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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0, 2018

My Name is Red

"Before my birth there was infinite time, and after my death, inexhaustible time,,,,"

"MY DEAR GOD. THE DOG IS NA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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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없이 자유롭게 무리지어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거닐거나, 가끔씩 인간들을 위협하기도 하며, 길모퉁이나 양지 바른 곳에서 평온하게 늘어져 낮잠을 자거나, 싸고 싶은데 싸고, 물고 싶은게 있을 때는 물 수 있는 개의 권리를 누가 빼앗아 갔는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주인을 거부한다.

"늦은 시간, 구원에 대한 생각은 마음속에서 자위의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The perfect life,,, leaving nothing but death. 완벽한 삶이 남겨 놓은 거라곤,,, 죽음뿐이라..

신의 기억이라,,,신에게 기억이라는게 있기는 하는 걸까?  Painting is the act of seeking out Allah’s memories and seeing the world as He sees the world.

Painting is the silence of thought and the music of sight.

천국에서는 육체 없는 영혼을, 이생에서는 영혼 없는 육체의 삶을,,, I begged of Exalted Allah to grant us souls-without-bodies in Heaven and bodies-without-souls in life.

책을 이런식으로 만드는 방식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칼로 미끈하게 잘라 재단한거 보다는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간다.



대체로 그렇다.. "Contrary to what is comonly believed, all murders are men of extreme faith rather than unbelievers" 믿는 자 만이, 그 "믿음"이라는 것에 사로 잡혀 악행을 저지른다. 그게 도덕적 강박이든, 정치적 신념이든, 종교적 신앙이든,,,, 인류역사란 대체로 그러하지 않은가?

Master Osman 은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였다.

횃불을 든 한 무리의 군중들이,, 커피가 건강을 해치고, 건전한 정신을 미혹시키며, 신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독, 악마의 음료로 규탄하며,,,

표지설명.
Sultan Mehmet I, Turkey, 16c.
Horseman drawing his bow, Ottoman miniature, 15c, Istanbul.


old "dotard",,, 여기서 만나네. 변덕스럽고 까칠한 늙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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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세의 나이에, 사랑도 결혼도 해본적이 없는 전설적인 늙은 화공은, 16살의 미소년 견습공을 보자 마자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 미소년을 유혹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 들었으나, 안타깝게도 몇 일 지나지 않아,, 아틀리에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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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01, 2018

[그리스인 이야기 Civilisation Grecque], 앙드레 보나르 Andre Bon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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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의 질서니, 인간의 법도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것들은 인간이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곡식을 빻는 여인들.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손잡이 달린 잔에 그려진 그림. 옷도 그렇고, 헤어 스타일도 세련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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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는 현재의 터키 아나톨리아, 소아시아 + 지중해 연안의 중동까지 확장된 지역인데, 나 자신도 글을 읽으면서,,  자꾸 현재의 그리스 반도로만 그 범위를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대략 3천여년 전의 권주가; “마시자! 뭐하러 등불 밝힌 밤이 오기를 기다리겠는가? 해가 반 주먹도 남지 않았는데. 친구여, 찬장에서 커다란 잔을 꺼내게.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 준 이 선물은 현세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이니. 자 파도타기로,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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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  진짜로,, 그 시절에 유난히 장수했네. 기원전 420년, 75세에 <오이디푸스 왕> 을 썼고, 다시 90세에 버전 2,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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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재앙의 기계적 진행;; “관객들은 보시오. 끝까지 꽉 조인 태엽, 그러니까 한 인간의 계산된 파멸을 위해 지옥같은 신들이 완벽하게 구축한 장치가 한 인간의 일생을 따라 천천히 풀려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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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에 대한 자세는, 대체로;; 모든 불운과 재앙은 인간이 아닌 신의 잘못이라는 입장. “그건 신이 잘 못한거네”, 신에게 책임 묻기,, 가 기본 스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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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쟁터에서 보이는 용기를 앞세워 한껏 허영을 부리며, 집 안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을 경멸하는 남자들이라니! 부조리!!” 라며,, 메데이아가 외쳤다.

역사이래 지금까지, “정당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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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는 운명의 여신.  사건의 틈새를 파고 드는...

왜? “운명”은 여신 女神 일까? 남신 男神 이 아니고,, 그리고 신의 성별 구분이라는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청년시절의 알렉산드로스. 이쁘장하고 멋있네.. 기원전 4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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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는 아무런 저항없이 순조롭게 남하 하였는데, 팔레스타인 가자에 이르러서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가자 Gaza 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임명한 바티스라고 하는 흑인 환관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복 후 그 세계를 통합 하고, 유지 하는 문제는,,,  정말 어려워.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도 예외는 아니었고. 저렇게 많이 휘젓고 돌아 다니긴 했는데,, 결국 그냥 그것 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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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Philadelphos 가 형제를 사랑한다라는 뜻 처럼,, 형제/남매간 근친혼에,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혼맥상. 그리고 권력을 둘러싼 왕족/왕가내의 피튀기는 투쟁.

데이노크라테스. 알렉산드리아의 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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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발전과 박물관의 쇠퇴. 종교의 정신분열증. 광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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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을 발명한 헤론. 그냥 만들기만 했다. 심심풀이로.. 노예가 있는데 기계는 뭐 하러 만들어?? 일은 노예가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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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14, 2018

2018年10月14日(日) 정선 민둥산 & 영월 한반도지형

정선 민둥산. 천둥, 지둥, 민둥,,, 나도 두발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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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다시 들러 봄. 6년만에 다시 찾은 영월 한반도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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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09, 2018

2018年09月09日(日) 치악산 산보

11시 50분경, 치악산 황골 탐방지원센터 코스 시작. 햇볕이 조금 따갑다.
황골 탐방지원센터에서 입석사까지는 아스팔트로 포장한 가파른 삔닥길.


12시 30분. 입석사. 저기 가운데 보이는게 입석(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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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입석대. 가까이 가서 보니 상당히 크다. 바위 위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기거하여 살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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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어김없이,, 거대한 입석대를 거뜬히 받치고 있는,,, 작은 나무 작대기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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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사 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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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이라는게,, 새로운 종교 권력에 의해 뒷방으로 쫓겨난 옛날 종교권력의 늙은이들을 위한 장소이다 보니,, 여기서도 개점 휴업 상태. 문이 잠겨 있고 아무도 찾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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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아이젠에 당했으면,, 나무계단이 움푹 파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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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 25분경 비로소, 비로봉에 당도.
비로봉 정상에 잠자리떼가 하늘을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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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하산길에 보이는 나무가지 위의 하얀 봉지들..
지난번 월악산에서도 이런걸 봤는데, 여기는 무더기로 씌워 놨네. 가만 읽어 보니, 종자•씨앗을 채취하기 위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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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아 서곤, 춤을 추는 녹색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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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경. 다시 입석사, 입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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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여 골프연습장 들러 골프연습 마치고 저녁 7시경 귀가.
구름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가 회색빛으로 식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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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25, 2018

2018/08/25 월악산 산보

오랜만에 산보.

대체로 여기 바위나 돌들은 나무판자를 쌓아 논거 같이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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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는 길에 내려오는 분들 만나 잠시 길을 비켜 옆에 서 있는데;; “여 동네 뒷산 올라 오신가 보네예” 하길래 어물쩡 “아~, 네...” 하고 대답. “마 설악산가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은 뒷산이 설악산이데예”하며 내려가더라.

반바지 티셔츠에 챙모자 쓰고 조그만 물병 하나 들고 털래 털래 올라오는 내 모습 보고 하신 말씀. 뒷산은 뒷산인데 집에선 좀 먼 뒷산ㅎ   땡볕과 무더위가 사라지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산보하기 좋은 날.

월악산 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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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오니,, 소나기 부슬부슬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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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이 스멀스멀,,,  순식간에 세상을 덮었다.



오늘 월악산 산보 코스 ;; 보덕암~하봉~중봉~영봉. 오름 내림 동일한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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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영봉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작은 예쁜 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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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에서 바라다본 청풍호(충주호). 날이 흐려 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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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슨 어떤 종류의 신앙일까요?
예전에 관악산에서는 나무로 남근을 깎아 바위를 받치고 있던 걸 본 적도 있는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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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 마치고 내려와 골프연습장 가서 연습하고 왔더니 상당히 피곤하고 배도 고파서
집옆 고기집에서 갈매기살 2인분, 맥주 3병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

Thursday, February 15, 2018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When We Are No More- How Digital Memory Is Shaping Our Future』 & more...

출근길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책(『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When We Are No More- How Digital Memory Is Shaping Our Future』)의 한 구절; "오늘날 웹페이지는 바뀌거나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평균 100일 동안 유지된다"

웹 사이트의 생애주기나 디지털 데이터/정보의 생성~폐기의 주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통계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휘발성 강한 디지털 형태의 정보와 지식의 저장(아카이브)의 문제도 중요한 Agenda 이다.

미국은 거대 데이터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고, 민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Archiving 작업들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한국어로된 디지털 정보와 자료에 대한 기록보관은?? 너무 방대한 문제라서 개인적인 사고의 확장에 더이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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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억의 보관,  트윗의 아카이브. 좋은 시도였는데,, 2017년 말 프로젝트 중단. “미국 의회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트윗을 아카이브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내년부턴 선별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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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정밀성”으로 계산한 지구의 창조 시기.
기원전 4004년.
이러한 진지함은 여전히 널리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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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scientist” 라는 용어의 탄생...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는 없다라는 자존심?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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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노출이 심한 몽테뉴…

Wednesday, February 14, 2018

[Web Scrap] 러시아에서 처형당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RUSSIA BEYOND 라는 사이트의 기사 Scrap
[원본글] https://kr.rbth.com/opinion/2017/03/16/reosiaeseo-ceohyeongdanghan-hangug-coecoyi-gongsanjuyija-gim-alregsandeura_720858

러시아에서 처형당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문화 MARCH 16 2017 안드레이 란코프

1918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김 알렉산드라(본명 김애림)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 밝혀져.

1918년 러시아 극동은 피비린내나는 내전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적군과 백군 양 편 모두 잔혹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며 상대편 처형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그런 처형 중 하나가 1918년 9월 16일 이른 새벽 아무르 강 연안의 최대 도시인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있었고 그날 한 무리의 공산당원들이 백군 병사들의 총에 처형됐다.

총살된 이들 중에는 폴란드식 성을 가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만 보고 그녀를 판단하면 안된다. 그녀는 김애림이란 이름의 한국계 여성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는 매우 희귀했다. 최근 들어 러시아와 한국 학자들(보리스 박, 벨라 박, 김철훈)의 노력으로 이 위대한 여인의 일생을 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공산주의자가 되기까지

알렉산드라의 부친은 1869년 경에 러시아에 정착한 표트르 김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정교회에 귀의한 고려인이었다. 알렉산드라가 태어난 1885년 그는 항간에 실력있는 통역가와 번역가로 알려져 있었다.

1896년 표트르 김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거대 토건 사업인 동청철도(東淸鐵) 부설 현장에서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덕분에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정규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이는 당시 고려인 가정의 여자 아이에게는 드문 기회였다. 건설 현장에서 표트르 김은 폴란드계 러시아 철도 기술자인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와 친구가 됐다.

1902년 표트르 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친구인 스탄케비치 가족은 알렉산드라를 떠맡았고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당시 러시아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사회주의 좌파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그녀는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그 무렵 알렉산드라는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두 사람은 1910년 경 이혼했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중국인, 고려인 노동자들이 벌목공으로 일하고 있던 우랄산맥 일대에서 중국어와 한국어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1917년 초 그녀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이상적인 후보자

볼셰비키당 조직지도부에게 그녀는 신이 보내준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언어에 능통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고 헌신적인 여성, 동양여성의 외모를 가졌지만 흠결없는 고상한 러시아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김은 극동의 한국인 사회에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는 임무를 받고 바로 극동으로 파견됐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그녀는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위원으로 임명됐다.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녀가 맡은 직책은 그저 상징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대한 지역의 외교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시 그녀가 외무위원으로서 내린 결정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로, 알렉산드라 김은 ‘반혁명 장교들’에게 사형 선고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갖고 그녀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당시는 잔혹한 일상이 수없이 반복되던 내전 시기였다. 게다가 그녀를 체포한 백군들 또한 그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 결코 자비와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1918년 8월 하바롭스크는 백군에 의해 포위됐고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서둘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르 강을 운항하는 기선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기선은 곧 백군의 의해 나포됐고 알렉산드라 김을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공산당 간부 전원이 체포되어 종국에는 처형됐다. 한국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될 뻔한 한 여성의 생애가 그렇게 마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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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렉산드리아에 관한 추가적인 기사 
시사저널 1993년도 기사 |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1부)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08192

아령실기(俄領實記)를 통해 연해주 한인들에 대해 기록을 남겼던 "뒤바보" 계봉우(桂奉瑀)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2년(1920) 4월 17일자, 20일자, 22일자에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간략한 전기를 남겼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35&cid=51289&categoryId=51289&expCategoryId=51289
여기 사진에서는 기사의 상세한 내용을 판독하기는 어렵다.

[Web Scrap] 영암 박씨 러시아파 후손의 굴곡진 인생 드라마


RUSSIA BEYOND 라는 사이트의 기사 Scrap
[원본글] https://kr.rbth.com/society/2013/05/29/42101


영암 박씨 러시아파 후손의 굴곡진 인생 드라마 
문화 MAY 28 2013 엘레나 김 RUSSIA포커스


1916년에 찍은 러시아 영암 박씨의 2대인 박양남의 아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오른쪽 셋째 어른)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마르타(맏딸), 마리야(둘째 딸), 부인 나탈리아, 무릎 위 카탸, 마트베이(그리고리가 안고 있는 둘째 아들), 형의 손자(이름 미상), 맏아들 마르틴. (사진제공=박씨 문중)


러시아 한인 이주 150년 ··· 본지가 찾아낸 ‘박양남 족보’로 본 고려인의 삶

1863년 여름~가을 무렵 연해주 노브고로드 경비대 부근(현 포시에트항)에 13~14세대의 한인 가구가 등장했다. 러시아 땅에 처음 출연한 한인이다. 이를 1863년 11월 30일 노브고로드 경비대장 랴자노프 중위가 연해주의 제1군사 지사인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카자케비치 해군 소장에 보고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 제국은 1854~1855년 영국·프랑스 함대가 극동 점령을 시도한 뒤 이곳으로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사 거점을 강화하는 등 극동 개발에 열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카자케비치 소장은 티진헤 강(러시아 이름 비노그라드나야 강) 유역에 정착하게 해 달라는 한인들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1864년 9월 21일 랴자노프 중위는 한인들이 티진헤 마을(러시아 이름은 랴자노프 중위의 이름을 딴 '슬로보다 랴자노프카')을 만들어 열심히 농사를지었다. 랴자노프는 이런 내용을 담은 한인 보고서를 지사에 제출하면서 이들에게 빵 판매와 제분소 건설을 허가하고 '보조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1864년 9월 21일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날로 간주됐다.

이에 따라 올해는 러시아의 한인 이주 150년이 되는 해다. Russia포커스는 초창기 러시아 한인 역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영암(靈巖) 박씨 가문의 역사가 담긴 족보를 발굴했다. 러시아어로 돼 있는 주요 기록엔 굶주림 때문에 1869년 선조 박양남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정, 이들을 따듯하게 대했던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또 그의 아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사진)의 가계를 통해 스탈린의 숙청 광풍이 몰아닥친 30년대 비극사와 이후 러시아에 뿌리내리는 과정도 잘 보여준다. 이 족보는 후손 박 라리사(61·우파 거주)가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한문으로 조선시대문중사를 쓴 두 장짜리 앞부분과 러시아 내의 가족사를 기록한 30여 쪽의 러시아어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러시아어 족보는 후손들이 태어난 해의 갑자도 일일이 기록, 족보를 만든 사람의 한국적 정체성이 담겨 있다.

가족에 따르면 '족부'로 불리는 이 기록은 단일본으로 전해져 오다 1991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사는 박양남의 손자 박 마르틴(당시 82세)이 영암 박씨 문중 500주년을 기념, 17권을 만들면서 여러 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풍부한 내용을 담은 러시아어 본은 영암 박씨 후손의 슬프고 굴곡진 러시아 드라마를 보여준다.

가문의 기원

러시아어 기록에 따르면 영암 박씨의 역사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떠난 영암 출신의 박동에서 시작됐다('족부'는 이를 1461년으로 본다). 동은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고위 관료인 '식관'이 됐다. 그러나 왕(세조로 추정)과의 갈등으로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유배된 뒤 후손이 수백 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또 본관을 '넨암 박'으로 기록했다. 족보는 18세기 접어들 무렵 '넨암 박씨 8대손 박 사수르'와 '임선과 증석'이 정리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러시아어 기록은 발음 문제에 오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문 기록엔 본이 '영암(靈巖)'으로 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입북 시조가 돈(敦)씨이다. 문과를 봐 경성에서 예조정랑으로 입시했는데 과생들이 그를 쫓아내 경흥부 송상동으로 가게 됐다. 현재 8대다. 조상의 사적을 모르게 될 것을 우려해 기록을 후인에게 남긴다. 건륭11년(1746년 )영암 후인 박시등 씀."

"기록을 14ㆍ15ㆍ16대까지 참고했다. 이후 서로 멀어지고 가문의 사람들이 서로를 잘 몰라 큰일을 같이 상의할 수 없고, 이에 족보를 수정하고 기록해 후대에 넘긴다. 광서 18년(1855년) 임진 12월."



러시아 시조의 탄생

1820년 영암 박씨 러시아파 시조인 박양남이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1869년 양남은 조선 내 기아와 탄압을 피해 아내, 두 아들과 함께 러시아로 건너왔다(이때는 고종 7년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나고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국내가 극단적으로 어수선해지는 시기다). 비슷한 이유로 피난 온 6명의 한인과 함께 연해주 수이푼 시(현재 우수리스크)에 푸칠로프카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곳은 포시에트의 첫 한인 정착지 바로 옆이다. 푸칠로프카의 한국 이름은 육성촌(6姓村)이다(朴ㆍ金ㆍ李ㆍ千ㆍ黃ㆍ吳씨).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제정 러시아는 소수 민족에 우호적이었고, 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주자들이 황제를 최고 권력자로 인정하고, 세금을 내며 법률을 준수하면 지원했다. 한인도 환영 받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들어온 이들에게 매달 가족당 보리 1푸드(16.38㎏)씩 배급했다. 보리는 130㎞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줬고 양남은 매달 왕복했다.

러시아정교회로 개종

1870년 박씨 일가는 다른 한인처럼 정교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러시아 국적을 얻었고, 그에 따라 제정 러시아 군대에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부지런히 일해 넉넉하게 살았다. 이름을 이반으로 바꾼 양남은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뒀다. 그 가운데 현재 셋째 아들인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사진의 남자)의 기록만 남아 있다. 그는 경찰 보조 관리관으로 있다가 나중에는 조그만 식용유 공장을 세웠다. 양남의 땅은 7㏊(2만여 평)나 됐고 방이 여덟 개인 집에서 살았다. 1912년 정착촌에 학교가 세워졌고 양남의 결혼한 자식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을 학교로 보냈다. 1913년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해 황제를 알현했다.

혁명과 내전 뒤 뿌리 내리기

혁명과 내전에 대해 족보는 '무섭고 어수선했다'고 할 뿐 별 기록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1929년에 다시 이어진다. 이 시점부터는 셋째 아들인 그리고리 가족의 이야기가 집중된다. 그에 대해선 두 번 결혼해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뒀다는 기록만 있다. 1930년대에 그리고리 가족은 극동을 떠난다. 그리고리와 첫 부인 사이에 태어난 맏딸 베라만 극동에 남았다. 두 명은 첼랴빈스크로 가고 나머지는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 소련인들은 한 곳에 오래 살지 않았다. 소련은 빠르게 발전 중이었다. 수천 개의 공장이 만들어지고 신도시도 조성됐다. 사람들은 들떴다. 그리고리의 자식들도 공부나 다른 이유 때문에 뿔뿔이 떠났다. 이들은 서로 도왔지만 경제적 지원은 나이가 많은(사진 왼쪽에서 둘째) 마리야가 맡았다. 그녀는 소련의 당 활동가였던 레프 유와 결혼한 뒤 함께 극동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아무르 강 유역 콤소몰스크의 당 구역위원회 서기가 됐고 마리야는하바롭스크 시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마리야는 멀리서도 가족을 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결혼해 하바롭스크·무르만스크 등으로 제각각 삶의 터전을 찾아나갔다.

직격탄, 숙청과 강제 이주

1930년대 말 사회는 불안해졌다. '인민의 적'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정권에 반대하거나 다가오는 전쟁에서 소련 편에 설 것이란 믿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한인에게도 칼날이 날아왔다. 마리야(그리고리의 셋째 딸)와 남편 레프가 모스크바로 불려간 뒤 레프가 투옥됐다. 공업전문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막내딸 카챠(사진 무릎에 앉은 여자아이)는 케샤 박을 만나 결혼한 뒤 야로슬라블로 이사했는데 몇 년 뒤 케샤가 체포됐다. 지금도 후손들은 왜 체포됐는지 모른다. 대재앙의 전조였다. 대대적 투옥이 시작되면서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의 딸들은 모두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37년 10월 극동의 한인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시작했다.

당시 그리고리의 맏아들 마르틴(1909년생) 가족만 극동에 있었다. 마르틴은 24시간 내에 짐을 챙기고 떠나야 했다. 화물칸 하나에 네 가족씩 밀어넣고, 몇 주간을 그냥 달렸다. 기차는 사람들을 허허벌판에 내려놓고 떠나기도 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건자재와 식품을 주긴 했지만 살 곳이 없는 그들은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나야 했다.

세월이 흘러 마르틴 가족은 카자흐스탄의 카잘린스크 시에 정착했다. 박양남의 3대손인 그는 학교 교무부장이 됐고 누나 마르파 가족도 카자흐스탄으로 합류했다. 그리고리 첫 부인의 딸인 베라는 남편과 사별한 뒤 우즈베키스탄의 한인 집단농장(콜호즈) '폴랴르나야 즈베즈다(북극성)'로갔다. 마리야는 동생 카챠가 사는 첼랴빈스크로 갔다. 마리야는 결핵을 앓다 세상을 떠났고 카챠는 언니의 자식들을 도맡아 키웠다.

다시 모인 가족들

전쟁이 끝나고 형제 자매가 다시 모였다. 마르파는 아이들과, 마트베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마르틴은 가족을 이끌고 '폴랴르나야 즈베즈다' 콜호스에 있는 맏누이 베라에게로 갔다. 그 무렵 '폴랴르나야 즈베즈다'는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농장이었다. 1951년 그리고리의 부인 나탈리아 오(사진의 엄마)가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모든 가족이 모였다. 막내딸 카챠도 갔다. 본지가 박양남 후손의 드라마를 찾아낼 수 있던 것은 이 카챠의 손녀 예카테리나 김 덕분이다.

양남의 6대손, 신세대
양남의 후손은 그 뒤 옛 소련 국가로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에 사는데 연락이 안 되는 가족들도 있다. 6세대가 지난 뒤 서로의 존재감이 흐려져 있다. 그러나 박양남의 피를 이어받은 신진 동양학자인 예카테리나 김 같은 이는 "할아버지가 슬퍼하실 거예요. 그래도 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씁니다"라고 말한다. 노보시비르스크 소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의 고고학ㆍ민속학 연구원 과정에 다니는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한인 디아스포라와 러시아 내 한인 정체성'을 연구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150년 사는동안 한인의 독특한 정체성이 형성됐어요. 많은 한인은 한국어를 모르며 러시아에 동화되어 살지만 나는 한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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