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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27, 2025

2025/04/26 청산도 트레킹

금요일 밤 11:45 양재역에서 출발~새벽 5시경 전남 완도항에 도착~06:00 배를 타고 청산도로 이동~06:50경 청산도 도착하여 트레킹 시작. 

서편제 촬영지 유채꽃 밭 들렀다가 청산도 슬로길 1, 2, 3길을 걷다가 청계리 매봉산에 올랐다. 약 12:30경 트레킹을 마치고 청산도에서 13:00  배를 타고 완도로 나와완도여객터미널 근처 횟집에서 점심. 14:40경 산악회 버스타고 귀경.


2020년에는 자전거를 가져와 홀로 1박2일 돌아 다녔는데, 오늘은 유쾌한 친구 셋이서 함께 하며 약 20km 를 걸었다. 


청산도의 유채, 청보리, 바람, 햇살이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유쾌한 친구들ㅋㅋ


동영상 : https://youtu.be/0C6k_CU3ebY?feature=shared








Monday, April 21, 2025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쉬소서...

내가 갈무리  두었던프란치스코 교황 어록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변두리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된다" ... "교회는 예배교리절차권위에 매달리기 보다는 거리에서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져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울고 어떻게 연민을 느끼는지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 눈물을 흘릴  아는 능력을 앗아 갔습니다


"멈추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세월호 배지 떼시라고정치적 중립을 지키시라는 기자의 말에

타인의 고통에는 중립이 없습니다”...라고 말씀.


 분은 참으로 마음이 따스하신 분이었어..

책, 『인간의 흑역사 Humans』 by Tom Phillips

한줄평: 진지한 주제들에 대한 우스갯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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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도통 알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 중 대부분은 누가 나서서 적어놓지를 않았다. 그리고 나서서 뭔가 적어놓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착각했거나, 미쳤거나, 거짓말쟁이거나, 극단적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그 모두인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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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 놓은 것에 불과... 그렇게 별 생각없이 손쉽게 판단을 내리기 위한 요령 편법을 "휴리스틱 Heuristic" 이라 부른다.

. 기준점 휴리스틱 :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 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 아무런 근거가 없는(심지어 황당한) 특정 기준 숫자를 제시/암시해 주면 그것을 의사결정의 기준점으로 삼는 경향성.

. 가용성 휴리스틱 :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 보다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느는 최신의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자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편향.

.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

. 선택지지편향(자기 판단 합리화) Choice-supportive bias

. 소망적사고 Wishful thinking : 과신과 낙관

. 집단사고. 대세추종

. 집단적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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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바보짓으로 영영 볼 수 없게 된 명소

파르테논 신전
고대 그리스 건축의 정수. 1687년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와 전쟁 중에 화약 창고로 쓰다가 베네치아군이 제대로 한 발을 쏘는 통에 태반이 날아갔다.

아르테미스 신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기원전 356년 헤로스트라투스라는 관심 종자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불태워버렸다.

테네레 나무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장소에 서 있는 나무로 유명했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선 반경 400킬로미터 내의 유일한 나무였는데, 1973년에 술 취한 트럭 운전사가 용케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바미안 석불
아프가니스탄 중부에 보존되어 있던 높이 50미터가 넘는 웅장한 석불. 2001년 탈레반 정권이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박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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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끔찍한 사건의 배후에는 뭔가 치밀한 고도의 기획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오판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거듭 저지르는 실수다.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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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란 멀리서 바라보면, 제국들이 흥했다가 망하고 서로 학살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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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 함대의 규모는 300척에 달했고, 그중에는 돛대가 아홉 개 달린 거대한 배들도 있었으니, 그런 큰 배는 이후 수백 년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함대에 속한 선원은 3만 명에 달했다. 일부 배는 마치 해상 농장처럼 채소를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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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은 몇 세대 후에 파벌 싸움과 내분에 휘말려 분열됨으로써 제국의 전형적 말로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일부 지역에서 계승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통치하던 부하라 토후국이 1920년 볼셰비키에게 정복되면서, 칸 왕조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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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미즐리: 엔진 녹킹 현상을 방지할 유연휘발류로 납빛 세상을 만들고, 염화불화탄소chlorofluorocarbon, 약자로 CFC 가스로 오존층을 파괴하는데 큰 역할을 한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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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인도사』

책을 읽다 몇 가지 발췌...

1. 비베다 시대. 일명, "축의 시대"

기원전 6세기 전후에 세계 여러 나라는 사상·가치적으로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중요한 철학·종교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색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도가 사상의 노자가 등장했다. 이 같은 사건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전통적인 브라흐마니즘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상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정통주의 사상으로 분류되는 이 같은 사상들은 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브라흐마니즘이 주장하는 제식주의와 희생제 의식 그리고 엄격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부정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교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은 각 개인은 신과 같은 외적인 절대자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브라흐마니즘의 사상으로 더욱 고양되었다. 

2. 아소카왕

그는 99명의 형제들을 살해한 뒤 왕이 되었다.... 
그리고 킬링가 전투에서의 참혹한 학살 후에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었던지,,, 

“보라! 이처럼 죽어 나자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을까? 정의, 진리, 법, 과연 어느 것이 그들의 목숨을 이렇게 내던질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래, 적어도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무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여기 그들보다 더 많은 브라흐만 사제와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수행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분노한 병사들의 눈먼 칼과 창끝에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 필요조차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전쟁은 위정자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대해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정의와 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소수 권력가들의 끝없는 욕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 평생을 몸부림칠 뿐이다.” 

3. 그리스영향을 받아 인격신화 되는 붓다

원래 산치탑과 같은 아소카 시대의 작품 속에서는 붓다에 대한 인물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신 그 부분에 깨달음 혹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나무 등을 조각하거나 아니면 그냥 빈 채로 두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예술 양식 속에서는 불교의 그림에 붓다와 보살에 대한 인물상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조각 분야에서도 붓다의 형상이 나타났다. 아울러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던 붓다 역시 점차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되면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불교의 종교화를 재촉했다. 불교의 신성화 작업은 힌두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개인의 지적 노력에 의한 깨달음과 더불어 신에 대한 헌신과 복종을 중요시하는 박티 종교의 출현을 재촉했다. 

4. 흉노족에 의한 민족의 대이동 ; 흉노 - 오손족 - 월지 - 스키타이... 박트리아의 멸망

원래 중국 서북부 감숙성의 서쪽 끝에서 돈황에 걸쳐 살고 있던 월지족이 흉노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자 이를 계기로 스키타이계의 샤카족 역시 남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간다라를 비롯한 카슈미르 지방으로 흩어졌고 얼마 후 다시 흉노에게 쫓긴 오손족이 월지족의 새로운 영토를 침범하면서 그들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박트리아의 왕국을 정복했다. 당시 박트리아에는 토카라족을 비롯한 스키타이계의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토카라족은 모두 다섯 토후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쿠샨족이다. 이 쿠샨족은 기원 전후 무렵부터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나머지 네 토후들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쿠샨 왕이라 일컫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변방 지역에 거주하다가 월지족에게 쫓긴 스키타이인들이 박트리아 왕국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메난드로스가 죽고 나서 월지인들에게 쫓긴 스키타이인들의 침입으로 사분오열되다가 결국은 스키타이 계통의 샤카족에 의해 기원전 75년경에 멸망했다. 

5. 굽타왕조

굽타 왕조는 인도 사회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굽타 왕조 시대에 브라흐마니즘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이즘의 형태로 부활되었고, 둘째는 이민족의 유입이 보다 활발했으며, 셋째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전체적인 경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부와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상인 계급의 지위를 신장시켰으며 인도 문화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왕권의 강화라는 지배 계급의 생각과 맞물려 부활하기 시작한 힌두이즘은 사회적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 제도를 통해 브라흐만 사제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보다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힌두이즘이 발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굽타 시대의 왕들은 종전의 마우리아 왕조 시대와는 달리 자신에 대한 칭호를 단순히 ‘라자’라는 표현에서 벗어나 왕중왕 혹은 신의 화현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칭호의 격상을 통한 왕의 신격화 혹은 왕권의 절대화는 불교적인 사고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교는 애초에 출발부터 만민 평등을 통한 카스트 제도의 폐지와 동물희생제를 반대하는 불살생의 법으로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자비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궁극 목표인 깨달음(열반) 역시 신과 같은 외부의 도움 없이 철저하게 진리(법)와 자기 자신에 대한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신봉했던 마우리아의 아소카 왕 시대에는 굽타 시대에 나타난 왕권의 신성화와 같은 작업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굽타 왕조는 이를 위하여 신을 인정하는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것 또한 필연적인 일이었다. 

6. 힌두이즘의 정착
    
굽타 왕조 시대는 고대의 베다 종교인 브라흐마니즘이 현대적인 형태의 힌두이즘으로 완전하게 정착한 시기이다. 브라흐마니즘이 내부적인 변혁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이즘이라는 독특한 종교 형태로 정착함으로써 인도 사회에 더욱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제식과 희생제 중심으로 진행되던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은 제식 절차의 복잡함과 과다한 비용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기에는 다소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문헌을 보면 일반인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희생제가 거행되었다. 제식 절차 역시 전문적인 사제들이 아니면 쉽게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이로 인해 브라흐만 사제들의 제식에 대한 독점은 부의 축적과 부패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자이나교 등 신흥종교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흐마니즘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제식 절차의 실행만이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며 만일 의식 가운데 단 한 글자의 잘못만 생겨도 무시무시한 재앙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브라흐만 사제들의 권위를 신성화하려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일반인들이 브라흐마니즘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행위가 그 결과를 낳는 경우는 그 행위 속에 행위하는 자의 개인적 욕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결과를 예상한다는 것은 바로 그 속에 개인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욕심 없는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결과를 바라지 않는 행위이다.”
    “그럼 결과를 바라지 않는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무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가 당연히 행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크샤트리아의 의무는 전쟁에서 싸우는 것이다. 크샤트리아는 자신의 싸움에 왜라는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된다. 왜라는 이유를 붙이는 것은 바로 거기에 개인의 욕망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결과는 신이 결정한다. 크샤트리아의 의무는 오직 전쟁에서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크샤트리아가 자신의 의무를 다해 전쟁에서 싸우면 그 결과로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결과가 아니라 개인의 욕심일 뿐이다. 의무에 대한 결과는 오직 신만이 결정한다. 설령 그가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더라도 그가 진정으로 크샤트리아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면 신은 반드시 그를 구원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결과를 낳지 않는 욕심 없는 행위이며 바로 의무의 참모습이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바로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바가바드기타》의 이 같은 내용은 굽타 왕조의 왕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왕권을 절대화할 수 있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요소였다. 

7. 고대 남인도 왕국

고대 인도의 남쪽 타밀지역에는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왕국이 존재했다. 판드양와 체라 왕국은 로마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한편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역과 교류속에서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체라왕국의 무지리스(크랑노르)에 2개연대를 파견했다. 로마군대는 이곳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원을 세웠다.

8. 하르샤왕과 현장

종교에 대해 관용적 정책을 취한 하르샤 왕은 5년마다 한 번씩 프라야그에서 각 종교의 승려들을 모아 종교 집회를 거행하였다. 이 집회의 첫째 날은 붓다가, 둘째 날은 시바가, 그리고 셋째 날은 태양신이 예배되는 등 모든 종교의 신들이 공평하게 경배되었으며 불교도, 브라흐만교도, 자이나교도 등 각 종교 간에 공개적인 토론이 거행되었다... 또한 그는 중국 승려 현장의 인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나우즈에서 집회를 가졌다. 현장에 의해 주되된 이 종교 집회에서는 24일간에 걸친 종교 토론이 행해졌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도인들은 대략 9세부터 30세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때로는 평생 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물론, 특정 계급에 한정된 이야기겠지만...) 대부분 교육 내용은 종교적인 내용이었으며 주로 구전으로 전수되었다.

9. 델리 술탄 시대의 우르두어

우르두어는 힌두어에서 파생하였는데, 우르두는 튀르크어로 '군대의 병영' 을 의미한다. 튀르크인들이 인도 용병을 고용하면서 그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언어이다. 우르두어는 힌두어의 문법 바탕에 페르리아어, 아랍어, 터키어, 산스크리트어 등에서 필요한 어휘를 빌어다 만들었다. 하지만 우르두어는 그 후 무굴제국 시대에 일상의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북인도 일대와 데카의 일부 지역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의 모국어로 쓰이고 있다.

10. 무굴제국의 악바르

 악바르는 자신이 경건한 이슬람교도였던 만큼 술의 판매를 금지하였다... 악바르의 다른 아들들이 모두 악바르 생전에 이미 술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큰 아들 자항기르는 자연스럽게 왕위 를 계승할 수 있었다.

11. 샤 자한과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

샤 자한은 비록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말년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샤 자한 자신이 아버지에게 저질렀던 반역에 대한 업보였는지는 몰라도 자식들의 왕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657년 샤 자한은 중병에 걸려 더 이상 국정을 보살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국정을 대신할 만큼 장성한 아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형제 간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이 바로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였다. 그는 1658년 세 형제와 누이를 포함해 그들을 지지했던 무리들을 차례로 물리친 다음 아버지인 샤 자한마저 큰아들 다라 슈코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그라 성에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올랐다.

악바르 이래 무굴 제국의 관리들 가운데 대다수는 힌두인들이었으며 제국 내의 일반 행정은 대부분 그들의 손에 의지했다. 아우랑제브는 이들마저 모두 이슬람교도로 대체시키도록 명령했다. 이처럼 편협한 종교 정책은 결국 많은 힌두교도의 반항과 반란을 야기시키고 결과적으로 무굴 제국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델리 술탄 시대와 달리 무굴 제국에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소유하는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무굴 제국이 무굴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무굴인뿐만 아니라 투란, 타지키스탄, 코라산, 이란인 등이 모두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굴 제국은 초기부터 편협한 인종주의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Saturday, April 19, 2025

2025/04/19 진안 마이산 종주 트레킹

마이산을 달리다. 도란도란 친구들과 벚꽃과 은수사 배꽃이 아름다운 진안의 마이산 산보. 07:10 양재출발. 서울은 약간의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였으나 진안은 아주 화창한 날씨. 10:30경 마이산 남부 주차장에서 내려 본팀(A, B 조)과 소수의 종주 트레킹조로 나뉘어 산행 시작. 16:30 산행 종료후 마이산 북부 주차장 조대감네 전주회관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귀경.

Strava 기록 : https://strava.app.link/rfpFgMmKISb


인스타그램 사진 :

  https://www.instagram.com/p/DIphPU-y5VH/?igsh=NDhyb3gzdGVnNHp0

  https://www.instagram.com/reel/DIphXXgScZw/?igsh=MWFkeTZvcTh1NWRwOA==


유투브 : https://youtu.be/nJWzJBsP690?feature=shared

Friday, April 18, 2025

Ego non baptiso...

"Ego non baptiso te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ritus Sancti-sed in nomine Diaboli"



Sunday, April 06, 2025

2025/04 장수 트레일 레이스 Jangsu Trail Race

2025/04/05 Jangsu Trail Race

친구 (bk 70k & kh 38k-p) 뛴다하여, 어차피 고향에서의 행사이고 또 고향집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 내려가는 김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장수 트레일 레이스 서포터즈로 참여 하였다(친구들 집에서 재워 주고 트레일 러닝 코스 중 38k만 함께 뛰어 줌)


07:00 장수종합운동장 출발 오후 16:40 종료차가운 바람과 비에 젖어 오돌오돌 떨며 산길을 달렸다70k  결국 악천후로 한밤 중에 경기가 중단되었다.


Strava 기록 : https://strava.app.link/z3UW2rGzESb


영상기록 : https://youtu.be/MY8zm45CV-U?feature=shared

Friday, April 04, 2025

책,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Judith Schalansky 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상실과 기억에 관한 책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갑작스런 부재와 동시에 남겨진 시신과 주인 잃은 소유물들을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가 세월이 흐르면서 답변을 요구하고 행동을 유발하였으며 현존하는 것 보다 잃은 것들에 더 가치를 두는 인류의 행동양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실과 부재를 채우려 한다. 

상실과 부재를 채우는 다양한 방식들; 망각, 공허, 상상, 상징, 의례, 기념물 등...

그렇게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방편으로서의 아카이브, 박물관, 도서관, 동물원과 자연보호구역들은 어찌보면 관리되는 공동묘지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작가는 대상의 부재로 인해 생겨나는 갑작스러운 공백과 그 남겨진 유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거와 다양한 문화속에서 폭넓게 관찰한다.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양의 투아나키 섬, 멸종된 카스피해 호랑이, 신화속의 유니콘, 살아 생전 단 한 채의 건물도 짓지 않고 폐허에만 매달렸던 건축가 피라네시, 복원 불가능한 무르나우의 영화와 유령처럼 맨하튼을 떠도는 그레타 가르보, 단편적 조각만으로만 남아 있는 사포의 싯구들, 포메라니아의 불타버린 성,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의 사라진 교리서들, 한때 그라이프스발트 항구를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어 주었찌만 이제는 말라버린 리크 강, 숲속에 자신만의 백과사전을 설치한 외톨박이 남자, 철거된 동독의 공화국궁전, 달과 사랑에 빠져 먼 미래에 달에 살아가고 있는 월면학자의 이야기들은. 작가를 만나 생생한 목소리를 얻고. 각각 한편의 몽타주처럼 어렴풋이 완성된 얼굴을 갖게 된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이라는 책 역시 뭔가를 보존하고, 과거를 눈 앞에 되살리고, 잊힌 것을 불러내고, 침묵하는 것을 말하게 하고, 그 상실을 애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라는, 그리고 이 책 역시 언젠가는 소멸이 불가피하리라는 작가의 말을 기억하자.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에는 많은 공백과 생략이 존재한다. 사포의 詩에 대한 작가의 언급처럼, 그 공백과 생략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환상을 시뮬레이션 하며. "모든 텍스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나 기존의 단어에 투항하지 않는 감정들에, 규정되지 않은 거대한 감정의 왕국을 열어준다".

책,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책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열쇠장이가 주는 교훈"의 이야기 이다. 

어떤 사람이 열쇠를 챙기지 않은 채 문을 잠가버린 탓에 집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정식 허가를 받은 열쇠공을 불러왔다, 그 열쇠공은 그 사람이 그렇게 열려고 애써도 열지 못한 문을 불과 몇 초 만에 쉽게 열어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고 쉽게 문을 여는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깜짝 놀라며 감탄을 하자, 열쇠공은 자물쇠는 정직한 사람들을 정직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게 하려고 달아 놓은 장치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 중 1퍼센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지요. 또 1퍼센트는 어떻게든 자물쇠를 열어 남의 것을 훔치려 합니다. 나머지 98 퍼센트는 조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동안에만 정직한 사람을 남습니다. 이 사람들은 강한 유혹을 느끼면 얼마든지 정직하지 않은 사람 쪽으로 옮겨 갑니다. 당신이 아무리 자물쇠로 문을 꽁꽁 걸어 잠가도 도둑이 털려고 마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당신 집에 침입할 수 있습니다. 자물쇠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 때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대체로 정직한 사람들의 침입을 막아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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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상식 밖의 경제학 Predictably Irrational』 이란 책에서 언급했던 내용 중의 하나 인 "본인의 사소한 부정행위에 관대한 심리"에 대한 심화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심리학 실험들을 통해, 인간 심리와 행동의 비합리성을 확인시켜주는 책이다. 

모든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며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의 이익에 반하거나 사회적 공정의 관점에서 어긋나는 부정행위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정행위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부정행위의 수준을 낮출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도덕적 건강을 개선할 수 있을지 탐구하고, 또 그에 대한 희망적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다.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안에 그리고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부정직함의 실체를 정확하게 바라볼 때 현실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적 이슈가 된 기업이나 거물급 인사들의 커다란 부정행위 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저지르는 사소한 부정행위에 주목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부정행위를 저지르지만 특정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사소한 수준내에서는 부정행위들; 가령, 사무실에 비치된 사무용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기 위해 집에 가져간다 라든지, 야근 수당을 더 받기 위해 시간을 부풀린다 라든지, 회사에 청구하는 비용 중에 개인적 용도로 쓴 영수증을 첨부 한다 라든지 하는 행위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과 사례를 들어 들려 준다. 

사람들이 이러한 사소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심리의 바탕에는 대부분 자신은 꽤 착한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주 조금씩 부정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이득을 보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합리화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규모로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스스로가 나쁜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다. 사소한 부정행위를 저지르되 본인이 생각하는 특정 경계, 기준점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너그럽다. 

이러한 개인적 내면의 윤리적 기준은 그 기준점이 모호하다. 그러므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주관적인 기준이 아닌 사회적 규범과 윤리적 기준이 요구된다. 개인의 도덕적 각성 장치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 장치란 무엇인가? 열쇠장이가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관련글 : 『상식 밖의 경제학 Predictably Irrational』 https://uquehan.blogspot.com/2025/02/predictably-irrational.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