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
종교의 숨은 본질은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 본질과의 통일이다. 그러나 종교의 형식 혹은 드러나고 의식된 본질은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구분이다. 신은 인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특정한 존재로서 알려진다. 그런데 사랑이란 종교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종교의 의식된 형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신과 동일화하고, 신과 인간과 동일화하며, 따라서 인간과 인간을 동일화한다. 신앙은 신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그 결과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한다. 왜냐하면 신은 인류의 신비적 종 개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으로부터의 신의 분리,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분리이며, 협동적 유대의 해소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앙을 통해 인간의 도덕이나 이성이나 진리에 대하여 단순한 감각과의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종교는 사랑을 통해 재차 이 모순에 대립한다. 신앙은 신을 개별화 한다. 신앙은 신을 하나의 특수한 다른 본질로 만든다. 사랑은 신을 일반화한다. 사랑은 신을 보통의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존재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신앙은 인간을 내부에서 자기 자신과 분열시키며, 따라서 외부에 있어서도 분열시킨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이 인간의 마음속에 만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의 신에 대한 신앙을 율법으로 만든다. 사랑은 자유이다. 사랑은 무신론자조차도 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자체가 무신론적이며 인간에 대립하는 특수한 신의 존재를 비록 반드시 이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실천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구별한다. 신앙은 진리를 오직 신앙에로 돌린다. 신앙은 한정된 특수한 진리(이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부정과 결합되어 있다)를 신앙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신앙은 본성적으로 배타적이다. 단지 하나의 일만이 진리이고 단지 한 사람만이 신이며 단지 한 사람만에게 신의 아들의 독점권이 소속된다. 다른 모든 것은 무이여 오류이며 망상이다. 다만 여호와만이 참된 신이다. 다른 신들은 공허한 우상들이다...
신앙은 특수한 명예감과 자기 감정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자연적인 인간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자기를 우수한 인간,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귀족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평민이다. 신이란 신앙에 있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한 구별과 우선이 인격화된 것이다(각주1 ; 케루수스는 기독교도들에 대해서 신에 의한 서열에서 일등임을 자랑한다는 것을 비난한다. "신이 존재하고, 그래서 후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 자신의 본질을 어떤 다른 본질로서 표상하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직접 자신 안에 두지 않고 이 다른 인격 안에 둔다. 신앙 있는 사람의 우선의 의식은 인격의 의식이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 다른 인격성 안에 가지고 있다(각주2 ; "나는 나의 행복과 죄의 서면 때문에 뻐기고 거만하다. 그러나 나의 행복과 죄의 서명은 무엇을 통해서 얻어지는가? 그거슨 타인의 명예에 의해서, 즉 주 그리스도의 명예에 의해서이다" -Luther.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 전서 1장 30절)
마치 하인이 그의 주인의 품위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것과 같이, 물론 자기는 자기 주인보다도 낮은 신분의 자유롭게 독립한 남자 이상으로 생각되는 것과 같이, 신앙이 있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다(각주3 ; 러시아의 장군, 뮌니히의 이전 부관은 "나는 그의 부관이었던 때 내가 사령관이 된 지금보다도 내 자신이 더 위대하다고 느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주에게 공적의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자기를 위해선 모든 공격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공적이 그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주의 명예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명예감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신앙은 거만하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의 우월한 감정과 자기의 자만과를 어떤 다른 인격 안으로 전이하는 것에 의하여 자연적인 거만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다른 인격이란 신앙 있는 사람보다는 더 월등하지만 그러나 신앙있는 사람 자신의 숨겨진 자기이며 그의 행복의 욕망이 인격화되어 만족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인격성은 자기가 자선가이며, 구제자이며, 구세주라는 규정-따라서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지 그 자신에게 그 자신의 영원의 구원에 관계시키는 규정-이외의 다른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의 특징적인 원리, 즉 종교는 자연적 능동형을 수동형에로 전화시킨다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이교도는 자신을 고양시키고 기독교도는 자신이 고양된다고 느낀다. 기독교도는 이교도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활동의 사상事象인 것을 감정이나 수용성의 사상에로 전환한다. 신앙 있는 사람의 겸손은 전도된 거만, 거만의 외관이나 외적 특징을 갖지 않는 거만이다. 신앙 있는 사람은 자기가 탁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탁월함은 그의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은총의 사건이다. 그는 탁월하게 되어진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보통 자신을 자기 자신의 활동의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목적이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이단자들 혹은 대체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하였다(각주4; 신앙이 아직 체내에 불, 즉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신앙에게 볼 때 이단자나 불신앙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 처벌은 신앙의 본질 안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우선 단지 신앙이 없는 자들로 부터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 없는 분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분리는 매우 비판적인 격리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자기에게 부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반대하게 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단지 신앙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신을 자기에게 반대하게 하지 않을 뿐이며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신을 자기에게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신분을 버리라고 하는 요구의 근거는 바로 이런 것 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자신에게 반대하게 하는 사람은 무가치하며, 버려져 있으며, 벌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자기에게 반대케하는 것은 그 자신 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선량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며,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악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신앙은 제한되어 있고 사로잡혀 있어서 모든 것을 호악好惡에 따라 해석한다. 신앙에 있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완고와 악의에서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적이다(각주5 ; 신약성서 속에는 이미, 무신앙에는 불복종의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제일의 악은 믿지 않는 마음이다"-Luther) 그러므로 신앙은 다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을 동화할 뿐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밀어 낸다. 신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대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쁘게 대한다. 신앙 속에는 악한 원리가 가로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성서에는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쓰여져 있다고 해서 반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앙이 심판 및 처벌의 선고를 신에게 맡긴다고 해서 반대해서는 안 된다. 이 성경 귀절과 다른 유사한 성경의 귀절들 역시 단지 기독교의 사법에 잇어서 타당할 뿐이고 기독교의 국법에 있어서는 타당하지 않으며, 단지 도덕에 소속할 뿐이고 교의학에 소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도덕적 언표를 교으학의 영역에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미 신앙의 냉담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과 인간과의 사이의 구별은 근대인의 인도주의의 결실이다. 신앙에 있어 인간은 신앙 안에서 해소된다. 신앙에 있어 인간과 짐승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은 오직 종교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단지 신앙만이 인간을 신의 마음에 들게 하는 덕을 자체 안에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척도이며 신의 희열은 최고의 규범이다.
따라서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인간, 바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인간, 신이 승인하는 인간이다. 인간과 신앙이 있는 사람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이미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떨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지 신앙의 구별이 극히 예리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만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이다. 신앙의 구별이 흐려지면 당연히 신앙 자체도 역시 냉담하게 되고 무성격하게 된다. 신앙은 그 자체가 아무래도 좋은 사물에 있어서만 관대하다. 사도 바울의 관용주의는 신앙의 근본 조항의 승낙을 전제로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신앙의 근본 조항에 관계하는 곳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 발생한다. 비본질적인 것의 영역에 있어서는 아무 율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곳에서 당신들은 자유이다. 그러나 분명히 신앙이 당신에게 권리와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다만 당신이 신앙에 손상되지 않은 권리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그와 같이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이다. 그리스도를 찬성하기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찬성하든가 혹은 반대하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신앙은 단지 적 혹은 친구를 알고 있을 뿐 비당파성을 알지 못한다. 신앙은 오로지 그 자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비관용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언제나 신앙의 일은 신의 일이고 신앙의 명예는 신의 명예라고 하는 망상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신은 본질적으로 신앙의 대상적 본질, 신앙 그 자체에 있어서의 대상인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종교적인 심성과 의식에 있어서 신앙의 사상事象은 신의 사상과 동일화된다. 신앙에는 신 자신이 관여한다. 즉 신앙이 있는 사람의 관심은 신 자신의 가장 내적인 관심인 것이다. "너희에게 손댄 자는 主의 눈동자를 스치는 것이다"라고 예언자 사가랴는 말하고 있다"(각주6 ; 그는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말하였다. 그는 그것에 의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치 인간의 눈동자를 조금만 건드려도 상하는 것과 꼭 같이 성도들이 조금만 모욕을 당해도 신이 훼손된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통찰하게 하려는 것이다"-Salvianus. "주는 성도들이 한 번도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그들의 가는 길을 그와 같이 주의 깊게 지키고 있다" -Calvin, 「기독교의 근본 교의」 제 I 권, 제 17 장 제 6절.) 신앙을 훼손하는 것은 신을 훼손하는 것이며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사랑은 죄 안에서도 덕을 인식하고 오류 속에서 조차도 역시 진리를 인식한다. 사람들이 다신교(일반적으로 우상 숭배) 속에서 진리르 보았던 것은 신앙의 힘 대신에 인간성의 본연에 충실한 통일의 힘, 이성의 힘, 인도의 힘이 들어 앉았던 때 이래의 일이다. 혹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때 편협한 신앙 안에서 신앙이 오직 악마속에서 도출한 것을 인간적이며 자연적인 근거에 의해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직 이성과 동일할 뿐이며 신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성과 꼭 같이 자유하며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나 신앙은 소심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일반적으로 사랑이 지배한다. 이성 그 자체는 보편적인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이 지옥을 발명하였던 것이지 사랑이나 이성이 발명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옥은, 사랑에 있어서는 공포이며 이성에 있어서는 불합리이다. 지옥 안에서 단지 신앙에 혼매昏昧나 그릇된 신앙만을 보려 한다면 측은한 일일 것이다. 지옥에 관한 것은 이미 성경에도 쓰여져 있다. 신앙은 일반적으로 어디에서나 동일한 것이다. 적어도 적극적-종교적인 신앙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적극적-종교적인 신앙이란 사람들이 여기서 취급되고 또 만일 우리가 이성이나 교양의 요소를 신앙과 혼동하지 않으려 한다면 취급되어져야 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이다. 이성이나 교양의 요소가 신앙과 혼동된다면 물론 신앙의 성격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이 기독교에 모순되지 않는다면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성향 및 이 성향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도 역시 신앙에 모순되지 않는다. 신앙은 처벌한다. 즉 사랑, 인간,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행위와 모든 성향은 신앙과 일치한다. 기독교의 종교 역사의 모든 공포(이것에 대해 우리의 신앙 깊은 사람들은 그것은 기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신앙이나 기독교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교 역사상의 사랑에 모순되는 행위가 기독교와 일치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의학적 기독교의 반대자들이 기독교도들이 행한 전율할 행위의 책임을 기독교에 돌리는 것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는 동시에 기독교에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단지 신앙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종교이기도 하며,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신앙을 의무지울 뿐만아니라 사랑에도 의무 지우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행위, 이단자들을 증오하는 행위는 기독교와 일치하고 그리고 동시에 모순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기독교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재가하는 동시에 사랑없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도 재가한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사랑을 율법으로 만들었다면 기독교의 귀의자들이 옳을 것이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종교 역사상의 전율할 만한 행위를 기독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신앙을 율법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면 그 때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비난은 무조건적으로 구속없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자유하게 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만큼 높은 곳에 올려 놓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런 자유가 없었으며 또 가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을 신앙의 지배 아래 예속시킨다.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공개적인 교의에 지나지 않으며 신앙은 비의적秘義的 교의이다. 사랑은 단지 기도교의 도덕일 뿐이지만 신앙은 기독교의 종교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그것이 기독교적이며, 자체를 기독교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이미 하나의 특수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은 사랑이 본질 안에 가로놓여 있다. 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적 성질을 방기하지 않는 한, 즉 사랑을 솔직히 최상의 율법으로 만들지 않는 한 기독교적 사랑은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처 입히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기독교와 소위 이교와의 사이의 구별을 폐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적 성질을 방기하고 솔직히 최상의 율법으로 만들지 않는 한, 기독교적 사랑은 특수성을 위해 사랑의 본질과는 모순에 빠지는 사랑이며 그러므로 옛부터 바르게 풍자의 대상이 된 이상한 사랑이며, 사랑이 없는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 자체에 만족하고 있다. 진실한 사랑은 어떤 특수한 호칭도 특수한 권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예지와 자연과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즉 사랑은 종속의 통일성이 신성을 매개로 하여 실현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사랑이 어떤 인격의 이름에 근거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단지 미신적 표상(그것이 종교적 종류의 것이든, 사변적 종류의 것이든 상관 없다)이 이 인격과 결합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미신이란 언제나 종파 근성과 분립주의가 결합되어 있으며, 분립주의는 광신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사랑은 단지 종속의 통일성이나 예지의 통일성이나 인류의 본성에 기초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 근본적인 사랑, 원리를 상실하지 않은 사랑, 보증된 사랑, 자유한 사랑인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사랑은 근원, 그리스도의 사랑 조차도 유래한 근원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출된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의 전권에 의해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본질에 의하여 사랑하였던 것 이다. 만일 사랑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되어 있다면 그 사랑은 오직 이 인격의 승인이 달하는 그만큼의 하나의 특수한 사랑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 자체의 토대를 근거로 하지 않은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인가? 그와 같이 사랑은 꾸며진 사랑이며 모방된 사랑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에만 우리는 진실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사랑의 원인일까? 혹은 오히려 그리스도는 사랑의 사도가 아닌가? 인간성의 통일성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근거가 아닌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사랑은 환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나는 종속의 본질을 초월해 나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사랑은 환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나는 종속의 본질을 초월해 나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높은 것을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을 다만 사랑으로부터 봉토로 얻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미신적인 표상 속에서 인정된 것과 같은 사랑의 소유주는 아니었다. 사랑의 개념은 독립한 개념이며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승인하는 것은 그 생애가 사랑의 법칙이나 개념과 일치한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 발견할 때에만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사랑의 관념이 결코 단지 기독교와 함께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식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의 관념이 결코 기독교적인 관념만이 아니라는 것에 의해서 증명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전율이 이 관념의 출현과 평행한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인류를 인류의 개념과 모순되는 방법으로 결합한 정치의 왕국은 스스로 와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적 통일은 잔인한 통일이다. 로마의 전제주의는 내부로 향해 제국 자체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정치의 이런 비참에 의해 마음을 짓누르는 정치의 올가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로마 대신에 인류의 개념이 나타나서 그것과 함께 지배의 개념 대신에 사랑의 개념이 나타났다. 유대인 조차도 희랍적 교양의 인도적 원리 속에서 그들의 증오해야 할 종교적 종파 근성을 완화시켰다.
필로Philo는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찬미한다. 국민적 차이가 해소되었다는 것이 인류 자체의 개념 안에 가로놓여 있었다. 사유하는 정신은 벌써 일찌기 인간의 시민적-정치적 분리를 초극하였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실이 인간을 노예로부터 구별하여, 노예를 인간으로서 주인과 동격으로 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주인과 노예 사이의 교우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는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노예인 에픽테트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황제 안토니우스도 역시 스토아 학도였다. 그와 같이 철학이 인간들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스토아 학도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즉 사랑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가르쳤다(각주7 ; 소요학파 사람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만인에게 대한 사랑도 역시, 특수한 종교적인 원리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자연적인 즉 일반적-이성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언표는, 황제 안토니우스의 말인데 적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가장 명성 높게 알려진 말보다도 더 무한하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토아 학도들의 실천적 원리는 그런 하나의 사랑의 원리이다. 세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의 도시이며 인간들은 동포, 시민이다. 특히 세네카는 가장 숭고한 말 가운데서 사랑, 인자, 인도(특히 노예에 대한)를 찬미하고 있다. 그와 같이 정치적 엄숙주의와 애국적 편협성과 국한성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들 인도적 노력의 하나의 특수한 현상이었다. 즉 기독교는 이 새로운 원리의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따라서 종교적인, 확실히 무엇보다 강한 현상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교양이라는 방법으로 가치를 주장한 것이, 여기에서는 종교적 심성이나 신앙의 일로서 언표된다. 기독교 자체는 그 때문에 또다시 일반적인 통일을 특수한 통일로 만들었고 사랑을 신앙의 부대적 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이런 일에 의해서 사랑을 일반적인 사랑과의 모순에로 떨어지게 하였다. 통일은 그 근원에까지 환원되지 않는다. 민족적 차이들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제 신앙의 상위,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의 대립이 민족적 대립보다도 더 심하게 그리고 더 한층 무겁게 역사를 등장하였다.
특수한 현상에 기초된 사랑은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사랑의 본질에 모순한다. 사랑은 어떤 제한에도 견뎌 내지 않고 모든 특수성을 초극한다. 우리는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목적이라는 것에 의해, 그리고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가진 본질이라는 것에 의해 사랑의 대상이다. 이것은 종속의 법칙이며 예지의 법칙이다. 사랑은 직접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아니 사랑은 다만 직접적인 것으로서만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바로 사랑 안에서 종속을 현실화하는 나와의 사이에서 이미 자기 안에 종속을 현실화하게 되어 있는 어떤 개성의 표현을 삽입한다면, 나는 사랑의 본질을 폐기하고 우리 이외의 어떤 제 3자의 표상을 통해서 통일을 교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나에게 사랑의 대상인 경우에 그가 그 원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사성 혹은 관계 때문이며 그 자신을 위한, 즉 그의 본질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의 인격성의 경우에는 인격성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독립하여 그 인격성으로 하여금 사랑할 만한 그리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질에 상관없이 의식과 심성 안에 확립되는 것이다.
마치 이성이 종속의 객관적 실존인 것과 같이 사랑은 종속의 주관적 실존이다. 사랑과 이성에 있어서 중간 인격의 필요는 소멸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종속의 통일성이 민중 의식에 파고들어 모습을 나타낸 하나의 형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을 사랑하였다. 그리스도는 성이나 연령, 신분이나 민족성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고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논한 종교의 본성에 따라서 하나의 형상으로 보여진 것, 혹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구현된 것이다. 이 인격은 그러나 종교적 대상으로서 이해되면 단지 하나의 현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단지 하나의 이상적인 인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귀의자들의 징표로서 사랑이 언표된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종속의 통일성이 성향에 의하여 확증되고 현실화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종속은 어떤 단순한 사상思想이 아니다. 종속은 사랑의 감정이나 심성이나 정력 안에 실존한다.
나에게 사랑을 불어 넣는 것이 종속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은 종속의 심장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랑의 의식으로서 종속의 의식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동일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통일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하는 자, 자신을 종속의 사랑과 종속의 본질에 상응하는 보편적인 사랑에로 고양시키는 자는 기독교도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다(각주8 ; 행위하는 사랑은 당연히 언제나 특수한 제한된 사랑, 즉 가장 가까운 것에 향해지는 사랑이며 또한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본성적으로 보편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하며 종속의 이름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적 사랑은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본성적으로 배타적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하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이도록 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종속으로서의 종속의 의식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는 소멸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리스도의 참된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종속의 의식의 대표자이며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9.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결론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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