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는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끝난 에도(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 백성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지에 주목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과 그들이 아팠을때 어떻게 병을 고쳤는지에 관해, 그리고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민이 과거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어떻게 입신양명의 길을 찾았는가에 관해서 의학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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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막부시대를 열면서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던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정치, 군사, 경제, 과학, 문화적으로 퇴보했다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에도막부시대 일본은 현대적인 국가 이미지의 단일한 나라가 아니라 약 300여 다이묘들에 의해 쪼개져 독립적으로 다스려지던, 약 300여개의 소국가가 공존하던 '하나의 닫힌 세계'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분할된 닫힌 세계에서 당시 막부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그들의 위계를 영지에서 쌀이 얼마나 생산되는 가를 가지고 정했으며, 세금도 화폐나 다른 물건이 아닌 쌀로만 수취하는 구조였다. 농민들은 생산량의 1/3은 황실과 막부에 1/3은 번주(다이묘)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들간의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들면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굶어 죽는 계층은 바로 쌀을 생산하는 농민 계층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로 기근이 발생해서 도시에서도 쌀값이 오르면 지방에 영지가 있는 다이묘들은 자기 지역의 쌀을 대도시로 수출해서 차익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면 쌀을 생산하는 지방에서 정작 비축미가 부족한 상황이 반복되고 그러다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기근이 일어나서 농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구조에서 영주(다이묘)-무사(사무라이) 집단 vs. 피지배 백성들 사이의 계급갈등이 심화되면서 에도시대에는 '하쿠쇼잇기(百姓一撥)'라는 농민봉기가 2,809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급적 대립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 농촌이 상업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경제력에 따라 분화한 상층농민과 하층농민의 대립구도로 변화하면서 '무라카토소도(농촌소동)' 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닥치면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떠도는 유랑민이 되거나, 입을 줄이기 위한 영아살해, 기아(아이 버리기) 등의 습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초한 인재이기도 했다. 에도막부는 유일한 유럽 교역국인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점하면서 도호쿠지역의 국제무역을 막는 한편, 전국 다이묘들의 격(格)을 쌀 수확량으로 측정하고 세금도 쌀로 수취함으로써 도호쿠 지역의 번들이 쌀농사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근본적으로 없앴다. 그리고 16~17세기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자체 건조하였던 일본이 막부의 원양 항해 금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형 배로 연안만 운향하게 됨으로써 수송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에도 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피지배민이 일본 바깥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원양 항해용 배의 건조도 금지했으며, 그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 수록 더 나온다는 말처럼 쥐어짜고 착취하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초래한 퇴보 상태에서도 일본 피지배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를 이루어 나갔다.
중세까지는 대가족과 예속민이 넓은 농지에 동원되어 영지를 경영했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면서 소농체제로 농업생산구조에 변화가 발행하기 시작한다. 에도시대에는 소가족이 자신의 좁은 농지를 근면하게 경작하면서 농업생산량도 늘리고 평균 수명을 높여 가게 된다. 가족구성원도 기존의 대가족 체계에서 4~5인 가족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1754년에 작성한 <아시 도잔 상서>에 50~60년전, 즉 1600년대 말쯤까지는 집마다 자녀를 5~8명 낳아 길렀는데, 요즘에는 한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르지 않습니다"라는 세태 한탄의 기록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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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만난 흥미로운 내용은;
1.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지금은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라고 당연시 되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 사람이 인구의 상당수에 달했다는 사실. 특히 하층 예속민일 수록 겨우 끼니를 잇는 수준으로 삶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기는 불가능했다. "하야미 아키라가 현재의 고쿠라 지역에서 1622년 작성한 인구 조사 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6~50세의 예속민 여성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전체의 8.7%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서도 유사한데, "1630년 경상도 산음현 호적에 따르면 상민 가운데 27.3%가 1인가족이었고, 천민 가운데 32.8%가 1인 가족이었다". 소위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2. 아프면 의사를 찾는 습관의 시작...
중부 일본의 시나노 지역에서 1760년에 작성된 가훈서인 <가훈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몇 명 있더라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면 안된다. 장남은 집안을 잇게 하고, 둘째 부터는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가 되도록 가르쳐라". 많지 않은 재산의 장자상속제도하에서,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어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계급에 편입/입신양명 할 수 없던 둘째 이하 자식들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당시 의사가 되려는 자중에는 의사 집안 출신자 이외에도 농민, 떠돌이 무사인 로닌, 떠돌이 종교인인 슈겐, 신사를 관리하는 가누시 등이 있었다. 빈농층은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경제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각번과 도시에 의사학교가 다수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고, 의사면허를 주면서 의사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한다.
1706년에 작성된 시나노 지역의 우에다번 99개 마을을 조사해서 작성한 인구 통계사 <우에다번 마을 명세장>에 따르면 "종교 관계자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고, 말을 치료하는 마의가 12명, 마을 의사는 3명"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1820년대 나카조 다다시치로가 자쓴 <견문집록>에는 "옛날 덴메이(1781~1789) 연간에는 지역거점인 마쓰시로 이외에 마을 열 곳당 한 명 비율로 의사가 있었지만, 지금(가세이 연간)은 의사가 마을마다 한사람씩, 또는 한 마을에 두세 사람이 있기도 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비추어 보았을때 1706년경에는 마을 33개당 의사 1명이었는데, 1780년대에는 마을 10개당 의사 1명, 19세기 전기에는 마을 하나당 의사 1명이 존재하게 되었응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의사의 숫자가 늘고 시골 마을 마다 의사가 있게 되면서 예전에는 병이 나거나 아프면 무당을 찾거나, 그럴 경제적 능력도 안되면 하는 수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아프면 의사를 찾는 환경과 습관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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