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된 것은, 감성적 대상에 관해서조차도,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해당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대상 의식은 자아 의식과 구별된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 의식은 자아 의식과 일치한다. 감성적 대상은 인간 밖에 있고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 자신 내면적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아 의식, 인간의 양심과 같은 친밀한 대상이다. 즉, 종교적 대상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친밀한 대상이다. 예를 들면, 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신은 감성적-육체적인 사물보다도 더 가깝고 더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용이하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각주 ; 「원리론」 제 5권, 제 16장) 감성적 대상은, 그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대상이며 심성에서, 판단력에서 독립하여 있다. 그러나 종교의 대상은 선택된 대상이며 가장 우수한 제 일급의, 최고의 존재이다. 종교적 대상은 비판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 즉, 종교적 대상은 신적인 것과 비신적인 것의 구별을 전제하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숭배할 가치가 없는 것의 구별을 전제한다(각주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옥타비안Octavian」 제 24장에서 이교도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사람들이 신을 존경하기 이전에 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의 대상은 인간의 대상적 본성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명제가 어떤 제한도 없이 타당할 것이다. 인간의 사유와 성향은 신의 사유나 성향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神의식은 인간의 자아 의식이며 神 지식은 인간의 자아 지식이다. 그대는 인간의 신으로부터 인간을 인식하며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부터 인간의 신을 인식한다. 인간과 인간의 신은 동일하다. 인간에게 신인 것은 인간의 정신이고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정신, 인간의 마음, 인간의 심정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신이 언표된 것이다. 종교란 인간의 숨은 보물이 엄숙하게 개막되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사상이 고백되는 것이며 인간의 사랑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고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의식인 종교가 인간의 자아 의식으로서 특징지어질때 마치 경건한 인간이 신에 대한 자아 의식이 자신의 본질의 자아의식이라는 것을 직접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직접적 의식의 결핍이 바로 종교의 특유한 본질을 기초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종교는 인간의 최초의 자아 의식이며, 실은 간접적인 자아 의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디서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와 같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철학에 선행한다.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전에 자신의 밖에서 잘못 인정한다. 인간 자신의 본성은 최초로 다른 존재자로서 대상이 된다. 종교는 인류의 본성의 어린아이다운 측면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기의 본성을(즉 인간을) 자기 밖에서 본다. 어린아이로서의 인간은 타인으로서의 자기에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에 ㅇㅆ어서의 역사적인 발전은 초기의 종교에 의해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후에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인정된다는 것, 즉 신으로 직관되고 숭배되었던 것이 후에는 어떤 인간적인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는 것이다. 전에 종교였던 것이 후에는 우상숭배가 된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숭배해 왔다. 인간은 자기를 대상화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대상을 자기의 본성으로서 인삭하였던 것은 아니다. 후의 종교는 거기까지 진보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있어서 진보란 어느 것이나 인간의 자아 인식을 한층 더 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는 어는 것이나 언니들에게 우상 숭배녀라는 각인을 찍고 자신들만을 그러한 운명의, 즉 종교 일반적인 본성의 예외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특정한 종교는 이미 종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교는 종교 일반의 죄-만일 이것을 죄라고 말해도 괜찮다면-를 다만 자신 이외의 종교에만 투입한다. 그 종교는 하나의 다른 대상, 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전의 종교의 내용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종교는 종교의 본질을 기초하고 있는 필연적이며 영원한 법칙을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의 대상이나 내용이 초인간적인 것이라고 망상한다. 그러나 그 대신 종교를 고찰의 대상으로 하고 ㅇ있는 사상가는 종교 자체에 숨어 있는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바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신과 인간)의 대립은 착각이라는 것, 즉 그 대립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인의 본성 사이의 대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기독교의 대상과 내용은 모두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자신과의 관계, 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과 자기의 본성, 즉 자기의 주관적인 본성과의 관계이다. 신적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혹은 좀더 바르게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개의 인간, 즉 현실적-육체적 인간의 제한에서 분리되어 대상화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인과 구별되어 대상화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본성이 개인과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성으로서 직관되고 존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본성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성의 규정이다(각주; "신의 완전성은 우리의 영혼의 완전성이다. 그러나 신은 완전성을 무제한하게 점유하고 있다. 우리는 약간의 능력, 약간의 인식, 약간의 착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에 있어서는 완전인 것이다." - Leibniz, 「변신론」 서언.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뛰어나게 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질에 있어서도 역시 고유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은 영혼의 본질 규정에도 역시 속하지 않는다 - 닛사(Nyss)의 성 그레고리우스 「영혼에 관하여」, Lips, 1837. p.42. "그러므로 모든 지식 중에서도 가장 좋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인식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안다면 그때 그는 또한 신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교육자」 제 3권 제 1장.)
신적 존재의 술어, 즉 성질 혹은 규정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승인되지만 그러나 주어, 즉 술어의 기체基體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주어의 부인은 무신앙이나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의 부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규정도 없는 것, 술어가 없는 것은 나에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나에겐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규정을 폐기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규정이 없는 존재는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이며,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는 허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게서 모든 규정을 빼앗아 버리는 곳에서는 신은 인간에게 단지 소극적인, 즉 허무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결코 규정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확실하고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무규정성 그리고 이것과 동일한 불가 인식성은 근대의 소산이며 근대적 불신앙의 산물일 뿐이다.
이성이 유한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또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다만 감성적 향락 혹은 종교적 감정 혹은 미적 직관 혹은 도덕적 심성을 절대적인 것,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곳에서만 그러하다. 그와 같이 신의 불가인식성 혹은 불규정성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교의로서 언표되고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 대상(神)이 이미 인식의 관심사가 아닌 경우이다. 그리고 또 현실성만이 인간의 마음을 끌고, 인간에게 현실적인 것 만이 본질적-절대적-신적 대상이라고 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아직, 동시에 이 순수하게 세속적인 경향과 모순되는 종교심의 낡은 잔재가 현존하고 있다. 인간은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종교적 양심 앞에서 신을 잊고, 속세에서 길을 잃고 있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신의 불가인식성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인간은 신을 실천적으로 행위에 의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호와 생각하는 것은 모두 현세의 것이다-그러나 인간은 이론적으로 신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신의 실존을 배격하지 않고 신의 존립을 승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실존을 배격하지 않고 신의 존립을 승인한다. 그러나 신의 실존은 인간에게 관계가 없으며 인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신의 실존은 단지 소극적인 실존, 실존 없는 실존, 자기 자신에 모순되는 실존이다. 즉, 영향이라는 점에서 보아 비존재와 구별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적 본성에 관해 적극적-규정적 술어를 부인한다는 것은 종교를 부인하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그 자체를 위해 종교의 가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인으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심하고 교활한 무신론에 불과하다. 규정된 술어에 의해 신을 유한화한다는 의견적-종교적 공포는 단지 신에 대해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신을 망각하려는 믿음 없는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유한하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존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모든 현실적인 실존, 즉 진실로 실존하는 실존은 질적으로 규정된 실존이다. 신의 실존을 진정으로, 실제로 믿는 사람은 신의 감성적인 성질에도 부딪치지 않는다. 규정에 의해서 모욕을 느끼는 신은 실존하려는 용기도 힘도 없는 것이다. 질은 실존의 불, 산소, 소금이다. 실존 일반, 즉 질이 없는 실존은 무의미한 실존이다. 그러나 신 안에는 종교 안에 있는 이상의 것은 없다. 오직 인간이 종교에 대해 취미를 잃고, 종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곳에서만 신의 실존은 무미 건조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서술한 직접적인 방법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법으로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신적 본성의 술어가 유한한, 특히 인간적인 규정이라는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부는 거부된다. 인간에겐 신에 관해 규정된 개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규정을 보호조차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신에 관해서 바로 인간적인 표상 이외의 어떤 표상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이들 규정이 물론 신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의의가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신의 모습은 나에게 보이는 모습대로, 즉 인간의 본질(속성)과 비슷한 본질을 지닌 존재 이상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신 자체에 있어서의 존재와 나에 대한 존재를 구별하는 것은 종교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게다가 그 자체가 근거 없는 구별이다. 나는 신이 자신에 있어서 혹은 자신을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인지 아닌지 조금도 알 수가 없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이 나에게는 신의 전부이다. 나에게 있어서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할 때의 규정 속에 그 자신의 존재의 신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신은 나를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관계에 있어 신의 존재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그는 신의 그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꼭 인간 일반에게 존재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와 같이 인간이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과를 구별지을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초월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즉, 나는 대상이 단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서만 자체에 있어서 있는 것과 나를 우해 존재하는 대상과의 구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나의 절대적 척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곳, 또 대상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나는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과의 구별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나의 개념은 주관적인 개념일 수 잇다. 즉 종속Gattung과 결부되지 않은 표상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표상이 종속의 척도에 상응한다면 자체에 있어서의 존재와 나를 위한 존재 사이의 구별은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 표상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종속의 척도는 인간의 절대적 척도, 법칙, 규준이다.
그러나 종교는, 바로 종교가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이나 규정은, 인간이 신에 관한 참된 표상이나 규정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각 사람이 가져야 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표상이나 규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종교는,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이나 규정은 인간이 신에 관한 참된 표상이나 규정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각 사람이 가져야 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표상이나 규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종교는,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은, 인간성에 필연적인 표상-아니, 객관적으로 신에게 적합한 표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다른 종교의 신들은 단지 신에 관한 표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종교가 신에 관해 가지고 있는 표상은 신 자신이며, 표상하는 신은 진정한 진실한 신, 자체로서 존재하는 신이다. 종교는 다만 숨겨진 것이 없는 전체적인 신에게만 만족하는 것이다. 종교는 신 자신, 신의 인격을 원한다. 종교가 신의 본성을 폐기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종교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종교가 만일 참된 신의 소유를 단념한다면 그때 종교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회의론은 종교의 큰 적이다. 그러나 대상과 표상 사이의 구별,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 사이의 구별은 회의론적 구별이며 따라서 믿음이 없는 구별이다.
인간에게 자존적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최초의 존재, 인간이 더 이상 높이 생각할 수 없는 존재-그는 바로 인간에게 신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대상의 경우 그 자체로서 무엇인가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신이 새(Vogel)에게 대상이라면 신은 날개가 달린 존재로서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에게는 최고의 존재,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날개가 달려 있는 존재로서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에게는 최고의 존재,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날개가 달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가 "내가 보는 신은 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새에게 최고의 존재란 바로 새의 본질이다. 새에게서 이런 개념을 제거 시킨다면 새에게서 최고 존재의 개념을 제가하는 것이다. 어떻게 새가 신 자체의 모습에 날개가 달려 있는지 아닌지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신 자체의 모습이 내가 보는 신과 같은가를 묻는 다는 것은 신이 신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며 자신을 자기의 신 위에다 두는 것이며 신에 대항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술어는 의인 표현, 즉 인간적 표상에 불과하다는 인간의 의식이 있는 곳에는 이미 회의, 불신앙이 신앙을 정복했던 것이다. 이 의식으로 부터 술어의 형식적인 부인으로 나아가고 또 다시 이 부인에서 술어와 관계 있는 주어의 부인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심정의 비겁함과 오성의 나약함에서 오는 철저하지 못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술어의 대상적 진리를 의심한다면 당신은 그들 술어의 주어의 진리성도 의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술어가 의인 표현이라면 그 술어의 주어도 역시 의인 표현인 것이다. 만일 사랑, 자비, 인격성이 인간적 규정이라면 당신이 전제한 주어, 신의 실존, 일반적으로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신앙도 역시 의인 표현-철저하게 인간적 전제-이다. 시에 대한 신앙 일반이 인간적 표상 방법의 한계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보다 높은 존재-그리고 당신이 가정한 보다 높은 존재-는 아마도 그를 자체에서 매우 축복받고 있으며 또 그들 자신과 매우 화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보다 높은 존재 사이의 긴장을 느끼는 일이 없다. 신을 알면서도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 축복을 알면서도 자신은 축복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분열이며 불행이다(각주; 그러므로 피안에 있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그 같은 분열도 역시 폐기된다. 피안에 있어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 곳에선 아마도 인간은 단지 상상의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신의 의지로부터 구별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조금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피안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구별도 대립도 모두 소멸한다. 그러나 신만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미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엄에 대립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존엄한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높은 존재는 이 불행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한 존재는 그들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어떤 표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이 신적 성질로서 사랑을 믿는 것은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을 현명하며 자애로운 존재자라고 믿는 것은 당신 자신이 자비심이나 오성보다 더 좋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고 또한 신은 주체 혹은 본질이라는 것을 믿는-실존하는 것은 실체 혹은 인격 혹은 그 외 어떤것으로 규정되고 특성지어진다 하더라도 본질이다-것은 당신 자신이 실존하기 때문이며 당신 자신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한다든가, 자비롭다든가, 현명하다는 것 보다 더 높은 인간적 선을 알지 못한다. 그와 같이 당신은 실존한다는 것, 주체가 된다는 것보다 더 높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 의식, 모든 행복의 의식은 본질 의식, 실존 의식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에게 있어 현명한 존재이며, 축복된 존재이며, 자비로운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당신에게 있어 실존자이며 본질이다. 신적 술어와 신적 주체 사이의 구별은 단지 당신에게는 주체, 실존이 의인 표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런 본질이라는 것 속에서는, 신이 당신에게 실존자이며 본질이지만, 반대로 신의 성질(술어)은 의인 표현으로서 나타난다는 필연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성질의 필연성, 즉 신이 지혜로우며 선하며 의롭다고 하는 필연성은 인간 존재와 동일한 직접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식 사유, 활동에 의해 매개된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명한 사람이든 혹은 바보이든, 착한 사람이든 혹은 악인이든 나는 주체이며, 본질이며, 나는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제일의 것이고, 인간의 표상에 있어서는 근본 본질이고 술어의 전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술어를 버린다. 그러나 신의 실존은 인간에게 기정의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대상적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존재)과 성질 사이의 그와 같은 구별은 오직 표면적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의 필연성은 다만 술어의 필연성 속에 가로놓여 있다. 당신은 다만 인간적 본질로서만 본질인 것이다. 당신의 실존의 확실성과 살재성도 당신의 인간적 성질의 확실성과 실재성 속에만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주어로 하여금 주어이게 하는 것은 술어 안에만 있다. 술어는 주어의 진실이다. 주어는 단지 인격화된 술어이며 실존하는 술어이다. 주어와 술어는 단지 실존과 본질처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어의 부인은 주어를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적인 본질에서 인간적 성질을 빼버린다면 인간적 본질 속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일상 생활어에 있어서조차도 사람들은 신적 본질 대신에 섭리, 전지, 전능이라는 신적 성질의 말을 사용한다.
신의 실존의 확실성은 인간에겐 대단히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자신의 실존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말하였다. 신의 실존의 확실송은 오직 신의 성질의 확실성에 의존한다. 즉, 신의 실존의 확실성은 어떤 직접적인 확실성은 아니다. 기독교도에세는 기독교적인 신의 실존만이 확실성이며 이교도에게는 이교적인 신의 실존만이 확실성이다. 이교도는 주피터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교도는 주피터의 본성에서 전혀 성나게 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그 외의 다른 성질에 있어서도 신을 표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 그 성질이 확실성이며 신적 실재성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술어의 실재성만이 실존을 보증하는 것이다.
인간은,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현실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근원적으로 참된 것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표상된 것, 몽상된 것, 상상된 것과는 대립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존재의 개념,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제 1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혹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진리를 실존에 의존시키며 그 결과로써 실존을 진리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성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종교는 마치 인간이 그의 본성을 파악하여 최고의 존재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다양한 것만큼이나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 이 규정성은 인간에겐 진리이며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동시에 최고의 실존 혹은 오히려 실존 자체이다. 왜냐하면 오직 최고의 실존만이 본래적인 실존이며 실존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이 규정된 존재라는 같은 이유에 의해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인 존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질 혹은 규정서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성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실존, 현실성을 단지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희랍 사람에게서 그의 특성을 제거한다면 그의 실존을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종교에 대해서, 즉 상대적으로 신의 실존에 관한 확실성은 직접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희랍 사람이 희랍 사람이었다는 것이 필연적인 일인 것처럼, 희랍 사람의 신들은 필연적으로 희랍적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실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란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직관이 인간의 본질과 동일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직관이 인간의 본질과 동일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본직적 직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직적 직관이 인간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인간을 활기 있게 하고, 규정하고, 지배하기도 하는 것이다.
증명의 필요, 본질 혹은 성질과 실존과의 매개의 필요, 회의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단지 내가 나 자신의 본질로부터 분리하는 것만이 나에게 있어서는 의심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본질인 신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나의 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신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즉 신의 술어가 철학적 추상에 의해서 매개될 때에만 주어와 술어, 실존과 본질을 구별하는 일이 생긴다. 실존 혹은 주어(주체)가 술어 이외의 어떤 것이며, 직접적인 것이며, 의심할 수 있는 술어와는 구별된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망상이 발생하는 것도 역시 위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 술어를 갖는 신은 또한 추상적 실존을 갖는다. 실존이나 존재는 성질이 다양한 만큼 다양하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2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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