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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9,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하여 신 혹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즉 인간은 도덕적 법칙에 있어서는 자기와 다른 존재자로서 자기에게 대립 시키는 자기본질과 사랑의 의식을 통하여 화해하는 것이다. 신의 사랑의 의식,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 인간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의 직관은 신의 성육신, 성육화 혹은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볹서잉 사실적-감성적으로 현현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은 신 자신을 위하여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가 성육신의 근거였었다. 그리고 이 욕구는 아직 오늘날도 종교적인 심성의 욕구로 되어 있다. 신은 자비심에서 인간이 되었다. 신이 현실로 인간이 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 안에서는 인간적인 신 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와 불행이 신의 마음에 울렸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신의 동정의 눈물이었다. 성육신은 그와 같이 단지 인간적으로 느끼는 존재자,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육신에 있어서 다만 인간화된 신에 멈추고 있을 뿐이라면 그 때는 물론 인간화는 놀란 만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현상한다. 그러나 인간화된 신은 단지 신화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으로 격하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 고양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1 ; "성서는 어떤 곳에서 마치 인간에 관해서와 같이 신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한 서술은 매우 사랑할 만하고 또 위안이 된다. 즉, 그곳에서 인간이 서로 흔히 이야기하는 사물에 대해 신은 친구같이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며 또 그리스도의 미래의 인간성의 비밀을 위해 마치 인간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며 고뇌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 Luther) 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즉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내기 전에 인간이 이미 신 안에 있었으며 이미 신 자신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기 않는다"라고 하는 오래된 근본 명제는 여기서도 타당하다. 자기 신하의 행복을 마음에 두지 않는 왕, 몸은 왕좌에 있어도 정신은 이미 신하의 집에 머물지 않는 그런 왕, 심성 안에 이미 국민이 말하는 것과 같이 "보통 사람"이 아닌 그런 왕, 그러한 왕은 신체적으로도 역시 인격적인 접촉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왕좌로부터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왕이 신하의 자리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신하가 왕의 자리로 올라간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만일 신하가 자기의 왕이 인격적으로 접촉해 주는 것에 의해 존경되고 행복하게 된 것과 같이 느낀다면 이 심성은 다만 가시적인 현상 그 자체에 관계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 그 심성은 오히려 심성의 현상에 관계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심성은 그 현상의 근거인 박애적인 본질이 아닌가? 그러나 종교의 진실에 있어서 근거인 것은 종교의 의식에 있어서도 귀결로 규정된다. 그와 같이 여기서는 신에의 인간의 고양은 인간의 신의 격하 혹은 하강으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신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인간화한다고 종교는 말한다(각주2 ; "신은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되었다" - Augustinus. 그러나 우리는 루터나 많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참된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곳을 발견한다. 루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세는 인간을 '신의 상, 신과 같다'고 말한 것에 의해서 그는 '신은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을 암암리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그와 같이 신의 인간화가 매우 확연하게 인간의 신성의 귀결로서 언표되어 있다)

"신은 인간이다. 혹은 인간이 된다"라는 명제 속에서 발견되는 심원한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모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 즉, 보편적이고 구속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본질의 개념 혹은 규정을 종교적인 신의 개념 혹은 규정과 혼합 혹은 혼동하는, 즉 오성의 규정을 심성의 규정과 혼합 혹은 혼동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혼동은 종교를 바르게 인식할 때에 최대의 장애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신의 인간적인 형태인 것이다. 이미 신은 본질에 있어서, 마음의 가장 깊은 근저에 있어서는 자비 깊은 즉 인간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교의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 1 인격이 성육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안에서 그리고 신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 2 인격이 성육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 2 인격은 실은, 다음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 1 인격인 것이다. 그리고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만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 개념이 없을 때에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이 매개 개념의 연관에서 고찰되면 성육은 "필연적"이라기 보다는 자명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성육은 다만 신학적인 계시에 의해서 알게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게 경험적인 혹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주장은 가장 우둔한 종교적 유물론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육은 매우 이해하기 쉬운 전제에 기초되어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육을 순수하게 사변적, 즉 형이상학적-추상적 근거에서 연역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오류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다만 성육하지 않은 제 1 인격, 어떤 희곡적 인물도 아닌 제 1 인격에 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연역이 정당화되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가 의식적으로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의 부정을 연역할때 뿐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이 예에서 밝혀진다. 인간학은 신비적 가상에 의해서 현혹된 사변과는 달리 인간화를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 고찰하지 않는다. 인간학은 오히려 인간화의 배후에서 특수한 초 자연적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환상을 파괴한다. 인간학은 이 교의를 비판하고,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생래적인 자연적 요소, 인간의 내적 근원 및 중심점으로 환원한다. 즉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의 교의를 "사랑"에로 환원한다.

이 교의는 우리에게 두 가지-신과 사랑-를 제시한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은 사랑이외의 어떤 무엇인가? 신은 사랑과 구별된 존재자인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의미는 마치 내가 인간에 대해서도 역시 "그는 사랑 그 자체이다"라고 감동하여 부르짖는 그런 의미와도 같은 것인가? 확실히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특수한 인격적 본질, 술어와 구별된 본질을 표현하는 신이라는 명사名辭를 방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같이 사랑은 어떤 특수한 어떤 것이 된다. 신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낸 것은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와 같이 배후로 밀려나서 신이라는 어두운 배후에서 멸시된다. 사랑은 비록 본질을 규정하는 특성이기는 하지만 단지 인격적인 특성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신이나 심성에 있어서, 객관적 및 주관적으로, 주어나 본질의 지위가 아니라 단지 술어의 지위를 유지할 뿐이다. 사랑은 부대 사건 또는 우연으로서 나의 눈 앞에서 사라진다. 사랑은 때로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나의 눈 앞에 나타나고, 때로는 다시 나에게서 숨어 버린다. 신은 나에게 아직 사랑 안에 있어서와는 다른 형태로서도 역시 나타난다. 즉 신은 전능이라고 하는 형태에 있어서도 역시 나타나는 것이다. 전능이란 사랑에 의해서 결박되지 않은 어두운 힘이며 또한 더 적은 정도에 있어서이기는 하지만 귀신이나 악마도 역시 참여하고 있는 힘인 것이다.

사랑이 실체, 즉 본질 그 자체에로 고양되지 않는 한에서는 사랑을 떠나서도 아직 그것 자체만은 무엇인가 주체, 사랑이 없는 괴물, 귀신적인 존재자가 사랑의 배경에 잠복하고 있다. 이것의 인격성은 사랑과 구별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사랑과 구별되어 있어 이단자들이나 불신하는 사람들의 피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열광의 환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비록 아직 종교적 의식의 밤에 결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신이 그의 신성을 소외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각주3 ; 그래서, 옛날의 무조건적인 영감이 넘치는 신앙은 성육신을 이런 의미로 찬미하였다. 예를 들면, 성 베르나르트(St. Bernard)는 "사랑은 신을 이긴다(Amor triumphat de Deo)"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신성의 현실적인 자기소외, 자기거부의 의의 속에서만 성육신의 실재성, 의의, 힘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자기부정 그 자체가 단지 공상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변화는 없다. 왜냐하면 잘 음미해 보면 신은 성육신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것, 인간적인 본질로서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에 관해서 후대의 합리주의적-정통파적인 신학이나 성서적-경건주의적-합리주의적 신학이 허구로, 옛날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환희에 취한 표상이나 표현에 반대해서 주장한 것은 주의할 만한 가지가 없다. 하물려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의 신성 그 자체에 의하면,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명제에 있어서의 주어이기는 하지만 신이 자기의 신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술어인 사랑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성보다도 더 높은 힘이며 진리인 것이다. 사랑은 신을 초극한다. 사랑을 위해 신은 자신의 신적 존엄성을 희생하였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던가?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었던가? 그것은 우리가 생명이나 재산을 바치는 대상인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었던가?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던가? 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가? 나는 신을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일 없이, 만일 신이 참으로 사랑한다면 신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신을 사랑하는 일 없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아마도 악마적인 사랑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악마도 역시 인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악마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악마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악마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 악마 자신의 위력을 확장하기 이한 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즉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선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축복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마치 성실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사랑은 일반적으로 복수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랑은 어디에서나 그 자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성육신에 관한 위조되지 않은 참된 원전은 아무 부가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과의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원전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기적인 사랑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인간적인 사랑-그리고 다만 그런 사랑만이 사랑의 이름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이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의 구제자이며 화해자인가? 그것은 신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신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인격성과 인간적인 인격성과의 구별을 초월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신이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한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사랑을 위하여 신을 포기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신을 사랑에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며 그리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술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열광의 나쁜 본질인 신을 가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육신으로부터 그와 같은 원전을 획득한 것에 의하여, 동시에 교의의 비진리성을 제시하고 외견적으로 초자연적-초이성적인 비밀을 인간 그 자신에게 생득인 단순한 진리에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이 진리는 다만 기독교에만 소속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발전되지 않은, 다소간 모든 종교 그 자체에 소속하는 것이다. 즉,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종교는 어느 것이나 신은 신을 존경하는 존재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은 신에게 소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신은 인간의 존경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 인간적인 신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기도는 성육신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으며 또 실제로 모든 기도가 신의 성육인 것이다. 기도에 있어서 나는 신을 인간의 비참에로 끌어들이고, 또 신으로 하여금 나의 고뇌와 욕구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신은 나의 비탄에 대해 귀를 귀울인다. 신은 나의 일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은 자신의 존엄성, 모든 휴한적인 것, 인간적인 것에 대한 초월성을 거부한다. 신은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나의 말을 들어 주고 나의 일을 측은하게 여긴다면 신은 나의 고뇌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즉 신이 인간에 관해서 고뇌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공감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공감은 공동 고뇌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감수성 없는 존재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것인가? 아니다! 나는 다만 감수성을 가진 것에 대해서만 느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나의 본질이 참여한 것 때문에 느끼는 것, 내가 그 곳에서 나 자신을 느끼는 것, 그것의 고뇌를 내가 함께 고뇌하는 것,  나는 다만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만 느끼는 것이다. 동정은 같은 본질을 전제한다. 신이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의 표현이 성육이며 섭리이며 기도인 것이다...(각주4 ; "우리는 신이 우리와 공동 고뇌에 엄습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신이 단지 우리의 눈물을 볼 뿐만 아니라 시편 56편에 쓰여 있는 것 처럼 우리의 '눈물'을 세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신의 아들은 진실로 우리의 고뇌의 심성에 엄습된다" - Melancthonis et aliorum. 루터는 지금 우리가 인용한 시편 56편, 59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눈물도 무익하게 흘려질 리는 없다. 그것은 크고 강한 문자로 하늘에 쓰여진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의 눈물을 세고 모으는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매우 감상적인 존재자인 것이다)

여기 전개된 성육신의 의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성육신의 경우와 이교적인, 그리스적인 혹은 인도적인 신들의 인간화의 경우와는 사정이 전혀 특수한(적어도 사정이 다른) 것이라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은 후에 자명하게 되겠지만 확실히 다른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진실한 것이다. 이교의 신들은 단지 인간의 소산 혹은 신화된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ㅇㅆ어서 참된 신의 관념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비로소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결합이 의의 깊게 그리고 "사변적"으로 되는 것이다. 주피터는 역시 황소로 변형된다. 이교에 있어서의 신들의 인간화는 단순한 공상일 것이다. 이교에 있어서의 신의 본질 안에는 현상 안에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현상하는 것은 신, 즉 인간과는 다른 초인간적인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항의는 언급한 주의, 즉 기독교적인 성육신의 전제도 역시 이미 인간적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의에 의해서 반박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우기 신은 자신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시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들은 신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에게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또 신에게 미지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도 역시 신의 본질 속에서는 신의 현상 속에 있는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성육신에 있어서 종교는 다만 종교가 자체에 대한 반성에서 신학으로서 말하기를 원치 않는 것, 즉 신은 철두철미 인간적인 본질이라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신인"이라고 하는 비밀은 어떤 대립물들의 신비적인 합성이 아니며 혹은 종합적인 사실도 아니다. 그런데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있어서는 신인이라는 비밀은 그와 같은 합성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변적 종교 철학은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 특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의 비밀은 분석적인 사실-인간적인 의미를 가진 인간적 말-이다. 만일 여기에 모순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모순은 이미 성육신의 앞에, 그리고 밖에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즉 모순은 섭리와 사랑의 신성과의 결합 속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의 사랑이 실제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으로부터 신의 사랑에로 이르기 위해서는 단지 제한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여 성육신은 단지 섭리나 사랑을 가장 강하게, 가장 열렬하게, 가장 감성적으로,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의 대상을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격적으로 현존하여 대상을 기쁘게 하고 사랑 그 자체를 보이게 하는 것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은혜자를 마주 본다는 것은 사랑의 가장 격렬한 희망이다. 본다는 것은 신적인 작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단순한 눈길 안에도 행복이 있다. 한 번의 눈길은 사랑의 확실성이다. 그리고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의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 이외의 다른것일리 없으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리도 엇으며 또한 그 이외의 다른 작용을 할 리도 없다. 사랑은 지속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어서의 성육신은 일시적이다. 현상은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소수의 사람밖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현상의 본질은 영원하며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아직 현상을 믿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현상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지 사랑의 직관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신을 신적 대상이나 신적 목적으로 직관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단지 자기 자신의 본질, 자기 자신과 관계할 뿐이다. 이것을 가장 명백하게, 가장 항의할 수 없도록 증명하는 것은 종교의 근거이며 중심점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신성을 소외한다. 성육신이 부여하는 고귀한 일상은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성육신에 있어서 아무 욕구도 없는 최고의 본질이 나를 위해 자신을 욕되게 하며 비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안에서 나 자신의 본질의 직관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된다든가, 인간이 신의 사랑의 궁극 목적이나 궁극 대상이 된다든가 할 때보다도 인간의 가치가 더 높게 표현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적 본질의 본질적인 규정이다. 신은 나를, 인간 일반을 사랑하는 신이다. 여기에 강조의 근거가 있으며, 이 안에 종교의 근본 열정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신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며,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근거이다. 신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야기하며 눈뜨게 한다. "우리가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먼저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각주5 ; 요한 1서 4장 19절)

그렇다면 나는 신 안에 그리고 신에 즉하여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우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우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면 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비록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애가 아닌가? 신이 인간을 사랑할 때는 인간이 바로 신의 내용이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가장 깊은 속마음이 아닌가?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심정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다! 사랑만이 인간의 심정인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며, 나의 내용이며, 나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왜 슬퍼하며, 또 왜 생활 의욕을 상실하는 것인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는 것과 함께 자기의 마음, 생활 원리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인간은 신의 심정이며, 인간의 복지는 신의 가장 내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의 대상이라면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신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적인 내용이 인간이라면, 신적인 본질의 내용은 인간적 본질이 아닌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종교의 근거이며 중심점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최고의 진리, 최고의 본질로서 대상화되어 직관된 것이 아닌가?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라는 명제는 그렇다면 동양 정신이 아닌가?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양적인 것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명제는 독일어로 말하면 "최고의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4.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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