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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ne 03, 2026

책, 『기술 봉건주의』 by Cedric Durand

 기술봉건주의; 같은 제목과 주제로 그리스의 경제학자 야니스 바로파키스(Yanis Varoufakis)의 테크노퓨달리즘 Techno-Feudalism 이란 책이 있다. 기술봉건주의란 소수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진입장벽이 높은 독점적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이익(상품생산을 통한 이윤이 아닌 지대)을 독점하여 과거 봉건사회의 영주들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플랫폼 사용자들이 그 플랫폼의 '자발적' 농노로 자처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프랑스 저자인 세드릭 뒤랑도 이러한 기술봉건주의 특성에 대해 동일한 인식과 설명을 보여준다.

저자 Cedric Durand는 기술봉건주의 사회란 "플랫폼"과 "데이터"라는 새로운 영지에서 사용자(농노)들은 강압적인 방식의 착취가 아닌 자발적인 자기착취의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정보제공에 참여하고, 플랫폼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은 수많은 사용자들이 제공한 데이터와 정보를 지식화, 자산화 하여 독점적인 지대를 수취하며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체계라고 설명한다. 특히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지대경제 형성을 가속화하는데, 이는 정보(데이터)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에 의한 정보와 지식의 통제 및 독점화가 그 '(경제적)가치'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체 또는 생산양식으로서의 "기술봉건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의 적절성에 대해 깊게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대사회의 특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나 논쟁보다는, 저자가 제기한 질문을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우리는 영지화된 플랫폼을 떠날 수 있을까?"

전망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사용자(농노)들은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영지를 쉽고 자유롭게 떠나지 못할 것이다. 속박되어 살아온 영지에서의 삶과 관계를 떠나기 위한 '이주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시대의 농노처럼 기존의 영지를 벗어나 찾아갈 미개척의 새로운 땅 자체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기존의 영지를 벗어나면 바깥은 또 다른 영주의 땅이다), 기존의 영지를 탈출하는데는 생명을 담보로 해야하기  때문이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의 글에서도 같은 인식의 흐름을 볼 수 있다 ; "구조를 따지면 이 사회는 중세 봉건 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농노의 처지예요. 페이스북을 비롯한 디지털 영주들은 우리에게 농지를 주면서, 너희가 무료로 받은 땅을 일궈라, 라고 말해요. 그리고 우리는 미친듯이 그 땅을 일구죠. 결국엔 영주들이 와서 농작물을 가져갑니다...우리는 서로 소통해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죠. 하지만 영주들은 우리의 소통을 기반으로 돈을 법니다. 또 정보기관은 우리의 소통을 감시해요. 이 시스템은 극도로 효율적입니다. 저항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안에서 살기 때문이에요... (저도) 제가 연결망에 속해 있지 않으면, 다들 그렇듯이 저도 불안해집니다. 당연하죠. 저도 피해자예요. 이 모든 디지털 소통이 없으면, 저는 교수이자 저술가로서 제 직업을 수행할 수 없어요. 너나 없이 누구나 매여 있고 묶여 있습니다." - [유감스럽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Zeit Wissen>, 2014년 9월.

문득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어디로 가서 살란 말이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어디서 부터 잘못 됐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떠날 수 없다면, 우울한 테크노 디스토피아라는 전망보다는 영지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희망속에 사는게 더 낫지 않을까?

Tuesday, June 02, 2026

책,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by 한병철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은 독일에서 살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의 여러 단편적인 글들과 대담을 엮은 책이다. 책의 제목인 "오늘날의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글은 2014년 9월 3일 남독일신문 Sueddeutsche Zeitung 에 발표된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 곧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 맞선 전지구적 저항의 가능성들을 열망했다. 그는 다중 Multitude, 곧 연결망을 이룬 저항 및 혁명 군중을 호출했다. 하지만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의 지배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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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벌인 논쟁을 언급하면서 오늘날 혁명이 더는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과거 규율 및 산업사회의 체제 유지 권력은 억압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는 공장 소유자에게 야만적으로 착취당했다.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타자 착취는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 경우에는 지배적 생산관계를 뒤엎을 혁명이 가능했다. 이런 억압체제에서는 구체적인 적이 눈에 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 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적도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이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 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 자신을 문제시한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논리는 감시에도 적용된다.19 80년대에 사람들은 인구조사에 맞서 더 없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심지어 어느 관청에는 폭탄이 터졌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뜻을 거슬러 그들에게서 정보를 빼앗으려는 국가가 바로 적이었다. 당시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인구 조사항목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직업이나 학력, 출근거리 같은 필수 기재항목들은 거의 가소롭게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과거 어느때 보다 더 많이 내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의지로 발가벗는다. 바로 이 느껴지는 자유가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유로운 자기 노출은 자유로운 자기 착취와 동일한 효율성 논리를 따른다. 

현대사회의 구조를 따지면 중세 봉건체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농노의 처지와 같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디지털 영주들은 우리에게 농지를 주면서, 너희가 무료로 받은 땅을 일궈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미친 듯이 그 땅을 일군다. 결국엔 영주들이 와서 농작물을 가져간다. 우리는 디지털 영지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영주들은 우리의 소통을 기반으로 돈을 번다. 또 정보기관은 우리의 소통을 감시한다. 이 시스템은 극도로 효율적이다. 저항은 없다. 왜냐하면 우기를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 살기 때문이다. 너나 없이 누구나 매여 있고 묶여 있다. 

무엇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자기 자신에 맞서? 사람들은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 만한, 바깥을 향한 공격은 자기 공격에 밀려난다. 연결망을 이뤄 협력하는 다중, 지구적인 저항 및 혁명군중으로 봉기할 만한 다중은 오늘날 없다. 

공유와 협력경제? 공유경제가 자본주의 종말과 지구적인 공동체 지향 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공유경제는 결국 삶의 총체적인 상업화로 이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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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답은 없다;  마냥 Godot를 기다리며 사는게... 인간의 삶 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