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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December 22,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판의 저자 서문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판의 저자 서문 ]

이 책의 제 1판이 출판된 이래 이 책에 대한 불합리하고도 불성실한 판단은 나에겐 조금도 불쾌한 감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이외의 판단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또 온당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과는 다른 어떤 판단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신과 세상의 감정을 다치게 하였다.

나는 서문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독신적瀆神的 대담함'이 있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 역시 기독교의 고전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다만 참된 것, 고전적인 것, 위대한 것만이 사유될 가치가 있으며 참되지 않은 것, 왜소한 것, 비고전적인 것은 풍자극 혹은 익살극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객체로서 확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근세의 무성격적이고 안이한 에피쿠로스적 기독교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직 순결한 처녀였던 시대에로 돌아가야 하였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직 하늘나라의 신랑의 가시 관冠속에 이교적인 비너스의 장미와 미루테나무를 엮어 넣지 않은 시대였다. 당시 그리스도의 신부는 지상적인 재물에는 궁핍하였으나, 그러나 초자연적인 사랑의 비밀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는 지나치게 풍요로왔으며 또한 지나치게 행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근대의 겉치레 기독교도들에 의해 얼버무려지고 거부된 참된 기독교를 과거의 암흑으로부터 밝음에로 이끌어 낸다는 독신적인 대담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참된 기독교를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극점Nonplusultra으로서 주장하는, 칭찬할 만하고 이성적인 의도로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나는 그와는 반대로 참된 기독교를 더 높고 더 일반적인 원리에로 환원하려는 "바보같은" 짓이기도 하고 또 "악마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독신적인 대담함 때문에 당연하게도 근대의 기독교도들, 특히 신학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사변철학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소箇所, 그들의 본래적인 명예에 관계되는 점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 공격에서 나는 사변철학이 사변철학과 종교 사이에 설정한 외적인 일치를 무자비하게 부셔 버렸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변철학이 종교와 조화시키기 위하여 종교로부터 진실하고도 본질적인 내용을 빼어 버린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리나 나는 또 동시에 실증철학의 우상인 원형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본질적으로 살과 피는 인격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실증철학을 극히 운명적인 빛 속으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흔치 않은 저서 내용으로 인하여 보통의 전문 철학자들은 심하게 모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종교의 어두운 본질에 관해서 행한 극히 비정치적인 계몽으로 인하여 정치가들의 불쾌감조차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계몽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종교를 인간을 예속시키고 억압하기 위해서는 가장 상책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며 또 종교를 정치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비위도 거슬렸던 것이다. 종교를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은 그렇기 때문에 산업이나 정치의 영역에서는 확실히 벗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빛과 자유의 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현대의 예의에 대해서 엄청나고도 용서받기 어려울 위반을 하였던 것이다. 원래 나는 모든 사물을 각각 알맞는 명칭으로 부를 때, 고려해 보지 않은 언어 사용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상류사회"의 경향, 즉 인습적인 환상이나 비진리에 대해 무관심하며 무감동한 경향은 현대의 지배적이면서도 정상적인 경향이다. 말하자면, 현대는 단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이것은 자명한 일이다)뿐만 아니라 종교적 및 학문적인 사건도 역시 그런 식으로 취급되고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현대의 불행이다. 겉보임은 현대의 본질이다. 우리의 정치도 겉보임뿐이고 우리의 도덕도 겉보임뿐이며 우리의 종교도 겉보임뿐이고 우리의 학문도 겉보임뿐이다.

지금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낯 두꺼운" 교양이 없는 사람이고, 교양이 없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진리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부도덕한 것이다. 기독교의 기만적인 부인-이것은 기독교의 긍정이라는 겉보임을 드러내고 있다-은 도덕적이며, 물론 권위 있는 것이며 명예로운 것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도덕적인 부인 다시 말하면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공언하는 부인Verneinung은 부도덕하며 또한 악명 높은 것이다. 자의는 기독교를 희롱하는데 기독교의 한 편의 근본 신조는 이것을 외관상으로 존립시키고는 있지만 이 자의의 희롱은 도덕적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신조를 폐기하는 것이 왜 다른 편의 신조를 외관상으로 존립시키는 것인가 하는 까닭은, 루터Luther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하나의 신조를 폐기하는 자는 적어도 원리적으로 모든 신조를 포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각주 ; 루터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명백하고 순수한게 전부를 완벽하게 믿든가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성령은 한 편은 진실이며 다른 편은 허위라고 가르치거나 혹은 믿게 하였음을 틀림없다는 것은 분리되지도 않고 분할되지도 않는다... 종鐘의 한곳이 깨지면 종은 이미 조금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현대의 신앙의 종소리는 음악적인 감관을 얼마나 모욕하는 것인가! 물론 그 종은 또 얼마나 망가져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기독교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진지한 태도는 부도덕한 것이다. 서투른 중도이폐中途而廢는 도덕적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그리고 확신하는 철저성은 부도덕한 것이다. 야무지지 못한 모순은 도덕적이지만 그러나 시종 논리일관된 엄격한 태도는 부도덕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은 아무것도 완결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 들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이지만, 천재는 자기의 문제를 정돈하고 철저하게 규명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도덕적인 것은 단지 허위뿐이다. 왜냐하면 허위는 진리의 해악 혹은-지금은 이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해악의 진리를 회피하며 은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진리는 단지 부도덕성뿐만 아니라 또한 비학문성이기도 하다. 즉 진리는 학문의 한계이다. 독일의 라인강의 운행의 자유가 바다에 이르는 동안 한한것과 같이 독일의 학문의 자유는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에 한한 것이다(각주 ; 1815년 비엔나 선언 속에 관련된 애매한 서식은, 그것이 그 후에 독일과 네덜란드사이의 분규를 반복하는 단서가 되었다). 학문이 진리에 도달하여 진리가 되는 곳에서 학문은 과학이 되는 것을 중지하고 경찰의 대상이 된다. 즉 경찰은 진리와 학문의 경계인 것이다.

진리는 인간이며 추상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다. 진리는 삶이다. 진리는 종이 위에 쓰여 있는 사상, 자기에게 일치하는 전 실존을 종이 위에서 발견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펜에서 직접 피로 이행한다든가, 이성에서 인간에로 이행한다든가 하는 사상은 이미 아무런 학문적인 진리도 아니다. 학문이란,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단지 나태한 이성의 무해하기는 하나 무용한 놀이 도구에 불과하다. 학문은 단지 생활이나 인간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은 사물을 취급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학문은 물론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닌 사물을 취급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것 없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뇌 속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마음에서는 활동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즉 진리를 망각하고 절조를 잃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간단히 말하면 무성격이 순수한 학자에게 진정으로 추천할 만한 필요한 특성인 것이다. 적어도 필연적으로 현대의 까다로운 문제와 접촉하고 있는 학문의 학자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침범하기 어려운 진리에의 사랑과 결연한 성격을 가진 학자, 바로 그 때문에 단 한번에 정곡을 찌르는 학자, 해악을 근절하며 위기나 결정적인 순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학자, 그러한 학자는 이미 학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학자는 일종의 헤로스트라토스Herostrat(기원전 365년에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하여 아르테미스의 신전을 불 태운 희랍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그를 단두대에 세우라.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항쇄項鎖(목에 쇠사슬을 묶어)하여 기둥에 매달아라! 단지 항쇄하여 기둥에 매달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단두대 위에서의 죽음은 오늘날의 "기독교적 국법"에 따르면 비정치적이며 "비기독교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쇄하여 기둥에 매다는 죽음은 매우 정치적이며 기독교적인 죽음이다. 왜냐하면 항쇄하여 기둥에 매다는 죽음은 음험하며 기만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죽음이기는 하지만 죽음으로 보이지 않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까다로운 모든 문제에 관해서는 겉보임, 순수한 겉보임을 중히 여기는 것은 현대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적이며 환상적인 장담을 잘하는 기독교의 시대가 기독교의 본질에 접할 때 그와 같이 감정을 다쳤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매우 심하게 변모해서 쓸모없게 되었으므로 기독교의 공적으로 학식있는 대표자들, 즉 신학자들조차 기독교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며 혹은 적어도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의 눈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단지 신학자들이, 예를 들면 신앙, 기적, 섭리, 세계의 무의미성에 대해 나에게 부여한 비난과 내가 나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는-특히 바로 이때문에 인용문에 의해 현저하게 증대시킨 제 2판- 증언과를 비교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학자들의 이러한 비난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그 자체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한 나의 저서에 대한 신학자들의 "분격"은 단지 기독교의 참된 내용(그러나 이것은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에 대한 분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아니다! 현대는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 사이의 대립과 같은 낡은, 지금은 매우 적은 대립(최근에는 구두 수선공이나 재단사까지도 그와 같은 대립을 초월해 있는)이 분명한 권태로부터이긴 하지만 정열에 몰리어 또다시 불붙게 된 시대이며, 이혼에 관한 논쟁은 엄숙하며 특히 중대한 사건으로서 취급한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시대이다. 그런데 나의 저서는 역사적 문서를 근거로 하여 단지 잡혼雜婚, 즉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일반 결혼도 참된 기독교에는 모순된다는 것을 증명하여, 참된 기독교도는 성령에 있어서의 생식-이것은 즉 기독교에의 개종이며 하늘나라의 백성이긴 하지만 지상의 백성이 아닌 우리 모두가 참된 기독교도가 되도록 마음을 쓰는 것은 "기독교적 정부",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의 설교자의 의무는 아닌가?-이외의 다른 생식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는 저서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있어서 그와 같은 저서가 사람들을 격앙시키는 시대착오라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아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저서에 관한 그리고 나의 저서에 반대해서 생긴 소란도 역시 나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오히려 아주 조용히 나의 저서를 다시 한번 가장 엄밀한 역사적-철학적 비판을 가하여 형식상의 결함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제거하고 새로운 발전, 예증, 매우 적절하게 논박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를 더하여 풍부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아마도 완전히 장님이 아니라면, 내가 하나하나 역사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나의 분석의 사상 과정을 중단하고 그것에 지주支柱를 더해가는 지금 나의 저서가 기독교를 상상의 동양적인 상형언어로 부터 바르고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충실하고 또한 옳은 번역을 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며, 또한 만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인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의 저서는 기독교의 수수께끼를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 비유하지 않고 표현하면 기독교의 수수께끼를 경험적-철학적, 혹은 역사적-철학적 분석, 해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서론에서 전제한 일반적인 명제는 자신이 증명한 아 프리오리(a priori)한 명제도 아니며 또 사변思辯의 산물도 아니다. 그 명제들은 종교의 분석으로부터 비로소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명제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이 저서의 근본 사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실은 인간의 종교적 본질 및 의식-의 사실상 나타남이 사상에로 이식된 것, 즉 일반적인 표현에 의해서 파악되고, 그것에 의해 이해된 것이다. 나의 저서의 사상은 단지 전제로부터의 결론이자 귀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전제는 그 스스로가 재차 사상이 아니라 대상적인-혹은 살아 있는 혹은 역사적-사실인 것이다. 즉 그 전제는 외계에 묵직하게 실존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이고 비물질적이고 자기-만족족인 사변, 즉 사변의 소재를 그 자체에서 끌어내는 사변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

나는 좀더 잘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머리에서 자신의 눈을 빼내는 철학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사유하기 위하여 감관感官, 무엇보다도 눈을 사용한다. 즉, 나의 사상을 언제나 감관의 활동을 매개로하여서만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는 재료에 기초를 둔다. 나는 사상으로부터 대상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대상으로부터 사상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오직 두뇌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다. 나는 다만 실천철학의 영역에 있어서만 관념론다(이상주의자)이다. 즉 나는 여기에서 현재나 과거의 제한을 인류나 미래의 제한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많은 일들-그렇다. 많은 일들이다-이 근시안적이고 소심한 실제가들에 의해서 오늘날 상상의 비약,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념, 단순한 망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내일, 즉 다음 세기-개인의 의미에서의 수세기는 인류의 의미와 생활에 있어서는 수일이다-에는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

간단히 말하면, "이념"이란 나에게 있어서는 단지 역사적 미래에 대한 신앙, 진리와 덕의 승리에 대한 신앙이며, 단지 정책적이며 도덕적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래의 이른 철학의 영역에 있어서 나는 바로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Hegel 철학과는 정반대로, 위에서 언급한 의미의 현실주의, 유물론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사변철학의 근본문제, 즉 "자기의 것은 모두 스스로가 휴대한다"라는 격언을 유감스럽게도 나는 나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가 없다. 나는 많은 사물들을 내 외부에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주머니 혹은 머리속에 넣어서 나와 함께 운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여기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나의 것이다.

나는 단지 정신적인 자연 과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 과학자는 기구나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그와 같은 정신적 자연과학자로서서 나의 책을 썼던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새로운 철학의 원리 이외의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원리는 실천적으로 이미 검증된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특수한 대상(그러나 이 특수한 대상은 일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에 비추어, 다시 말하면 종교에 비추어 서술되고, 발전되고, 관철된 원리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철학이며 인간의 참된, 현실적인, 전체적인 본질에 상응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물론 이 철학은 바로 그 때문에 초인간적, 초자연적 즉 반인간적, 반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상극하는 철학이다.

환원하면 이 철학은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진리는 제시하는데 유일한 기관은 "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손과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철학은 펜이라고 하는 운하를 통하여 실제의 실존을 종이 위에 실존에로 환원하기 위하여 사실의 사상思想을 사실 그 자체와 동일화하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분리한다. 그러나 이 철학은 바로 이와 같이 사실과 사실의 사상과를 분리하는 것에 의해서 사실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추상적 이성의 대상과 같은 사물(das Ding)이 아니라 현실적-전체적인 인간의 대상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전체적-현실적인 사물인 사물을 참된 사물로서 승인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고립된 오성悟性, 즉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절대적으로 이름없는 오성에서가 아니라 인간, 물론 사변철학이나 기독교가 생각해낸 인간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 지주를 구하기 때문에, 또한 본질도 이름도 없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철학은 실체에 있어서나 언어에 있어서 둘 다 철학의 본질을 철학의 부정 속에서 인정한다. 즉 이 철학은 피와 살이 된 철학, 인간이 된 철학만이 참된 철학이라고 확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철학은 철학의 가상假象속에 철학의 본질을 인정하는 모든 조야하고 강단에서 이식된 두뇌들에 있어서는 전혀 철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자기 최고의 승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스피노자Spinoza의 실체, 칸트Kant나 피히테Fichte의 자아, 쉘링Schelling의 절대적 동일성, 헤겔Hegel의 절대정신을, 즉 간단히 말하면 단지 사유된 혹은 상상된 추상적인 본질을 원리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본질 혹은 오히려 무엇보다도 더 현실적인 본질, 가장 참된 실재적인 존재 즉 인간을, 그러므로 가장 적극적인 실제 원리를 그것의 원리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철학은 사상을 사상의 반대물로부터 즉 물질, 실재, 감각으로부터 산출하여 이것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서 규정하기 전에 대상에 대해서는 처음에 감각을 통해서, 즉 수동적-수용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이와 같은 철학의 견본이다. 따라서 나의 저서는 비록 다른 관점에서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참된 성과가 살과 피로 된 것이라고하더라도 사변철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산물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오히려 사변철학의 직접적인 반대물, 아니 사변철학의 해소인 것이다. 사변철학이 종교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은 사변철학 자체가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사변철학이 그것을 종교보다는 훨씬 잘 표현하였던 것이다. 사변철학은 종교에 의해서 규정되는 일 없이 종교를 규정한다. 사변철학은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로 하여금 종교자체를 말하게 한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을 종교의 경청자 혹은 통역인으로 만들 뿐이고 종교의 후견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며 올바르게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노력이었다.

비록 종교 혹은 신학이 이것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신을 거부하고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을 인간이 되게 하고, 다음에 인간적으로 형성되어 인간적으로 느끼고, 인간적으로 사념思念하는 신을 종교의 열애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기독교의 비밀을 누설하였을 뿐이며, 나는 단지 신학의 모순이 가득찬 망상을 제거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의미의 신성모독을 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신앙심이 없는 무신론적인 것이라면 무신론은 – 적어도 이 저서의 의미에 있어서의 무신론은 – 종교 그 자체의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 그 자체는 실은 표면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근저根底에 있어서, 그리고 또 본래 사념이나 상상에 있어서가 아니라 심정이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의 진리성과 신성과는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에게 나의 저서의 역사적 및 합리적 논증이 허위임을 증명해야 한다. 즉, 그것들을 반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바라컨대 법률적인 가해 혹은 신학적인 비가悲歌, 혹은 진부한 사변적 산문, 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련함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물론 나 자신이 지금까지 극히 철저하게 반박하지 못하였던 그런 근거에 의해서 반박해 주기 바란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오직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뿐이며 종교의 인간저인 본질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 1부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 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동이란 것이 증명되어 있으며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혹은 오히려 방법이 반대일 뿐이다. 즉, 제 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종교의 진리에로 드러내는 일이며, 제 2부는 종교를 종교가 갖는 모순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제 1부는 발전이며 제 2부는 논쟁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사례의 성질상 잔잔하며 후자는 생명적이다. 발전은 조용하게 전진하지만 투쟁은 급속하게 전진한다. 왜냐하면 발전은 단계마다 자족하지만 투쟁은 오직 최후의 목표에 도달해야만 만족하기 때문이다. 발전은 주저하지만 투쟁은 과감하다. 발전은 빛을 필요로 하지만 투쟁은 불이다. 그러므로 양부兩府는 이미 형식적인 관계에서 서로 다르다.

그와 같이 나는 제 1부에서 신학의 참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의 본질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의 술어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 혹은 본질과 인간적인 주어 혹은 본질 사이에도 역시 아무 구별도 없다는 것, 양자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여기서 “따라서”라고 말을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신학적인 술어의 경우에는, 특히 술어가 주어의 우연적인 특성, 우연성이 아니라 주어의 본질을 표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술어와 주어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없으며 술어를 주어의 위치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분석론 혹은 포르피리우스Porphyrius의 서론만이라도 이런 관점에서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제 2부에서 나는 이와 반대로, 신학적인 술어와 인간학적인 술어 사이에 만들어진 혹은 오히려 만들어져야 할 구별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 현저한 일례가 있다. 제 1부에서 나는 “종교에 있어서” 신의 아들은 실제의 아들이라는 것, 인간이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서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신적인 관계로서 파악하고 긍정하는 종교의 본질 혹은 진리를 찾아 내는 것이다. 제 2부에서는 이와 반대로, 신의 아들은 자연적-인간적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자연이나 이성에 모순되는 전적으로 다른 방법, 따라서 몰의미적이고 몰오성적 방법에 있어서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참으로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 신의 아들은 확실히 자연적-인간적 의미에 있어서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종교의 자체 반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감관이나 오성을 그와 같이 부인하는 것 속에 종교의 비진리성과 부정적 측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 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직접 증명”이며 제 2부는 “간접 증명”이다. 그러므로 제 2부는 필연적으로 제 1부로 환원된다. 제 2부는 어떤 독립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제 2부는 다만 제 1부에서의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제 1부에서 해석된 종교가 정당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제 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 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제 1부에서 내가 “주로” 종교를 취급한다고 말한 까닭은 제 2부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제 1부에서 신학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또 내가 제2부에서 신학을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대로 단지 보통의 신학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얼핏 보고도 알 수 있는 것, 사변적인 신학 혹은 철학도 취급하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잘 앍 ㅗ있는 보통 신학의 하찮은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나는 도처에서 대상의 취급을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엄밀하며, 가장 필연적인 규정에 한정하면서 사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성체의 경우에 문제를 단지 두 개에 한정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단지 두 개의 성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루터전집」, 1792년 라이프찌히 출판, 제 17부 558 페이지를 참조) 따라서 나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규정에 한정하여 그 대상을 신학의 제한된 범주를 넘어서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학을 취급한다고해서 신학자들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처에서 무엇이 제 1 원인 인가를 확립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인물이 아니라 원리를, 개인이 아니라 종족Gattung을, 악평 수첩의 새상이 아니라 역사의 대상을 취급하는 것이다.

만일 나의 저서가 제 2부만을 포함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확실히 이 책에는 단지 부정적인 경향이 있을 뿐이라는 비난을 해도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즉, “종교는 無이며 무의미하다”고 하는 명제가 이 책의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특징짓는다 해도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신은 무이며, 삼위일체는 무이며, 신의 말씀은 무이다”라는 등등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수월하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단지 신이나 삼위일체나 신의 말씀은 신학의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외래의 비밀이 아니라 토착의 비밀, 인간성의 비밀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종교가 자연이나 인류의 외관적이며 피상적인 본질을 자연이나 인류의 참된 내적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이나 인류의 비의秘義적 본질을 특수한 다른 존재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나는 종교가 신에 대해, 예를 들면 신의 말씀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규정(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의미에 있어서는 결코 부정적이 아닌 규정)에 있어서는 단지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정의 혹은 대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의 저서에 의하면 종교가 무의미, 무, 순수한 환상이다라는 비난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근거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나의 저서에 의하면 내가 종교를 환원하는 곳, 내가 종교의 참된 대상이나 내용이라고 증명하는 것, 인간 혹은 인간학도 역시 무의미, 무, 순수한 환상이라고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내가 인간학에 허무적인 호은 종속적인 의의만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학에 허무적인 혹은 종속적인 의의가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단지 인간학의 위에 그리고 인간학에 대립해서 신학이 설정될 때만 그러한 것이다. 나는 신학을 인간학에로 끌어 내림으로써 오히려 인간학을 신학에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신을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의해 인간을 신으로 만든 것과 같은 것이다 – 물론 또 다시 인간으로부터 격리된 초월적이며 환상적인 신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인간학이라는 말을 헤겔 철학 혹은 대체로 지금까지의 철학이 생각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높은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 속에서도 무無 속에 혹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현실성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꿈 속에서 실제의 사물을 현실성과 필연성의 빛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자의의 매혹적인 가상 속에서 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 및 사변철학 혹은 신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는 것, 혹은 오히려 내부로 향하고 있는 종교의 눈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표상 혹은 상상에 있어서의 대상을 현실성에 있는 대상에로 전화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러나, 물론 사상事象 보다는 심상을 선택하고, 원본보다는 복사본을 선택하고, 현실성보다는 표상을 선택하고, 본질보다는 가상을 선택하는 현대에 있어서 이런 전화轉化는 환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파멸이고 혹은 적어도 믿음이 없는 무모한 독신瀆神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에 있어서 신성한 것은 오직 환상뿐이며 진리는 비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인의 눈 속에서는 진리가 감소하고 환상이 증대함에 따라 신성함은 상승한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 최고도의 환상은 또한 최고도의 신성함이기도 한 것이다. 종교는 소멸해 버렸고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조차 종교 대신에 종교의 외관인 교회가 나타나서 적어도 무지하며 판단력이 없는 대중에게 신앙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아직 존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직도 천년 전과 꼭 같이 기독교 교회가 존립하고 있으며 오늘날 여전히 신앙의 외면적 징표가 성행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실제로는 믿어지고 있지 않는 것도 아직 겉보기에는 존중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미 그 자체 내에서 참디ㅗ게 신성하지 않는 것은, 더욱 적어도 신성하게 보이는 것이다.(현대의 신앙은 나와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된 바와 같이 단지 겉치레인 신앙,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믿고 있지 않는 신앙, 결단하지 못하는 소심한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히 성례에 관한 나의 분석에 대해 외관과 환상의 시대인 현대가 종교적 분격을 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호의가 아니라 진리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적나라한 진리만을 목표로 하는 한 저술가에게서 그가 공허한 가상을 존경한다든가 혹은 그것을 가장하도록 바라서는 안된다. 이 가상의 대상이 그 자체 종교의 극점, 즉 종교적인 것이 비종교적인 것에로 급변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나는 성례에 관한 나의 분석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위에 특히 결론에서 서술한 성례에 관한 분석의 본래적인 의미에 관하여 나는 단지 나의 저서의 본질적인 내용, 본래의 주제를 나의 저서의 실천적인 의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감성적인 한 예를 들어 분명하게 한다는것 만을 주의해 두겠다. 그리고 또 나는 여기서 나의 분석이나 사상의 진실성의 증인으로서 감관을 불러 내어 내 저서 전체를 통해서 오성을 향해 강의한 것을 눈을 향해, 아니 촉각이나 미각을 향해 논증한다는 것만을 주의해 두겠다. 즉 세례의 물 및 성찬의 포도주나 빵은 자연적인 힘이나 의의로 해석될 때에 초자연주의적이고 환상적인 의의로 해석할 때보다도 활동력이 무한히 많은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종교의 대상은 나의 저서의 의미에 있어서, 인간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파악될 때에 신학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 보다도 이론이나 실천의 대상으로서 무한히 더 효과적이고 질적인 대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이나 포도주나 빵 속에서 이들 자연적인 물질과 구별되는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전해지는 혹은 오히려 전해져야 하는 것은 단지 표상이나 상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일 뿐이고 진리나 현실성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이 종교의 대상 일반도 역시, 즉 자연이나 인류와 구별된 신적 본질도, 다시 말하면 신적 본질의 규정인 오성이나 사랑이 자연이나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는 것고 같은 오성이나 사랑과는 다른 무엇인가이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나타내게 될 때에 이들 규정 역시 표상이나 상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일 뿐이며 진리나 현실성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화의 교훈에 따라서 신학이나 사변철학이 하는 것과 같이 현실성의 규정이나 힘을 –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존재나 사물을 – 이것들로 부터 구별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즉 추상적인 존재의 자의적인 기호나 매개물이나 상징이나 술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이 독립해서 가지고 있는 의의에 있어서, 그것들의 성질과 동일한 의의에 있어서, 그것들로 하여금 그것들 자체가 되도록 하는 규정성과 동일한 의의에 있어서 받아들이고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여 비로소 우리는 현실적인 이론과 실천에 도달하기 위한 열쇠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효력없는 세례의 물 대신에 실제의 물의 선행善行을 존중한다. 그것이 얼마나 “물다운가!” 그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가! 그렇다. 매우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Luther는 자신의 자연적인 인간적 감각에 기초하여 독신 생활의 겉보임만을 신성한 환상에 결혼 생활을 대립시켰지만 그 결혼 생활도 역시 당시는 매우 평범한 진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나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실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또한 나의 저서의 “신성하지 않은” 정신의 매개물, 비유, 예,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나의 분석의 대상인 세례의 물도 역시 본래의 물인 동시에 비유적인 혹은 상징적인 물인 것이다. 포도주와 빵의 경우도 같은 것이다. 악의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목욕, 먹는 일, 마시는 일이 나의 저서의 총계이며 적극적인 성과일거라고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끌어 내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밖에 할 말이 없다. 만일 종교의 전내용이 성례안에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또한 성례나 성찬때에 수행되는 동작 혹은 행위 이외에는 종교적 동작 혹은 행위가 없다면 그 때에는 확실히 나의 저서의 전내용과 적극적인 성과란 목욕, 먹는 일, 마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저서는 사상事象에 충실하며 대상에 가장 엄밀하게 적합한 종교의 역사적-철학적 분석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자기환멸, 종교의 자체 의식”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철학적 분석은 기독교의 단순한 역사적인 분석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다우메르Daumer 같은 역사가는 성찬이 옛날, 사물을 제물로 하는 제의에서 유례한 의식이며 예전에는 포도주와 빵 대신에 실제의 인육과 피가 쓰여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과 반대로 나는 다닞 성찬의 기독교적인 의의, 기독교에 있어서의 허가되어 있는 의의를 나의 분석이나 환원의 객체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어떤 교의 혹은 제도가 기독교에 있어서(물론 오늘의 기독교에 있어서가 아니라 옛날의 참된 기독교에 있어서),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 있는지 아닌지에는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의의는 그 교의 혹은 제도가 기독교적인 것인 한 또한 그 교의 혹은 제도의 참된 기원이기 도 하다는 근본 명제를 준봉하는 것이다. 혹은 역사가는, 예를 들면 뤼쩰베르거Luezelberger와 같이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순전히 모순과 불합리로 해소된다는 것, 그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 그리스도는 결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일반적으로 성서가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와는 반대로 현실적이고 자연적인 그리스도는 만들어진 혹은 생성된 초자연주의적인 그리스도와 그별되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종교적인 그리스도를 가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 초인간적인 존재자는 초자연적인 인간적 심정의 산물이나 목적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이런 혹은 저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없는가, 일반적으로 기적이란 생길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묻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기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것을 선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서 실제의 사건으로 말하여진 기적의 실례를 토대로 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럿에 의해서, 기적의 가능성 혹은 현실성 혹은 필연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 자체가 이들 모든 문제의 가능성을 폐기하는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반기독교적 역사가들과 나와의 상위에 대해서는 이것만을 말해 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시트라우스Strauss와 브루노바우어Bruno Bauer와 함께 불려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관계에 관해서 나는 여기에서 오직 제목만을 보기만 하여도 알 수 있는 대상의 구별 속에 이미 우리의 저작의 구별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 만을 지적해 둘 뿐이다.  바우어는 그의 비판 대상으로서 복음서적 역사, 즉 성서적 기독교 혹은 오히려 성서적 신학을 가지고 있다. 시트라우스는 기독교적 신앙론과 예수의 생애(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 신앙론의 제목 안에 포함할 수 있다)를, 따라서 교의적 기독교 혹은 오히려 교의적 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다. 나는 기독교 일반, 즉 기독교적 종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며 결국, 단지 기독교적 철학 혹은 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로 기독교를 단지 이론적 혹은 교의학적 객체로서뿐만 아니라, 즉 다만 신학으로서뿐만 아니라 종교로서 취급한 사람을 인용한 것이다. 나의 주요한 대상은 인간의 직접적 객체, 직접적 본질인 “기독교”이고, “종교”이다. 학실과 철학은 나에게 있어선 단지 인간 안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끌어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또한 나의 저서가 전혀 나의 의도나 기대와는 반대로 일반 대중에게 읽혔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언제나 학자나 특별한 전문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나의 참된 교육의 방법이나 저작법의 척도로서 택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런 혹은 저런 체계를 설립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을 진리의 척도로서 관찰하였으며, 처음부터 철학자의 최고의 숙련은 철학자의 자기부인自己否認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숙련된 철학자는 인간으로서도 저작자로서도 자기가 철학자라는 것을 과시해서는 안 되며, 다시 말하면 단지 본질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철학자이지만 형식에서 볼 때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조용한 철학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소리를 높이거나 혹은 소란스러운 철학자가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저서의 경우에도 모든 나의 저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상이 허용되는 한 최고의 명석성, 단순성, 규정성을 나 자신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원래 교양이 있고 사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요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저서는 학자-자명한 일이기는 하지만, 단지 진리를 사랑하고 판단력 있는 학자, 유학 무학의 천한 사람의 심성이나 선입견을 초월한 학자-에 의해서 인정되고 완전히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저서는 아무리 철저하게 독립적인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빈번하게 이런 혹은 저런 역사적 현상을 염두에 두고 논하고 그 현상을 명백하게 지명하는 일 조차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과의 관계는 단지 학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나는 감정의 입장의 필연적 귀결을 전개하는 제 1장에서는 야코비Jacobi와 실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라는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제 2장에서는 주로 칸트주의, 회의론, 자연신론, 유물론, 범신론을 언급한다. 그리고 또 나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자연관과, 물리학적 혹은 자연 철학적 자연관 사이의 모순을 증명한 “종교의 입장”의 장에서는 정통파에 있어서의 철학, 그리고 특히 데카르트Descartes나 라이프니쯔Leibniz의 철학(이들 철학에 있어서 이 모순은 특별히 특징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있다)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의 역사적 전제와 매개의 단계를 모르는 독자에게는 나의 논증이나 사상의 연결점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주장이 그런 사람에게 종종 순수하게 허구인 것 같이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은 여전히 매우 확고한 토대위에 서 있는 것이다. 내 저서의 대상은 보편적인 인간적 흥미에 대한 것이다. 더우기 나의 저서의 근본사상은 언젠가는 확실히 인류의 재산이 될 것이다(그러나 그것도 확실히 그들 근본사상이 여기서 언표되고 혹은 현재의 세대에서 언표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에 있어서 나의 근본사상에 대립해 있는 것은 단지 공허하고, 무력한 인간의 본질에 모순되는 환상이나 선입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대상을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사건(철학의 객체로서)으로서만 취급하였고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종교나 신학이나 사변철학의 착오를 정정하면서 당연히 종교, 신학, 사변철학이 쓰고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사변하는 것 같이 보일 것임에 틀림없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신학화하는 것 같이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사변철학을 분석할 뿐이다. 즉 신학을 인간학에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철학에 적합한-학문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원리를 구체적으로 ㅍ함하고 있으며 또한 적용시킨 것이다. 그렇다. 나의 저서는 이 원리를 단지 원리를 산출하는, 그리고 바로 종교의 핵심으로부터 산출한다는 것에 의해서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은 미리 말해 둔 것 같이 이미 옛날의 가톨릭적 스토아 철학이나 현대의 프로테스탄트적 스토아 철학과는 달라서, 그것의 종교와의 일치를 그것이 기독교의 교의학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에 의하여 증명한다는 것과 같은 유혹에 빠질 수는 없으며 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철학은 오히려 종교의 본질안에서 산출되는 것으로서 종교의 본질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에 철학으로서의 성질과 종교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발생을 논하고, 따라서 설명적이고 논증적인 저서는 형식상 이와 같은 성상性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일반 독자를 위해서는 부적당한 저서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저서의 겉보기에 증명 불충분한 주장을 고려하여 보충으로 나의 前 저서, 특히 「P. Bayle, 철학사와 인류사에의 한 기여」와 「철학과 기독교」를 독자들이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나는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예리한 필치로 기독교의 역사적 해결을 묘사하였고 기독교는 단지 인류의 이성으로부터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으로 부터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나는 기독교가 이미 화재-생명보험제도, 철도, 기관차, 미술관, 사관학교, 공업학교, 극장, 박물표본실에 가장 예리하게 모순되는 하나의 고정관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브루크베르크, 1843년 2월 14일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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