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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9,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

신으로서의 신-오성의 무한한, 일반적인, 의인설적 성질을 겸한 본질-이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는 특수 과학의 시점인 일반적인 근본명제가 특수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잇는 의의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본질은 단지 종교의 최상-최후의 받침점이자 결합점에 지나지 않으며, 말하자면 종교의 수학적인 점이다. 인간의 제한성과 허무성의 의식은 그와 같은 본질의 의식과 결합되어 있으나 그것은 결코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회의론자, 유물론자, 자연주의자, 범신론자를 특징 짓는 것이다. 신-적어도 종교의 신-에 대한 신앙이 상실되어 가는 것은 다만 회의론, 범신론, 유물론에 있어서와 같이 인간, 적어도 종교에 있어서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의 허무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으며 또한 취급할 수도 없다(각주1 ; 신 앞에서 인간의 무에 대한 표상 혹은 표현은 종교의 내부에 있어서는 신의 노여움이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이 인간의 긍정인 것과 같이 신의 노여움은 인간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노여움은 신중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은... 진실로 노여워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신은 노하시며, 벌하신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신의 진실한 진심이 아닌 것이다" - Luther)  그것과 같이 종교는 이 허무성의 의식과 결합하고 있는 저 추상적 본질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종교가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은 다만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대상화하는 규정뿐이다. 인간을 부인한다는 것은 종교를 부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의 대상적 본질(존재자)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고 하는 거은 확실히 종교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그런 다른 본질이 동시에 인간적인 본질이라고 하는 것 역시, 물론 더 큰 종교의 관심사이다. 그 본질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 본질의 실존에 관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본질이 인간적인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의 내적 본질성에 관계한다. 만일 그 본질(존재자)이 본질에 의해서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그 본질, 존재, 혹은 비존재는 인간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만일 인간 자신의 본질이 그 본질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어떻게 그 본질의 실존에 대해서 그런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가 있을 것인가?...

인간은 종교안에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의 최고 선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인간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신 안에서 위안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 본질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라면, 그의 평화도 역시 나의 평화와는 다른 것이며, 나에게는 평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그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일 내가 실제로 다른 본질이라면 나는 어떻게 그의 본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모든 것ㅇ은 다만 자기 자신의 영역에 있어서만, 또 자기 자신의 본질 안에 있어서만 평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 안에 평안을 느낀다면, 인간이 평안을 느끼는 것은 신이 비로소 인간의 참된 본질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여기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지금까지 평안을 찾았던 곳, 그리고 인간이 지금까지 자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어떤 다른 낯선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켜야 하며 또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인간은 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도 신성을, 그것이 음미되기를 원하는 방법이 아니고는, 즉 신성이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고찰되는 것과 같은 방법 이외로는 음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각주2 ; Luther) 모든 것은 태어난 장소에서 평안함을 느낀다. 내가 태어난 상태는 신성이다. 신성은 나의 조국이다. 나는 신성 안에서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나는 신성 안에 다만 아버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되기 전에 나는 신성 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각주3 ; 타우레리Tauleri 시대와 그 이전의 설교사의 설교집)

단지 오성의 본질을 표현할 뿐인 신은 그 때문에 종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종교의 신이 아니다. 오성은 단지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본질, 자연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오성인은 게다가 자연에 열중해서 자기 자신을 망각한다. 기독교도들은 이교적 철학자들을 조소한다. 왜냐하면 이교적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 자기의 구원에 관해서 생각하는 대신에 다만 자신들 이외의 사물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이다. 기독교도는 다만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오성은 신과 비슷한 모습, 인간을 고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의 있게 벼룩이나 이도 고찰한다. 오성은 모든 사물이나 본질의 "절대적 무차별성과 동일성"이다.  우리가 식물학, 광물학, 동물학, 물리학, 천문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독교나 종교적 영감 덕택이 아니라 오성의 열의 덕택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성은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본질이며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징적인 규정은 그것이 전혀 인신론적 본질,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인간적인, 그리고 더우기 주관적-인간적인 본질의 배타적인 자기긍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확실히 오성은 또한 인간의 본질도 긍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성이 긍정하는 것은 대상을 위한 대상에 관계하는 객관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본질의 서술만이 바로 과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종교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키고자 원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면, 오성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종교 안에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어떤 것은 종교의 본래의 핵심을 포함한 것이며 또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이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나타나는 신의 오성 규정 혹은 이성 규정은 도덕적 완전성의 규정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은 도덕의 이념이 실현된 것, 도덕률이 인격화되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각주4 ; 칸트조차도 이미 내가 여러 번 인용한 「철학적 종교론에 대한 강의」(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의 치하에서 이루어졌던것이다)에서 "신은, 말하자면, 도덕률 그 자체이지만, 그러나 그 도덕률이 인격화되어 생각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은 신은 또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절대적 본질로서 조정된 것이며 인간 자신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신은 인간에 대해서 신 자신과 같이 될 것을, 즉 "신은 성스러움이므로 너희도 신과 같이 성스러워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은 또한 인간 자신의 양심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신적 본질을 두려워한다든가, 신적 본질에 향해서 스스로를 고발한다든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일 신이 인간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면 인간은 어떻게 신적 본질을 자기의 가장 내적인 사상이나 심성의 재판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의 의식은 모든 의인설적 관념에서 분리된 추상적인 본질의 의식으로서 우리에게 차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이 본질과의 상이의 거리와 간격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정이 없는 의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인격적 허무성의 의식이며, 그리고 더우기 무엇보다도 더 강하게 감수되는 도덕적 허무성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간이나 공간 속에서 제한되어 있는 것과 반대로 신은 전능하며 영원하다고 하는 의식은 나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능은 나에게 나 자신이 전능하라고 명하지 않으며 또 영원성은 나에게 영원하라고 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도덕적인 완전성을 동시에 나를 위한 율법으로서 의식하는 일 없이 그것을 의식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적 완전성은 적어도 도덕적 의식에 있어서는 자연(천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의 완전성이며, 완전한 의지이다. 나는 완전한 의지를 동시에 의지의 객체, 즉 나에게 있어서는 당위로 생각하지 않고는 완전한 의지, 율법과 동일한 의지, 그 자체가 율법인 의지를 생각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의 표상은 단지 이론적-평화적인 표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행위나 모방으로 몰고 가든가, 나와 나 자신과의 분열이나 갈등에로 던져 버리든가 하는 실천적 표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완전한 본질의 표상은 내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나에게 알림으로써 동시에 모든 아첨을 버리고 내가 있지 않는 것을 직관하기 때문이다(각주5 ; 그런데 우리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우리의 자부심에 손해를 주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불가피하게 어떤 사람이라도 겸손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 자시의 본성의 감성적 경향을 도덕률과 비교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 Kant). 종교는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본질을 인간과는 다른 본질로서 대립시키고, 그리고 그 위에 모든 구원과 행복의 원천인 은총으로부터 죄인을 소외시키든가, 증오한다든가, 저주한다든가 하는 인간적 본질로서 대립시킨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와 완전한 본질 사이의 이 갈등으로부터, 죄의식의 고통으로부터, 허무감의 고뇌로부터 무엇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일까? 인간은 죄악의 치명적인 가시를 무엇에 의하여 무디게 할 것인가? 인간은 심정이라 사랑을 최고로서, 절대적인 위력이나 진리로서 의식하는 것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며, 또 신적 본질을 다만 율법이나 도덕적 본질이나 오성의 본질로서 직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는, 상냥한 그 자신 주관적으로 인간적인 본질로서 직관하는 것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성은 율법의 엄격함에 따라서 판단한다. 심정은 순응하고, 공평, 관대, 신중하며 인간적이다. 우리는 다만 도덕적인 완전성을 제시할 뿐인 율법에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므로 역시 율법도 사랑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은 벌한다. 사랑은 죄인도 역시 불쌍히 여긴다. 율럽은 나를 단지 추상적인 본질로서 긍정할 뿐이며 사랑은 나를 현실적인 본질로서 긍정한다. 사랑은 나에게 내가 인간이라는 의식을 부여한다. 율법은 단지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 허무적이라는 의식을 부여할 뿐이다(각주6 ;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였다.... 아버지 살해는 율법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 Seneca. "율법은 우리를 살해한다" - Luther). 율법은 인간을 복종시키고, 사랑은 인간을 자유하게 한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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