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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December 28,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어거스틴주의Augustianinsmus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us와의 차이는 단지 후자가 합리주의의 유형으로 표현하는 것을 전자는 종교의 유형으로 표현한다는 것 속에 존립하여 있을 뿐이다. 양자는 같은 것을 말하며 똑같이 선을 인간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나 이것을 펠라기우스주의는 직접적으로 합리주의적-도덕적 형식으로 말하며, 어거스틴주의는 간접적으로 신비적 즉 종교적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다.(각주; 펠라기우스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에 매우 많은 힘을 부여하며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기도하는 마음을 약화시킨다"-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를 반박하여 장ㄴ과 은총에 관하여 논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단지 조물주 즉 자연을 기저로서 가지고 있을 뿐이며 구주 즉 종교적 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펠라기우스주의는 신을 부인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그 대신에 인간을,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독립적인 본질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높여 신으로 삼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같은 저서 제 33장 및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반대한 곳을 참조하라. 어거스틴주의는 인간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신을 인간에게로 저하시키고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굴욕까지 받게 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 어거스틴주의는 신을 인간의 지위에 놓는다. 양자의 귀결은 같다. 구별은 단지 가상이며 경건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거스틴주의는 단지 뒤집어진 펠라기우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주의가 주체로서 조정한 것은 어거스틴주의는 객체로서 조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쪽 모두가 똑같이 인간에게 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신에게 부여되는 것은 실은 인간 자신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인간의 신에 관해서 단언하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단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악마를 자신의 신으로서 가지고, 그리고 악마가 악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최고 존재로서 존경하며 찬미할 때에만 어거스틴주의가 진리,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와 대립되는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존재를 신으로 존경하는 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인간성의 근본적 타락에 관한 교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과 동일한 교의, 즉 인간은 어떤 선도, 실은 어떤 일도 자기 자신에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써는 행할 수 없다는 교의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힘과 자발적-도덕적 활동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이 신 안에서도 역시 도덕적 활동을 부정하고, 동양의 허무주의자 혹은 범 신론자와 똑같이 신적존재란 절대로 의욕하지 않으며 혹은 행위하지도 않는 존재, 무관한 존재,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할 때에만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신을 활동적인 존재, 그리고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활동적이며 도덕적으로 비판적인 존재로서 규정하는 사람-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선에는 보상하고, 악을 벌하고, 악을 거부하고, 악을 힐난하는 존재로서 규정하는 사람-은 단지 의관적인 인간의 활동을 부인할 뿐, 실은 인간의 활동을 최고이며 가장 확실한 활동으로 만들 것이다. 신을 인간적으로 행위하게 하는 사람은 인간적 활동을 신적 활동이라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활동적이 아닌 신, 그리고 도덕적으로 혹은 인간적으로 행위적이 아닌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성의 개념을 행위의 개념에 의존시킨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인간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 활동보다 더 높은 활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대상화하고, 그리고 다음에 또다시 자신을 주체나 인격으로 전화하여서 대상화된 존재의 대상으로 삼는다(각주;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대상화인 종교적인 자기대상화는 확실히 반성이나 사변의 자기대상화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에서 충분히 명백하게 언명되어 있다. 반성이나 사변의 자기 대상화는 자의적인 것이지만 종교의 자기 대상화는 자의적이 아니고 필연적인 것이다. 마치 종교적 자기 대상화의 필연성은 예술이나 언어의 필연성과 같은 것이다. 때가 감에 따라 물론 신학은 끊임없이 종교에 일치하게 된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인간은 자신을 사유하고, 자신에게 있어선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에게 대상이다라는 것은 대상의 대상, 즉 다른 대상의 대상으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지금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하여 하나의 대상이다.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신에게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신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에 대해 생기 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은 인간이 선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면 신의 자애 없이는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인간은 인간 행위의 무의미성을 철회한다. 즉 인간의 자기 성향과 행위를 신의 대상을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표로 삼으며-정신의 대상은 행위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신의 행위를 인간 구원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간 해위를 의미있게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외관적으로는 가장 낮게 천시당하는 반면 실은 가장 높게 올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하여서 오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 행위의 목표를 인간의 도덕적이고 영원의 구원 이외의 다른 곳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목표가 없는 것이다. 신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신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와는 다른 행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행위라면 그것이 어떻게 나를 대상으로 내 안에서 작용할 수 있겠는가? 만일 신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면 신의 행위가 어떻게 인간적인 목표, 즉 인간을 선하고 행복하게 하는 목표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목표는 행위를 규정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인간이 도덕적인 개선을 자신의 목표로 설정한다면 인간은 신적 결단과 신적 기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만일 인간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면 신은 인간적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에 상응하는 인간적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하나의 대상으로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자기의 행위를 자신과 구별되는 대상적 행위로서 직관하며 선을 오직 대상으로서 직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충동과 동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선)으로 부터 받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자기 외부에서 찾고 이 본성을 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행에 대한 충동이 오직 그가 선하다고 하는 곳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은 자명하며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신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추상화된 최고의 주체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모든 선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이 주체가 되면 될수록 인간은 더욱 자신의 추체성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신 자신은 인간이 포기한 인간 자신이고, 그 포기한 자신을 다시 소유한다고 자신에게 변명하기 때문이다. 동맥의 활동은 혈액을 가장 외부에까지 보내고 정맥의 활동은 혈약을 다시 내부로 끌어들인다. 생명 또한 일반적으로 끊임없이 심장 수축과 심장 이완에 의해 존립하는 것이다. 종교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종교적 심장 수축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자신으로부터 몰아내고 인간은 인간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내던진다. 종교적 심장 이완에 있어서 인간은 일단 거부된 본성을 또 다시 자기의 심장속으로 받아 들인다. 오로지 신만이 스스로 행위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거부력의 작용이다. 신으 내 안에서, 나와 함께, 나를 통하여, 내 위에, 나를 위하여 행위하는 존재이다. 신은 나를 구원하는 원리이며 나의 선한 성향과 행위의 원리이며 결국 나 자신의 선한 원리이고 본성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견인력의 작용이다.

위에서 일반적으로 서술된 종교의 발전 과정은 특히 인간이 점점 더 신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점점 더 승인한다고 하는 것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처음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없이 자기의 외부에 조정한다. 이것은 특히 계시의 신앙 속에 나타난다. 후세대 혹은 문화가 발달된 민족에 대해선 자연이나 이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전 세대 혹은 아직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민족에 대해선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적 충동도 역시-뿐만아니라 청결에의 충동조차도-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例에서 우리는 동시에 다시 인간이 자신을 거부하면 할 수록 신은 바로 그만큼 낮아지며 평범한 인간의 유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상식적인 예의의 요구조차도 자발적으로 완수할 능력을 상실할 때보다 인간의 겸손이나 자기부인이 더 멀리 나아갈 때가 있을 것인가?(각주; 신명기 23장 12, 13절)

이에 반해서 기도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열정을 그들의 상상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한다. 기독교는 단지 선한 열정, 선한 성향, 선한 사랑만을 신의 계시, 신의 역사役事 즉 신의 성향, 신의 열정, 신의 사상으로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신이 제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은 말이 되어 나오고 원인은 결과와 같은 종류의 것이며 자기를 계시하는 존재는 계시와 같은 종류이다. 오직 선한 심성안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신은 그 자신 도덕적 완전만을 자기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신이다. 기독교는 내면적-도덕적 청정을 육체적 깨끗함과 구별한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하였다(각주; 예를 들면, 창세기 35장 2절 및 레위기 11장 44절, 20장 25절을 참조하라).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신에 의하여 명해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낼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은 외면적인 일에 있어서조차도 자기 자신의 의지라곤 없었다. 그 종교의 위력은 음식물에 관한 일에까지도 뻗쳐 있었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이 모든 외면적인 일들에 있어서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였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외부인 신 안에 놓았던 것을 인간 안에 놓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증주의의 가장 완결된 나타남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도는 교양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자유 사상가였다. 사물은 그와 같이 변한다. 어제까지고 여전히 종교였던 것이 오늘은 이미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된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2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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