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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December 27,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

인간의 이성 혹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제한한다는 것은 모두 기만이나 오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로서의 인간 존재는 자기를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느끼고 또한 인식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인간의 개체와 짐승의 개체와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제한이나 자기의 유한성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의 완전성이나 무한성이 그에게 있어서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개인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감정의 대상으로서든지, 양심의 대상으로서 든지, 사유하는 의식의 대상으로서든지 어느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제한을 종의 제한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종과 동일시하는 기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만은 안일함, 태만, 허영, 이기심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순전히 나의 제한으로서 알고 있는 제한은 나를 낙담시키고 수치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 수치심, 이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개성의 제한을 인간 본질 일반의 제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나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이상 무엇을 마음써야 할 것인가? 그렇다 그 제한은 나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오성의 책임이 아니라 종족 자체의 오성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개체의 절대적 본질인 인간의 본성과 종족의 본질을 유한하고 제한된 것으로서 규정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도 모독적인 오류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자도 자기 자신에 있어서 제한된 존재자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오히려 자체 안에 그리고 자체에 대하여 무한하며, 자기의 신, 자기의 최고의 본질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자의 제한은 모두 단지 그 존재자 이외의 그리고 그 존재자 이상의 다른 존재자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하루살이의 생명은 더 오래살고 있는 동물의 생명과 비교하면 대단히 짧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살이에게는 이 짧은 생명도 다른 동물에게 있어서의 수년의 생명만큼이나 긴 것이다. 모충이 살고 있는 나뭇잎은 그 모충에게 있어서는 전 세계이며 무한한 공간이다.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그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자의 재능이며, 그 존재자의 능력이며, 그 존재자의 부이며, 그 존재자의 장신구이다. 그 존재자의 존재를 비존재로서 지각한다든가, 그 존재자의 부를 결핍으로서 지각한다든가, 그 존재자의 재능을 무능으로서 지각한다든가 하는 일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만일 식물이 눈, 취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모든 식물은 자기의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단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식물의 오성, 그식물의 취미는 그 식물의 본질의 생산력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물의 본질의 생산력이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그 식물의 오성, 그 식물의 취기마 최고의 것으로서 긍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 오성이나 판단력은 이미 이 특정한 본질의 오성이나 판단력이 아니고 어떤 다른 본질의 오성이나 판단력이 될 것이다. 본질의 척도는 또한 오성의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본질이 제한되어 있다면 감정도 제한되어 있고 이성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본질에 있어서 제한된 오성은 제한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히 행복하고 또 만족해 하는 것이다.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훌륭하고 신적인 힘으로 생각하고, 찬미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제한된 오성은 또한 자기 편에서도 제한된 본질을 찬양한다. 제한된 오성은 제한된 본질의 오성이다. 양자는 가장 엄밀하게 적합한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불화할 수 있을 것인가? 오성이란 본질의 시야이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의 눈이 다다르는 한 연장되는 것이며 또 역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의 본질이 연장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어떤 짐승의 눈은 그 짐승의 욕구를 넘어서 멀리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한되지 않은 자기의식은 당신의 본질이 도달하는 곳까지 이를 것이며, 그리고 당신은 그곳까지 신이다. 오성과 본질 사이의 분열,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의 사유력과 생산력 사이의 분열은, 한 편에서는 보편적 의미를 갖지 않은 단순한 개인적 분열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단지 외견적인 분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쓴 졸렬한 시가 졸렬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졸렬한 시를 쓰고도 그것을 자기의 오성 속에서 좋은 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 같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본질에 있어서도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그 때에 당신은 사유능력의 무한성을 사유하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만일 무한자를 느낀다면 그 때에 당신은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는 것이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그 자체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은 그 차체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만일 당신이 음악에 대한 감각이나 감정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도 당신의 귀 옆을 스쳐가는 바람이나 당신의 발 옆으로 흘러가는 실개천에서 듣는 소리 이상의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멜로디가 당신을 감동시킬 때 당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멜로디 속에서 당신이 들 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심장의 소리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감정의 대상은 오직 그 자신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은 다만 감정에게만 말하는 것이며, 감정은 단지 감정에게 즉 그 자체에게 있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감정의 독백이다. 그러나 철학의 대화도 역시 사실은 단지 이성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은 단지 사상에게만 말을 하는 것이다. 결정체의 색채미는 감관을 황홀하게 하지만 이성의 흥미를 갖는 것은 단지 결정체의 법칙뿐인 것이다. 이성에 있어서는 단지 이성적인 것만이 대상이다(각주 ; "오성은 다만 오성과 오성에서 유출된 것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 Reimarus)

그러므로 형이상학적-초인간적인 사변 철학 그리고 종교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단지 파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 수단, 기관Organ의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인 모든 것은 진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근원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정이 종교의 본질적인 기관이라면 신의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나타난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감정은 신적인 것의 기관이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숨어 있기는 하나 그러나 진실한 의미는 감정이 인간의 본질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고 가장 뛰어난 것, 즉 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감정의 본질 자체가 신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은 감정을 통해서 신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신적인 것은 단지 신적인 것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신은 단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의 본성은 사실은 감정의 본질이 그 자체에 황홀해지고 스스로 환희에 도취된 감정, 즉 자신의 충만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환희에 도취된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으로, 종교의 주관적인 본질로서 주장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인 표현에서 객관적인 가치가 상실되고 만다는 것을 보아도 분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감정을 종교의 제 1 원리로 주장할 때에는 과거에 그렇게도 신성하다고 하던 기독교 교리들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감정의 입장에 있어서 역시 아직도 대상이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그래도 대상이 가지가 있는 것은 오로지 감정 때문이며, 감정은 아마도 우연적인 이유에서 그 대상과 결부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다른 대상이 똑같은 감정을 격하게 자극한다면 그 대상도 똑같이 환영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대상이 무관삼한 것이 되는 이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일단 감정이 종교의 주관적 본질이라고 언표되었을 때, 그것은 실제로 또한 감정이 종교의 객관적인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감정이, 적어도 직접적으로, 종교의 객관적 본질로서 언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직접적으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확실히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해서 승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감정 그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단언되고 따라서 특히 종교적인 감정과 반종교적 감정 혹은 적어도 비종교적인 감정과의 구별이 폐기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폐기는 단지 감정만을 신적인 것의 기관으로서 인정한다는 입장에서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당신은 감정을 무한하고도 신적인 존재의 기관으로 만드는 것은 감정의 본질이나 본성 이외의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감정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감정 일반의 본성은 또한 각각의 특수한 감정의 본성이 아닌가? 따라서 무엇이 이 감정을 종교적 감정이 되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일정한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대상은 다만 냉담한 오성 혹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일 때에만 종교적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이 종교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감정이 대상의 구별 없이 나누어 갖는 감정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전적으로 그것이 감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감정의 종교성의 근거는 감정의 본성이며 감정 자체 안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의해서 감정은 절대자로서, 신적인 것 자체로서 언표된 것이 아닌가? 만일 감정이 자체에 의하여 선하고 종교적이라면, 즉 거룩하고 신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자체 안에 자신의 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감정의 객체를 확립하고 동시에 당신의 감정을 진실하게 해석하려고 당신의 반성과 함께 무언가 이종적인 것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즉 당신은 개인적인 감정과 감정의 보편적인 본질 또는 본성과 구별하여, 제약된 개인으로서의 당신 안에 있는 감정을 속박하고 있는, 방해하면서 불순하게 하기도 하는 영향으로부터 감정의 본질을 분리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대상화하여 무한자라고 언표하고 그 무한자의 본질로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정의 본성뿐이다. 결국 당신은 다음과 같은 신 규정 이외에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은 순수하고, 무제한하고, 자유한 감정이다"라고 하는 규정뿐이다. 당신이 여기서 그 이외의 신을 조정한다면 그 각각의 다른 신은 당신의 감정 밖에서 밀어 넣어진 신인 것이다. 감정은 정통 종교적 신앙의 의미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이다. 정통적 종교로서의 신앙은 외적 대상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대상적인 신을 거부한다. 즉 감성은 자체에게 신이다. 감정의 입장에서는 단지 감정의 부정만이 신의 부정이다. 당신은 단지 너무나 겁이 많고 혹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으므로 당신의 감정이 은밀히 긍정하고 있는 것을 말로써 고백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당신은 외적인 배려에 속박되어 있는 감정의 정신적 숭고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심정의 종교적인 무신론에 직면하여 전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신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낡은 물음과 의문으로 또 다시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감정이 종교의 본질로서 규정되는 곳에서는 소멸되는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것이다. 감정은 당신의 가장 내적인 힘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으로부터 구별된 힘, 독립된 힘이다. 즉 감정은 당신의 안에 있으며, 당신의 위에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당신의 가장 고유한 본질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본질을 다른 본질로서 그리고 다른 본질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감정은 당신의 신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 안에 있는 본질로부터 다른 대상적 본질을 구별하려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감정을 초월하려 하는가?

그러나 여기서 감정은 단지 하나의 예例로서 강조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상의 본질적 기관으로 규정하는 다른 모든 힘, 능력, 잠재력, 실재성, 행위-이들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의 경우에도 사정은 이와 같은 것이다. 주관적인 혹은 인간의 편에서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객관적으로 혹은 대상의 편에서도 역시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 한 번도 자기의 참 본질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상상을 매개로 하여 자기보다 더 높은 종류의 개인을 생각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종이나 본성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이상의 이러한 개인에게 부여하는 본질 규정은 언제나 그 자신의 본질로부터 이끌어 내진 규정 혹은 특성이다. 즉, 인간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사실은, 단지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대상화) 그려 낼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확실히 인간 이외에도 사유하는 존재자가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을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질적"으로가 아니라 "양적"으로 풍부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다른 행성들에서도 여기에서와 같이 동일한 운동법칙이 타당한 것 처럼 감각과 사유의 법칙도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별들에도 생명이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와는 다른 존재자가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곳에도 우리와 같은 존재자 혹은 우리와 닮은 존재자가 더 많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각주 ; "음악이나 수학이 부여하는 만족은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많은 존재자들에게도 확산되어 있다는 것은 참인 것 같다" 이것은 바로 "質은 동일하고 음악이나 과학에 대한 감각은 같은 것이며 향유자의 수도 제한되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Chist. Huygens, 「우주론」, 제 1권)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1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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