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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December 24,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

종교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옛날의 무비판적인 동물학자들은 확실히 코끼리가 다른 훌륭한 성질과 함께 종교심이라는 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리의 종교는 단지 우화의 영역에 속할 뿐이다.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 중의 한 사람인 퀴비에(Cuvier, 1769~1832)는 자신의 관찰에 의거하여 코끼리가 개보다 조금도 정신적 단계가 높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통속적인 해답은, "그것은 의식意識 이다"라는 명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그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자기 감정이라든가, 감성적 식별력이라든가, 지각이라든가 하는 의미에서의 의식, 그리고 외적 사물을 일정하게 현저한 표징에 따라서 판단한다라는가 하는 의미에서의 의식조차도 동물에게서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의식은 다만 자기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있어서만 존재할 뿐이다. 짐승은 분명히 개체로서는 자기에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짐승은 자기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짐승은 종種으로서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짐승에겐 자기 이름을 지식에서 유도하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이 있는 곳, 그곳에는 학문을 위한 능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학문은 種의 의식이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개체와 교섭하고, 학문에 있어서는 종과 교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자기 자신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성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는 존재만이 다른 사물 혹은 존재를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서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짐승은 오직 단순한 생활을 하지만 인간의 이중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즉 짐승에 있어서는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이 합일되어 있지만 인간은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 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 생활은 자기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에 대해 관계를 가진 생활이다. 인간은 사유한다. 즉 인간은 대화한다. 인간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짐승은 자기 외부의 다른 개체가 없으면 종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이 없어도 사유 및 대화와 같은 종속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동시에 나와 너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타인의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다만 자기의 개성이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종이나 본질도 역시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은 단지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실은 유한하고 제한된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것에 대해서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와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또한 그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과 거동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식물에 구속되어 있는 모충毛蟲이 가지고 있는 의식은 또 그 한정된 영역 이상으로 넓혀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모충은 확실히 그 식물을 다른 식물과 구별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제한된 의식, 그러나 그것은 바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오류가 없는 의식을 의식이라 부르지 않고 본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 혹은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의식과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은 불가 분리적인 적이다. 제한된 의식은 아무 의식도 아니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총괄적이며 무한한 성질의 것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은 의식의 무한성에 관한 의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한한 것에 관한 의식에 있어서 의식하는 주체의 본질이 의식하는 주체에 대해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은 인간 속에 있는 본래의 인간성, 종Gattung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각주 ; 천박한 유물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단지 의식에 의해서 짐승과 구별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의식이 추가된 동물이다." 따라서 이 유물론자는 의식에까지 깨어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전체 본질의 질적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해서 동물의 본질을 결코 경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장소가 아니다) 인간의 독특성과 본연의 인간성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는 이성, 의지, 애정이다. 사유의 힘, 의지의 힘, 애정의 힘을 갖춘 사람을 비로소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힘이고, 애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 사랑, 의지의 힘은 완전성이며, 최고의 정력이며, 인간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그리고 인간 생존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며,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이다.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의직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지의 자유이다. 우리는 인식을 하기 위하여 인식하고, 사랑을 위하여 사랑하고, 의욕을 위하여 즉 자유를 위하여 의욕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단지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이 참되고 완전하고 신적이다. 오직 사랑이 그러한 것이며, 이성이 그러한 것이고, 의지가 그러한 것이다. 인간안에 있는 그리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는 이성, 사랑,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상상력, 환상, 표상, 사념)과 의지, 살ㅇ 혹은 애정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은 무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인간은 이것을 소유할 수도 없고 또 만들 수도 없다-을 근거짓는 요소로서, 그리고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고, 인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힘으로서, 신적이며 절대적인 힘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댛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것이다(각주 ; "사람의 의견은 어느 것이나 매우 강하기 때문에 사름은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자기 의견을 발표할 정도이다" - 몽테뉴Montaigne)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감정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저항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에 저항한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누가 압도적인 멜로디의 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멜로디의 위력이란 느낌의 위력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음악은 감정의 언어이며, 멜로디는 소리 있는 감정이며 자체를 전달하는 감정이다. 누가 사랑의 위력을 경험한 일이 없거나 혹은 적어도 그 위력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랑과 개개인의 인간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인가? 인간이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오히려 사랑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 인간을 감동시켜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에로 향할 때 이 죽음을 초극하는 힘은 그 사람 자신의 개인적인 힘일까, 혹은 오히려 사랑의 힘일까? 그리고 한 번이라도 진실로 사유해 본 일이 있는 사람으로 그 누가 조용하고 떠들썩하지 않는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숙고에 잠겨서 당신 자신과 당신 주위의 것을 잊는다면 그때 당신은 이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당신이 이성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흡수되는 것은 아닐까? 학문적 환희는 이성이 당신에 대해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개가凱歌가 아닐까? 지식에의 욕망은 불가항력적이고 모든 것을 초극하는 힘이 아닐까? 그릭고 당신이 어떤 격정을 억제한다든가 어떤 습관을 폐기한다든가 하는, 즉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극복하여 승리를 획득한다면 그때 이 승리하는 힘은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힘인가, 혹은 오히려 당신을 정복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개인적 약점에 대항하는 분개로 당신을 채우는 도덕의 힘이나 의지의 정력은 아닐까?(각주 ; 개인이라는 단어는 물론 모든 추상적인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확실하지 않으며, 애매하여 오해를 야기하기 쉬운 단어이다. 이와 같은 개인과 사랑, 이성, 의지 사이의 구별이 자연에 근거되어 있는 구별지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 책의 주제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힘, 성질, 본질 규정을 인간으로 부터 떼내어 그것을 독립적인 본질로서 신화한다. 그래서 종교가 다신교의 경우와 같이 그것들 각 개체를 그것만으로 하나의 본질에로 총괄하는지 어떤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위의 이유에 의해서 이들 신적 본질을 설명하든가 인간에로 환원하든가 할 때에도 역시 개인과 사랑, 이성, 의지와의 구별지음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 구별은 단지 대상에 의해서 제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 구별은 또한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또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논리적으로도 기초지어져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들 자기의 정신, 자기의 두뇌, 자기의 심장과 구별하여 마치 그것들 없이도 자기는 어떤 것일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션시해 보여주는 그런 위대한 모범적인 인간은 이 명제를 그들의 삶에 의하여 확증하였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행위의 대상인 목적을 실현하다는 하나의 지배적 근본 열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대상은 그 주체 잔신의 대상적인 본질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체가 자신을 관계시키는 대상이 종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각개의 양태에 있어서는 상이한 많은 개인에게 공통된 하나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이 각각 성질을 달리하는 개인에게 있어서 객체인 것과 같이 적어도 그들 각개 자신의 대상적 본질인 것이다.

그와 같이 태양은 여러 행성들의 공통적인 객체이다. 그러나 태양은 지구에 있어서 대상인 것과는 다른 조건 아래에서 수성, 금성, 토성, 그리고 천왕성에 있어서 대상인 것이다. 각각의 행성은 그것 자체의 태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황성을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 그 태양은 지구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물리적 현존Dasein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천문학적-과학적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한 태양이 천왕성상에서는 지구상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날뿐만아니라 천황성상에 있어서의 태양은 실제로 지구상에서의 태양과는 다른 태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에 대한 태양의 관계는 동시에 지구 자체에 대한 관계, 지구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지구의 관계인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지구의 대상으로서 갖는 크기와 빛의 강도의 척도는 지구의 특유한 성질을 결정하는 거리의 척도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행성은 그 자체의 태양에 있어서 그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즉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하여 인간을 인식한다. 대상에서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한 객관적 자아이다. 그리고 이말은 정신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대사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조차도 역시 인간에겐 대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대상인 한에 있어서, 인간 본질의 현시Offenbarung 이다. 달도, 태양도, 별도 인간에게 "너 자신을 알도록 하라"고 말한다. 인간이 달이나 태양이나 별을 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본다는 것, 이것은 그것들이 인간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동물은 단지 삶에 필요한 광선을 받을 뿐이지만, 반면에 인간은 인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실제로는 인간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별빛까지도 지각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만이 이해利害를 떠나 순수하고 지적인 기쁨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만이 눈의 이론적 즐거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현세나 현세의 필요물과 공통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해를 떠난 빛을 바라보는 눈은 그 빛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과 자기 자신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눈은 천상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눈에 의해서만 지구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은 하늘로 향한 눈길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천문학자였던 것이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사명을 상기하게 한다. 즉 인간은 오직 행동을 위해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명상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자는 인간 자신의 본질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대상의 힘은 곧 인간 자신의 본질의 힘이다. 그와 같이 감정의 대상의 힘은 감정 자체의 힘이며, 이성의 대상의 힘은 이성 자체의 힘이며, 의지의 대상의 힘은 의지 자체의 힘이다. 음악적 솔에 감동한 사람은 감정에 지배된다. 즉, 적어도 음악적 소리에 자기와 일치하는 요소를 발견하는 감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 자체가 아니라 단지 내용이 풍부한, 의미에 가득 찬, 감정에 가득 찬 멜로디만이 감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단지 감정을 전달하는 감정, 즉 감정 자체, 감정 자체의 본질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의지 또한 그러하며, 이성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욕, 정감, 사유는 완전성, 본질성, 실재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이성을, 감정을 가지고 감정을, 의지를 가지고 의지를 제한된 유한한 힘으로써, 즉 쓸모없는 힘으로 감각한다든가 혹은 지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즉, 유한성과 허무성은 동일한 것이며 유한성은 다만 허무성에 대하여 미화된 표현일 뿐이다. 유한성은 형이상학적-이론적 표현이며, 허무성은 병리학적-실천적 표현이다. 오성에 있어서 유한적인 것은 심정에 있어서는 허무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 감정, 이성을 유한한 힘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모든 완전성, 모든 힘, 모든 본질성은 그 자체를 직접 검증하고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 의욕, 사유의 활동을 완정성으로서 느끼지 않고서는 사랑한다든가, 의욕한다든가, 사유한다든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고, 의욕하며,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어떤 특수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의식하는 존재자로부터 구별된 것도 아니다. 의식이 의식하는 존재자로부터 구별된 것이라면 그 존재자가 어떻게 자신을 의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완전성을 불완정서으로서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감정을 제한된 것으로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사유를 제한된 것으로서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의식이란 자기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애이며 자기 자신의 완정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본성의 특징적인 표식이다. 의식은 단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 속에서만 실존할 뿐이다. 인간의 허영심까지도 이 진리를 확증한다. 인간은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의 형태에 만족한다. 이 자기만족은 그의 형태의 완전성과 미의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귀결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자체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필연적으로 그 자체에 대하여 기쁨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형태는 필연적으로 그 자체를 자체 안에서 주시한다. 인간이 단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형태에 대해 자만할 때 그것은 허영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형태 일반을 감탄할 때엔 허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 형태 일반을 감탄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형태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한 형태를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각주 ;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Cicero의 「신의 본질에 관해서」 제 1권. 그리고 이것은 결코 인간의 제한성의 표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자도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동물의 형태의 아름다움, 식물의 모양의 아름다움, 자연 일반의 아름다움도 즐긴다. 그러나 단지 절대적이고 완전한 형태만이 질투 없이 다른 존재자의 모양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각각의 존재자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존재를 사랑하여 또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선이다. 베이컨Bacon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또한 알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탁월한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체를 긍정하고 자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긍정의 최고의 형태, 즉 그 자체가 영예, 완전성, 행복, 선善인 형태는 의식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판의 저자 서문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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