곳에서 황제와 남녀 귀족들을 즐겁게 하여 릴리펏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일. 릴리펏의 라이벌 소인국인 블레푸스쿠와의 전쟁에서 릴리펏을 도운 일. 그리고 왕궁에 불이 났을때 불을 끄기 위해서 불이난 왕비의 궁전에 오줌을 싸서 불을 진화 하였지만, 그로 인해 왕비의 미움과 분노를 사게 된 일. 이웃나라를 정복하고 식민지화하자는 릴리펏 왕에 계획에 반대하자 그에게 대역죄의 누명을 씌워 처벌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어 이웃나라 블레푸스쿠로 탈출한 뒤 영국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2부 두번째 여행에서는 항해 도중 큰 폭풍우를 만나 식수를 구하러 육지에 올랐다가 그 곳 원주민인 농부(그는 거인이었다)에게 붙잡혀  끌려 간 일. 거인국 주인에 의해 시장으로 끌려 나가 구경거리가 되고, 그게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안 거인에 의해 거인국의 수도로 가는 길에 유랑극단의 광대처럼 볼거리 공연에 동원된 일. 거인국의 왕궁에 들어가 왕비의 사랑을 받게 된 일. 거인국 난장이와의 갈등, 원숭이에게 납치되어 곤역을 겪은 일. 거인국 왕으로 부터 듣는 고국(영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 거인국에서 2년여를 보내다가 독수리에게 집채 납치되어 바다에 떨어 졌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후 약간의 인지부조화/적응장애를 겪은 일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3부는 선상 의사로 다시 항해를 떠났다가 통킹만 근처에서 해적의 공격을 받아 표류 하다가, 하늘을 나는 성(城) 라퓨타에 오르게 된 일. 수학과 음악에만 몰두하고 살아가는 라퓨타 왕궁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묘사. 랴퓨타에서 내려와 라퓨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발리바비 섬의 수도 리가도로 가서 수도와 주변을 돌아 보면서 경험하고 느낀 일, 라가도에 있는 대학술원을 방문하여 거기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다양한 학문연구, 이론과 실험, 프로젝트들에 대해 접하고 관찰한 일, 발리바비를 떠나 강령술과 망자의 나라 글럽덥드립 섬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가 배를 타고 럭낵왕국으로 항해한 일. 럭낵왕국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스트럴드브럭에 대해 보고 들은 이야기. 럭낵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네덜란드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이다.

4부는 걸리버가 선장의 자격으로 어드벤처라는 상선을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선상반란으로 인해 배를 빼앗기고 미지의 해안에 버려지는데, 그 곳은 지적이고 덕스러운 말(馬人종족)인 후이늠들이 야만스럽고 사악한 인간 종족인 야후를 다스리는 나라였다. 이성적이고 덕스러운 후이늠의 삶과 사회 그들의 훌륭한 미덕을 흠모하지만, 반대로 역겹고 사악하며 미개한 종족인 야후에 대한 증오, 경멸, 적대감은 늘어 간다. 하지만 후이늠은 걸리버라는 존재도 결국은 야후에 지나지 않고, 후이넘들은 야후를 거세하여 재생산이 불가능하게 하여 말살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후이늠 주인은 걸리버에게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알려준다. 걸리버는 어쩔 수 없이 나무와 야후의 가죽으로 인디언카누를 만들어 바다로 나가 항해하다, 결국은 포르투갈 배를 타고 리스본으로 갔다가 영국의 집으로 귀환한다. 영국으로 귀환한뒤, 그는 이제는 야후라고 부르는 인간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주로 마구간의 말들과 이야기 하며 지낸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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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는 책 제목 그 자체가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의 여행기, 여행소설, 판타지 라기 보다는,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당대에 던지는 우화, 알레고리, 정치적 풍자와 비평으로 읽는 게 더 적합할 거 같다. 그 풍자와 비판의 대상은 매번의 이야기에서 걸리버가 귀환하는 고국, 즉 영국이다. 

1부 소인국의 이야기에서의 영국(릴리펏), 프랑스(블레푸쿠스), 그리고 양국간의 전쟁에 대한 비판적 우화. 그리고 소인국 왕궁에 불이 났을 때 소변을 누워 불을 끈게 화근이 된 사건은 스위프트의 논문 통 이야기 때문에 앤 여왕으로 부터 괘씸죄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는 개인적 경험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2부 거인국의 이야기에서 거인국 왕의 입을 빌려 나온 말; "영국의 역사라는 것이 음모, 반란, 살인, 학살, 혁명, 추방 뿐인 사건들이며 탐욕, 파당, 위선, 배신, 잔인, 분노, 광기, 증오, 사기, 욕정, 악의, 야심 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일 뿐...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 라는 악평은 영국의 현실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3부에서 보이는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에 대한 우회적 비판, 학술원의 모습을 통해 보여지는 당대의 사회/과학/정치적 프로그램에 대한 풍자와 경멸, 4부에 나타나는 '이성적'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와 신랄한 비판은, 스위프트가 가지는 당대 사회에 대한 염세적이면서 원한이 가득 찬 이야기 이다. 

조지 오웰은 이러한 스위프트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評)하였다 ; "...이 책 속에는 옹졸함과 관대함이, 공화주의와 권위주의가, 이성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의 결여가 전부 섞여 있다... '토리 아나키스트' 라 칭할 수 있는 스위프트의 정치적 충절과 그 궁극적 실망 사이의 관련성이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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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번역자인 이종인의 작품해설에 나오는 걸리버(=조나단 스위프트)의 인간 신체와 배설물(똥)에 대한 혐오감에 대한 이야기는 음미해 볼 내용이다. 

"똥과 오줌 이야기는 1~4부에 걸쳐 나오고 있는데, 제 4부에서는 야후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입니다. 이것은 결국 독자에게 '너는 냄새나는 똥을 싸는 육체적 존재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스위프트가 이 배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그 행위 자체보다는 그 냄새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도덕적/윤리적 악행의 추악한 냄새와 연결이 됩니다. 이 분변학적인 이야기가 풍자의 최고점에 도달하는 것은 4부 7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이런 (과식하는) 병은 야후의 대변과 소변을 섞은 것을 강제로 야후의 목에 밀어 넣는 방법으로 치료했다. 나는 이 방법이 성과를 거두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여기서 나는 터 놓고 조국 동포의 공익을 위하여 이 방법을 권하고자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풍자가 너무 고약하고 지나치다는 느낌마저 받게 됩니다. '너는 똥이므로 너의 병은 똥으로 치료해야 한다' 라는 뜻이니까요. 이 지독한 분변 혐오는 고약한 냄새라는 연결고리를 통하여 여성 혐오와도 연결이 됩니다...(스위프트의 여성 혐오적 측면과 관련하여) 조지 오웰은 약간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스위프트가 성불능자 였을지도 모른다고 본 것입니다. 성불능자일수록 인간의 배설물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두려워 하거나 증오하는데 아마도 후자가 더 흔한 반응일 것입니다"

4부에서 보이는 걸리버의 모습은 결국은 '야후'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과 부정에서, 여성과 동포에 대한 혐오, 더 나아가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멸과 혐오로 나아간다. 후이늠의 세계는 이상적 유토피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현실, 그리고 사악한 인간이성이라는 것을 비평하기 위한 반사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