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7 장 삼위 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이 없는 신이,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이 감정만 있고 오성이나 의지가 없는 존재도 역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다만 전인全人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존재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 일체의 의식이다. 삼위 일체는 지금까지 분리해서 고찰된 모든 규정 혹은 힘을 총괄하여 통일체를 이룬다. 이와 같이 하여 삼위 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이나 하나의 특수한 능력에로 저하시킨다.
우리는 다만 신학에 의하여 삼위 일체의 복제, 초상, 비유로서 특색짓고 있는 것, 즉 사물 그 자체를 본질, 원형, 원물로서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삼위 일체를 구상화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시도에서 사용한 명목상의 상들은 주로 정신, 오성, 기억, 의지, 사랑이었다(각주1 ; Meus, intellectus, memoria, voluntas, amor 또는 caritas)
신은 사유하고, 신은 사랑한다. 그리고 더우기 그는 자신을 사유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안에서 만나게 되는 최초의 것이다. 자기의식은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어떤 절대자로서 인간에게 육박해 온다.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는 자기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으며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전적인 존재이다.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존재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자기의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실제로 자기 자신에 있어서 절대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신, 의식을 갖지 않은 신은 신이 아니다. 마치 인간이 의식이 없으면 자기를 사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역시 그러하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혹은 신적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코 삼위일체가 이것에 의하여 철저하게 해석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의 비밀을 전적으로 위와 같이 환원하고 제한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전혀 자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될 것이다. 추상적인 본질 혹은 규정 안에서의 의식, 오성, 의지, 사랑은 다만 추상적인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자기가 살아 있는 전체성에 있어서 자기의식의 통일성은 단지 나와 너의 통일성, 관계가 풍부하며 충실된 통일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세계를 등한시한다. 내면성이 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현세로부터 괴리된 생활, 신의 안에 숨는 생활, 조용한 생활, 현세의 기쁨이 비어 있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이 자신을 현세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신 자신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본질, 세계 외적으로 초세계적인 본질 즉 엄밀하게 추상적으로,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세계의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외적인 본질로서의 신은 인간의 본질이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고, 세계와의 모든 유대와 얽힘으로부터 해방되고, 세계를 무시하고 대상적 본질로서 실현되어 직관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자기 이외의 모든 다른 것을 버리고 다만 자기만이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의 의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힘은 종교의 내부에 있어서 즉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각주2 ; "신의 본질은 마치 신이 영원 이래 자기 자신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의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로부터 당신의 사랑을 빼버리라"-John Gerhard. "네가 만일 피조물의 창조주를 얻고자 한다면, 너는 모든 피조물 없이 지내야만 한다. 피조물 없이 지내는 일이 적으면 적을 수록 신없이 지내는 일이 그 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이 부여한 모든 위안과 함께 버리라" - J. Tauler. "만일 인간이, 단지 신과 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자기 마음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 조금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G. Arnold)
신 그 자체, 단순한 본질로서의 신은 전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본질-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왜냐하면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만이 고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격과 사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표시이다. 고독은 사상가의 욕구이며 협동은 심정의 욕구이다. 우리는 혼자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땐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의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와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옥직 고독한 사유 작용에 있어서만 독립적인 것이다. 고독은 자족이며, 자기만족이다.
그러나 고독한 신으로부터는 이원성, 사랑, 협동성, 현실적으로 충실된 자기의식, 다른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가 배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욕구는 종교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서 만족되는 것이다. 즉 신적 본질의 고요한 고독 속에 다른, 제 2의-인격적으로는 신과 구별되어 잇으나 본질적으로는 신과 동일한-본질이 조정되는 것에 의하여 만족되는 것이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인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며, "너"는 사랑이다. 그러나 오성을 가진 사랑, 사랑을 가진 오성이 비로소 정신이며, 비로소 전인全人인 것이다.
다만 협동 생활만이 진정한 자기 안에 있어서의 만족된 신적인 생활이다. 이 단순한 사상, 인간에게 자연으로 생득적인 이 진리는 삼위일체의 초자연적인 신비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다. 그러나 종교는 다른 모든 진리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이 진리도 역시 다만 간접적으로 즉 전도하여 언표할 뿐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여기서도 역시 "신은 협동 생활이며, 사랑과 우정의 생활이며 본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진리도 특수적인 진리로 만들며 또 참된 주어를 술어로 만들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제 3의 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제 3 인격이란 아들과 아버지의 통일이며 협동성의 개념이 전혀 불합리하게 스스로 재차 특수한 인격적 본질로서 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신의 가족, 신과 아들과의 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하여 또한 제 3의, 그리고 더우기 여성적인 인경이 하늘에 받들여졌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격성이 이 제 3의 보완적인 본질일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나 모호하고, 너무나 불확실하고, 너무나 명백하게 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상호적인 사랑을 인격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설정된것은, 마치 아버지가 마리아를 매개로 아들을 낳은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의 교합은 어떤 신성하지 않은 것이며 죄 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적인 본질이 아버지와 아들 옆에 설정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각주3 ; 그러나 일치서Concordienbuch와 신앙고백서 안에서 마리아는 아직도 "진실로 신의 어머니이시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녀로 계시는 축복된 처녀"라든가 "모든 최고의 찬양을 받을 만하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밀려난 여성은 그 대신에 프로테스탄트교에 대하여 심하게 복수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서 사용한 무기는 프로테스탄트교 자체에 대해, 신의 아들에 대해, 삼위일체에 대해 되돌아왔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희생으로 바친 자는 멀지 않아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비밀도 의인설적 관념으로서 희생으로 받쳐야만 한다. 여성적 본질이 배제되면 의인설적 관념은 분명히 은폐된다. 그러나 그 때도 그것은 단지 은폐될 뿐이며 폐기되지는 않는다. 물론 프로테스탄트교는 도한 하늘의 여성에 대한 욕구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트교는 지상의 여성을 팔을 벌려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교는 어머니와 함께 아들과 아버지도 역시 방기할 정도로 철저하고 용감했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적인 신은 가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적인 신이 깊고, 열렬하고, 필연적인 진실한 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실재적인 유대들의 부정에로의 대립에 있는 것이며, 은자생활, 승려생활, 수녀생활에 대립하여 있는 것이다(각주4 ; 승려는 Melchisedech와 같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없이, 계보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리고 지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으리라. 오히려 그는 자기에 관해서 마치 다만 그 한 사람과 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리라" - Specul. Monach., "Melchisedech의 예에 따르면 목사는, 말하자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라고 암브로시우스는 어딘가에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적인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삼위 일체적인 신은 실제 생활의 내용이 버려져 있는 곳에서 요구된다. 삶이 공허하면 할 수록 신은 풍요로우며 더 구체적이 된다. 현실 세계가 공허하게 되는 것과 같이 신성이 충만한 것은 같은 작용이다. 오직 가난한 인간만이 부유한 신을 가진다. 신은 결핍이라는 심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규정되고 따라서 의식적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이 공허함이나 고독함의 위안이 없는 심성이 서로 가장 친절하게 사랑하는 본질의 사회, 협회를 포함하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왜 근세에 있어서 삼위일체가 먼저 실천적 의의를 상실했고, 최후에 이론적 의의를 상실했는가에 대한 참된 설명 근거를 갖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6.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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