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결 론 ]
우리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모순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순 속에서 기독교-종교 일반에 특유한 본질-의 위로 우리 자신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실제적이며 명백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두철미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며 신의 본질의 비밀은 인간 본질의 비밀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그것의 내용인 인간성에 관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는 오히려 자신을 인간적인 것에 대립시킨다.
혹은 적어도 종교는 종교의 내용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공공연한 고백과 수긍은 역사의 필연적인 전환점이 된다. 즉 신 의식은 종 die Guttung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고백, 인간은 단지 자신을 자기의 개성 혹은 인격서의 제한위로 높일 수 있으며 또 높여야 한다는 것 뿐이고, 자기의 종속의 법칙이나 본질 규정 위로 높일 수 없으며 또 높여서도 안된다는 고백, 인간은 인간의 본질 이외의 어떤 본질도 절대적인 신적 본질로서 사유하고, 감지하고, 표상하고, 느끼고, 믿고, 의욕하고,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다는 고백이 그것이다(각주1; 내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이란 자연을 포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연의 본질에 속하는 것 것(이것은 비속한 유물론의 주장과 반대이다)과 같이 자연 또한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적어도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절대적" 철학의 비밀이기도 한 주관적 관념론의 주장과 반대이다) 우리는 다만 인간과 자연의 결합에 의해서만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이기주의를 초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단지 부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판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오직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분리할 뿐이다. 단 허위로부터 분리된 진리는 언제나 낡은 진리에서 구별된 하나의 새로운 진리이다. 종교는 인간 최초의 자기의식이다. 종교가 신성한 것은 그것이 최초의 의식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의 최초의 것, 즉 신은 이미 증명된 것과 같이 그 자체가(진리에 의하면) 제 2의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단지 인간의 본질 자체가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있어서 제 2의 것, 즉 인간은 제 1의 것으로 조정되고 또 언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떤 도출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근원적인 사랑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그 때에만 사랑은 진실하고 신성하며 신뢰할 만한 힘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본질이 인간 최고의 본질이라면 그 때에는 실천적으로도 최고이며 제 1의 율법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이것은 최상의 실천적 근본 명제이며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다. 친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간단히 말해서 도덕적인 관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진실로 종교적인 관계이다. 삶은 일반적으로 그 본질적인 관계에 있어서 철두 철미 신적 성질의 것이다. 삶은 그것의 종교적 봉헌을 처음으로 목사의 축복을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그 자체 외적인 부가물에 의하여 대상을 신성화하려 한다. 종교는 이에 의하여 스스로 자체만을 신성한 권력으로 언표한다. 종교는 그 자체 이외에는 단지 지상적인 비신적 삶의 관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으로 종교는 이 관계들을 성화하고 봉헌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사랑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결혼(각주2; 물론 오직 사랑에서 생긴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결혼만이 신성하다. 왜냐하면 단지 외적 제한을 유대로 하고 있을 뿐 자체 안에 있어서 만족하고 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사랑의 자기제한을 유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결혼, 간단히 말하면 스스로 맺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않는 결혼은 결코 진실한 결혼이 아니며 그러므로 참된 도덕적인 결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은 자체에 의하여 맺어지고 결합의 본성에 의하여 신성하다. 다만 진실한 결혼, 결혼이나 사랑의 본질에 상응하는 사랑만이 종교적인 결혼이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인 관계들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다. 모든 도덕적인 관계들이 도덕적이며 모든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배양되는 것은 다만 관계들이 이미 자체에 의하여 종교적 관계로 인정되는 곳에서뿐이다. 진실한 우정이 존재하는 것은 우정의 한계가 종교적 성실에 의하여 지켜지며, 믿는 사람이 신의 가치를 지키는 것과 같은 성실에 의하여 지켜지는 곳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의 우정, 재산, 결혼, 복지는 신성하며 또 당신에게 있어 신성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그 자체에 있어서 신성하게 하라!
기독교에 있어 도덕률은 신의 계명으로서 파악된다. 도덕 그것이 종교성의 규준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이 종속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해서 그 자체가 종교의 의의를 갖지는 못한다. 종교의 의의는 신앙에 속할 뿐이다.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본질로서의 신은 도덕 위를 떠돈다. 그리고 인간에겐 오직 타락만이 귀속하는 것에 반하며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본질로서의 신에겐 최선의 것이 소속한다. 인간은 생활과 인간에게 바쳐져야 하는 모든 성향과 그의 최선의 모든 힘을 요구를 갖지 않은 그 본질을 향해 낭비한다. 실제의 일은 자기 성질이 없는 수단이 되고 단지 표상되고 상상된 것의 원인만이 실제의 원인이 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으 ㄹ희생으로 제시해 준 은혜를 신에게 감사한다. 인간이 자기의 은인을 향햐 말로 표현하는 감사는 단지 표면저인 감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감사는 그의 은인에게 향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해당한다. 인간은 신을 향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배은망덕하다(각주3;"신이 통치, 주인, 피조물을 통하여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조물로 몰리며, 피조물에 기대에 창조주에 의지하지 않는다-그들은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에게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왕들로부터 신들을 만들었던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 혹은 은혜가 왜 신으로부터 오며 절대로 피조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인가를 알 수 없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피조물에 의해서 신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우리를 돕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수단이다"-Luther)
이와 같이 종교에 있어서의 도덕적 성향은 몰락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을 향하여 인간을 바친다. 피비린내나는 인간 희생은, 사실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비밀의 조야한 감성적 표현에 불과하다. 피비랜내나는 인간 희생이 신에게 바쳐지는 곳에서 이런 희생은 최고의 희생에 해당하며 감성적 생활은 최고의 선으로 인정된다. 사람들은 바로 이 때문에 생명을 신에게 바치고 특별한 경우에 그것에 의해 신에게 최대의 영예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만일 기독교가-적어도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는-더 이상 피비린내나는 희생을 신에게 바치지 않는다면, 이는 다른 이유들을 제지하고 다만 감성적 생활이 더이상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대신에 혼을, 심성을 바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감성적 생활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책임-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것과 같은 책임-을 종교적 책임을 위한 희생으로 제공하고, 인간에 대한 관계를 신에 대한 관계를 위한 희생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공통사이다. 기독교도들은 신의 무요구성-이것은 오직 순수한 숭배의 대상인데-의 개념에 의하여 확실히 많은 퇴폐한 표상들을 제거하여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무요구성은 단지 종교 특유의 본질을 확실하게 할 수 없는 추상적, 형이상학적 개념에 불과하다. 숭배의 필요는 오직 한 측면, 즉 주관적 측면으로 옮겨 놓으면 모든 일면성이 그런 것과 같이 종교적 감성을 냉냉하게 한다. 그러므로 상호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 주관적 요구에 상응하는 규정이 신 안에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모든 현실적 규정은 상호성에 근거하고 있다(각주4;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 상 2장 30절. "오! 선하신 아버지시여! 영원한 증오에 가장 합당한 가장 저급한 벌레조차도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벌레는 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혹은 오히려 자기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Bernardus ad Thomam. 이것은 매우 아름답고 중대한 언표이다. 만일 내가 신에게 찬성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게 찬성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수동형은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능동형이며 객체는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주체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임을 뜻하는 것이며 사랑받는다는 것은 신임을 뜻하는 것이다. 신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하며 인간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중에야 비로소 처음의 일이 전도되고, 수동형은 능동형으로 전화되며, 능동형은 수동형으로 전화된다)
종교적 인간이 신에 대한 일을 생각하는 것은 신이 그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가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 대하여 질투가 심하다. 종교는 도덕에 대하여 질투한다(각주5;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좋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 하리니 이느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사사기 7장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신다. 무릇 사람을 믿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믿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예레미아 17장 5절. "신은 우리의 금이나 육체나 재화를 요구하지 않고 그것을 황제에게, 즉 세계나 국가의 대표자에게 주고 그리고 황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이며 최선의 것인 혼을 자신을 위해 보류하였다. 우리가 신을 믿는 것과 같이 사람은 혼을 신에게 주어야 한다"-Luther) 종교는 도덕에서 최선의 힘을 흡수한다. 종교는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주지만 그러나 신은 것은 신에게 준다. 그리고 진실한 온 마음의 성향, 즉 심성은 신의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신성하였던 시대에는 결혼이나 재산, 국법이 존경된 것을 본다. 그것은 그 근거를 종교 안ㄴ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자연적-인륜적-법률적 의식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식에 의하여 법률적이고 인륜적인 관계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법률을 법률 그 자체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 자에게 법률은 결코 종교에 의하여 신성한 것으로 되지 않는다. 재산은 신적 제도로서 표상된 것에 의하여 신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신적 제도로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신의 술어 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신적이기 때문에 신의 술어인 것이다. 이교도들이 빛이나 샘을 숭배하는 것은 빛과 샘이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것 차에의 의하여 인간에게 어떤 은혜적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며 고뇌하는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빛이나 샘의 우수한 성질 때문에 그것들에게 신적 영예를 표시하는 것이다.
도덕이 신학에 기초를 두고 법률이 신의 제정에 의존하는 곳에서 우리는 가장 부도덕하고 가장 불법적이고 가장 유해한 사물을 정당화하며 확립시킬 수 있다. 내가 도덕을 신학에 근거지을 수 있는 것은 오닉 나 자신이 이미 도덕에 의하여 신적 본질을 규정하였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나는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의 어떤 규준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에서 내가 모든 가능한 것들을 도출할 수 있는 부도덕하고 자의적인 기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도덕을 신을 통하여 기초를 세우려 한다면, 나는 도덕을 이미 신 안에서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나는 도덕이나 법률을-간단히 말하면 모든 본질적인 관계들을-그것 자체를 통해서만 기초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진리가 명하는 대로 진실하게 기초지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들 자체에 의해서 기초될 때뿐이다. 어떤 것을 신 안에 조정하거나 혹은 신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은 이성의 눈을 벗어나서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는 일 없이 그것을 의심할 수 없는, 상처나게 할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서 설정하는 것 이외의 다른 뜻이 없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교활한 의도가 없는 곳에서 조차도 자기기만은 도덕이나 법률을 신학 위에 확립하려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법을 성실하게 취급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선동이나 위로부터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기독교적 국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이성적인 국법, 적법적인 국법, 인간적인 국법을 필요로 할 뿐이다. 바른 것, 참된 것, 선한 것은 도처에 그 신성화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 즉 자체의 성질 안에 가지고 있다. 도덕을 성실하게 취급하는 곳에서 도덕은 바로 그 자체에 있어서 신적인 힘으로 인정된다. 만일 도덕이 자기 자신 안에 아무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는 도덕을 위한 아무 내적인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은 그때 종교의 근거 없는 자의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자각적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다만 어떤 환상의 파괴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 환상은 어떻든 상관이 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실제적 생활의 힘을 없애며 그와 같이 진리와 덕에 대한 감각을 말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 가장 내적이고 진실한 성향인 사랑까지도 종교성을 통하여 표면적-환상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랑은 인간을 단지 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다만 표면적으로 인간을 사랑할 뿐이고, 실제는 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종교적 관계를 전도하기만 하면 된다. 즉 우리는 종교가 수단으로 설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파악하고 종교에 있어서 종속적인 것 부차적인 것, 조건인 것을 주요 사항, 원인에로 높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환상을 파괴하고 투명한 진리의 빛을 우리 눈앞에 갖는 것이다. 세례와 만찬의 성배들(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상징이다)은 우리의 이 진리를 확증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세례의 물은 종교에 있어선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성령은 이 수단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 규정을 통하여 이성과 사물의 본성의 진리와의 모순에 빠진다. 일면으로는 물의 자연적 성질에 어떤 중요한 것이 있고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그 성질이 무이며 신의 은총과 전능의 단순한 자의적 수단이다. 우리가 이것들과 다른 것들의 참기 어려운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세례에 진실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물 그 자체의 의의의 표시로서 고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세례는 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불가사의한, 그러나 자연스런 작용을 우리에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은 실제로 인간에게 물리적인 작용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도덕적이고 지적인 작용을 부여한다. 물은 단지 육체의 더러움에서 인간을 순화할 뿐만 아니라 물 속에서 인간을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게도 한다. 즉 물 속에서 인간은 보다더 분명하게 보고, 보다더 분명하게 생각한다. 물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보다더 자유롭게 느끼는 것이다. 물은 욕망의 열화를 꺼버린다. 얼마나 많은 성자들이 악마의 유혹을 초극하기 위하여 물의 자연적인 성질에로 도피하였던 것인가! 은총에 의해서 거부된 것이 자연에 의해서는 허용되었다. 물은 단지 식이요법의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학의 영역에도 속한다. 자신을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목욕하는 것은 비록 최저의 덕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덕이다(각주6; 분명히 기독교의 세례 역시 단지 고대 자연 종교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자연 종교에 있어서는 페르시아의 종교의 경우와 같이 물은 종교적 정화의 수단이었던 것이다-S. Rhode. 그러나 여기서 세례는 기독교에 있어서보다 훨씬 더 진실한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훨씬 깊은 의미도 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자연 종교에 있어서 세례는 물의 자연적인 힘과 의의에 근거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고대 종교의 이와 같은 단순한 자연관에 대하여 우리의 사변적-신학적인 초자연주의는 아누 감각도 이해력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 이집트인, 헤브루인이 육체의 청결을 종교적 의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의 성자들보다도 훨씬 더 이성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성자들은 그들 종교의 초자연적인 원리를 육체의 불결속에서 명확하게 확증하였다. 이론에 있어서의 초자연주의는 실천에 있어서의 반자연주의가 된다. 초자연주의는 단지 반자연주의에 대한 완곡어에 불과하다)
소나기를 만나면 아욕의 정념이 사라진다. 물은 자연과 친숙해지기 위한 가장 가깝고도 제일가는 수단이다. 목욕은 우리의 자아성을 자연의 객관적 본질속에서 분리시키는 화학적 과정이다. 물 속에서 위로 떠오른 인간은 재상한 새로운 인간이다. 만일 우리가 상상된 초자연적인 은총의 수단을 자연적인 수단과 바꾸어 놓는다면, 은총의 수단 없이 도덕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교의는 하나의 좋은 구실을 가지고 있다. 도덕은 자연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도덕은 가장 단순한 자연적 수단과 결부되어야 한다. 가장 깊은 비밀은 비속한 것이나 일상적인 것 속에 가로놓여 있다. 초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은 실제의 비밀을 환상적인 비밀들을 위해 희생으로 바치며, 예를 들면 지금의 경우엔 물의 실제의 기적적인 힘을 상상된 기적적인 힘에 희생으로 바치는 것과 같이 비속한 것이나 일상적인 것을 무시한다. 물은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단순한 은총 수단 혹은 의약이다. 그러나 물이 효과를 내는 것은 종종 그리고 규칙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일회적 작용으로서의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무의미한 제도이든가 혹은 만일 그것에 실제의 작용이 결합된다면 미신적인 제도이든가이다. 이에 반해서 만일 세례 중에 물의, 일반적으로 자연의,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치료력이 추체화되어 찬미된다면 세례는 이성적이며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의 성례는 보충을 필요로 한다. 보편적인 생활요소로서의 물은 우리에게 자연으로부터의 우리의 근원을 상기 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근원을 식물이나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에 있어 우리는 순연한 자연의 위력 아래 굴복한다. 물은 자연적인 평등과 자유의 소재이고 황금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무기계와 함께 자연적이라고 하는 공통의 이름 아래 포괄하는 동물계와 식물계로 부터 구별한다. 즉 우리는 자연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의 구별, 우리의 본질적인 차이를 찬미하여야 한다. 우리의 이 차이의 상징들이 포도주와 빵이다. 포도주와 빵이란 질료에 관해서 말하면 자연의 산물이고 형상에 따르면 인간의 산물이다. 만일 우리가 물에 있어서 "인간은 자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면, 포도주와 빵에 의해서 우리는 "자연은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적어도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자연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자연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적-정신적인 활동은 물에서는 몰락하고 포도주와 빵에서는 자기만족을 얻는다. 포도주와 빵은 초자연적인 산물이다. 단 그것은 이성과 자연에 모순되지 않는 유일하게 타당하고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이다. 만일 우리가 물에서 순수한 자연력을 숭배한다고 하면 포도주와 빵에 있어서는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의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제는 다만 의식에까지 성숙한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세례는 이미 어린 아이들에게도 역시 베풀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동시에 자연에 대한 정신의 바른 관계를 찬미하는 것이다. 즉 자연은 소재를 주고 정신은 형상을 주는 것이다. 세례의 성례는 자연에 대한 감사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빵과 포도주의 축제는 인간에 대한 감사를 주입한다. 포도주와 빵은 가장 오래된 발견에 속한다. 포도주와 빵은 우리에게 인간이 인간의 신이며 구세주라는 진리를 현재화하며, 구체화한다.
음식은 성만찬의 비밀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실은 원래 종교적인 할동인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각주7;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 일보다도 용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먹지 않으면 춤을 추지 못한다'라고 보통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즐거운 머리는 만복 위에 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며 사람들은 이것을 곧 익혀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 그리스도도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 필요한 일을 행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도 감미롭고 즐거운 식시를 준비하여 나는 너희에게 어려운 일을 과하지 아니하고 만찬을 정하였다'"-Luther) 그러므로 당신을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한 조각의 빵에, 그리고 또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한 모금의 포도주에, 그대에게 이들 유익한 선물을 보내는 신-인간-을 생각하라! 그러나 인간에 대한 감사 때문에 자연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 포도주는 식물의 피이며 빵은 식물의 살이며,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의 생존의 복지를 위하여 희생으로 바쳐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식물은 당신에게 자기를 무로 하여 당신의 향유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연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또한 당신은 빵과 포도주의 자연적인 성질에 힘입고 있다는 감사를 잊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비속한 일상적 행위이며, 그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정신도 없고 심성도 없이 수행되기 떄문에 그것을 종교적 행위라고 말한다는 것을 조소하고 싶다면 조소해도 좋다. 그때에 당신은 성만찬도 역시 그것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경우에 심성도 정신도 없이 행해지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고 또 당신은 빵과 포도주를 향유한다는 것의 종교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언젠가 일상적인 활동이 비자연적-폭력적으로 중단된 상태에 당신 자신을 놓아 보라. 배고픔과 갈증은 단지 인간의 육체적 힘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및 도덕적인 힘을 파괴한다. 배고픔과 갈증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성과 오성과 의식을 빼앗는다. 오! 만일 당신이 언젠가 그와 같은 결핍과 불행을 체험한다면, 어떻게 당신은 또다시 인간성과 오성을 부여한 빵과 포도주의 자연적인 성질을 축복하며 찬미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이 우리는 범속한 것에서 범속하지 않은 의의를 획득하고 일상적인 생활 자체에서 종교적 의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단지 사물의 일상적인 범속한 경과를 중단하게 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빵이 신성하고 포도주가 신성하며 그리고 물 또한 신성할지어다! 아멘.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10.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전체 목차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_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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