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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14, 2024

책, 『홀로서기 심리학』

저자가 강조한 책의 내용 중 공감하는 부분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과 자기가 정말 통제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리적 어른되기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타인과 세상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통제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세상을 받아 들이고 행동을 결정하는 내 마음만은 통제 가능하다. 어찌 보면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사상을 떠 올리게 된다. 저자의 '마음챙김' 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그러한 자세이지 않나 하는 판단이다. 

자신의 객관화,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상태로 부터 거리두기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통제불가능한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잘 읽고 다스릴 줄 아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며 인생을 의지대로 이끌어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공감하는 부분은, 심리적인 문제를 (통제불가능한) 과거에서 기인한 문제로 여기고 회피하기 보다는 바꿔 나가야 할 "습관" 으로 바라보라. 그렇게 되면 심리적인 문제는 바꿔야 할, 바꿀 수 있는 습관이 된다. 심리 문제를 습관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는 가장 큰 수확은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다. 습관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중심이 단단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과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하는 능력을 기르고, 예기치 않은 시련앞에서도 크게 휘청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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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 중 개인적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조언

[감정패턴으로 부터 홀로서기]

심리적 압박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어른으로 홀로서기 위한 심리적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관찰자 모드' 또는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로 부터 '거리두기'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5 가지 요소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① 상황과 사실 : 누가, 어디서, 무엇을... 주로 객관적인 상황.

② 생각 : 받은 인상, 해석, 기억, 예측, 추측 

③ 감정 : 의심, 불안, 짜증, 슬픔.. 

④ 신체감각 : 체온, 표정, 긴장감, 행동습관 등 

⑤ 행동 충동 : 폭언, 신체적 행동 등..

이러한 요소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라다 보고 심리 습관을 바꾸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사실"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에서의 홀로서기]

흔히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세가지 : '희생'을 사랑으로 착각 하는 것. '의존'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 그리고 '느낌'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거리두기가 필요하고, 사랑에는 상대를 더 자유롭게 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관계 일 수록 첫째,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 둘째, 사랑하는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 하지 말 것. 셋째, 사랑할 수록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책, 『음식의 언어』

음식을 단순히 조리법이나 미각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명과 문화의 교류, 시대를 거치면서 변형해 나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융합 발전하는 측면에서 여러 사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음식의 언어]라는 책은 훌륭하다.

저자가 책을 통해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강조하는 것 처럼,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교류속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는 점이다. 페르시아에서 출발한 시크바즈가 영국의 국민음식 피쉬앤드칩스로 가는 여정이 이를 충분히 보여 준다. 바빌론의 고대 이슈타르 숭배에서 예고되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아랍 무슬림들의 손에서 다시 변형이 되고, 기독교들의 응용을 거쳐 페루의 모체족 요리와 융합되고, 아시아에서는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영국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돨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모든 시크바즈의 후손들을 전 세계의 번잡한 도시에 가득찬 식당들에서 찾을 수 있다.

혁신은 언제나 작은 틈새에서 발생한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다. 문화의 교차점에서 각 문화가 서로 이웃에게 빌려온 것을 수정하고 더 훌륭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 창조된다. 음식의 언어는 이런 장소들 사이를, 고대에서 일어난 문명의 충돌과 현대의 문화 충돌을 들어다 보는 창문이며 인간의 인지, 사회, 진화를 알게 해주는 은밀한 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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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다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식사의 순서에 따라 들려 준다. 처음에는 메뉴 고르기를 다루고, 그 다음에는 선원과 해적 이야기 어울어진 생선 코스를, 그 다음에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음료(펀치)와 건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 다음 육류 로스트 요리를 이야기하고, 막간에 잠시 스낵과 중독성 강한 식품들을 다룬뒤 디저트로 마감한다.

음식과 관련된 인류 문화와 교류의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추려 보면 ; 

1. 케첩 : 몇 세기전에 만들어진 케첩의 최초 버전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케첩은 중국의 푸젠성에서 먹던 발효된 생선소스(젓갈)였다. 14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동남아시아 전역의 항구에 정착한 중국 상인들에 의해 중국식 생선 발효법과 음식이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무역상들은 케첩을 유럽에 갖고 돌아 갔으며, 그 뒤 400년 동안 이 음식은 서양인들의 입맛에 맞게 변신을 거듭한 끝에 그 원래 재료인 발효 생선은 쓰이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조리법에서 생선이 빠지고 대신 버섯, 호두, 토마토 등이 쓰이게 된 것이다. 결국 토마토를 더 한 것이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것이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거기에 설탕이 추가 되었다. 그러다가 설탕이 더 많이 추가된 버전이 미국의 국민양념으로 등극하였고, 그런 다음 상품화 되어 다시 홍콩과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2. 영국의 국민 음식인 피쉬앤드칩(Fish & chips) : 피쉬앤드칩은 원래 중동 페르시아의 시크바즈에서 시작되었다. 시크바즈는 16세기 페르시아의 샤(왕)들이 좋아하던 식초와 양파로 만든 새콤달콤한 스튜이었다. 그 음식이 지중해 선원들의 목선으로 넘어가 선원의 음식으로 애용되다 유럽으로 퍼지고, 중세 시대에는 안식일의 데우지 않은 식힌 생선요리로 이어진다. 영국으로 건너간 시크바즈기 오늘날의 피쉬앤드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입맛을 돋구고 있는 것이다.

3. 마카롱 : 매커룬, 마카롱, 마카로니는 모두 같은 선조인 달콤한 가루 반죽 음식에서 유래한다. 라우니자즈 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산 아몬드 반죽 과자가 지중해의 시칠리아와 안달라루시로 전해지고 1500년쯤이면 벌써 이탈리아의 전역에 퍼져, 그곳에서 프랑스로 갔다가 영국까지 갔다. 180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은 코코넛을 기반으로 케이크를 만들어(코코넛 매커룬) 미국의 베스트 셀러 과자로 등극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났는데, 파리의 제빵사 피에르 데스퐁텐이 아몬드 반죽이나 가나슈(초코릿과 생크림으로 만든 크림)를 마카롱 두 개 사이에 넣어 샌드위치 쿠키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마카롱 파리지앵이 재빨리 대중화 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4. 터키(Turkey) : 멕시코가 원산지인 터키라는 조류, 즉 칠면조가 어찌하여 지중해 동부에 있는 나라의 이름을 땄을까? 그것은 15,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의 비밀주의와 관련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이 개척한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찾아낸 금과 향신료와 이국적인 조류의 원천을 다른 나라가 찾지 못하게 막으려는 와중에 터키라는 이름의 맘루크인들이 수이하던 전혀 엉뚱한(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새와 혼동하여 멕시코의 칠면조를 "터키" 라는 이름으로 세탁을 한 것이다.

이렇듯 여러 민족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보물이거나 한 것처럼 자기것 또는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요리들의 유래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문화든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음식도 변형을 겪고 시대와 지역의 특성들이 가해지면서 또 다시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Tuesday, October 01, 2024

책, 『바깥은 여름』 김애란

소설 『바깥은 여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이별, 상실, 또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관계된 이야기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감과 고통,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린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계곡물에 휩쓸린 제자를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삶은 계속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일 수 있다.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 ;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때론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해야할 필요가 있다' 라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는 시의 이미지가 내내 머릿속에서 중첩되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中

그리고 또 하나의 이미지;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모나드(單子).
각자의 닫힌 세계에 살고 있는 구(球)안의 삶.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공감한다고 하나,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감정이지 타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내면의 고통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다가도, 그것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혹은 타인을 향해 말은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써만 말을 하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또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외로운,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Individual, 라이프니츠의 단자 Monad)" 의 우화일 수도 있다. 

김애란의 글은 참으로 화.려.하다. 겉치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말 한마디 마디마다 꽃이 생명을 움트며 피어나듯(華), 말들이 엮어져 마디를 이루며 자라난 사슴의 뿔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듯(麗), 마음을 울리며 감동을 자아 낸다.

 * 華 : 피어 있는 한송이의 꽃을 본떠 만든 글자
 * 麗 : 鹿(사슴 록)을 써서 뿔 부분을 강조한 사슴의 모습을 나타낸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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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요약  ■ 


[ 입동 ]

사고로 어린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몰아 닥친, 소중한 아이를 잃어버린 사건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죄책감, 무력감, 절망속에서 솓아나는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을때 하지만 바깥의 시간은 나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가고 세상은 무심한 듯 또 그렇게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공감한다고 하나,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감정이지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의 고통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기 일쑤이지 않는가

“자정 넘어 아내가 도배를 하자 했다.” 

어쨋든 살아 남아 있는 이들은 소중한 사람의 상실과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한다. 상실은 짧은 순간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 이후의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날들은 시간이 되고 또 계절이 된다.


[ 노찬성과 에반 ]

"절벽 아래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찬성은 갓길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저기, 아직 사람이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사고(?)로 아버지는 떠나고, 어느 지방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 아이 노찬성. 

어느날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늙은 개 한마리를 발견하여 집에 데려온다. 사람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운다는게 말이 되느냐는 할머니의 타박과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책임' 지겠다고 장담을 하여 결국 반려견이자 친구로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늙고 병든 반려견 '에반' 은 오래 가지 못하고 아이 곁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반려견 '에반'의 죽음을 준비하려는 어린 찬성의 노력과 책임감. 그러나 녹록치 않은 현실의 장벽과 유혹들... 


[ 건너편 ]

헤어지는 연인들;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함께 해온 연인. 여전히 공시생인 이수와 경찰 공무원이 된 도화.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헤어지는데 이 말 외에 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는가?


[ 침묵의 미래 ]

한 언어의 실사용자가 10명 미만인 소멸어 사용자인 경우 언어박물관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전시되어 산다는 설정.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말은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써만 말을 하는,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지 못한, 어찌보면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Individual, 라이프니츠의 단자 Monad)" 의 우화일 수도 있다. 


[ 풍경의 쓸모 ]

시간이 흐르고 서로 얽히면서 삶이 되고, 현재의 삶은 과거를 불러오고, 또 과거는 현재를 복기한다.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더블폴트의 삶을 살게 된 남자 ; 지방 대학의 강사인 정우는 강의를 마치고 함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낸 대학교수 대신해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 그 교수는 이후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과는 달리 정우의 교수임용에 강하게 반대하게 됨을 옛 은사와의 통화를 통해 듣게 된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가 재혼을 한 아버지. 아버지는 재혼한 여자의 병 때문에 아들에게 손을 빌리기 위해 연락을 취해 온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의 연락이 마땅치 않은 정우... 어머니, 와이프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순간 들어온 휴대전화의 부고 문자...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 처럼, 서로 엇갈리는 삶들...


[ 가리는 손 ]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아이들이 밀치며 때린 노인이 쓰러지며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의 목격자인 화자의 아들 재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인다. 

하지만 사건을 담은 영상을 보면 재이는 사건의 가담자가 아니라 목격자이다. 아이를 믿으려는 엄마. 하지만 엄마의 믿음에도 한가닥 의심이 자리하고 있다.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발견한 순간 엄마는 자신이 모르던 아이의 다른 면을 느끼게 된다. 

그 낯설음, 놀람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엄마가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 '내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편견의 한 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방식대로 아들(타인)을 바라보다가 그 존재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이질감과 간극의 차이.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휴대전화의 음성서비스(Siri)와 이야기를 나누는 주인공. 시리에게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주인공이 붙들고 있던 질문은 결국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 그 원망과 질문 빠져 있는 화자에게 죽은 제자의 누나가 보내온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줄곧 외면하려고 했던 어떤 모습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라는 이해와 위안. 남편의 제자 지용이 계곡물에 잠겨 죽기 전 손을 내밀어 움켜잡은 건 차가운 물이 아닌 사람의 온기였을 것이다.

책, 『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분량이 상당히 짧은 단편 소설이라 내용이 정말 짧다.

한 여인의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 하는 20살 생일날의 기억 ; 도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던 주인공. 20살 생일날 대신 일을 해 주기로 하였던 동료가 일이 생겨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레스토랑에 출근하여 일을 하게 된다. 약간 비가 내리는 날씨. 손님은 별로 없고 그렇게 또 하루가 평범하게 지나가려는 가 싶었는데, 매장의 플로어 매니저가 갑자기 복통이 와서 병원에 가게 되는 상황에서 플로어 매지너로 부터 부탁을 하나 받게 된다. 식당의 주인이 같은 건물 6층에 사는데, 사장은 베일에 가려진 사람으로 플로어 매니저 이외에는 사장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고, 그동안 플로어 매니저가 어김없이 매일 저녁 8시에 사장의 식사수발을 해 왔다. 하지만 그날 매니저가 복통으로 갑자기 택시에 태워져 병원에 가게 되는 바람에 그녀에게 대신 사장의 식사수발을 부탁하게 된 것이다. 정확히 저녁 8시에 604호로 사장의 식사를 가져간 그녀에게, 그날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장은 뭐든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말한다. 딱 한 가지 소원. "소원은 번복할 수 없으니 신중하게 선택하라"며... 그녀는 소원을 빌었지만 그게 어떤 소원인지, 소원이 이루어진 건지, 이루어 졌다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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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이라는 것. 세상에 태어남과 살아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축하하는 하나의 정기적 이벤트 또는 의식(Ritual) 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특정하는 20살의 생일날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생일도 대체로 마찬가지이고. 어려서는 생일이면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라는 것 정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정 생일날의 경험이 삶에서의 큰 사건과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리라 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인의 20살 생일날도 그러한 케이스 이겠지.

소설에서는 20살 생일을 맞이한 여인의 생일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레스토랑 사장의 정체나, 생일을 맞이한 여인이 빌었던 소원의 내용이 무엇이고,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인지, 이루어졌다라면 어떻게 이루어진 것 인지에 대해서는 가려 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가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소원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그 대가라는게 시간일 수도 있다. 과연 시간이라는 대가를 인간이 치루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일은 내가 기억하고 축하하는 날이라면, 삶이 끝나면 생일 대신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기리는 제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Thursday, August 22, 2024

책,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 총평 ■

이야기의 핵심은 "얼굴없는 사람의 초상화" 그리기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얼굴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 그것은 철학적 개념을 들어 이해 하자면 '표상(Vorstellung)', '재현(Representation)'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상이라는 말의 독일어 표현으로는 "Vorstellung" 이 있다. 이는 (주체) 앞에 내세우다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스스로 설정한다는 함의가 있다.

작품속 화자의 말처럼,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해석하고 자기가 파악한 대상의 한 국면을 재구성하여 그림으로 표상(Vorstellung) 하는 작업이다. 그 재구성이라는 것은 화가/작가의 인식틀에서 그 대상의 실체/본질(또는 플라톤적 '이데아')을 개별적이고 차별적으로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해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는 그 대상의 본질(이데아)을 다시 re- 현재화 presentation 하는 활동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마치 플라톤이 이야기 하였던 이데아의 상기(想起)라는 개념처럼...

그렇다면, 작품속에서 이야기 하는 "얼굴없는 남자"와 같은 존재의 초상화를 그린다는게 가능할까? 

이야기 속의 화자인 초상화가인 나는 얼굴 없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  

"그가 얼굴을 반쯤 가린 검은 모자를 벗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얼굴은 없고, 유백색 안개가 천천히 휘돌고 있었다...(중략)... 더욱이 무(無)를 둘러싼 유백색 안개는 쉼 없이 모습을 바꾸었다...(중략)... 그저 짧은 꿈 같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만일 그게 꿈이라면 내가 사는 이 세계가 모조리 꿈이라는 뜻일 테니까"

그 대상의 확실성이 담보되지 않고, 유백색 안개 같이 끊임 없이 얼굴이 변하는 사람(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실로 난해하고 곤혹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얼굴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작품에  언급되는 그 인물들의 실제적 모습과 사건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다. 도대체가 이 모든게 현실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꿈 또는 망상인지... 

그 불확실성, 애매모호함,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할 수 없고, 국면의 불가지론적 특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화자(작가)는 "시간" 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굴없는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또는 알 수 없는 사건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데는 '시간' 이 필요하다라고, 시간을 내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전 우주적 꿈꾸는 神 비슈누(Vishnu) 에게는 그의 꿈이 곧 전우적 시공간이겠지만, 한낱 불완전하고 티끌같은 인간의 개인적 존재에게 시간은 과연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 도서 내용 요약 ■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개인적 단상으로 대체 한다.

▣ 화자인 초상화 화가 : 미대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내. 나름 초상화 업계에서 알아주는 실력자로 성장함. 아내의 갑작스런 이별/이혼 통보로 홀로 여행을 하다, 미대 동기인 야마다 마사히코의 소개로 마사히코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 화가인 야마다 도모히코의 산속 집에 홀로 살게 된다. 그 집의 천정 다락에서 야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을 우연히 찾아 맞딱뜨리게 되면서 소설속에서 전개되는 이상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성격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소설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인물(전형적인 하루키식 주인공)

▣ 화가의 아내 유즈 : 독자인 나에게는 특별히 이렇다할 인상이 별로 없고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갑자기 이혼하자고 통보하고, 헤어진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하고, 임신한 상태에서 다시 주인공과 결합하여 함께 살자고 하는, 주인공을 밀쳤다가 다시 끌어 안을 정도로 이야기속 초상화가인 화자에게는 존재감이 상당히 큰 중요한 인물.

▣ 야마다 도모히코 :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그린 저명한 일본화 화가. 고령으로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 살게되어 작중 화자가 도모히코의 집에 잠시 살게 되면서 도모히코가 천정 다락에 숨겨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도모히코가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면서 휘말린 사건을 계기로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서양화를 포기하고 일본화 화가로 전향하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과거사와 관련된 부분, 그리고 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을 그려놓고 세상에 발표하지 않고 숨겨 놓았는지, 그리고 그 그림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 모든 면에서 인물 자체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은 상당히 모호하고 미스터리어스하다. 결국 진실은 저 너머에...

▣ 야마다 마사히코 : 저명한 일본화 화가 야마다 도모히코의 아들이자 작품속 주인공인 나의 미대 동기이자 친구. 주인공인 나에게 아버지가 살던 집을 소개시켜 주며 주인공이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유즈와의 관계에서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친구. 

그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하나의 사람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어찌보면 소설의 주요한 테마를 언급한게 아닌가 한다 ;    

"그게 말이지 여자의 얼굴은 좌우가 다르거든. 그거 알았어?...(중략)... 두달쯤 전 일인데, 요즘 만나는 여자친구 사진을 찍었어. 디지털카메라로 얼굴 정면을 클로즈업해서. 그리고 업무용 컴퓨터의 대형 모니터에 띄워 봤어.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을 한가운데서 잘라 반쪽씩 봤어...(중략)...  얼굴을 반으로 나눈 뒤에 한쪽을 반전해서 붙이는 식으로. 오른쪽만으로 얼굴하나를 만들고 왼쪽만으로 또 얼굴 하나를 만드는 거야. 그랬더니 완전히 다른 인격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두명의 여자가 만들어 진거야. 놀랐어. 요컨데 한 사람 안에 실은 두명이 도사리고 있던거라고..." 

▣ 백발의 중년 남성 멘시키 : 소설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멘시키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하고 명백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찌보면 한 측면에서는 작품속에 등장하는 '얼굴 없는 남자'와도 같은 특징을 가진 인물. 소설속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화자와 함께 사건의 전 과정에 관여한다.

▣ 아키가와 마리에 :  백발의 중년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10대 중학생 소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속 주인공의 Mirror Image, 화자의 분신과과 같은 인물로 느껴진다. 미스터리한 성격에 화자와 같은 사건의 경험을 공유한다. 

▣ 현현하는 이데아 : 야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속에 표현된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 불멸의 이데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소멸 맞이 해야만 하는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

▣ 전이하는 메타포 : 야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속에 표현된 '긴 얼굴'의 특징을 가진, 이데아와 마친가지의 정체불명의 존재. 작품속 주인공이 이공간을 지나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비자발적 도움을 준다.

Wednesday, July 31, 2024

책,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문화란 무엇인가 Culture』

책의 원제 Culture ; 독일의 Kultur라는 용어를 일본이 수입하면서 "문화"로 번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언어적으로 Culture : cultivate, 경작하다라는 어원도 있고, cult 라는 종교적 의미도 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文治敎化"(글로 다스리고 가르쳐서 변화시킨다)라는 말로 부터 '문화'라는 단어를 조어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대체적으로 그 의미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단어나 개념이라는 것이 단일 어원이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고 또 변용되면서 시대성/역사성을 띄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특성이 가미되기도 한다. "문화"라는 개념을 둘러싼 근현대의 담론도 그러한 시대성/역사성/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벗어나기 힘들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문화를 둘러싼 담론(특히 포스트모던 문화주의,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비평을 전개 한다. 물론 이글턴 자신의 주장 또한 그러한 시대성, 역사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있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이다. 

 "분명 사회주의에서 노동은 사회적 존재의 토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생산의 큰 부분은 문화를 위해서 존재할 것이고, 자유로운 자기실현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노동으로 부터 귀중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경제적 잉여를 더 많이 창출할 수록, 그는 노역의 필요에서 더 많이 해방될 수 있다...경제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경제 혁명이 필수다.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향한 충동은 끝이 없으므로, 오직 사회주의만이 이러한 편집광적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시장논리로 인해 최소한 신석기 시대 조상들이 했던 만큼이나 힘들게 일한다. 기술은 착취를 폐지하는게 아니라 착취를 강화하는 식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했듯이, 노동이 기계화, 자동화, (인공)지능화 되어 생산성이 높아지고 타인의 노동을 착취할 필요 없이 모두가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기계발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이다. 럭셔리한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는 것이 하릴 없는 공상, 이상주의적 꿈인가? 아니라고 본다.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능하다. 기술이 착취를 강화는 것이 아닌 착취를 폐지하는 구조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과거 아동노동이나 노예매매가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아동노동이나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주장과 활동에 대해 당시의 옛 사람들은 그것은 허무맹랑하고도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온한 반역적 행동이라 했다. 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력에 기반한 럭셔리한 공산주의 사회에의 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오직 현재 질서에만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비현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 . . . .[도서 요약]. . . . .

테리 이글턴은『문화란 무엇인가』에서 먼저 "문화"와 "문명" 개념의 주요한 차이점들을 검토하며 문화론, 문화주의, 문화적 상대주의 등에 대한 자신의 비평적 담론을 펼친다. 

1. 문화와 문명

문화는 1)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들 전체, 2)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 과정, 3)사람들이 살아가며 따르는 가치, 관습, 신념, 상징적 실천들, 4) 총체적 삶의 방식으로 정의, 분류될 수 있다. 허나 4가지의 분류가 그 구분선이 명확한건 아니다. 특히 '문명'이라는 개념과 대비되어 사용될 때에는 종종 그 기원적 의미를 넘어서 개념이 확장되거나 병용, 교차 혼용되기도 한다. 

문화와 문명은 원래 거의 동일한 의미였으나, 근대에 들어서 이 둘이 구별될 뿐 아니라 실제로는 반대말로도 여겨진다. 가령 문화와 문명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현 ; 독인인들은 괴테 칸트 멘델스존을 가지고 있는 반면(독일적 문화 Kultur), 프랑스인들은 향수, 최고급 요리, 샤토뇌프 뒤 파프(포도주)를 보유하고 있다(프랑스적 문명 Civilization)...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우편함은 문명의 일부이고, 우편함을 무슨색으로 칠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다.

한편 생활방식의 총체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에서 본다라면, 자본주의 산업화 이후에 잃어버린 과거의 이상향, 실락원에 대한 노스텔지어로써, 문명이 더 지독스럽게 물질적으로 변해갈수록 문화는 더 고귀하고 현실 초월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여기에서 문명은 계몽주의의 언어에 속한다면, 문화는 낭만주의적 개념으로 제시된다. 문명 비판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이 대두된 것이다. 

2. 포스트모던 문화주의에 대한 비판

문화는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사를 오로지 문화로만 설명하는 문화주의; 다양성, 다원성, 상대성, 주변성에 대한 관심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는 인정하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누락한다. 바로 문화의 물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고려이다. 그 모든 좋은 '문화'의 뿌리에는 수많은 노동과 고통, 피와 잔인함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 시인, 철학자, 성직자, 무당, 족장 등의 문화적 업적은 노동의 필요에서 해방되어야만 가능한, 즉 타인 노동의 과실에 기반한 것이다.  

3.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문화

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란 가장 정교한 인간의 "의식 행위" 인데,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은 "유적존재 Species being" 라는 개념, 또는 쟈크 라캉의 대타자라 부르는 개념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개체/개인으로서의 존재와 집단으로서의 인간(유적존재)의 차이. 개인/개체에게 언어, 문화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주어진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속에서 습관, 관습화 되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또는 집단적 의식의 흐름에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문화라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진행중이고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역, 언어, 종족, 계급적 집단, 공동체들간의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한편으로는 문화적 상대성으로 이해되는 한편, 또 다른 측면에서는 문화적 우월성/열등성의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타 민족, 국가에 대한 식민지화속에서 문명/문화에 대한 우열 구분이라든가, 하나의 공동체, 국가내에서도 나타나는 고급/엘리트 문화, 대중문화, 저급문화, 소수문화, 서브컬쳐 등의 위계질서 세우기.

4. 문화의 사도,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이 꿈꾸는 세상

노동이 기계화 되고, 노동으로 부터 해방되어 결과적으로 개인적 자기계발을 할 수 있게 되는 미래. 사회주의에서도 노동은 사회적 존재의 토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생산의 큰 부분은 문화를 위해서 존재할 것이고 자유로운 자기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노동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노동의 기계화/자동화/지능화에 따라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적 잉여를 더 많이 창출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계발을 할 시간을 확보하고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사회는 가능하다.

5. 문화의 물적 토대와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 외면하지 마라.

Tuesday, July 16, 2024

책,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지음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이야기들로 많은 수의 작가와 작품을 이야기 하다보니 한 화가의 삶이나 작품을 둘러싼 전체적인 모습을 포착하기 힘든 부분이 있으나, 책의 제목과 의도 그대로 처음 미술을 접하는 사람들이 가볍고 재미있게 읽으면서 입문할 수 있는 책 인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몰랐던, 새롭게 다가왔던 내용 두가지를 정리해 본다. 

1. 에드바르트 뭉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규> :
<절규>는 그림속 주인공(또는 작가 자신이)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이 내지르는 비명에 놀란 작품속의 남자가 공포에 질려 귀를 막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거대하게 다가오는 외부(자연, 죽음)의 폭력과 공포 맞딱드린 불안하고 미약한 존재의 몸부림.  

2. 뒤상의 예술 철학 :
① 관객을 단지 관찰자, 소비자가 아닌 예술활동의 공동 창조자로 인식한 점.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 

② 그리고 예술을 진지하고 무거운 그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고통이나 노동이 아닌 마치 체스게임과 같은 놀이로 인식한 점.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데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한 것"이 본인이 예술가로 살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이라 이야기 한다. 

. . . . .[도서 요약]. . . . .

1. 에드바르트 뭉크 : 회화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게 아닌 작가의 감정과 내면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표현주의의 선구자. 그는 자신의 삶으로 부터, 자신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 사랑의 고통, 존재의허무함 등의 감정을 회화로 표현함.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 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Memento Mori ; 작품 중 <병든 아이>는 자신의 누이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린 작품으로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비탄에 빠진 어머니를 따스한 미소로 위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엄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부디 굳건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저를 잊지 말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2. 프리다 칼로 : 멕시코 혁명의 정치운동가이자 대표적인 국민화가 였던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멕시코를 대표하는 부부 화가. 프리다 칼로는 16세기 스페인의 무력 침략과 식민지화로 맥이 끊겼던 멕시코의 전통을 예술로 계승, 표현하고자 함. 한편 자신의 불행과 고통(교통사고, 유산, 실연, 남편인 디에고의 바람기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사고>, <떠 있는 침대>,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두명의 프리다> 등이 그러한 고통과 극복의 표현들이다. 

3. 에드가 드가 : 19세기 당대의 보통의 여성들; 세탁부, 카페의 여가수, 여자 서커스단원, 그리고 특히 발레리나를 그린 인상주의 화가. 특히나 화려한 무대 뒷편의 치열함과 은밀함(<무대 위 발레 리허설>, <발레 교실> 등의 작품), 그리고 당시 부르조아들의 추악함까지도(<실내(강간)> 이라는 작품).. 

"낮이나 밤이나 연습에 몰두하는 그녀,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즐거움이 밀려오네, 아직 빈민가의 흔적을 떼버리지 못한 그녀.." - <어린 무용수> 중에서

그는 순간포착 사진 처럼 무용수가 춤을 추는 순간 등 움직이는 대상의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는 당시 발명된 사진의 영향도 한몫 했다라고 볼 수 있다.

4.빈센트 반 고흐 : 색을 향한 열정.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색을 통해 자연의 생기와 자신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화가.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극단적인 느낌에 이르도록 색을 사용해보는 일이 내게는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닫는다"

"노란 높음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고흐의 그림에 표현된 노랑색(<밤의 카페 테라스>, <프로방스의 건초더미>, <노란집>, <아를의 밤의 카페>, <해바라기> 등의 작품에 표현된)은 사실 독주 압생트에 중독되어 압생트에 들어 있는 사토닌 성분이 가져온 황시증의 부작용 때문이다. 

한편 앱생트에 포함된 또 다른 성분인 튜존은 뇌세포를 파괴하고 정신착란과 간질발작을 일으키는데 그로 인해 압생트 중독이었던 고흐의 몸과 마음을 파괴해 나갔다. 극심한 발작, 정신질환, 환상에 시달리며 우울과 고통에 시달리다 그는 결국 <까마귀가 있는 밀밭>으로 그는 사라져 갔다.

5. 구스타프 클림트 : 고전주의 미술에서 경력을 쌓고 젊어서 돈을 벌었으나, 1890년대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빈에서 기존 미술로 부터 분리주의(Secession, 제체시온) 운동을 이끄며 시대의 반항아로 돌아선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누다 베리타스>, <철학>, <의학>, <법학> 등의 작품은 미술계의 기존 질서와 체계에 대한 반항이자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이었다.

6. 에곤 실레 :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배이자 제자. 클림트의 예술관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성적 본능, 죽음의 공포 등의 주제로 직설적이며 특히 노골적으로 성적 표현을 그려낸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28살의 나이로 죽기 몇 년전에 그린 <포옹>, <죽음과 소녀> 등의 작품에서는 스타일이 변화하며 자전적 체험을 그려낸다.  

7. 폴 고갱 : 증권맨으로 직장생활을 하다 늦깍이로 전업 화가의 길로 뛰어든 사나이. 전에 없는 자신만의 회화를 찾기 위해 "야생과 원시성"을 찾아 나선 화가. 고갱의 "원시성과 야생"이라는 주제는 어찌 보면 당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인생 후반부를 타히티에서 보낸 그는 자신이 원하던 원시성을 찾았을까?

8. 에두아르 마네 : 인상주의라는 미래의 미술로 가는 문을 찾아 그림에 숨겨둔 화가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 어찌보면 그는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화가였지만 그의 작품은 이후 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문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 <풀밭 위의 식사>라는 작품에서, 신화나 성서 역사적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1860년대 풀밭 위에서 퇴폐적으로 노니는 부르주아들의 당시 생활상을 그려냈다. 즉,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미술로의 문. 두번째로 <올랭피아> 에서 전통적인 원근법을 버리고 평평한 캔버스 위에 완전평면과 붓질과 색채의 단순함이라는 모더니즘 회화의 문. 마지막 세번째로 <폴리베르제르 바>에 숨겨둔 '다시점 多視點'의 문. 하나의 그림에 하나의 시점이 아닌 복수의 시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로 발전한다. 

9. 끌로드 모네 : 인상주의라는 미래로 가는 문을 연 남자. 빛의 포착; 햇빛의 변화로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하여 원색과 점을 찍듯 짧고 빠른 터치로 표현한다. 모네는 당시 발명된 카메라와 광학의 원리를 그림에 도입한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비친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모네는 자연을 빛의 반사로 탄생한 무수한 색채 조각의 총합으로 보게 된다. 오직 빛 만으로 풍경, 인물, 사물 등 모든 대상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장님이 막 눈을 뜨게 되었을때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

그러한 배경하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인상, 해돋이>.

10. 폴 세잔 : 매너리즘적 인상주의가 아닌 나만의 회화를 만들고 말겠다라는 집념. 세잔은 시시각각 변하는 찰나의 빛에 의해 반사된는 사물을 마치 사진찍듯 찰나의 순간에 담고자 하는 모네식 인상주의를 넘어서 무언가 사물의 본질을 견고하게 담아 내고자 한다. 

구성적 회화의 탄생; 세잔은 캔버스 안에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림 속 사물간에 화음을 구성하게 된다. 그림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크기와 생김새, 그리고 위치와 간격까지 그 모든 요소를 치밀하게 고려하여 그림을 구성한다.

11. 파블로 피카소 & 앙리 마티스 : 아방가르드 선도자라는 타이틀을 건 피카소와 마티스간의 세기의 대결? 회화는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라는 명제를 깨 부순 두 화가. 마티스는 자연에서 보이는 색을 재현하는 기능에서 색채를 해방(야수파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모자를 쓴 여인> 이라는 작품)시켰다 라면, 피카소는 자연에서 보이는 형태를 재현하는 기능에서 형태를 해방(다시점과 쪼개기라는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린 문제작 <아비뇽의 처녀들>) 시켰다. 

12. 마르크 샤갈 : 파리감성+유대감성=샤갈감성. 러시아 출신 유대인, 외부인, 경계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 자신의 뿌리를 그리는 것은 그의 숙명이었다.  <나와 마을>, <생일>, <밝은 적색의 유대인> 같은 초기 작품과 늙어서 그린 <성서 이야기> 시리즈의 작품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야수주의 입체주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긴 하였으나, 그러한 사조와 기법을 자신만의 독자성으로 흡수하여 자신의 고향과 뿌리를 그리는 것으로 승화되었다.

13. 바실리 칸딘스키 : 추상미술의 창시자.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순수한 형태와 색만으로 마치 음악을 작곡하듯 회화를 그린다. 캔버스 위에 점, 선, 면 그리고 색이라는 악기로 자유로운 연주를 하듯 감정과 개념을 그려 낸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순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에의 추구. 한편 가브리엘레 뮌터와의 연애와 사랑에서는 찌질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남자.

14. 마르셀 뒤상 : 현대 미술의 창조자. 눈에 보이는 미술이라는 관념을 파괴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미술, 개념미술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한 예술가. 팝아트(Pop Art)와 옵아트(Optical Art), 그리고 설치미술의 시대를 열어제낀 선구자. 

그는 관객은 단지 관찰자, 소비자가 아닌 예술활동의 공동 창조자로 인식하였다.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

작품은 창조가 아닌 놀이가 된다. 심심풀이 땅콩 같은 미술, 그에게 미술은 마치 체스게임과 같은 놀이인 것이다. 

Monday, June 24, 2024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전직 빨치산이자 어수룩한 농삿꾼인 아버지, 치매기가 있던 아버지가 길을 걷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는 죽었다(곧 바로 죽은 건 아니고, 그 여파로 빠른 시간내에..) 

"근엄, 진지, 혁명가의 비장함"이라는 단어로 이야깃속 주인공인 딸이 묘사한 빨치산 부모님의 삶. 평생을 사회주의자 빨치산 이념에 매달리며 서툰 농삿꾼으로 살던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하나뿐인 딸이 상주로써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면서 맞게 되는 가족, 친지, 그리고 다양한 조문객들. 그들의 사정과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되는 아버지의 삶. 그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의 갈등, 분열, 폭력, 상처, 분노, 죄책감, 이해와 용서의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평탄치 않은 만남과 재혼.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 관계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갖게 되는 가족친지들간의 -특히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와의- 그 기나긴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 좌우대립과 한국전쟁 중에서 겪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치유될 수 없는 상처. 장기투옥, 자기 신념체계의 공고화, 또는 변절. 살아 남은 자들의 슬픔/죄책감, 상대나 타인에 대한 분노, 전쟁 이후 다시 이어가는 사회와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관계들...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을 통해 딸이 몰랐던 아버지의 삶의 다양한 모습 중 일부가 재구성되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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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딸로서 살아온 삶. 오롯이 '나'로서가 아닌 '누구누구의 딸'로서 살아간다라는 것은 멍에일 뿐이다. 그 삶은 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이 끝날때 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모와의 관계설정은 여러 경로를 거치고, 또 그러한 부모에 대한 감정이나 부모의 삶에 대한 이해도 다양하게 변화하게 된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와는 다르게 돌아가시고 나면 그러한 부모와의 관계와 그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게 되며, 그러면서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되거나 긍정적인 측면이 강화되기도 하고... 어찌보면 죽음 이후에는 좀더 관대해지고 아련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야깃속 주인공의 자세 또한 그러하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 돌아가신 전직 빨치산이자 농삿꾼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기억과 추모; 한 인간의 삶이라는게 다양한 굴곡과 사회적 관계속에서 어우르며 지내온 것이라, 주인공인 딸이 알던 아버지의 삶이라는 것도 전체를 구성하는 아버지의 다양한 삶의 모습 중 한 단면이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을 계기로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다른 시간, 다른 관계속에 있던 삶 중 일부를 재구성하고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장례식이 단지 죽음을 추도하는 공간만이 아닌 만남과 화해, 그리고 시끌벅적 울고 웃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책, 『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은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할때와 집단으로 존재할때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비 한다. 

개인으로서의 존재 : 의식, 합리, 이성 
  vs. 
집단/군중의로서의 존재 :  무의식, 비합리, 광기, 폭력..

군중이 되었을때, 군중은 각 개인이 가진 지식과 이성의 합이 아니라 "각 개인의 지적 능력, 즉 그들의 개체성은 집단의 정신상태속에서 사라진다. 이질성은 동질성 속에 섞이고 무의식적 자질들이 우위를 차지한다". 즉 개인으로서의 존재 보다 더 낮은, 열등한, 퇴행적인 정신/의식상태와 행동양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군중/집단에서 나타나는 의식, 심리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귀스타브 르 봉은 이성 혹은 합리적인 논리가 인간의 행동을 주재하는 전능한 힘이 아니며,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 관습, 신념(믿음)체계 등이라고 본다. 이성은 거의 대부분 다른 본능적, 감정적, 생물학적, 집단적 논리들이 우리에게 범하라고 부추킨 행위를 사후에 정당화 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다. "역사를 살펴볼때 인간들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보다는 사상/믿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 

귀스타브 르 봉은 이러한 관점하에서 그가 살었던 프랑스의 프랑스혁명과 파리꼬뮌의 격랑속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했던 세로운 정치세력, '군중'에 대한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인간의 비합리성, 광기, 맹신, 폭력의 역사에 대한 책들과 연구가 많은데,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는 이러한 연구의 고전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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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파리꼬뮌의 격랑속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던 "군중"에 대한 충격으로 부터 시작된다. 

군중(群衆)이라는 집단이나 집합적 무리가 그때 그당시에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겠지만, 산업화와 근대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집단으로서의 "군중"의 존재는 과거와는 다른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군주나 귀족, 지식계급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끌었다면 (귀스타브 르 봉이 살았던 프랑스의 경험으로 보면) 프랑스 혁명과 파리꼬뮌의 격랑속에서 등장했던 군중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비춰지게 된 것이다. 

"정치생활에 군중이라는 계급이 진출했다는 사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들이 지배계급으로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 과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그러한 '세로운 세력', 군중의 정체란 무엇인가?

"오늘날 군중의 요구는 점점 더 분명해져 가고 있는데, 현재 사회를 철저히 파괴한 다음 문명의 여명기 이전에 모든 인간집단이 영위하던 정상적 생활방식인 원시공산사회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생산과 철도, 공장, 토지를 수용할 것. 모든 생산물을 평등하게 분배하고 민중계급의 이익을 위해 모든 상류계급을 타도할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요구사항이다"

귀스타브 르 봉이 이야기 하는 그 "군중"이라는 집단은 주로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와 계급 일부를 일컫는,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정치세력이라 볼 수 있다. 

『군중심리』 가 출판된 1895년은 프랑스혁명과 파리꼬뮌의 충격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라 귀족이나 부르주아, 지식인 들의 그러한 군중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고 부정적으로 남아 있다. 

군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적대감 ; 그들은 과거와 같은 지배와 통치의 대상으로서의 "백성"이 아닌, 통제되지 않은 미지의 세력, 즉 왕권과 귀족지배를 뒤엎을 혁명세력이었던 것이다. 

귀스타브 르 봉의 책도 이러한 배경으로 부터 "군중"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귀스타브 르 봉이 정의하고 분석하는 군중이란 "심리적" 군중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수 많은 개인이 결합한다고 해서 군중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관점에서 군중을 정의한다. 

"이렇게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군중이라는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어떤 일정한 여건에서 그리고 오직 이건 여건에서만 인간들의 집합체는 이 집합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특성과는 크게 다른 특성이 있다. 의식을 가진 개성은 자취를 감추고 그 집합체를 이루는 모든 단위의 감정과 생각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일시적이지만 대단히 명확한 특징을 드러내는 집단적 정신상태가 형성 된다. 이런 집단을 '조직된 군중', 혹은 '심리적 군중' 이라 부를 것이다.....심리적 군중은 일시적인 존재로서, 마치 어떤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결합에 의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생명체를 생성하는 것 처럼 잠시 동안 결합한 이질적 요소로 이루어 진다"

이러한 군중이 가진 특성과 심리구조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개인의로서의 존재와 집단/군중으로서의 존재할때의 차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판단력, 이성을 가진 개인이라도 집단/군중의 일부로 존재할때 나타나는 '퇴행적'인 -개인으로 존재할때 보다는 열등하고 낮은 수준의- 정신/의식상태와 행동양태를 보인다고 진단한다. 퇴행적인 군중의식/정신상태라는 진단으로 부터 군중의 여러 특성(충동성, 폭력성, 변덕스러움, 과민성, 피암시성, 상상력, 맹신, 비관용성, 보수성 등)을 나열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특성 덕에 군중은 '설득, 선동, 조작,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이해되고, 군중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리더나 지배자들의 수단이나 기술(이미지, 단어, 확언/반복/감염/위엄)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3부에서는 군중의 분류와 몇몇 군중 집단에 대해 분석을 진행한다.

Tuesday, April 23, 2024

[Book Scrap] 김상욱의 양자 공부

마치 동문서답, 선문답 같은 Q&A ; 

 Q : 원자는 어디 있나요?
 A : 모릅니다. 질문이 들렸어요.
 Q : 양자역학은 뭐 하는 학문인가요?
 A : 원자를 설명하죠
 Q : 그럼 원자는 어디 있나요?
 A : 모른다니까요!
 Q : 원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원자를 설명한다고요?
 A : 질문이 틀렸다니까요!

이 문답을 이해한다라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 하는 양자 이야기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나오는 불연속성, 불확정성, 확율 파동 함수... 도대체가 모호하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미궁속으로 빠지는 듯 하다. 모든 내용을 100%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주의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고, 양자역학은 원자를 설명하는 과학이라 한다. 결국 양자역학이 제대로 밝혀지고 정립되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과연 양자역학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이란 말인가? 우리가 원자 세계의 운동과 현상을 완벽하게 안다고 해서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은 과연 하나일까? 

엄밀하게 이야기 하자면, 객관적 물리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한 이론(법칙)으로 우주를 해석할 뿐이지 않는가? 세포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이지만 세포의 특성과 운동, 그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밝혀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인간 그 자체, 인간의 심리, 정신, 사회구조, 관계, 역사를 규정하는 법칙이 아니듯...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무용하다는 말은 아닐터...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 The Capital] 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해부와 해석의 시발점으로 자본의 원자라고 할 수 있는 '상품' 분석으로 부터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자본의 운동을 설명하였듯이, 양자역학이 원자 세계의 구조와 운동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우주의 구조와 운동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 지식을 한층 더 풍부해주는 이론/방법론/학문분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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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이란? : 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다. 그렇다면 원자란 무엇인가? : 원자는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최소 기본단위로,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즉, '양자역학'이란 원자라는 물질의 핵과 전자(들)의 존재방식, 물리, 화학, 전기적 특성과 운동을 설명하는 과학이라 정의될 수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이다. 전자의 특성과 운동방식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양자역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은 전자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 전개된다. 전자의 존재와 운동 특성 즉, 전자의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특성. 여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중슬롯 실험, 쉬뢰딩거의 고양이 비유, 결어긋남, 관측의 문제, 코펜하겐 해석, 불연속성, 불확정성, Quantum Leap, 확률해석, 카오스, 다중/다세계해석, 다중우주 등에 대한 이야기들...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원자, 그리고 그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로 부터 시작하여 분자, 세포, 생명, 그리고 우주까지 확대된다. 

양자역학에 대한 구체적인 개별 이론이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결국 논쟁의 핵심은 전자의 특성과 운동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므로, 그 중 양자역학의 정통(?)이론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세계는 입자이면서 파동의 성질을 가지는 전자는 그 자체로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중첩상태에 있다. 그러한 여러 가능태의 존재는 외부의 실험자의 "측정"/"관측"에 의해 간섭을 받아 그 중첩상태가 깨지면서 하나의 상태/결과로만 보여지게 된다. 비유하자면 여러 확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지만, 주사위가 던져졌을때에는 하나의 결과만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주사위를 던졌을때 나올 경우의 수는 6가지로 존재하지만, 던져지기 전에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미리 정해지거나 알 수 없고, 오직 던져진 행위, 사건의 결과로서 1이나 2 등의 하나의 결과만 보여질 뿐이며, 그 결과값인 1 이나 2는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즉 전자는 그 자체로 확정된 실재라기 보다는 측정 행위의 결과로서만 보여진다는 것, 측정/관측/실험은 그 과정중에 필연적으로 대상을 교란하고 측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가 전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질/본질을 규정하는것은 아니다. 좀더 이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전자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그 대상 물리량이 어느 하나의 상태로 존재하지 못하고 여러 상태의 확률 파동 함수로서 분포된다. 여기에 측정을 가하면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물리량은 하나의 상태로 특정된다. 

이것이 '코펜하겐 해석'에서 이야기 하는 양자역학(전자운동)의 불연속성, 불확정성, 확률해석의 내용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가 어디 있는지(그 위치나 궤도)를 알 수 없고 오직 상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불가지론이나 전혀 무용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양자역학으로 우주의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정확도 99.999999999....(유효숫자 15자리까지) 측정할 수 있다.

[Book Scrap] 유현준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은 건축을 단순히 용도나 대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건축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사회와 역사라는 인간 관계를 보고 있다. 건축물에 대한 유현준의 정의를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라면 '공간이 만든 공간' 이라고 하지 않을까?

"건축물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전달 매체가 있다. 그것은 비어 있는 Void 공간이다. 공간은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을 때부터 시간과 함께 있었던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공간이 없다면 빛도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건축은 이러한 공간을 조절해서 사람과 이야기한다. 이러한 보이드(Void) 공간은 건축의 도움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우리 눈으로 캄캄한 우주 공간을 쳐다보면 그 광활한 공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상의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건축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공간은 막연하다. 하지만 벽을 세우게 되면 막연해서 느껴지지 않던 공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마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처마 팀의 공간이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을 준다"

위의 문장이 건축(물)에 대한 유현준의 관점과 정의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덧대어 '정보로서의 공간'이라는 개념도 추가된다. 

"과연 어떤 정보들이 우리의 공간을 구성하는가? 개인적으로 Void, Symbol, Activity 라는 세 종류의 정보로 만들어 진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보이드 Void는 물리적인 양이다.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실제 비어있는  공간의 볼륨이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서 객관적인 정보이다. Symbol 정보는 간판, 조각품, 그림 같은 상징적인 정보이다. 개인에 따라서 정보 해석의 차이가 있다. 마지막인 액티비티 정보는 사람들의 행동에 의한 정보이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무엇 인지가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종류의 정보가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건축 구조에 인간의 인식과 활동이 추가됨으로써 그 공간은 사회적인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건축물, 건축물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도시 공간이라는 것은 하나의 고착되거나 불변의 대상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질로 구성된 도시가 어떻게 살아 있는 유기체적인 특징을 갖게 된 것일까? 물론 대부분의 도시 구성의 변화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그 변화들은 인간에 의해서 디자인되어진 대로 변화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 만들어낸 변화들이 모여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이 불특정 다수인 인간은 유기체 생명이기 때문에 도시가 유기체의 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유기체 생명인 인간은 모여서 사회라는 조직을 형성하고 이 조직은 우리가 파악하거나 컨트롤 할 수 없는 또 다른 유기체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유기적인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내는 것이 도시이다"

공간, 정보, 그리고 인간의 Activity가 어울어 지면서 변화하는 유기체로서의 건축, 도시가 우리와 함께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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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도시에 대한 유현준의 글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재밌었던 부분은 공간구조와 종교활동의 상호관계에 대한 장이었다. 건축물이라는게 환경과 인간 사회활동의 혼합적 결과물이지만, 그 중 특히나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건축물의 변화에 대한 내용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잘 설명해 주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종교가 분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종교 건축물의 구조 변화 동인을 '예배행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제사 vs. 설교' 라는 종교 행위의 차이가 가져온 건축물 구조의 변화.

구약시대(유대교)에는 주요한 종교적 행위가 제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유대교의 초기 예배 형식은 구약시대의 모세라는 인물이 틀을 만들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지시를 받고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교회의 첫 번째 유형인 모세의 장막이 나온다. 모세는 이동하면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디자인하였는데, 그 구조는 장막을 이용해서 담장을 치고 그 안에 텐트를 치고 또 다시 그 안에 커튼을 쳐서 공간을 마당, 성소, 지성소라는 세가지로 구분한 것이었다 . 마당은 담당과 텐트사이의 공간으로 이 공간에는 물두멍이라고 제사장이 손을 씻을 수 있는 커다란 물동이가 있었다. 그다음 공간인 텐트안의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보다 더 안쪽에 위치한 성궤가 있는 지성소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으로서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소는 희생물의 피를 흩뿌리는 제사 공간과 하나님이 거하는 텅 빈 공간으로 분리 구성된 것이다. 

이렇듯 유대교의 교회라는 것은 소수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던 것이 예전의 공간이었기에 대규모로 집회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과거 모세의 성막이다. 

기독교 교회 건축 양식이 크게 변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이다. 신약시대(기독교)에 와서 가장 큰 변화는 제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가 희생양이 되어서 한 번의 십자가형으로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이는 건축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예수가 전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다 수행했기 때문에 기존의 제사 행위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제사를 대신하는 예수의 업적과 교리, 스토리들이 전파되어지는 설교가 대신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바뀌게 되면 건축의 외형도 바뀌는 법이다. 제사에서 설교로..대형집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필요에 따라 교회 건축은 더욱더 대형 건축물화 되어 갔다.

Monday, March 18, 2024

[서평] 애나 번스의 『밀크맨』

애나 번스의 『밀크맨』 은 1970년대 북아일랜드 독립투쟁 동안 북아일랜드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18살 젊은 여성이 겪은 일을 그리고 있다. '물건너'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려는 북아이랜드 독립운동 세력, IRA가 활동하던 시절. 종교(개신교 vs. 카톨릭)와 정치(연합주의 vs. 독립주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던 그 때 그 상황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며, 심리적/정서적으로 칼날위에 선 듯한, 보이지 않은 억압구조의 그물망이 촘촘히 지배하는 사회. 이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쓴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억압과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은 마치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 장을 떠올리는 그러한 상황이다. 단어나 말로는 언뜻 대립어를 나열하여 쉽게 나눌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 그러한 시공간속에서는 작가가 이야기 하듯 "사람마다 민감한 정도가 다르고 공동체의 역사를 함께 겪어왔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삶의 이력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도화선이 되는 일이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대적이고 순간적인 지평에서 날 것인 삶과 그 삶에 대한 불완전한 정신반응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상황은 개인적 수준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소설속에서 화자가 공동체로 부터 커다란 비난과 질타는 받는, 공동체의 '상도'를 벗어난 행위로 지목된 "걸어가면서 책읽기"; 그런 행위는 소름끼치고 변태적이고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일이며, 자기보호 본능에도 어긋나며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이며 공공정신에도 위배되는 행위로 규정된다. 

왜 그럴까? 폭력과 상호 감시 체계 속에서는 공동체의 상도라는 것도 '상도'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모순적이고 희극적인 공동체의 '상도'에 걸맞는 수 있는 상황이 소설속의 한 묘사를 통해서 그려지기도 한다; 

"국가 반대자들이 검은 옷에 복면을 쓰고 권총을 들고 들어와서 불량배나 미성년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술집에는 보통 불량배나 미성년자가 많지만 반대자가 누구를 밖으로 끌어내거나 쫓아내는 것은 못 보았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것이다. 이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시늉이고 매주 꼭 해야 하는 연극이라는 걸 누구나 알았다. 반대자들이 성큼성큼 들어와 위압적으로 둘러보고 무기를 번쩍이며 한바퀴 돌고 나가면, 잠시 뒤에 다른 무리가 들어와 또 한차례 시늉을 했다. 이들은 외국군 그러니까 '물 건너' 나라의 점령군 이었다. 이들도 군장과 군복 군모 무기를 갖추고 몇초 전에 떠난 반대자들을 찾는다고 술집으로 들이닥쳤다. 가끔은 만약 두 무리가 동시에 들어오면 어떤 피바다가 펼쳐질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몇년 동안 금요일 밤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도 한번도 그런 일은 안 일어 났다. 우연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두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연동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금요일 밤이네', 한쪽의 잠재의식이 다른 쪽의 잠재의식에 말을 거는 것이다. '간단하게 가자고. 너희들이 먼저 들어갔다가 나간 다음에 우리가 가면 어때? 다음 주에는 우리가 먼저 들어갔다 나간 다음 너희들이 들어가고' 이런 식이 아니라면 매번 간발의 차로 서로 어긋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두번이 아니라 수백번도 넘게 그런 일이 있어났으니까" 

그러한 시대 그러한 공동체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감내하거나 헤쳐나가야 하는 그 촘촘하고 억압적인 분위기와 폭력의 위험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나"와 "밀크맨" 이라는 북아일랜드 독립주의 반군의 리더(? 밀크맨의 실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명되지는 않는다)와의 불륜의 소문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화자는 그러한 소문에 적극 대응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침묵을 유지하며 무시한다. 그러면서 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폐쇄되고 뒤틀린 공동체내에서 증폭되며 확산된다. 그건 어쩌면 일상적인 폭력과 감시에 항의하는 화자만의 방어기제이다. 마치 책속에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당하는 - '상도를 벗어난',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행위처럼... 자신 주변의 삶에 무감함으로 보호막을 치고 감정을 억누르면서 인식의 한 측면을 의도적으로 뭉개버리려는 방어기제. 현실을 직시하는 객관적 비판적 인식이 아닌 선택적 기억상실과도 같은... 그러나 18세 젊은 여성의 걸으면서 책읽기, 그리고 "밀크맨"과의 불륜 소문은 공동체내에서 '정치적'인 사건이 되어간다. 

그 곳에서는 살인도 '정치적 살인'만 일어날 뿐이다. 평범한 살인은 섬뜩하고 불가해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분류해야할지 모르던 그런 시공간이었다. 

이야기 속에는 두명의 밀크맨이 등장한다. 한 명은 진짜 우유배달부이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수식어가 붙은 밀크맨. 그리고 또 한 명은 화자와의 불륜소문이 퍼진 독립반군 소속의 진짜 이름이 '밀크맨"인 밀크맨. 두 밀크맨은 '물건너' 나라 영국의 관계기관으로 부터 저격을 당하여 한명은 살아나고 한명은 죽게 된다. 아무튼 그 사건의 결과로 화자와 화자의 가족 주변을 둘러싼 엉키고 뒤틀린 하나의 매듭이 끊어진다. 폭력과 죽음속에서도 또 삶은 이어져 간다. 그리고 화자는 "나는 빛을 다시 내 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라며 숨을 크게 내쉰다.

Thursday, March 14, 2024

[서평] 마이클 샌들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 에 대한 짧은 생각

마이클 샌들은 현대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정치/이데올로기 프레임웍을 규정하는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에 대한 재 검토를 요청한다.

능력주의의 신화와 그 위기 ;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부의 양극화. 과거에는 신분이 세습되었지만 이제는 부와 학력이 세습화 되는 사회; 승자의 오만함과 패자들의 굴욕감. 그들 사이에서의 팽팽한 긴장감... 인간사회의 계급구조, 계급적 불평등, 계급간의 갈등. 이러한 현상이 현재 미국이라는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와 함께 진행되어 오고 있고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해결 되지 못할 문제 일 수 있다. 

마이클 샌들이 제시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 또는 보완책은 다음과 같다;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교정 원칙이지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이 아니다. 문제는 기회의 평등을 넘어 조건의 평등을 제공, 보장하는 것 , 그리고 겸손과 겸양의 미덕.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자, 모욕의 감정과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이다" 라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자본의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통제가 아닌, 엘리트 지배계층의 내면의 심리적 해법.. 이는 전형적인 미국 자유주의자(American Liberalist)적인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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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 인식과 해법에 대한 샌들의 입장은 케이스로 토마 피케티의 그것과 비교해 볼 만하다. 샌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불평등의 사례와 계급간의 격차에 대한 근거나 내용은 브랑코 미라노비치의 "코끼리곡선" 사례나 『세계불평등보고서 - 2018 불평등의 수량적 분석』 등에서 충분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와 대안에 대한 인식틀은 약간 다르다. 피케티의 인식틀과 해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모든 나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 불평등한데, 각각의 불평등 체제는 실제 지배계급의 구성도 다르고, 지배계급의 수탈 방식도 다르며, 불평등을 설명하고 합리화 하는 방식도 다르다. 나름대로 그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샌들이 지적하는 미국사회의 "학력주의/능력주의"도 그러한 사회/정치/경제적 불평등을 합리화 시키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무소불위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복지국가, 누진소득세강화, 글로벌자본세. 참여사회주의(노동자참가)" 등의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그 실현가능성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미지수 이다.

하지만 샌들이 제시하는 지배계급의 심리적 도덕률(겸손과 겸양)의 고양이라는 주장과 비교해 보면, 사회제도나 정책을 통해 사회/계급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Thursday, February 29, 2024

[서평] 찰스 맥케이, 『대중의 미망과 광기』 에 대한 짧은 생각

찰스 맥케이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는 대중의 비이성적인 광기를 다룬 책 가운데 가장 고전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인간사회에 큰영향을 끼친 집단적 광기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이 책은 19세기 전반까지 중세와 근세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대중적 광기의 역사적 사례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주요 사례로는 프랑스를 투기 광풍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미시시피계획, South Sea Bubble,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연금술, 종말론과 예언의 미신들, 점성술, 사이비 의학,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독약과 독설, 대중적인 미신, 심지어 결투와 유물수집의 사례까지 제공하고 있다. 특히 책의 앞부분의 3개 장에서는 경제주체의 비합리성과 시장의 비효율성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는 투기와 거품현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군중심리, 집단사고, 문화갈등, 이해충돌 등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역사적 사례를 풍부히 제공해 줌으로써 책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앞 부분 첫 3챕터의 내용; 미시시피계획, 남해버블(South Sea Bubble), 튤립열풍의 이야기는 마치, 에드워드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 의 역사를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 보니, 오히려 『대중의 미망과 광기』 라는 책이 챈슬러 보다 더 오래전인 19세기 중반에 발간된 책인걸 알게 되었다.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라는 책이 챨스 맥케이의 책을 Reference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나 사회이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열병을 앓듯 한꺼번에 미망에 현혹되고 광기와 광신에 사로 잡혀 피가 강물처럼 흐를때 까지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게 물질적인 돈에 대한 욕망이든, 이념적/종교적인 열정이든... 튤립 투기 광풍과 십자군 전쟁, 그리고 마녀사냥의 역사가 그러한 극명한 사례들 아닌가.. 인간의 역사에서 그러한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책은 특히 경제적 투기, 경제주체의 비합리성에 대한 고전적인 책으로 이 책에서 언급된 버블 투기의 사례 이외에 좀 더 이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면 챨스 P. 킨들버거의 『광기, 패닉, 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 라는 책도 함께 연관하여 읽어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