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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01, 2025

책,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by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는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끝난 에도(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 백성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지에 주목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과 그들이 아팠을때 어떻게 병을 고쳤는지에 관해, 그리고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민이 과거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어떻게 입신양명의 길을 찾았는가에 관해서 의학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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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막부시대를 열면서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던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정치, 군사, 경제, 과학, 문화적으로 퇴보했다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에도막부시대 일본은 현대적인 국가 이미지의 단일한 나라가 아니라 약 300여 다이묘들에 의해 쪼개져 독립적으로 다스려지던, 약 300여개의 소국가가 공존하던 '하나의 닫힌 세계'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분할된 닫힌 세계에서 당시 막부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그들의 위계를 영지에서 쌀이 얼마나 생산되는 가를 가지고 정했으며, 세금도 화폐나 다른 물건이 아닌 쌀로만 수취하는 구조였다. 농민들은 생산량의 1/3은 황실과 막부에 1/3은 번주(다이묘)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들간의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들면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굶어 죽는 계층은 바로 쌀을 생산하는 농민 계층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로 기근이 발생해서 도시에서도 쌀값이 오르면 지방에 영지가 있는 다이묘들은 자기 지역의 쌀을 대도시로 수출해서 차익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면 쌀을 생산하는 지방에서 정작 비축미가 부족한 상황이 반복되고 그러다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기근이 일어나서 농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구조에서 영주(다이묘)-무사(사무라이) 집단 vs. 피지배 백성들 사이의 계급갈등이 심화되면서 에도시대에는 '하쿠쇼잇기(百姓一撥)'라는 농민봉기가 2,809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급적 대립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 농촌이 상업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경제력에 따라 분화한 상층농민과 하층농민의 대립구도로 변화하면서 '무라카토소도(농촌소동)' 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닥치면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떠도는 유랑민이 되거나, 입을 줄이기 위한 영아살해, 기아(아이 버리기) 등의 습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초한 인재이기도 했다. 에도막부는 유일한 유럽 교역국인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점하면서 도호쿠지역의 국제무역을 막는 한편, 전국 다이묘들의 격(格)을 쌀 수확량으로 측정하고 세금도 쌀로 수취함으로써 도호쿠 지역의 번들이 쌀농사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근본적으로 없앴다. 그리고 16~17세기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자체 건조하였던 일본이 막부의 원양 항해 금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형 배로 연안만 운향하게 됨으로써 수송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에도 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피지배민이 일본 바깥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원양 항해용 배의 건조도 금지했으며, 그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 수록 더 나온다는 말처럼 쥐어짜고 착취하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초래한 퇴보 상태에서도 일본 피지배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를 이루어 나갔다. 

중세까지는 대가족과 예속민이 넓은 농지에 동원되어 영지를 경영했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면서 소농체제로 농업생산구조에 변화가 발행하기 시작한다. 에도시대에는 소가족이 자신의 좁은 농지를 근면하게 경작하면서 농업생산량도 늘리고 평균 수명을 높여 가게 된다. 가족구성원도 기존의 대가족 체계에서 4~5인 가족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1754년에 작성한 <아시 도잔 상서>에  50~60년전, 즉 1600년대 말쯤까지는 집마다 자녀를 5~8명 낳아 길렀는데, 요즘에는 한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르지 않습니다"라는 세태 한탄의 기록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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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만난 흥미로운 내용은; 

1.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지금은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라고 당연시 되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 사람이 인구의 상당수에 달했다는 사실. 특히 하층 예속민일 수록 겨우 끼니를 잇는 수준으로 삶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기는 불가능했다. "하야미 아키라가 현재의 고쿠라 지역에서 1622년 작성한 인구 조사 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6~50세의 예속민 여성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전체의 8.7%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서도 유사한데, "1630년 경상도 산음현 호적에 따르면 상민 가운데 27.3%가 1인가족이었고, 천민 가운데 32.8%가 1인 가족이었다". 소위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2. 아프면 의사를 찾는 습관의 시작...

중부 일본의 시나노 지역에서 1760년에 작성된 가훈서인 <가훈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몇 명 있더라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면 안된다. 장남은 집안을 잇게 하고, 둘째 부터는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가 되도록 가르쳐라". 많지 않은 재산의 장자상속제도하에서,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어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계급에 편입/입신양명 할 수 없던 둘째 이하 자식들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당시 의사가 되려는 자중에는 의사 집안 출신자 이외에도 농민, 떠돌이 무사인 로닌, 떠돌이 종교인인 슈겐, 신사를 관리하는 가누시 등이 있었다. 빈농층은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경제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각번과 도시에 의사학교가 다수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고, 의사면허를 주면서 의사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한다. 

1706년에 작성된 시나노 지역의 우에다번 99개 마을을 조사해서 작성한 인구 통계사 <우에다번 마을 명세장>에 따르면 "종교 관계자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고, 말을 치료하는 마의가 12명, 마을 의사는 3명"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1820년대 나카조 다다시치로가 자쓴 <견문집록>에는 "옛날 덴메이(1781~1789) 연간에는 지역거점인 마쓰시로 이외에 마을 열 곳당 한 명 비율로 의사가 있었지만, 지금(가세이 연간)은 의사가 마을마다 한사람씩, 또는 한 마을에 두세 사람이 있기도 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비추어 보았을때 1706년경에는 마을 33개당 의사 1명이었는데, 1780년대에는 마을 10개당 의사 1명, 19세기 전기에는 마을 하나당 의사 1명이 존재하게 되었응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의사의 숫자가 늘고 시골 마을 마다 의사가 있게 되면서 예전에는 병이 나거나 아프면 무당을 찾거나, 그럴 경제적 능력도 안되면 하는 수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아프면 의사를 찾는 환경과 습관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

책, 『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 by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는 덴노(천황)나 막부의 쇼군 중심의 일본사가 아닌, 각 권마다 주제어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 전쟁과 바다는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 이후 동북아시까지 이르런, 무력/폭력을 동반한 해상무역과 카톨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16~117세기의 일본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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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개척하던 대항해 시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등의 유럽국가들은 전 세계에서 군사력을 앞세워 무역을 전개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유럽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이 최신식 무기와 상업,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앞세워 인도양을 휩쓸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맞닦뜨린 것은 명청시대 중국과 일본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거침없는 무력을 행사하며서 폭력과 학살로 학살로 지배하던 것과는 다르게, 당시 중국과 일본을 군사력으로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 하자 '조용히' 무역에만 종사하는 모습을 보인게 된다. 

일본이 전국시대에서 에도막부시대로 넘가는 시기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이 일본 규슈지역에 무역거점을 마련하면서 일본은 유럽 문명과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를 통해 중화 문명 이외의 또 다른 거대하고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이 중화 문명 단 하나뿐인 시대에서 중화 문명과 유럽 문명 가운데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히 선택할 수 있는 상대주의 시대로 바뀌게 된것이다. 일본은 중화문명과 유럽문명의 경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16~17세기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운데 앞의 두 사람,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럽으로 부터 새로운 세계관과 군사기술을 배워 중화 문명을 뛰어 넘고 나아가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러한 해외 확장의 시도의 첫발이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였던 대륙 정복 계획은 한반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정치/경제/군사적 한계에 부딪쳤고 도요토미가 죽으면서 야망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거대한 배와 조총, 대포를 가지고 전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고 있는 유럽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명나라, 조선과의 화해를 통해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한 원인과 배경에는 새로 권력을 잡고 막부체계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내부의 안정적인 지배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문명과의 접촉으로 전파된 카돌릭의 위협도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서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일본안의 덴노나 쇼군보다 바다 바깥 로마에 살고 있는 교황에게 충성하는 주민이 수십만(20~30만)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통제 바깥에 놓여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본인 마을에도 일본인 수십만명이 살고 있었던 상황이라, 당시 일본 국내 상황에 불만을 품은 피지배층이 유럽의 침략에 호응해서 내부로부터 봉기하거나, 동남아시아에 나가 있는 일본인들이 유럽 세력을 안내해 일본을 침략할 수도 있다라는 불안감, 그리고 일본지역 내부적으로 카톨릭 세력 vs. 불교/신도 세력간에 종교전쟁을 방불케 하는 갈등으로 인한 충격과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유럽인들이 아프르카에서 노예로 잡은 흑인들도 와 있었고, 오늘날 멕시코에 해당하는 누에바에스파냐를 스페인이 식민지로 삼았다는 정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도쿠가와 막부는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하고 일본내의 외국인 카톨릭 신부/선교사들과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추방 또는 처형하면서 일본에서 가톨릭을 지워나가게 된다. 또한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로마까지 항해할 수 있는 유럽식 배 만드는 조선술을 폐기하는 등, 기술적 퇴보를 감수하면서 까지 일본인과 유럽 세력의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하였다. 

참고로, 당시 일본내의 가톨릭 전파와 유럽 문명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단편으로, 1582년 오무라 스미타다, 오토모 소린, 아리마 히루보두 세 가톨릭 다이묘가 후원하여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로마에 까지 갔다가 1590년에 귀국한 네명의 소년사절단, '덴쇼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 과 1613년 센다이를 출항하여 멕시코를 거쳐 스페인과 로마를 방문하고 다시 멕시코와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1620년에 귀국한 '하세쿠라 사절단'의 경우 처럼, 단지 유럽 카톨릭 신부나 선교사의 일본 왕래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직접 로마까지 방문하고 올 정도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유럽의 '종교'는 차단하였지만 '무역'은 분리하여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네덜란드와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서는 류쿠(오키나와)왕국과, 홋카이도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민족과 교역을 하는 네개의 창구 시스템을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유럽 여러나라(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사람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와서 동시대적으로 지식과 물자를 전해주며 자유롭게 교류하던 시절과는 다르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에는 일본이 교류하는 유럽 국가를 네덜란드 한 나라로 제한하고 교역도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으로 제한하는 한편 일본인이 네덜란드인을 직접 만나는 일도 제한하게 된다. 이러한 단절과 쇄국은 같은 시기 유럽을 중시으로 한 전 세계의 움직임과 비교했을때 동시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퇴보였다라는게 저자의 평가이다. 

<<일본인 이야기 1.전쟁과 바다>>는 도쿠가와 막부 초기까지 유럽과의 접촉이 가져온 영향과 일본의 대응을 '조총(무력)과 가톨릭' 라는 키워드로 살펴 보고 <<일본인 이야기 2.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에서는 이후 에도막부 시대의 일본 백성, 그 중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삶과 그들을 치료해준 의료/의학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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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낀 점은; 어느 나라의 역사를 현재의 국가/영토 개념틀안에서 국수주의적으로 볼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관련 세력간 다양한 교류의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해양세력을 중심으로하는 문명간, 지역간 교류/교역의 역사는 고대부터 그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식과 과거사에 대한 지식이 몹시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인식과 접근법은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이야기하였던 내용과 부합한다라고 볼 수 있다. 16~17세기 일본의 역사도 '일본' 이라는 단일 국가의 역사로만 바라보았을 때는 전체적인 모습과 그 실상을 놓치기 쉽다. 당시 유럽 여러나라의 '동인도회사'들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전개한 무력을 동반한 해상무역이 일본에 까지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상호 교류와 교역, 충돌과 전쟁의 역사는 일본만의 역사가 아닌 조선, 명나라, 대만, 류큐, 태국(아유타야),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역사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내용 중 ; 

당시 유럽세력, 특히 포르투칼 상인들이 주요하게 취급하던 상품은 일본인 노예였다라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히라도에서 포루투갈인들은 주로 일본일은 노예로 수출하는데 종사하였다... 히라도에서 수출되는 주요 상품은 은, 철, 조총, 도검류, 노예, 선원, 용병 등이었다... 일본인 노예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까지 수출되었고, 일본인 용병은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에서 스페인과 싸우는데 동원되었다". 

우리가 왜구라고 부르는 해적집단은 사실 중국(명나라)-일본-유럽인들로 구성된 무장해상집단, 밀무역집단 이었다라는 사실도 새롭다. 

아유타야(현재의 태국)에 대한 이야기 중 '일본에서 태어나 동남앗아로 건너가 일본인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아유타야의 정치세계에 입문하여 오캬 세나피묵이라는 관직에 오른 야마다 나가마사라, 그리스 출신으로 야유타야 나라이왕 재임시절에 수상에 임명되었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예수회 신부 콘스탄틴 파울콘, 그리고 콘스탄틴 파울콘의 아내 마리아 구요마르 데 피나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추방당한 카돌릭교도 일본인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었다라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6~17세기 일본과 동남아시아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얽힌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왕조 중심의, 왕들의 연대기 중심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모습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