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Thursday, May 04, 2023

수프와 이데올로기 Soup & Ideology

오늘 우연찮게 [수프와 이데올로기 Soup & Ideology] 보게 되었다. 자이니치 在日. 오사카에 사시던 강정희(호적 이름 강상숙?). 제주 4.3 사건. 원래 태어난 곳은 오사카 이지만, 2 대전에 다시 부모님을 따라 제주 왔다, 4.3 사건후 다시 일본으로 피난. 겹겹의 디에스포라.

젊은 시절 4.3 학살 경험 남편과의 삶에 따라 남한 정부에 환멸을 느껴 북조선을 따르던 조총련 활동을 하다, 아이를 북송까지 시켰던(물론 남편이 주도했겠지만),, 암튼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


자이니치(在日) ; 한국(남한)+북조선(북한)+일본의,, 변방인/외부자들의 ... 분들의 삶을, 현재를 사는 우리의 지금 상황이나 정치적 환경으로 판단할 일도 아니다.


사족; 수프 Soup 삼계탕... 어머니가 삼계탕 끓이는 플러스 일본인 사위가 삼계탕 끓이는 장면이 나온다..


사족 2; 남한, 북조선 인가??... 한국, 조선, 고려라는 명칭이 혼재된 요즘... 쏘련에 지역 사는 사람들을 고려인이라 부르고오히려 뒹귁(중국)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조선족이라 부르고, 한반도 남쪽은 한국, 한반도 북쪽은 조선...


한국의 공식 외국어(영어) 명칭이 코리아(Korea, Corea)라는 보면,, 원래 지역은 대대로 고려국이라 불렸다. 물론 일본은 식민지배 거치며 조센이라 부르지만, 중국이나 기타 지역에선 근래까지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고려(까오뤼, 꼬레, 코리아) 일반적..


비근한 예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공식적인 "조선"이란 명칭(이것도 이성계가 중국에 새로운 정부의 이름을 허락을 받기 위해 올린 옵션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대신,, 당시대 중국인들이 불렀던 명칭이 "고려" 였다는 사실...


정대세 선수를 통해서 "자이니치",,, [남북한과 일본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 자이니치를 위하여

시사인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24


남북한과 일본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 자이니치를 위하여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입력 2010.06.22 15:47 144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 대표팀의 주장 지단이 어째서 갑자기 이탈리아 수비수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받아버렸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프랑스팀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의 선수들로부터도 기량에서나 인품에서나 존경을 받는 지단이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일까

경기 내내 마테라치가 자신의 유니폼을 붙들고 늘어지자 지단이그렇게 유니폼이 탐나면 경기가 끝난 뒤에 벗어주겠다 비꼰 것이 아마 발단이었던 같다. 자존심이 상한 마테라치가 지단에게 뭐라고 쏘아붙였는데 그걸 지단이 참지 못했던 것이다. 지단의 어머니나 누이를 모욕했다는 얘기도 돌았는데 마테라치 자신이나 지단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진상은 길이 없다. 다만 알제리 이민 2세인 지단이 예전에도 인종 차별 욕설을 참지 못해 경기 도중 박치기를 예가 있기 때문에 마테라치가 지단의 혈통을 비웃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지단은 이번 월드컵 알제리-슬로베니아 경기 운동장을 찾아 알제리를 응원하다 알제리 선수가 어처구니없는 핸드볼 반칙을 범해 퇴장 당하자 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Reuter=Newsis

알제리 이민 2세인 지단처럼 본의 아니게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뿌리를 뽑힌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표팀 과다보이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지단처럼 본의 아니게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뿌리를 뽑힌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본래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뺏기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이산 유대인과 공동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지만 어느덧 모든이산 백성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월드컵은 마치 디아스포라의 전시장 같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노예 무역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2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북중미와 남미의 거의 모든 흑인 선수가 디아스포라이다


식민지배 역시 많은 피점령지 백성의 뿌리를 뽑았다. 유럽에서 뛰는 유명 프로축구 선수 상당수가 식민지 혹은 식민지 출신이다. 프랑스 대표팀에는 멕시코 근처 서인도 제도의 작은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 출신의 선수가 유난히 많아 그들을 과다보이즈라고 부를 정도이다. 이들의 운명이야말로 기구하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선조로 이들은 아직 독립을 하지 못해 프랑스 국적이다. 이들은 손기정 선수와 같은 신세이다. 자기나라 국기를 달고 FIFA 주관하는 경기에는 참가할 없으므로 프랑스 국가대표로 뛴다. 앙리, 튀랑, 윌토르, 갈라스가 과달루페, 아넬카가 마르티니크 출신이다. 인구가 40만에 불과한 과달루페는 피파가 주관하지 않는 북중미 골드컵에는 참가할 있는데 지역 절대 강자인 미국이나 멕시코에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과시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아넬카는 팀내 불화를 조성했다는 이유로 시합 도중 팀에서 추방당하는 불명예를 안았는데 과다보이즈들이 아넬카 편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유럽의 축구 잔디구장은 새롭게 발견한 플란테이션 농장

유럽에 널린 수많은 축구 잔디구장은 유럽인이 새롭게 발견한, 수익성 좋은 플란테이션 농장이라고 있다. 유럽인은 지금 신종 플란테이션에 다시 젊고 빠른 아프리카인을 맹렬히 실어 나르는 중이다. 실제로 최근 독일의 쉬피겔지는 유럽의 많은 구단들이 아프리카의 유망주들을 거의 노예와 같은 헐값으로 마구 사들이고 있다고 폭로했다. 유럽이 이처럼 단물을 빨아대는 통에 아프리카 국가는 사상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린 이번 월드컵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유럽의 유명구단에서 사시사철을 보내는 아프리카 나라의 대표선수들에게 아프리카는 이미 홈이 아니다. 갑자기 유럽의 귀족이 돼버린 유명 선수들은 가난한 조국과 조국을 벗어나지 못해 역시 가난에 찌든 대표팀의 다른 동료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다른 유형의 디아스포라이다.


북한의 국가대표 정대세 선수는 브라질과의 대결을 앞두고 국가를 들으면서 마치 우승이라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 눈길을 끌었다. 어떤 국제대회에서도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국가를 듣고 우는 선수를 기억이 없다. 기자들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세계 선수권대회에 드디어 나오게 됐고, 세계 최강팀과 맞붙게 됐기 때문에 좋아서 그랬다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리는 일본의 조선 사람들을 빼고는.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수많은 디아스포라 가운데 정대세 선수처럼 펑펑 우는 이가 없는 보면 어쩌면 자이니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디아스포라가 아닌지 모르겠다


일본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라가 나의 조국


정대세 선수는 같은 재일교포 3세인 신무광씨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왓북, 2010)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모국은 일본이 아니에요. 일본 속에 하나의 나라가 있죠. 바로재일이라는 나라에요. 북한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재일이라는 나라가 나의 모국이고 재일인이라는 존재를 널리 세상을 향해 알리는 것이 삶의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끌려갔거나 혹은 벌러 갔다가 광복을 맞은 사람들은 대략 230 정도로 추산된다. 대부분은 이명박 대통령 가족처럼 고향으로 돌아갔고, 60 정도만 일본에 남았다. 1952 일본은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일본 국적의 상실을 통보했다. 그리고 이들을 편의상 조선 국적으로 분류했다. 이들 조선 국적자의 97% 남한 출신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조선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자발적으로 북한 국민이고자 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불리한 지위를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조선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훨씬 많다


조선국적자는 사실상 국적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에서 해외로 나가기도 힘들다. 나가더라도 일본 정부의 재입국 허가가 없으면 자기 집에도 돌아갈 수도 없다. 자이니치 문필가 서경식씨는 그의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개, 2006)에서 조선국적을 유지한 중견기업인 K씨의 사례를 소개한다


직장에서 나가던 K씨는 어느날 상사로부터 독일 출장 명령을 받고서는 크게 당황했다. 극도로 번거로우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가우리 아무개는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갔대, 우리는 안가?”라며 졸라도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다르단다라고 말했던 터였다. 결국 K씨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출장 전에 간신히 재입국 허가증을 손에 있었다. 다수자들에게는 당연한 , 사소하기까지 것이 자기에겐 얼마나 힘든 것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비행기에서 시베리아를 내려다보면서 왈칵 눈물을 쏟을 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한 곳에 갇혀 지낸 것인가


일본은 조금씩 산소가 희박해지는 공간

서준식씨는 그의 책에서일본이란 공간은 내게 있어서, 조금씩 공기가 희박해지는 지하실과 같았다. 아니면 염천에 달구어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가는 작은 웅덩이와 같았다 썼다. 그는 자이니치의 신세를 루쉰의 말을 인용해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시는 붕어와 같았다 표현했다


옛날 강과 호수에 있던 우리 조상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는 수레바퀴 흐름 속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큰물이 빠진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우리들은 남았다. 지글지글 물은 말라간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붕어가 산소 부족에 허덕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과 같다.”


형인 서준식씨와 서승씨가 민주화 투쟁을 하다 오랜 동안 옥살이를 했지만 서경식씨는 2000 해방된 공간인 광주에 와서도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 5.18 광장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생기 있고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가혹한 체험을 겪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손으로 변화를 쟁취한 자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망연한 느낌으로 나는 거듭 자문한다. 나는 거대한 변화를 추진한 구동력의 부분이었다고 있을까? 사람의 디아스포라인 나는 결국 변화의 몸을 두어왔던 것은 아닐까.”


서경식씨는 재일조선인은,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자에게 마음이 끌릴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식민지배자의 자식과 피지배자의 자식이 행복하게 사귈 있다고는 생각할 없었다. 만약 결혼해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상대 여성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안절부절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해야만 할까


이용당하고, 배제당하고 농락당하는

축출당한 프랑스 축구 대표 아넬카와 같은 프랑스령 미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 파농(프랑스에서 정신의학을 배운 알제리 독립투쟁에 투신했다) 그와 재일조선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해 인류의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게 만든다.”


서경식에 있어서 디아스포라의 삶은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배제당하면서 언제까지 농락당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자이니치의 , 중에서도 조선국적자의 삶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가 재일동포 3 신숙옥씨이다. 그녀가 끊임없이 자이니치들에게 누구 편이냐고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남한, 북한, 그리고 일본에 하고 싶은 얘기를 책이 바로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뿌리와 이파리, 2006)이다


6.10 남북 정상회담은 배부른 자들의 만남일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그녀는 1959 도쿄에서 태어났다. 재일조선인 2세인 아버지 신개성은 주오 대학 법학부를 다녔던 엘리트였으나 삶에 의욕이 없어 처가에 얹혀 살았다. 그녀가 태어난 1214 1 귀환선인 크릴리온 호가 니가타 항을 떠났다. ‘낙원천국북한을 찾아 떠난 귀국사업은 그녀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국적이 없어 국민건강보험 대상에서도 제외됐던 자이니치에게 의료비도 들지 않고 학교에도 있다는 북으로의 초대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명이 북으로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끊임없이 과도하게 이것저것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던, 그녀의 셋째 외삼촌이 죽었다는 연락이 북에서 왔을 그녀는 기뻤다고 한다. 잔인한 같지만 이제 비로소 북한과 관계를 끊을 있게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2000 6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서기가 평양에서 만나 포옹했을 배부른 자들이 만났을 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에 대해 과거사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김대중 대통령은 자이니치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자신보다 고령인 1세들을 시간이나 채로 기다리게 하고 박수로 맞이하게 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자마자여러분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이니치 1세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고단하게 생활해온 탓에 이미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하다. 2,3세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마저 허용이 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일본어에 능통한 김대통령은 한국어로만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니 한국에 투자하라고 했다. 한국어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에 자이니치가 얼마나 민감한지 한국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자이니치에 대한 테러에 다문 한국 정부

그녀는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면 아에 말을 잊는다고 했다. 2003 917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사이에 300건이 넘는 자이니치 폭행 사건이 일어났고, 사건들 모두 멋대로 방치됐다. 한국 정부 역시 논평 하나 내지 않았다. 한국에서 자이니치의 이같은 비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기자회견을 가졌을 진보적이라는 매체의 기자들마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당신의 국적이 어디인가였다. 국적이 어디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그토록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를 전후해 노무현 대통령은나의 재임기간에는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자이니치 피해자와도 만날 생각을 했다. 그녀가 이는 근현대사에 대한 무지이며 일본의 작태와 하등 다를 없는 가해 역사로부터의 도피이다


북한의 영향 하에 있는 민족학교에서의 추억은 끔찍하다. 재일조선인은 광복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졸지에 난민 신세가 되었다. 최소한의 의료, 교육, 복지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사람 사람이 사재를 털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민족학교이다. 1957 이후부터 북한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왔다고 하지만 액수는 미미했다. 독재정권 아래 있던 한국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 자연히 민족학교들은 조선총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학생수가 격감했지만 지금도 한국계 민족학교는 10 교에 불과한 반면 조선총련계 민족학교는 122개교에 달한다. 정대세 선수 같은 대다수 민족학교 출신이 북한을 모국으로 생각하게 것은 그런 연유이다


신숙옥씨는 일본 학교 다닐 때는 주먹했지만 민족학교에 전학 오니 통하질 않았다. 학생 모두가 독하고 난폭했으며 격렬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1967년부터 1972년까지 7년간 민족학교를 다녔다. 1968년에는 총련의 김병식 부의장에 의해 김일성 원수의 신격화가 강력히 추진되었다. 김일성 원수의 초상화를 호화롭게 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와 활동가들이 학부모 집을 돌며 돈을 우려냈다. 학비가 공짜라는 말도 거짓이었다. 돈을 조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선생들에게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Reuter=Newsis

정대세 선수는 골을 넣는데 실패함으로써 다시 자이니치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실패했지만 기회는 것이다.


민족학교에서의 끔찍한 추억


민족학교 아이들은 가난과 폭력과 죽음과 등을 맞대고 살았다. 민족학교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동시에 내부의 상황이 밖으로 전해지지 못하게 하는 강고한 벽이기도 했다. 그녀는 교사의 폭력에 번이나 척추를 다쳤다. 그녀의 동생은 술을 마신 교사에게 폭행을 당한 끝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을 뻔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도 그렇고 자이니치는 조선인 내부 문제를 일본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조선인을 예비 범죄자로 보는 경찰이 꼬투리만 생기면 조선인 전부를 탄압할 뻔하기 때문이다. 동포를 팔았다고 찍히면 자이니치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기도 하다. 그들은 자이니치 전체를 지키느라 가정이 깨지고 스스로 망가졌다


그녀는 스무 한국 여권을 신청했다. 아버지께 고향인 부산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다. 사상검증을 받듯이, 모국방문과 안기부 면담이라는의식 치러야 했다. 신청한 7 만에 처음으로 한국 여권을 손에 쥐었을 일본 공항의 출입국 심사가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빨리 끝났다. 그녀는 그것이 견디게 화가 났다. 한국은 여권을 발급하면서 과거의 삶을 부정하고 한국 정부에 충성을 약속하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하기도 한다한국인의 눈에 자이니치는 차별과 외로움에 우는 도와줘야할 동포가 아니라 체제 우위를 선전하고 북한을 압박할 도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같다

1989 파친코 의혹 당시(파친코 업계가 거액을 탈세해 사회당에 제공했다는 의혹 사건. 파친코 업계의 3분의 1 장악하고 있던 총련계가 덩달아 일본 사회의 눈총을 샀다) 80, 1994 북한 개발 의혹 당시 160, 1996 58건의 자이니치 위협 폭행 사건이 일어났지만 경찰의 검거 건수는 0이었다. 일본은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 2,3세에게 국적을 주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얼마 전에는 일본 정부가 자이니치의 북송 사업을 적극 도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일본은 자국의 납치 피해자에 대해서는 흥분하면서도 자국이 납치해간 이들(자이니치 상당수가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다) 고통은 외면한다. 무시하고 방치하고 불만을 토로하면 배제하고 추방했다. 신숙옥씨에 따르면 피해자도 아닌 사람(극우) 가해자(자이니치) 공격한다. 일부 자이니치는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겁이 나서 사과 논평까지 발표하는 지경이다


그녀는 말한다.
지금 나는 어느 나라 국가도 부르지 않는다. 어느 나라 국기도 게양하지 않는다. 내게 애국심은 없다. 국가를 사랑하기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사람을 계속 사랑하고 싶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정대세의 눈물이 그처럼 뜨거웠는지 이해한다. 아니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어를 써야 한다고 믿는 우리와 같은 다수자들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한다. 이번 월드컵 포르투갈 전에서 북한 팀이 대패하고 자신도 골을 넣는데 실패함으로써 정대세 선수는 다시 자이니치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실패했지만  기회는 것이다. 과다보이즈의 예에서 보듯 디아스포라는 강인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다. 앞으로 사회 각계에서 자이니치가 두각을 나타내는 목격하게 것이다. 한국, 북한, 일본 모두에게 자이니치는 존재 자체가 말할 없이불편한 진실이겠지만.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