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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10,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

인간화 된 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인간적인 신-즉 그리스도-의 하나의 본질 규정은 열정이다. 사랑은 고난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리스도와 직접 관계되는 모든 사상이나 감정은 고난이라는 개념 속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불행의 총체이다. 이교적인 철학자들은 활동, 특히 지성의 활동을 최고의 활동, 신적 활동으로 찬미하였다. 기독교도들은 고난을 신성화하고 그것을 신의 안에서 조차 조정하였다. 만일 순수활동으로서의 신이 추상적인 철학의 신이라면, 기독교도들의 신인 그리스도는 그에 반하여 순수 열정이며 순수한 고난이다. 즉 심정의 최고의 형이상학적 사상, 심정의 지고 존재이다. 도대체 심정에 대하여 고뇌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뇌란 본래 그 자신은 고뇌를 갖지 않은 사람의 고뇌이며, 모든 고뇌를 초월해 있는 사람의 고뇌이며, 죄없는 사람이나 죄로 더렵혀지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고뇌이며, 자기희생의 고뇌이다. 그러나 열정의 역사는 인간의 심정 혹은 일반적으로 심혼에 대하여 최대의 감동을 주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심혼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심정 이외의 다른 것으로 표상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우스운 망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열정의 역사 속에는 심정의 본질 이외의 어떤 것도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또 대상화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고난의 역사는 본래 인간의 오성 혹은 시작 능력의 발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심저으이 발명이라는 것이 고난의 역사로부터 반박의 여지 없이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정은 자유로운 상상 혹은 지성과 같은 방법으로 발명되지는 않는 것이다. 심정은 수동적-수용적으로 관계한다. 심정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심정에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서 긴박한 필연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심정은 인간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일단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실은 그의 악령, 그의 신으로서의 심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심정은 그 자체, 이름은 심정과는 다른 특수한 것이기는 하지마 그러나 본질, 실체는 심정 자체의 본질인 신 이외의 어떤 다른 신도 모르고, 그것 이외의 더 높은 탁월한 존재자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심정을 통하여 선을 행하고 인간을 위해 살며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내적 갈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어떠한 인간도(가장 타락한 사람이나 가장 저열한 사람까지도) 제외하지 않는 자혜慈惠라고 하는 신적 충동을 통하여, 내적 필요 즉 심정으로 된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 자혜라고하는 도덕적 의무를 통하여, 그러므로 심저으로서 그리고 심정을 통하여 제시되는 것과 같은 인간적 본질을 통하여, 기독교의 한층 더 높고 진실한 본질 즉 신학적인 요소와 본질이나 모순으로부터 순화된 본질이 발행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앞에서 전개한 것에 의해 종교 안에서 술어인 것을 주어로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종교 안에서 주어인 것을 술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교가 부여한 신탁을 전도하여, 말하자면 역리로서 파악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은 고뇌한다. 고뇌한다는 것은 술어이다. 그러나 신을 인간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고뇌하지 않는다. 이것을 독일식으로 말하면 어떤 뜻이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뇌한다는 것은 신적이라고 하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고뇌하며 자신의 마음을 잊는 사람은 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며, 인간에 있어서 신인 것이다(각주1 ; 종교는 예를 통하여 말한다. 예는 종교의 율법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일은 율법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주는, 너희도 똑같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적게 하도록 스스로를 비우시고, 낮게 하시고, 적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Bernardus "우리는 그리스도가 보여 준 예를 열심히 주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를 감동시키며 몰아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하여 고뇌해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마음으로 부터 다른 사람들을 즐겨 돕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되는 것이다"- Luther)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도덕적, 자기행위적 고난, 사랑의 고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려는 힘을 대표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난 그 차제, 고난의 능력 일반의 표현인 한에서 고난을 대표한다. 기독교는 결코 초인간적인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신성화하는 정도이다. 이교적인 철학자는 자기 아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받았을 때 조차도 "나는 내가 가사적可死的인 것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적어도 성서의 그리스도(그러나 성서 이전의 그리스도나 성서에 없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나사로의 죽음(실은 다만 가사假死에 지나지 않았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신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만일 할 만하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Wenn es moeglich, so gehe dieser Kelch ovrueber"라고 외친다(각주2 ; 성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절에 부딪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여기에서 더 그리스도의 겸허함과 존엄함에 경탄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나의 열정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훨씬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신에게 감히 가까이 하고자 할 수 있을 것인가?" -Bernardus. 멜란히든의 친구에게 기독교도인 의사 J. Milithiu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에게 있어선 신에게 감정 혹은 감동을 귀속시킨다는 것이 우스운 일 같이 보일지라도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들의 불행에 관해서 사랑의 상처와 고통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다면 신의 안에도 신의 아들이나 우리에 대하는 유사한 사랑이 일어난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차갑지 않은, 왜곡되지 않은 사랑은 신도가 가지고 있다" - Declam, Melanchth) 그리스도는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적 감수성의 자기고백이라고 할 만하다. 기독교도는 이교적인 원리, 특히 엄격한 의지력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스토아적인 원리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감성과 감수성의 의식을 신의 의식안으로 집어 올렸다. 기독교도는 그것들이 죄 깊은 약점만 아니라면, 신의 안에서 부정되지도 않고 또 저주되지도 않는 다는 것을 알아 내는 것이다.

고난은 기독교의 최고의 계명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인류의 수난사이다. 이교도들 사이에서 감성적 쾌락의 환호가 신들에 대한 의식 속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를, 물론 고대의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혼이나 심성의 눈물과 탄식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감성적 즐거움의 소리들이 신에 대한 제의에 속하는 곳에서는 감성적인 신, 즉 삶의 신이 존경된다. 물론 감성적 즐거움의 소리는 단지 이 기쁨의 소리가 바쳐지는 신들의 본질에 관한 감성적 정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기독교도들의 탄식은 그들의 신의 가장 내면적인 심혼, 가장 내면적인 본질로 부터 나오는 음조인 것이다. 신에의 숭배(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숭배)에 있어서는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이며 궤변적인 신학의 신은 인간의 참된 신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물론 고대의 기독교도들) 눈물, 즉 참회의 눈물, 동경의 눈물에 의하여 그들의 신에게 최고의 명예를 드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눈물은 기독교적인 심정의 감성적 정점이며 그것에서는 그들의 신의 본질이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마음에 드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심정의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적 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우리를 신과 화해하게 하셨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있도록 하자. 우리는 신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괴로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신과 화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뇌의 비완료형은 구원의 완료형보다도 더 강하고 더욱 영속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다. 구원은 단지 고뇌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고뇌는 구원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고뇌는 더 깊은 심정 안에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고뇌는 모방의 대상이 되지만 구원은 모방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만일 신  자신이 나 자신을 위하여 고난받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신이 고난받은 무대인 이 타락한 지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나는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각주3 ; "나의 신은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그런데 나는 쾌락을 즐겨도 좋을 것인가?"- Form Hon. Vital. 성 Bernahard의 위서僞書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의 너의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Joh. Gerhard). 내가 신보다도 더 행복하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렇다면 나는 신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고뇌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주이신 신이 이루시는 것을 내가 본받아야할 것이 아닌가? 나는 얻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도대체 다만 신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가? 나에게 있어서 신의 고난의 역사도 역시 대상은 아닌가? 나에게 있어서 신의 고난받은 역사는 단지 차가운 상기의 대상에 불과해도 좋은 것인가? 혹은 신이 나에게 축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 고난받음은 나의 기쁨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좋다는 것인가? 그러나 누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자기의 신의 고난받음에서 자기를 제외하려고 원할 것인가?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각주4 ; "해악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다" -Luther).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제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사람, 고난받은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괴로운 시련까지도 심리학적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는 그들의 종교적 견해의 귀결인 것이다. 십자가상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을 십자가에 못박고 싶다는 욕망이 왜 생기지 않을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다른 교부들이 이교에 대하여 그와 같은 비난을 할 자격이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

신은 고뇌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신은 심정이다"라고 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근원이며 총체이다. 고뇌 없는 존재자는 심정이 없는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수난의 신이란 느끼는 신이며 다감한 신이다.(각주5 ; "신은 동정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고난 받기를 원하였으며 연민을 태우기 위하여 가련하게 되고자 하시었다." - Bernhard. "당신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육신의 약함을 경험하시었기 때문입니다" -Clemens Alex). 그러나 "신은 느끼는 본질이다"라는 명제는 단지 감정은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활동의 원천의 의식을 자기 않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뇌의 원천의 의식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느낀다. 그리고 나는 다만 너무도 빈번히 나와 나의 감정과를 대립시키는 의욕이나 사유가 나의 본질에 속할 뿐만아니라 감정도 역시 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이때 감정을 비록 모든 고뇌와 약함과 고통의 원천으로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영광스러운 신적 힘과 완전성으로서 느끼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 감정은 인간 안에 있는 음악적인 힘이다. 그러나 음악이 없는 인간은 어떤 것일까? 그러므로 인간은 멜로디나 노래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발산하려는 음악적 충동과 내적 강제를 자신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와 똑같이 필연적으로 종교적 탄식이나 눈물에서 감정의 본질을 대상적 신적 본질로서 유출시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그 자체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 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비난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를 긍정하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삶에 싫증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같이 감정을 경시하거나 억합 하지 않는 곳, 즉 감정의 존재를 기꺼이 허용하는 곳에서는 감정 안에 이미 종교적인 힘이나 의의도 역시 허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감정도 역시 이미 자기 안에로 반영되고 반성되어 신 안에 자기 자신의 거울을 들여달 볼 수 있는 단계로 높여져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게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된 것, 인간에게 참으로 만족을 주는 것, 다만 그러한 것 만이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다. 만일 당신에게 감정이 훌륭한 특성으로 생각된다면, 감정은 바로 그 때문에 당신에게 있어 신적인 특성인 것이다. 그 때문에 민감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단지 민감하고 감정이 풍부한 신만을 믿는다. 즉 그와 같은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진리를 믿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본질 속에 있는 그 자신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은 그에게 신성한 것에 관한 의식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신성한 것은 다만 인간의 가장 내부에 있는 것,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 인간의 개성의 궁극적인 근거, 본질뿐이다. 다감한 인간에게 있어서 무감한 신은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신이며, 즉 무이다. 왜냐하면, 무감각한 신에겐 인간에게 가치가 있고 신성한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의 최고의 감정이나 최고 사상의 비망록이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귀중하고 신성한 존재물의 이름을 써넣어 두는 기념첩이다.

사람이 가치 있다고 인정한 것을 수집하고 그 수집한 것을 참을성 있게 보존하여 망각의 물결이나 상기想記의 우연에(일반적으로 그 물건 자체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가정적인 안락함의 표시이며 여성적 충동이다. 자유 사상가는 낭비적이고 산만하고 방종한 생활의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 만물을 하나로 총괄하는 신앙심 있는 사람은 감상적 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편견과 승려적 자기본위, 탐욕의 위험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신앙자 혹은 적어도 불신앙자는, 적어도 신앙자에게 있어서 주관적이고 전제적이고 거만하고 경박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믿는 사람에게 신성한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신자가 단지 자기 머리 속에 보유하고 있을 뿐인 것을 신앙자는 자기 밖에, 그리고 자기 위에 대상으로서 조정하고, 그런 이유로 정식 종속관계를 자기 안에 인정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믿는 사람은 비망옥을 가지기 때문에 집합점이나 목적을 가지는 것이며 목적을 갖기 때문에 확고한 지반을 가지는 것이다.

단순히 의지나 막연한 지식이 아니라 다만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과의 통일인 목적 활동만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근거와 지주, 즉 성격을 부여하는 거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궁극 목적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 목적은 의식되고 의욕된 본질적 생활 충동이며, 천재적 눈빛이며, 자기인식의 초점이다. 즉 궁극 목적이란 인간 안에 있는 자연과 정신의 통일이다. 궁극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자기가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는 인도되는 것이다. 궁극 목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고향도 없으며 신전도 없다. 최대의 불행은 무목적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목적을 설정하는 사람조차도 아무 목적도 설정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실제로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낫게 해나간다. 목적은 제한한다. 그러나 제한은 덕의 여주인이다. 목적 그 자체에 있어서 진실하며, 본질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것에 의하여 종교를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설사 신학적 천민이 생각하는 제한된 의미에서의 종교는 아니라 하더라도, 오히려 이성 및 진리의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성의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만이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5.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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