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2, Ludwig Feuerbach, 이문출판사, 강대석 옮김, 1983년 -
형이상학이 사물의 본질에서 시간과 공간을 부정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가장 위험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삶에서도 박자와 실천적인 이해력을 갖는다. 공간과 시간은 실천의 제일 척도들이다. 형이상학으로부터 시간을 배제하고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영원하고 추상적인 실존을 신성화하는 민족은 결과적으로 정치에서도 시간을 배제하고 부당하고 반이성적이며, 반역사적인 안정원칙을 신성화하게 된다.
사변철학은 시간에서 유리된 하나의 발전을 절대자의 형식과 속성으로 만들었다. 발전을 이렇게 시간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그러나 사변적 자의의 훌륭한 걸작이고 신학자들이 모든 인간적인 감각을 갖되 감각이 없는, 사랑없이 사랑하는, 분노없이 분노하는 하나의 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사변철학자들도 절대자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시간없는 발전이란 발전없는 발전과 같은 말이다. 절대자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발전한다는 명제는 단지 거꾸로 생각될 때만 참되고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스스로 발전하고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존재가 절대적인 즉 참되고 실제적인 존재이다.
공간과 시간은 실제적인 무한성의 제시형식이다.
한계, 시간, 궁핍이 없는 곳에 성질도 에네르기도 정령精靈도 정열도 사랑도 없다. 고통을 받는 존재만이 필연적인 존재이다. 궁핍없는 실존은 남아도는 실존이다. 모든 필요성에서 해방되는 것은 실존의 필요성도 없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같은 것이고 하나는 스스로를 위해 다른 것은 타자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궁핍없는 존재는 쓸모 없는 존재이다. 고통을 받는 것만이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 고통이 충만한 존재만이 신성한 존재이다. 고통없는 존재는 본질없는 존재다. 고통없는 존재는 감성이나 본질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수동적인 원리를 내포하지 않는 철학, 시간없는 실존, 지속없는 현존, 지각없는 성질, 본질없는 본질, 삶이 없는 즉 살과 피가 없는 삶을 사변하는 철학은 절대자 일반을 추구하는 철학처럼 철저히 일면적이며 필연적으로 경험과 상반된다. 스피노자는 물론 물질을 실체의 속성으로 생각했지만 고통의 원리로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즉 물질은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에 상반되는 사유의 속성에 해당하는 제 규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추상적인 물질이고 물질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헤겔논리의 본질이 자연과 인간의 본질이지만 본질도 없고 자연도 없고 인간도 없는 것과 같다.
철학자는 인간 속에서 철학하지 않는 것, 오히려 철학에 대치되는 것, 추상적인 사고에 반대되는 것, 그러므로 헤겔에서 주註로 격하되는 것을 철학의 교재로 받아들여야 되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철학은 보편적이고, 상반되지 않고, 모순이 없고, 반박되지 않는 힘이 된다. 철학은 그러므로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것 즉 비非철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사유와 구분되는 비철학적이고 절대적으로 반 스콜라철학적인 본질이 감각주의의 원리이다.
철학의 주요한 도구이자 기관은 두뇌인데 그것은 활동, 자유, 형이상학적인 무한성, 관념론의 원천이고 마음은 고통, 유한성, 욕구, 감각주의의 원천이다 - 이론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사고와 직관의 관계다. 왜냐하면 사고는 두뇌의 욕구이고 직관과 감각은 마음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사고는 학문 및 체계의 원칙이고 직관은 삶의 원칙이다. 직관 속에서는 내가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고 사고 속에서는 나는 대상을 규정한다 ; 사고 속에서 나는 자아이고 직관 속에서 나는 비아非我이다. 사고의 부정으로부터만, 대상에 의한 규정으로부터만, 정열 즉 모든 쾌락과 고통의 원천으로부터만 참다운 객관적인 사상과 참다운 객관적인 철학이 발생한다. 직관은 실존과 직접 일치되는 본질을, 사고는 실존과 구분되고 분리되어 간접화된 본질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실존과 본질, 사고와 직관, 능동과 수동, 다혈적인 반 스콜라적 프랑스 감각주의 및 유물론의 원칙과 독일 형이상학이라는 스콜라적 둔중이 결합되는 곳에서만 삶의 진리가 있다.
어떤 철학인가에 따라 철학자도 비슷하고 어떤 철학자인가에 따라 철학도 비슷하다 ; 철학자의 특성 즉 철학의 주관적인 조건과 요소들은 또한 철학의 객관적인 조건이고 요소들이다. 삶과 인간과 일치된 참다운 철학자는 독,불적인 혈통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순결한 독일인이여, 이러한 혼합에 놀라지 말지어다! 벌써 1716년에 철학자의 강령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진술했다. "우리가 독일인과 프랑스인을 더욱 대비시키면 후자는 물론 성격상 더 활달하고 전자는 더 견실하다. 덧붙여 말한다면 獨-佛 혼합적인 기질이 철학하는데 최적이다. 말하자면 프랑스인을 아버지로 하고, 독일인을 어머니로 가진 아이는 훌륭한 철학적인 성품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아주 옳은 말이다 ; 다만 우리는 어머니를 프랑스 여자로 아버지를 독일 남자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여성원리이고 유한한 것에 대한 감각이고 유물론의 모태인 마음은 프랑스적인 의미가 있고, 남성원리이고 관념론의 모태인 두뇌는 독일적인 맛이 있다. 마음은 혁명을 일으키고 두되는 개혁을 한다 ; 두뇌는 사물을 고정시키고 마음은 움직이게 담든다. 그러나 운동, 파도, 정열, 피, 감성이 있는 곳에 역시 정신도 있다. 독일인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철학적인 현학주의와 스콜라주의로부터 눈을 돌리게 한 것은 다만 라이프니쯔의 정신이고, 다혈질적이고 유물-관념론적인 그의 원리였다.
마음은 지금까지 철학에서 신학의 보루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바로 마음이 인간 속에서 철저히 반 신학적인 원리이고 신학적인 의미에서 비신앙의 무신론적 원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자기 본질의 견고하고 신성한 절대적인 실재성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뇌는 구분이나 주-객관의 분리에 대한 장본인이므로 마음의 자기 본질을 마음과 달리 객관적이고 외형적인 본질로 변화시킨다. 물론 마음은 다른 본질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에도 자기와 유사하고 분리되지 않으며 모순되지 않는 본질만을 요구한다. 예컨데 종교적 충동인 마음은 말한다; "신은 고통을 받는다." 이에 반해 신학은 말한다 ; 신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신과 인간의 구분을 부정하나 신학은 그것을 주장한다.
유신론은 두뇌와 마음의 분열에 의존한다 ; 범신론은 이 분열을 분열 속에서 지양한다. 왜냐면 범신론은 신의 본질을 초월적인것으로만 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인신론人神論에는 이 분열이 없다. 인신론은 오성화한 마음이다 ; 그것은 마음이 그 나름대로 말하는 것을 두뇌에서 다만 이성적인 방식으로 말한다. 종교는 충동, 느낌, 마음, 사랑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속에서 신의 부정이고 용해이다. 새로운 철학은 그러므로 종교적 충동이라는 진리를 거부하는 신학의 부정이며 종교의 긍정이다. 인신론은 스스로 의식한 종교이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종교이다. 이에 반해 신학은 종교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종교를 거부한다.
쉘링과 헤겔은 서로 상반된다. 헤겔은 독립, 자족이라는 남성원리 즉 이상주의 원리를 대표하고 쉘링은 수동성, 수용성의 여성원리 즉 유물론적 원리를 대표한다. (쉘링은 처음에 피히테를, 다음에 플라톤과 스피노자를, 마지막으로 뵈메를 수용했다). 헤겔에게는 직관이 부족하고 쉘링에게는 사고 및 규정력이 부족하다. 쉘링은 단지 일반자 속의 사상가이며 사태의 특수성, 규정성에 접하면 상상속의 몽유병에 빠진다. 쉘링에 있어서 합리주의는 가상일 뿐이고 비합리주의가 진리이다. 헤겔은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원리로 나아갔으며 쉘링은 합리적인 원리에 모순되는 신비적, 상상적 실존과 실재서으로 나아갔다. 헤겔은 실재론에 대한 결함을 주제 넘는 말로, 쉘링은 미사여구로 보충한다. 헤겔은 평범하지 않은 것을 평범하게 쉘링은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표현한다. 헤겔은 사물을 단순히 사유로 만들고 쉘링은 단순한 사고를 - 예컨대 신의 무시성無始性같은 - 사물로 만든다. 헤겔은 생각하는 두뇌를, 쉘링은 생각하지 않는 두뇌를 현혹한다. 헤겔은 비이성을 이성으로, 쉘링은 반대로 이성을 비이성으로 만든다. 쉘링의 실재철학은 꿈 속에서 이고, 헤겔의 실재철학은 개념 속에서이다. 쉘링은 환상 속에서 추상적 사유를 거부하고 헤겔은 그것을 추상적 사유속에서 거부한다. 헤겔은 부정적 사고의 자기 부정 혹은 옛 철학의 완성으로서 새로운 철학의 부정적 출발이며 쉘링은 새로운 실재철학이 되다는 상상과 환상을 가진 옛 철학이다.
헤겔의 철학은 특히 칸트가 진술한 바와 같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모순을 지양하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모순의 지양이 단지 모순 내에서, 동일한 요소 안에서, 사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헤겔에 있어서 사유는 존재이다 ; 사유가 주어이고 존재는 술어이다. 논리학은 사유의 요소 안에 있는 사유이거나 스스로 사유하는 사유이고 이 사유는 술어가 없는 주어 혹은 스스로에 대해 동시에 주어와 술어가 되는 사유이다. 그러나 사유의 요소 안이 있는 사유란 아직 추상적인 것이다 ; 그것은 실현되고 외화된다. 이 실현되고 외화된 사유가 자연이고 실재성 일반이고 존재이다. 그러나 이 실재성 가운데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 스스로 술어가 결여되었음을 참다운 본질로 내보이기 위해 실재성의 술어를 스스로에서 떨쳐버리는 사유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헤겔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유롭고 독자적이며 스스로 행복한 존재에 이르지 못했다. 헤겔은 대상을 스스로 사유하는 사유의 술어로만 생각했다. 헤겔의 종교철학에 나타나는 실제 종교와 사유된 종교사이의 분명한 모순은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 처럼 사유가 주어로, 대상과 종교가 사유의 단순한 술어로 되어버린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철학의 개혁에 관한 예비명제 Vorlaeufige Thesen zur Reform der Philosophie] #02
http://uquehan.blogspot.kr/2012/12/vorlaeufige-thesen-zur-reform-der_22.html
[철학의 개혁에 관한 예비명제 Vorlaeufige Thesen zur Reform der Philosophie] #04
http://uquehan.blogspot.kr/2012/12/vorlaeufige-thesen-zur-reform-der_59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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