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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07,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

종교는 인간의 자기분열이다. 즉,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인간에게 대립하는 존재자로서 신을 자기에게 대립시킨다.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과는 상반한다. 신은 무한한 존재자이며, 인간은 유한한 존재자이다. 신은 완전하며,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은 영원이며, 인간은 일시적이다. 신은 전능하며, 인간은 무력하다. 신은 신성하며, 인간은 죄깊다. 신과 인간은 양극이다. 신은 단적으로 적극적인 것이며 모든 실재성의 총체이고, 인간은 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며 모든 허무성의 총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의 잠재된 본질을 대상화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와 같은 대립-갈등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본질과의 갈등이라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만일 실제로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존재자)이 인간의 본질과 다른 본질이라면 분열과 갈등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과 인간의 갈등은, 인간은 인간의 본질과의 갈등이라고 하는 증명이 가지고 있는 내적 필연성은 이미 이 일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일 신이 실제 인간의 본질과는 다른 본질(존재자)이라면 신의 완전성은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분열은 서로 모순되지만, 그러나 하나 이어야 하며 또 하나일 수 있는 본질(존재자), 따라서 본질이나 진실에 있어서 하나인 본질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반적인 근거에서 인간은 자신과의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는 본질-인간에게 생득한 본질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질은 인간에게 신 혹은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 자신과의 화해와 통일의 심성, 의식을 부여하는 본질 혹은 힘으로서 인간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본질이 아니면 안 된다.

이 본질은 지성-이성 혹은 오성-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대극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본질 즉 인격적으로 인간적인 본질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며, 오성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순수하고, 완전하고, 결함이 없는 신적 본질은 오성의 자기의식이며, 오성이 자기 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오성은 심정의 고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오성은 심정과는 달라서 욕망이나 정열이나 욕구를 전혀 갖지 않으며,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결함이나 약점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다. 순수한 오성인이란 비록 단지 일면적인 규정성에 있어서뿐이기는 하더라도,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특징적인 규정에 있어서 우리에 대하여 오성의 본질을 상징화하고 인격화하는 인간이다. 이런 순수한 오성인들은 감정인이 가지고 있는 정의적인 고뇌나 열정이나 무절제에서 해방된다. 순수한 오성인들은 어떤 유한한, 즉 한정된 대상에도 정열적으로 열중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자기를 인질(人質)로 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자유"이다.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 무욕구에 의해서 불사의 신들과 동일하게 된다"든가, "자기를 사물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라든가, "모든 것은 공허하다"든가-이것들과 그리고 이것과 유사한 표현은 추상적인 오성인들의 모토이다. 오성은 우리 안에서 중성적이고 무관심하고 청렴하고 기만되지 않은 본질이며, 지성의 순수한 정의(情意)에 의하여 흐려지지 않는 빛이다. 오성은 사상 그 자체의 단언적이며 공평한 의식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스스로 객관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성은 또한 모순이 없는 것의 의식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스스로가 모순이 없는 통일이며 놀리적 동일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오성은 또한 법칙, 필연성, 규칙, 척도의 의식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스스로가 법칙의 활동이며, 지기 활동으로서의 사물의 본성의 필연성이며, 규칙의 규칙이며, 절대적 척도이며, 척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오성의 신, 법칙, 필연성, 법이 그렇게 명한다면 인간이 자기의 소중한 인간적, 즉 개인적 감정과 모순되게 판단한다든가 행동한다든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아버지가 그 자신의 아들을 유죄로 인정하기 때문에 재판관으로서 아들에게 사형의 선고를 내린다는 것은 다만 오성인으로서만 가능할 뿐이며 감정인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성은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점이나 약점들까지도 보여 주며, 우리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들까지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오성은 우리를 매우 자주 우리 자신과 우리 심정과의 괴로운 충동에로 내던진다. 우리는 오성에게 양보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관용과 배려에서, 오성이 내리는 바르기는 하지만 엄격하고 냉혹한 판단을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성은 본래 종속의 능력이다. 심정은 특수한 사정 즉 개인을 대표하고, 오성은 일반적인 사정 즉 전인류를 대표한다. 오성은 초인간적인 힘 혹은 본질성, 즉 인간 안에 있는 초개인적-비개인적인 힘 혹은 본질성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즉 자기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본질을 사상하고 자기를 일반적인 개념이나 관계에로 높이어 대상을 대상이 심정에 부여하는 인상으로부터 구별하고 대상을 그 자체에 있어서(인간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고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오성을 통해서이며 또한 오성 안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철학, 수학, 천문학, 물리학, 간단히 말하면 과학 일반은 실제로 무한하며 신적인 이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활동을 사실에 의해서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의인설도 역시 오성에 모순된다. 오성은 신에게서 의인설적 성질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런 의인설적 성질로부터 해방된 공평하고 무감동한 신은 바로 오성 자신의 대상적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으로서의 신, 즉 유한하지 않은 본질, 인간적이 아닌 본질, 물질적이 아닌 규정된 본질, 감성적이 아닌 본질로서의 신은 단지 사유의 대상일 뿐이다. 신은 비감성적인 본질, 형태없는 본질, 파악하기 어려운 본질, 형상없는 본질이며,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본질이다. 이와 같은 신은 단지 추상과 부정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즉 대상이 될 뿐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신은 사유력 혹은 일반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이나 정신이나 지성을 의식하게 하는 힘 혹은 활동(사람들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의 대상적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계발하여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지성 이외의 어떠한 정신도, 즉 그 이외의 어떠한 지성도 믿거나, 감지하거나, 표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의 개념은 전적으로 사유의 개념, 인식의 개념, 오성의 개념이며 그 이외의 정신은 모두 공상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성을 자신의 개성의 제한에서 분리하는 이상의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한한 정신에서 구별된 "무한한 정신"이란 개인성과 육체성(왜냐하면 개인성과 육체성과는 불가분이기 때문이다)의 제한에서 유리되어 있는 지성, 즉 그 자체에 있어서 조정 혹은 사유된 지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은 비물질적인 본질이며, 지성이며, 정신이며, 순수오성이라고 스콜라 철학자들, 교부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앞서 이미 이교적인 철학자들이 말하였다. 신으로서의 신에 관해서 사람들은 어떠한 심상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오성이나 지성에 관한 심상(형상)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오성이나 지성의 활동은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활동이며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활동이 아닌가? 신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은 지성의 본질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사유의 비림에 찬 조작이나 자기의식의 신비적인 본질을 탐구하였는가? 자기의식은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가 아닌가? 이미 옛날의 신비주의자들이나 스콜라 철학자들이나 교부들이 신의 본질의 파악하기 어려움을 표현하기 어려움을 인간 정신의 파악하기 어려움과 표현하기 어려움을 가지고 설명하였고 비교하였던 것은 아닌가?(각주;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 어느 정도 이교도였을 때 쓴 그의 저서 「아카데미의 학자를 공박한다」에서 인간의 최고 선은 정신 혹은 이성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그가 탁월한 기독교적 신학자로서 쓴 「정정」에서 그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더 바르게 말한다면 인간의 최고의 선은 신 안에 존재한다고 말해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복되기 위하여 신을 자기의 최고의 선으로서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이것에 의하여 어떤 구별이 설정된 것일까? 나의 최고의 선이 있는 곳에 비로소 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신 그자체는 단지 사유할 수 있는 본질, 단지 이성의 대상적인 본질이며, 자신으로서는 이성적인 대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오성 혹은 이성이란 무엇인가를 당신에게 말해 주는 것은 신뿐이다. 모든 것은 자기를 언표해야 하고, 자기를 현시해야 하며, 자기를 대상화해야 하며, 자기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은 자신을 최고의 본질로서 언표하는 이성이며 자신을 최고의 본질로서 긍정하는 이성이다. 상상에 있어서 이성은 신의 계시 그 자체 혹은 신의 하나의 계시이지만, 이성에 있어서는 신이 이성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본성과 능력은 신 안에서 비로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신은 사유의 요구이며, 필연적인 사상이며-최고도의 사유력이다. "이성은 감성적인 사물과 본질 옆에는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성은 최고의 본질, 제일의 본질, 필연적인 본질, 단지 이성에 있어서만 대상적인 본질에까지 귀환하여 비로소 만족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성은 그런 본질과 만나서 비로소 자신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최고 본질의 사유 안에서 비로소 이성의 최고의 본질이 조정되어 사유 능력과 츠상 능력의 최고의 단계가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어떤 능력의 최후의 단계에, 즉 우리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리고 우리에게 생득인-이 예술 혹은 저 예술을 위한, 이 과학 혹은 저 과학을 위한-능력을 최고의 완성에까지 다다르게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안에 간극, 공허, 결함을 느끼며, 따라서 불행하며 불만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술의 초고의 완성만이 비로소 예술이기 때문이며, 오로지 최고도의 사유만이 비로소 사유이며, 이성이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당신이 단지 신을 사유하는 곳에서만 당신은 진실로 사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만이 비로소 실현된 사유력, 충실된 사유력, 천착된 사유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신을 사유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한 그대로의 이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당신이 비록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이 본질을 또다시 이성에서 구별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당신은 감성적인 본질로서 언제나 직관의 대상, 현실적인 대상을 대상의 표상에서 구별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신을 이성에서 또다시 구별하여 표상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상상력을 매개로하여 이 습관을 이성적 본질에로 전이하고, 그리고 그와 같이 하여 이성적 실존이나 사상적 존재에로,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버린 감성적 실존을 재차 역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신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 만족된 지성이다. 혹은 오히려 역으로 자기 자신안에서 만족된 지성, 자기를 절대적 본질로서 사유하는 지성이 형이상학적인 규정들은 단지 그것이 사유 규정으로서 인식되고 지성이나 오성의 규정으로서 인식될 때 뿐이다.

오성은 "원본적-원초적" 본질이다. 오성은 만물을 제 1 원인으로서 신으로부터 도출한다. 오성은 오성적 원인 없이는 세계가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인 우연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오성은 단지 자신, 자기의 본질 안에서만 세계의 근거와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성은 세계의 현존재를 모든 명석하다고 판명한 개념으로부터, 즉 오성 자체로부터 설명할 때에만 세계의 현존재가 명석하고 판명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성에 있어서는 단지 의도를 가지고 목적에 따라서, 즉 오성을 가지고 작용하는 본질만이 직접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명백하며 확실한 본질이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 기초되는 본질이며, 참된 본질인 것이다(각주; 여기서 "오성에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기는 하지만"여기서 고찰되는 오성에 있어서"라는 뜻이다. 즉 "감성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연으로 부터 소외된 유신론적 오성에 있어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가 아무 의도도 갖지 않은 본질은 그것의 현존재의 근거를 다른 것의, 그리고 더우기 오성적인 본질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하여 오성은 자기의 본질을 원본적인 본질, 제 1 본질, 전세계적인 본질로서 조정한다. 즉 오성은 순위에 있어서는 자연의 최초의 본질이지만,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는 자연의 최후의 본질인 오성은 시간에서 말해도 역시 최초의 본질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성은 스스로에겐 모든 실재성의 규준이며 모든 현실성의 규준이다. 오성을 결하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 모순되는 것이며 무이다. 이성에 모순되는 것은 신에게 모순된다. 예를 들면, 최고 실재의 개념과 시간성이나 장소의 제한을 결부시키는 것은 이성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이성은 시간성이나 장소의 제한이 신의 본질에 모순되는 것으로서 신에 대해 그것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성은 다만 이성의 본질과 일치하는 신, 이성의 권위 이하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본질을 표현하는 신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즉 이성은 단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본질의 실재성과 진리성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이성은 자신을 신에게 의존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이성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기적을 믿는 권위 맹신 시대에 있어서까지도 오성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자기를 신성의 규준으로 만들었다. 신은 그의 무한한 전능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여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자신에게, 즉 이성에 모순되는 어떤 것도 아니며 또 모순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비이성적인 것은 전능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신적인 전능은 이성의 더 높은 힘 위에 위치하고 있다. 오성의 본질은 신의 본질에 대해서 긍정되어야 하는 것과 부정되어야 하는 것의 규준,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과의 규준으로서 신의 본질 이상이다. 당신은 비이성적이고 열정적인 본질은 신을 믿을 수가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열정적이고 비이성적인 본질을 신적 본질로서 가정한다는 것은 당신의 오성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신 안에서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대상화할 것인가? 당신이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오성이다. 신은 당신의 최고의 개념, 오성이며, 당신의 최고의 사유 능력이다. 신은 "모든 실재성의 총체", 즉 모든 오성의 진리의 총체이다. 내가 오성 안에서 본질적인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을 나는 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조정하는 것이다. 신은 오성이 최고의 것이라고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적인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 안에서 나의 오성의 본질이 계시되고 나의 사유 능력의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오성은 그와 같이 가장 실재적인 존재, 옛날의 존재론적 신학에서 말하는 가장 실재적인 본질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모든 실재적인 것을 제한이 없는 신의 권능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달리 신을 감지할 수가 없다"고 존재론적 신학은 말한다(각주;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 강의」). 그러므로 우리의 적극적-본질적인 특성, 우리의 실재성이 신의 실재성이다. 그러나 차이는 다만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는 제한과 함께 있으나 신 안에서는 제한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 누가 실재성으로부터 제한을 철거한다든가 제거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오성이다. 따라서 모든 제한 없이 생각된 본질은 모든 제한을 빼버리고,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성의 본질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신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생각한다. 즉 당신의 신의 척도는 당신의 오성의 척도이다. 만일 당신이 신을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때에 당신의 오성도 역시 제한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신을 육체적인 본질로 생각한다면 그 때엔 육체성이 당신의 사유에 미치는 한계, 제한이며 당신은 육체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당신이 신에게서 육체성을 부인한다면 그 때에 당신은 그것에 의하여 당신의 오성이 육체성이라고하는 제한에서 자유로와져 있다는 것을 보증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당신은 제한되지 않은 본질 속에서 다만 당신의 제한되지 않은 오성을 감성화학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제한되지 않은 이 본질을 무엇보다도 실재적인 최고 본질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의하여 당신은 실로 오성이 최고 존재이며 최고 본질임을 말하는 이상의 다른 것을 말하는 거이 아니다.

오성은 더 나아가서 독립한 자조적 본질이다. 오성을 갖지 않은 것은 비독립적이고 의존적이다. 오성이 없는 인간은 역시 의지가 엇는 인간이다. 오성을 갖지 않은 인간은 유혹당하기도 하고 기만당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로 부터 수단으로 이용된다. 오성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수단인 것이 어떻게 의지에 있어서는 자기목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사유하는 자만이 자유하며 독립적이다. 인간은 다만 자신의 오성에 의해서만 자기 이외의 본질과 자기 이하의 본질을 자기생존의 단순한 수단에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만 자체에 있어서 목적이며, 그 자체에 있어서 대상인 것만이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것이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며 대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이 자체에 있어서 대상인 한 이미 다른 본질을 위한 수단이나 대상이 아니다. 오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타자를 위한 존재-객체라는 것이다. 오성은 자신을 위한 존재, 즉 주체이다. 그러나 이미 다른 본질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다른 본질에의 모든 의존성을 방기한다. 우리는 확실히 사유하는 순간에 있어서 조차도 우리 자신 이외의 본질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하고 있는 오성 활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한 우리는 어떤 다른 본질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각주; 이것은 생리학적 작용으로서의 사유 작용에 대해서조차 타당하다. 왜냐하면 뇌수 활동은 비록 호흡 작용 및 그 외의 과정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독자적으로 독립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사유활동은 자기 활동이다. 칸트는 바로 위에서 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사유할 때 나는 내 안에서 나의 자아가 사유하고 있는 것이며, 어떤 다른 것이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안에서의 이 사유가 나의 외부의 다른 사물에 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내속한다른 것을 추론한다. 따라서 역시 나는 내가 실체라는 것과, 즉 나는 다른 사물의 술어로 존재하는 일 없이 나 자신을 위하여 실존한다는 것을 추론한다" 비록 우리가 언제나 공기를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동시에 물리학자로서 공기를 욕구의 대상으로 부터 무욕구의 사유활동의 대상, 즉 우리를 위한 단순한 물物로 만든다. 호흡에 있어서 나는 공기의 객체이며 공기의 주체이다. 그러나 나는 공기를 사유나 연구,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때 이 관계를 전도轉倒한다. 즉 나는 나를 주체로 만들고 공기를 나의 객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에 의존하는 것은 다만 다른 본질의 대상인 것 뿐이다. 그와 같이 식물은 공기와 빛에 의존한다. 즉 식물은 공기나 빛에 대한 대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기나 빛도 역시 서로 식물에 대한 대상이다. 물리적 생활은 일반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이와 같은 영원한 교차,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와 같은 영원한 교차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기를 마셔 버리고 그리고 공기에 의해 마셔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향유하고 또 향유된다. 다만 오성만이 모든 것을 향유하며 그리고 무엇에 의해서도 향유되지 않는 본질이다. 즉 오성만은 오성 자체를 즐기면서, 오성 자신에게 만족하는 본질이다. 오성은 절대적 주체이다. 즉, 오성은 이미 다른 본질의 대상으로 끌어내려질 수 없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모든 대상들을 오성 자체의 객체(술어)로 만들기 때문이다. 오성은 또한 만물을 오성 안에서 이해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것 자체가 어떤 사물이 아니며 또한 만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이다.

오성은 통일성은 신의 통일성이다. 오성에 있어서 오성의 통일성과 보편성의 의식은 본질적이다. 오성은 그것 자체가 절대적 통일성으로서의 자체를 의식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오성에 의해서 오성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오성에 있어서 절대적 법칙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이다. 오성 자신에 모순되는 것, 허위인 것, 불합리한 것이 어딘가에 참되다든가 또는 역으로 참된 것, 이성적인 것이 어딘가에서 참되다든가 또는 역으로 참된 것, 이성적인 것이 어딘가에서 허위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든가 하는 것을 오성에 있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와 같지 않은 예지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인식한 법칙이나 진리와는 다른 법칙과 진리를 인식하는 예지적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정신도 반드시 2곱하기 2는 4가 된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는 자기의 친구를 자신의 개보다도 중히 여긴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 말브랑시malebranche-마찬가지로 천문학자인 크리스찬 휘겐스도 그가 이미 앞에서 인용된 저서 「우주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우리의 이성과는 다른 이성이 실존한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의이며 칭찬할 만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목성이나 화성 위에는 부정이며 저주될 만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하는 그런일이 일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그와 같은 일은 있을 법하지도 않으며 또한 전혀 불가능하다"). 인간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다른 오성에 관해 표상한다든가, 감지한다든가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조정한 각각의 추정된 오성은 단지 나 자신의 오성의 긍정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나에 관한 하나의 관념이며 나의 사유 능력 속에 포함되는, 따라서 나의 오성을 표현하는 표상인 것이다. 내가 사유하는 것은 그것을 내 자신이 사유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지 순수하게 지적인 일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하다. 내가 결합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결합하는 것이다. 내가 분리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내가 폐기된 것, 부정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내가 대상에 대한 직관 혹은 현실성이 그 대상에 대한 사상과 결합되어 있는 오성임을 감지한다면, 나는 실제로 그것을 결합한 것이다. 나의 오성 혹은 나의 상상력은 그것 자체가 이를 구별하는 혹은 대립의 관념을 결합하는 능력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들의 구별 혹은 대립의 관념을 당신 자신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그것들의 구별 혹은 대립의 관념을 결합된 것으로 표상한다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의 경우 당신의 그 표상이 판명한 것이든 혼란한 것이든 사태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 그 자신의 오성과 구별하여 가정한 오성이 어떤 조건에서 규정되든지 이런 다른 오성은 단지 인간 일반 안에 존재하는 오성이며, 이 규정된 일시적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제한에서 분리되어 생각되어진 오성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은 오성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성이 두개의 최고의 본질, 두개의 무한한 실체, 두개의 신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은 오성이 그 자체에 모순된다는 것, 그 자체의 본질을 거부한다는 것, 그것 자체를 분산되어 다양하게 되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성은 무한한 본질이다. 무한성은 곧 통일성과 함께 조정되고, 유한성은 다수성과 함께 조정된다. 유한성-형이상학적 의미에 있어서-은 본질로부터의 실존의 구별, 종속으로부터 개성의 구별에 기초되어 있으며, 무한성은 본질과 실존과의 통일에 기초되어 있다. 그러므로 같은 종속에 속하는 다른 여러 개체들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유한한 것이다. 단지 자시 자신과 같을 뿐이며 자기와 같은 것을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 따라서 개체로서 종속의 하위에 위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불가분적으로 종이며 동시에 개체이고 본질인 동시에 실조인 것은 무한하다. 그러나 오성은 그와 같은 것이다. 오성은 오성의 본질을 그것 자체안에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오성은 오성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떠한 곳도 오성 옆에도 오성 밖에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 오성은 비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자체가 모든 비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오성은 또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성은 모든 척도의 척도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다만 오성을 통해서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성은 보다 높은 어떠한 본질에도, 어떠한 종에도 종속시킬 수 없다. 오냐하면 오성 그것이 모든 종의 최상의 원리이며 모든 사물과 본질을 그것 자체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사별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신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를, 신이란 실존과 본질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존재이며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 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에 있어서 술어와 주어는 동일하며, 따라서 이 모든 규정은 역시 단지 오성의 본질로부터 추출된 본질에 불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성 혹은 이성은 필연적인 본질이다. 이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성의 실존만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성도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무이며 존재는 비존재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처음으로 존재와 비존재와의 구별을 근거지운다. 의식에 있어서 처음으로 존재의 가치와 자연의 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세계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것이나 시계가 존재하는 것은 만일 어떤 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무가 실존하기 때문이며, 만일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이성만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때문에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세계의 의미의 참뜻을 세계의 비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에서 찾아내고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의 근거를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의 무근거성 속에서 찾아 낸다. 무나 비존재는 무목적적이며, 무의미이며, 무오성적이다. 단지 존재만이 이성이며 진리이기 때문에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는 절대적 필요이며 절대적인 필연성이다. 자신을 느끼는 존재의 근거, 생명의 근거는 무엇인가? 생명의 요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누구에게 있어서의 요구인가? 그것은 즉 아직 생명을 얻지 못한 것에 있어서이다. 보는 본질이 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본질이 이미 본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눈을 만들 것인가? 아니다. 단지 아직 보고 있지 않는 본질만이 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지도 의지도 없이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지와 의지를 있게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세계는 결핍에서, 욕구에서, 필요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세계와 구별된 다른 본질 속에 가로놓여 있는 필요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순수한 모순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는 가장 고유한, 가장 내적인 필요에서-필요의 필연성에서-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없이는 어떤 필요도 존재하지 않으며 필요 없이는 어떤 이성도, 어떤 오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무에서 생겼지만 그 무는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확실히 무das Nichits-사변 철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부정성-는 세계의 근거이다. 그러나 그 자체를 지양한 무, 즉 만일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무無인 것이다. 확실히 세계는 결핍-페니아Penia에서-발생한다. 그러나 이 페니아를 존재론적 본질로 만든다는 것은 잘못된 사변이다. 이 결핍은 전혀 세계의 가정된 비존재 안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은 결핍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오직 세계 자체에서 그리고 세계 자체에 의하여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필연성은 이성의 필연성이다. 이성은 모든 실재성의 총체이다(세계의 모든 영광도 빛이 없다면 무엇일 것인가? 그러나 내적인 빛 없이 외적인 빛이 대체 무엇일 것인가?) 이성은 가장 불가결한 본질이며, 가장 심각하며 가장 본질적인 요구이다. 이성이야 말로 비로소 존재의 자기의식이며 자기의식적인 존재이다. 이성에 있어서 비로소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현시된다. 이성은 자기목적으로서 자신에게 대상적인 존재이다. 즉 이성은 사물의 궁극목적인 것이다. 그것 자체에 있어 대상인 것은 최고의 본질, 최후의 본질이며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전능하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3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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