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Saturday, January 12,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

신은 우리의 소망과 심성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사람이다. 신은 그 자신 심정의 소망이 실현 되는 것이며, 소망의 성취나 타당성의 확실성에까지 고양된 것이다. 이 확실성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며 이 확실성 앞에서는 오성의 어떤 항변이나 경험, 외계의 어떤 이론도 무력하다. 확실성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힘이다. 인간에게 있어 확실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언표는 기독교의 최고의 언표이긴 하지만 이 언표는 단지 인간적 심성의 자기확실성의 표현이며 유일하게 정당한 힘, 즉 신적인 힘으로서 인간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확실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사랑이다"라는 언표는 또한 인간의 심정의 내적 소망이 무조건적 타당성과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며, 인간의 심정에는 어떤 제한도 어떤 대립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다. 

모든 장엄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는 전세계도 인간적인 심정에 대해서는 무라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다(각주1 ; "선량하고 정직한 인간이 신의 자애로 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믿는 사람은, 인간적 본질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재화, 어떤 눈도 볼 수 없고, 어떤 귀도 들을 수 없으며 어떤 인간적 오성도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한한 자애와 무한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본질이 인간의 문제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또한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만 악덕에 굴복한다든가 신을 모독하는 생활만 하지 않는다면 전혀 아무것도 이 희망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으며 혹은 동요시킬 수조차 없는 것이다" - Cudworth) 신은 사랑이다-즉 이것은 심성이 인간의 신이라는 것,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신이며 절대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신은 심성의 본질이 대상적으로 된 것이며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심성이다. 신은 인간의 심정의 기원법이 특정한 때, 즉 확실한 축복된 현재성에로 진화한 것이며, 감정의 전능이 무분별하게 나타난 것이며, 들릴 수 있는 기도이며, 귀에 들리는 심성이며, 우리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의 반향이다. 고통은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음향에 맡겨 토로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악기를 손에 든다. 예술가는 자기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것을 대상화한 것을 통하여 그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심정에 깃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허공으로 전달하며 자기의 고통을 일반적으로 본질로 만드는 것에서 그 짐을 가볍게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탄식을 들어 주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무정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즉 눈에 보이는 대상 일반으로 부터 눈을 돌린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무정한 힘으로부터 남모르게 숨어서 자기의 고뇌를 들어 주기 바란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무거운 비밀을 말하고 자기의 억압된 심정을 털어 놓는다. 심정의 자유한 공기, 이 언표된 비밀, 이 소외된 정신적 고통-이것이 신이다. 신이란 인간의 불행에 대해, 마음 깊이 숨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다. "신이란 영혼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탄식이다"(각주2; Sebastian Frank von Woerd in Zinkgrefs Apophthegmata deutscher Nation). 이 언표는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표현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장 심각한, 가장 진실한 언표이다.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은 종교의 가장 단순한 행위-기도-에 의하여 계시된다. 기도는 성육신의 교의가 말하고 있는 것보다 무한하게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이다. 혹은 적어도 성육신의 교의가 말하고 있는 같은 정도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이다. 단 종교적 사변은 성육신이라는 교의를 최대의 비밀로서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기도는 식전, 식후의 기도나 이기주의의 기도가 아니라, 고통으로 꽉 찬 기도, 위안할 길 없는 사랑의 기도, 절망으로 시작하여 환희로 끝나는 기도이다. 

기도할 때 인간은 당신이라는 말로 신에게 말을 건다. 이리하여 인간은 소리높이 그리고 명료하게 신을 인간의 타아로 선언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본질(존재)로서의 신에게, 다른 경우에는 듣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기의 가장 은밀한 생각이나 가장 깊은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신뢰하며 확신하고 언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탄식에 대해 조금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본질(존재)에 의뢰할 수 잇을 것인가?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의 실현을 신뢰하고 표현된 심혼의 소망이외의 무엇이겠는가?(각주3 ; 신은 다만 신의 이름에 있어서 혹은 기독교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생기는 소망이나 청원을 이루게 해준다고 말하는 것, 간단히 말하면 신은 다만 신의 의지와 일치하는 소망을 충족시켜 줄 뿐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무력한 항의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는 바로 인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혹은 오히려 신은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으 행복하게 되려고 욕망한다. 개개의 이런 혹은 저런 소망은 분명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속-본질적인 경향-만 인정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청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믿음이 깊은 사람은 그 청함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하지 못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고 자위하는 것이다-Soz. B. Oration de precatione in Declamat Melanchthonis). 

이들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일을 들어 주고, 자기 자신에게 동의하여 이의도 항변도 없이 자기를 긍정하는 인간적 심성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세계라고 하는 표상을 망각하고 있지 않는 인간, 즉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단지 매개되어 있고, 여러 가지 결과는 자기의 자연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소망은 그것이 목적이 되고, 그리고 상응하는 수단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는 표상을 망각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러한 인간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오직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인간은 실현 가능한 소망을 실제의 활동의 목적에로 전화하여, 자기가 주관적으로 인정하는 다른 소망을 억압하든가 혹은 단지 주관적인 경건한 소망으로서 고찰하든가 할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세계-그는 자신을 세계의 성원이라고 생각한다-에 의하여 제한하고, 제약하여 자기의 소망을 필연성이라는 표상에 의하여 제한 및 제약한다. 

이것에 반하여 기도할 때에 인간은 그의 심성에서 세계와, 이것과 함께 매개의 사상, 의존성의 사상, 슬퍼해야 할 필연성의 사상을 배제시킨다. 그는 여기에서 자기의 소망이나 심정의 문제들을 독립적인, 전능한, 절대적 본질의 대상으로 만든다. 즉 그것들을 무제한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적 심정을 긍정하는 말이다. 기도는 인간적 심성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과의 절대적인 동일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기도란, 또한 심정의 힘은 자연의 위력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하는 확실성이며, 심정의 욕구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성이며 세계의 운명이라고 하는 확실성이다. 기도는 자연의 운행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신이 자연의 법칙과 모순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규정한다. 

기도란 인간의 심정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이다. 기도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소망에는 제한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망각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기도는 인간의 두 개의 본질에로의 분할이다-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심정과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를 소리높이, 명료하게, 힘있게 언표하는 것은 기도의 결과를 야기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불가피하게 입술 위로 흘러나온다. 심장의 압박은 입의 장벽을 폭파한다. 그러나 소리높은 기도는 단지 자기의 본질을 계시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실제로 언표되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도는 본질적인 이야기Rede이다. 

라티어의 이야기Oratio는 양자(기도와 이야기)를 의미한다. 인간은 기도에 있어서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자신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하여 숨김없이 언표한다. 인간은 자신의 심정을 대상화 한다. 여기에서 기도의 도덕적인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집중은 기도의 조건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정신 집중은 조건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그 자체가 정신 잡중이다. 즉 기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며, 외부로부터 방해하는 모든 영향을 배제하는 것이며, 단지 자기 자신의 본질과 관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내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만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마음으로부터의, 친밀한 기도만이 구원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원은 기도 자체 안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도처에 주관적인 것, 인간적인 것, 종속적인 것이 제 1 의 것, 제 1 원인, 사상事象 그 자체인 것과 같이 여기서도 이 주관적인 특성들은 기도 자체의 객관적 본질이다(각주4; 주체적 근거에서도 역시 협동적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보다 더 효과적이다. 협동은 심성의 힘을 고양시키며 자기 감정을 높인다. 사삼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면 가능하다. 고립감은 제한되어 있는 감정이다. 협동감은 자유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폭력에 위협당하면 함께 무리를 이룬다. 암브로시우스가 말한 것과 같이, 수가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수의 인간에 베풀어지는 것도 개인에게는 거부된다" -Paul. Mezger)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7.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9.html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