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
하늘의 삶 혹은 인격의 불멸(나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지 않는다)은 기독교의 특징적인 하나의 교의이다. 확실히 인격의 불멸은 얼마간 이교적인 철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교적인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격의 불멸은 단지 환상의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격의 불멸은 그들의 근본 견해와 견관되어 있기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이 대상에 관해서 얼마나 모순투성이의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인격의 불멸은 기독교도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즉 그들은 인경의 불멸이 필연성을 가진 자명한 진리로서 명백하게 귀결된 원리를 찾아 냈던 것이다. 세계, 자연, 종속Gattung의 직관이 고대인들의 계획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생활원리와 살아 있는 주관과의 사이에 구별을 짓고, 혼이나 정신과 자기 자신 사이에 구별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종의 전체성에 소속하고 있을 뿐인 것을 직접으로 자기 자신 속에 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과 개성과의 직접적 통일성은 바로 기독교의 최고의 원리인 신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개인은 절대적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의 필연적 귀결은 바로 인격의 불멸이다.
혹은, 오히려 인격의 불멸에 대한 신앙은 인격 신에 대한 신앙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신이 대상인 것처럼 신은 인격의, 하늘의, 불멸하는 삶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격의 불멸에 대한 신앙은 구속되지 않은 절대적 인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속되지 않은 인격성은 신이다. 그러나 하늘의 불멸하는 인격성이란 그 자신 모든 지상적인 무거운 짐과 제한을 모면한 구속되지 않은 인격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구별은 다만 신이 정신적인 하늘이며, 하늘은 감성적인 신이라고 하는 것, 신 안에서 사유되는 것은 하늘에 있어서는 공상의 객체로서 조정된다는 것 안에 있을 뿐이다. 신이란 오직 전개되지 않은 하늘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인 하늘은 전개된 신이다. 현재는 신이 하늘나라이며, 장래에 있어선 하늘이 신이다. 신은 미래의 보증이며 미래의 현재성과 실존이다. 그러나 미래의 현재성과 실존이란 아직 추상적이다. 신은 또한 예상된 개요적인 하늘이다. 우리 자신의 미래의 본질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로 부터, 현재 이 세계 안에 이 육체 안에 존재하는 우리로부터 구별되어 단지 이상적으로 대상적인 본질이 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저 세계에서 자기를 현실화하고 개별화하게 될 종속 개념이다.
신은 저 세계에서 하늘나라의 순수한 존재자로서 실존하게 될 하늘나라의 순수하며 자유한 본질성이며 저 세계에서 축복되는 많은 개인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축복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인, 축복된, 하늘나라의 순수하며 자유한 본질성이며 저 세계에서 축복되는 많은 개인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축복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인, 축복된, 하늘나라의 생활의 개념 혹은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여기 신에게 있어선 그 자신 아직 하나의 이상적인 인격성에로 총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축복된 삶이 신과의 합일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 충분히 명백하게 언표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신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지만 저 세계에서는 장벽이 무너진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들이며 저 세계에서는 신들이다. 이 세계에서 신성은 독점물이나, 저 세계에서는 공유 재산이다. 이 세계에는 추상적인 단일성이 있고 저 세계에는 구체적인 다수성이 있다(각주1; "우리가 신과 동등할 때, 즉 신 자신이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성서는 이미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의 아들이 되는 힘이 부여된 사람들에게는 신이 되는 힘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존재하는 그대로의 신이 되는 힘도 역시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독신 생활에 관해서」. "선한 의지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러나 영생은 신 자신이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은 신성 자체이다" -Boethius. "행복은 신과 동일한 것이다" -Thomas Aq. Summa Cont. Gentiles. "다른 인간은 성직 생활에로 경신될 것이다. 그는 생활에서, 정의에서, 영광에 있어서, 지혜에 있어서 신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 -Luther)
이 대상의 인식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상상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뿐이다. 상상은 한 편에 있어서는 신의 인격성과 독립성과의 표상을 통하여, 다른 편에서는 많은 인격성이라고 하는 표상을 통하여 개념의 통일성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상상은 동시에 보통 많은 인격성을 감성적인 색채를 가지고 채색된 나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신으로 생각되는 절대적인 삶과, 하늘로 생각되는 절대적인 삶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단지 신 안에 한 점으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 하늘에서는 길이와 넓이로 연장된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불사에 대한 신앙은 순수하고 모든 제한에서 구추로딘, 따라서 바로 그 때문에 불사인 인격성에 대한 신앙이다. 불멸인 영혼과 신 사이에 만든 구별은 단지 궤변적인 구별에 불과하든가 혹은 상상적인 구별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신과 하늘나라의 본질 사이에 구별을 확정하기 위하여 하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또 다시 여러 제한을 정하고 그 행동의 여러 단계를 설치하여 그것을 분류할 때 신과 불멸인 영혼과의 구별은 궤변적 혹은 상상적인 것이다.
신적인 인격성과 하늘나라의 인격성과의 통일성은 불사에 관한 통속적인 증명 속에서조차도 나타나 있다. 만일 이 세계의 삶과는 다른 더 좋은 삶이 하나도 없다면 신은 정의도, 선도 아니다. 그와 같이 신의 정의와 자비는 개인의 영속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가 없으면 신은 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이나 신의 실존은 개인의 실존에 의존하게 된다. 만일 내가 불사가 아니라면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불사를 부정하는 자는 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신이 확실한 만큼 그 만큼 나의 행복은 확실하다. 신은 나에게 있어서 바로 나의 행복의 확실성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관심은 내가 존재한다-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는 관심과 동일하다.
신은 나의 숨은 실존이며 나의 확실한 실존이다. 신은 모든 주관의 주관성이며 모든 인격의 인격성이다. 그러므로 인격성에 귀속하는 것이 모든 인격들에 귀속하지 않는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법한 일인가? 신 안에서 나는 바로 나의 미래형을 현재형으로, 혹은 오히려 동사형을 명사형으로 만든다. 어떻게 한 쪽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신은 나의 소망과 감정에 상응하는 실존이다. 신은 정의의 사람이며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자비 깊은 사람이다. 자연이나 이 세계는 나의 소망과 감정에 모순하는 실존이다. 여기에서 사물은 있어야 하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세계는 소멸한다. 그러나 신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있는 존재이다. 신이 나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하는 것은 단지 신이 나의 소망의 실현자-즉 소망이 현실화하여 성취되는 형태-라고 하는 명제의 통속적인 인격화에 지나지 않는다(각주2; "만일 썩지 않은 실체가 우리에게 선이라고 한다면 신이 그와 같은 실체를 우리에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의심하려 하는 것일까?" - Augustinus)
그러나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소망이나 동경에 상응하는 존재이다(각주3; 천국적인 실체란 정신적인 육체를 이름한다. 왜냐하면 천국적인 실체는 정신의 의지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너희에게 모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너희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너희에게 반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존재하고자 하는 동일한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 Augustinus. "그곳에는 더러운 것, 적의 있는 것, 불화한 것, 모양이 흉한 것,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Augustinus. "다만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생활한다" -Ders.) 따라서 신과 하늘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영원한 행복을 실현시키는 힘이다. 신은 모든 개개의 인격들의 행복과 불사가적 확실성을 가진 절대적 인격성이다. 신이란 인간 본질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한 최고이며, 궁극적인 확실성이다.
불사의 교의는 종교의 결론이며 종교의 최후적인 의지가 표현되어 있는 유언장이다. 그 때문에 종교는 다른 곳에서 침묵하는 것을 여기서는 언표한다. 다른 곳에서는 어떤 다른 본질의 실존이 문제라고 하면 여기서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실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 신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이 신의 실존을 인간 자신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 신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이 신의 실존을 인간 자신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인간에게 제 1차적 직접의 진리인 것은 여기서는 그에게 파생적인 제 2차적 진리인 것이다. 내가 만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신은 신이 아니며, 만일 어떤 불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지 않으며 만사는 무가 되는 것이다. 먹고 마시자! 우리는 확실히 이러한 추론 형식을 피하는 것에 의하여 통속적인 증명 속에 가로놓여 있는 외견적인 불쾌나 현실적인 불쾌를 제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추론 형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사를 분석적 진리로 만드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신의 개념은 바로 절대적 인격성 혹은 주관성의 개념으로서 스스로 이미 불멸성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신은 나의 미래의 실존의 보증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미 나의 현재의 실존의 확실성이고 진리성이며, 나의 구원이고, 나의 위안이며, 외계의 힘에 대한 보호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사를 일부러 귀결로서 끌어 낼 필요가 전혀 없으며 또 고립된 진리로서 명시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신을 가지고 있다면 나를 불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원한 기독교적 신비가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그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사의 개념은 신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그들의 불사의 삶이 었다. 그들에게 신 자신은 주관적인 행복이었다. 그러므로 그들-그들의 의식-에 있어 신의 존재는 신 자신에 있어서의 존재, 즉 종교의 본질에 있어서의 신의 존재였다.
이와 같이 하여 신은 하늘이며 신과 하늘은 동일물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역逆의 증명, 즉 하늘은 인간 본래의 신이다라는 증명이 더 용이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하늘을 생각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신을 생각한다. 인간의 하늘의 내용 규정성은 인간의 신의 내용 규정성이다. 인간은 자기의 하늘을 생가가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신을 생각한다. 인간의 하늘의 내용 규정성은 인간의 신의 내용 규정성이다. 구별은 다만 신에 있어서는 기획이나 초안에 불과한 것이 하늘에 있어서는 감상적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는 것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비밀을 여는 열쇠이다. 마치 하늘이 객관적으로는 신성의 본질이 해명된 것인 것처럼, 주관적으로는 종교의 가장 내적인 사상과 심성이 가장 솔직하게 언표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들은 모든 하늘나라들이 다른 것과 같이 다양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구별이 있는 것처럼 상이한 하늘 나라들이 존재한다. 기독교도들 자신도 역시 하늘을 다종 다양하게 생각한다(각주4; 그리고 기독교는 꼭 같이 그들의 신도 다종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건한 기독교적 독일인다운 사람들은 "독일적 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건한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적 신"을 가지며, 불란서 사름들은 "불란서 신"을 가지고 있다. 불란서 사람들은 실제로 선한 신은 불란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민족이 있는 한 또한 다신교가 실존한다. 어떤 민족의 실제의 신은 그 민족의 국민성이 명예로 하고 있는 덤이다)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인간적 개체에 있어서 그것이 감정에 있어서든 혹은 사유에 있어서든 상관 없이 제한이나 악으로서 현상되는 것으로 부터 순화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피안이란 제한이나 악으로 현상된 것으로부터 해방된 차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개체가 제한으로서의 제한, 악으로서의 악을 명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의식하면 할 수록 제한이 없어진 피안의 삶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만큼 더 명확하고 분명하다. 피안이란 이 세계에서 개체의 자기 감정과 실존을 침해하고 있는 제한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감정이며 표상이다. 종교의 진행이 자연적인 혹은 이성적인 인간의 진행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만 그러하다. 즉 자연적인 혹은 이성적인 인간이 최단선으로서의 직선에 있어서 이루는 진행을 종교는 곡선, 실은 원주의 선에 있어서 그린다는 것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인간은 자기의 고향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 곳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며 그는 이 곳에서 완전하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만족, 불화에서 시작하는 종교는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먼 곳에서 고향의 행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출발한 같은 점에 언제나 복귀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또 다시, 그리고 더우기 이번에는 영광스런 형태로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또한 이 세계의 삶을 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결국은 차안을 피안으로서 또다시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각주5; 그러므로 저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한 개의 이 혹은 하나의 손톱조차도 잃어져 가서는 안 된다 -Aurelius Prud. 그리고 너희 눈 속에 조야한, 육적인 그리고 그 때문에 너희에 의해서 부인된 신앙은 그것만이 모순이 없는 신안, 그것만이 성실한 신앙, 그것만이 진실한 신앙이다. 인격의 동일성에는 육체의 동일성이 필요하다). 잃어버리기로 하였으나 그러나 또다시 발견된, 그리고 재발견의 환희 속에서 더욱더 밝게 빛나고 있는 차안이 바로 피안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이 세계의 기쁨을 방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대신에 하늘의 기쁨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오히려 종교적인 인간이 이 세계의 기쁨을 방기하는 것은 이미 적어도 정신적으로 하늘의 기쁨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의 기쁨은 이 세계에 있어서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다만 하늘의 기쁨은 이 세계의 삶의 제한과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이와 같이 자연적인 인간이 직선적으로 서둘러 향해가는 목표(기쁨의 목표)에, 우회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도달하는 것이다. 상징속에 있는 본질이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는 사상事象을, 상징을 위해 희생으로 한다. 피안은 상상의 거울에 비치는 차안이다. 피안은 사람을 매료하는 상징이며, 종교의 의미에 있어서 차안의 원상 das Urbild 이다. 이 세계의 실제 생활은 단지 저 세계의 정신적-상징적인 생활의 가상이며 미광微光에 지나지 않는다. 피안은 상징 속에서 직관되어 모든 조야한 물질로부터 정화되고 미화된 차안이다.
미화나 개량은 결점이나 불쾌를 전제한다. 그러나 불쾌는 단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상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그 사상이 존재하는 그대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나는 단지 성상을 거부할 뿐 본질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사상을 전멸하려 할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을 헐어 버리기는 하지만 미화하지는 않는다. 피안에 대한 신앙은 현세를 방기하지만, 그러나 현세의 본질을 방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그대로의 현세계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피안을 믿는 사람에게도 기쁨은 마음에 드는 것이다. 누가 기쁨을 어떤 진실한 것이나 본질적인 것으로서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현세에선 기쁨 뒤에 반대의 감정이 따른다는 것, 기쁨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이미 기쁨을 신 안에 조정하는 것처럼 기쁨을 피안에-그러나 영원하며 중단되지 않는 신적인 기쁨으로-조정한다. 피안은 이 때문에 기쁨의 나라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하며 중단되지 않는 기쁨이, 하나의 존재자로서 생각되어진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안을 믿는 사람에게는 개성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다만 객관적인 충동에 의해 장애받지 않는 개성만이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성도 역시 포함시킨다. 그러나 그가 포함시킨 개성은 순수한 개성이며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개성이다. 빛은 마음에 들지만 중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력은 개인에게 제한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밤에는 인간은 자연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계에는 빛은 있으나 중력이나 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세계에는 순수한, 방해받지 않은 빛이 있는 것이다(각주6; "부활 후에 시간은 이미 낮과 밤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밤이 없는 낮이 존재할 것이다" - Damascen)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신 안에서 언제나 또다시 자기 자신에로 귀환하며,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그와 같이 인간은 차안으로부터 한껏 떨어져서 역시 또다시 결국에는 차안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신은 처음에 인간 외적으로 또한 초인간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도중 혹은 종말에 있어서는 그만큼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꼭 같이 하늘의 삶이, 처음에는 혹은 멀리서 바라볼 때에 초자연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종말에는 혹은 가까이에서 고찰되면 하늘의 삶과 자연적 생활과의 통일성이 그만큼 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최후에 육肉이나 육체에까지 퍼져가는 통일성이다. 마치 신의 직관에 있어서는 개체로부터의 본질의 분리가 중요한 것과 같이 우선은 육체로부터의 혼의 분리가 중요하다. 신의 직관에 있어서 개체는 정신적으로 죽으며, 잔존하는 사체가 인간적 개체이며, 사체로부터 분리된 혼은 신인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부터의 혼의 분리, 개체로부터의 본질의 분리, 인간으로부터의 신의 분리는 또다시 폐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합체하고 있는 제 본질을 분리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혼은 자신의 상실한 부분, 자기의 육체를 또다시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신, 분리된 혼이 또다시 실제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또다시 실제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또다시 인간이 되는 것과 꼭 같이 혼은 자기의 육체 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차안과 피안과의 완전한 통일이 이제야 또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실은, 이 새로운 육체는 빛으로 가득 찬 육에이며 정화된 육체이며 경탄할 만한 육체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적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며 또한 인간적 본질과 같은 본질인 것과 같이 이 새로운 육체는 다른 육체이며 또하너 같은 육체인 것이다(각주7; "육체는 동일한 육체이며, 그래도 아직 동일한 육체가 아닐 것이다" -Augustinus)
그리고 이 일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모순되는 것을 통일하게 하는 기적의 개념에 도달한다. 초자연적인 실체는 공상의 실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초자연적인 실체는 인간의 심성에 상응하는 실체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실체는 인간을 괴롭히지 않은 실체이며 순수하게 주관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피안에 대한 신앙은 공상의 진리성에 대한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신에 대한 신앙이 인간의 심성의 진리성과 무한성에 대한 신앙인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신에 대한 신앙이 단지 인간의 추상적인 본질에 대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이 피안에 대한 신앙은 단지 추상적인 차안에 대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피안의 내용은 인격성의 행복, 즉 영원의 행복이다. 인격성은 현세에서는 자연에 의해 제한되고 침해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안에 대한 신앙은 자연의 제한으로부터 주관성의 자유에 대한 신앙이며 따라서 인격성과 무한성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격성의 영원성과 무한성이란 언제나 새로운 개체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종속 개념안에서의 인격성의 영원성과 무한성이 아니라 이들의 이미 실존하고 있는 개체 그 자체의 영원성과 무한성이다. 따라서 피안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대한 신앙은 신에 대한 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신앙과 신에 대한 신앙속에는 동일한 내용이 있다. 신은 자연의 모든 제한을 모면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인격성이다. 신은 철두철미 인간적인 개체가 존재해야 하며 또 존재하게 될 것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한성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다. 신적 본질은 인간적 본질, 그리고 더우기 자기의 절대적 자유와 비제한성안에 있는 주관적-인간적 본질이다.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과제는 이미 마치게 된다. 우리는 신의 세계외적-초자연적-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하였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 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 있어서 재차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초이며, 종교의 중간점이며, 종교의 종점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8.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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