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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December 28, 2017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Beyond Good and Evil, Genealogy of Moral)』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Beyond Good and Evil, Genealogy of Moral)』. 이런 재미없는 책을,, 크리스마스 오후에, 젊은 연인들이 키스하며 데이트 하고 있는 카페에 앉아,, 할일 없이 뒤적이고 있다.


창조자 자신이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고,, 굴욕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이 덜 편협한 사람들에게 즐겨 쓰는 복수이고, 또한 그들이 자연에서 재능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손해배상...

“신을 위해 인간을 사랑한다” 라는 기묘한 발명품. 종교적 신경증.

바다 한가운데서 갈증이 나서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그대들은 자신의 진리가 한 번도 갈증을 해소 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꼭 소금에 절여야만 하는가?

플라톤의 말은 플라톤 자신의 말로 반박가능하다.

처음에는 두 개의 피부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얇았던 내면세계(영혼이라고 불리는 것) 전체가 인간 밖으로 발산하는 것이 저지됨에 따라 안으로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가 오늘날까지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도 무시무시한 병,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이라는 병-‘양심의 가책’ 이라는 심각한 병을 가지게 되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부터 ‘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연결시키는 사막의 종교, 그리스도교의 천재성;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다. 신 스스로가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지불한다.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한다’. 그럼으로써 내면에서 더욱 강화되는 부채의식.

반면, 그리스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자신에게서 떼어놓고 그들의 영혼의 자유를 즐길 수 있게 오랫동안 자신의 신들을 이용했다; “아마도 신이 그를 우롱했음이 틀림없어...”라는 위안처럼,, 신을 악의 원인으로,,, 나쁜 일로 부터 인간을 변호하는데 신을 이용하였다.

“원전”이 다양한 해석들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때 까지,,,

Wednesday, December 27, 2017

[Thus Spoke Zarathustra], 짜라투스트라

[Thus Spoke Zarathustra], 짜라투스트라,, 책이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걸 넘어 황갈색으로 변했다.


고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장의 소음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의 시끌벅쩍함이 끝나면 다시 고독으로,,,

순수한 사상가 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않았)다. "말씀"만이 있었다. 짜라투스트라,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짜라투스트라, 너는 여자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 하지만 우리들에게 여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나에게 여자에 관해 말해봐..” 라고 어느 여인이 추궁하니,, 짜라투스트라는 여자에게 상처받은 이야기만 늘어 놓더라.

이건, 니체 Nietzsche 가 그 보다 우월한 여성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Lou Andreas-Salomé)” 로 부터 받은 상처/열등감의 결과 때문이라고 본다. 찌질한 인간.

짜라투스트라가 교차로=십자가에 도착하여, “이제 부터는 나 혼자 하겠노라” 하며, “다시 한번 이야기 하노니, 부디 나를 잊고 너희 자신을 찾아라. 너희 모두가 나를 부정/부인 할 때서야 그때 내가 다시 돌아 오겠노라” 하였다.


니체가 반기독교적 사상가로 이야기 되는데,, 내가 보기엔 겉보기만 그런.. 교회와 호교론에 비판을 가한 것은 맞지만, 기독교 자체를 뿌리채 부정한건 아니다. [Thus Spoke Zarathustra] 도 제목이나 표현 방식이 그래서 그랬지, 내게는 모두 예수의 이야기로 읽힌다.

짜라투스트라의 다음과 같은 말;  “Better to be angry than make ashamed! And when you are cursed, I do not like it that you then want to bless. Rather curse back a little!” 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Of the Adder’s Bite 라는 장에서 자신을 문 독사에게 웃으며 한 말, “용이 독사의 독에 물려 죽은적이 있더냐? 너의 독을 다시 가져 가거라. 너는 그것을 내게 줄 만큼 부자가 아니지 않느냐”

제자들이 묻길, 이 이야기의 교훈/도덕은 무엇입니까?  “나는 도덕의 파괴자이다. 적에게서 선함을 구하지 마라.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화를 내거라. 너에게 저주를 퍼부으면 그를 가여이 여겨 축복을 주지말고, 그 저주를 되돌려 주거라”

냉혹한 정의 보다는 복수가 더 인간적이다... “I do not like your cold justice,, A little revenge is more human than no revenge at all.. Shared injustice is half justice” ; 공유되지 못하는 정의라면 악덕만 못하느니,, 그런데 그 “정의”란 무엇인가?

“Of Voluntary Death”; Zarathustra 曰,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과 상속자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리한 시점에.. 마치 해질녁에 타오르는 석양처럼 그 정신과 덕은 여전히 빛나야 한다. 그의 죽음 속에서,, 죽음 안에서의 자유.. 예수를 추모 하다.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스스로 너무 고통을 받은 지라, 다른 사람들도 그 만큼 고통 받기를 원한다, 고통 받게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사람을 못 박는 것 이외에는 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He jump over his own shadow”; 뛰어 봤자 그림자 위다. 넌 그림자를 벗어나 못한다...

지구의 질병으로서의 인간; “The earth has a skin and this skin has diseases, One of these diseases, for example, is called ‘Man’” 라고 짜라투스트라가 말씀하셨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

우리는 잡다한 허수아비들을 구름위에 올려 놓고 그것을 신, 또는 초인이라 부른다,, 라고 짜라투스트라가 이야기 하자, 그의 제자/사도들이 화를 내며 뒤돌아 앉아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Every honest man’s step speak out: but the cat steals along over the ground. Behold, the moon comes along catlike and without honesty. You of pure knowledge.

Friday, December 22, 2017

[잡다한 것을 주워담다] 도시이야기, 주거문화, 고시원의 미래...



도시이야기,,, [The Right to the City : A Verso Report]
https://twitter.com/nomadic_crow/status/936139401175773184


[시론] 왜 고시원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가?
https://twitter.com/ObserverofCity/status/943756618625413120


UN이 제시한 기준으로 본다면 고시원 거주자도 홈리스, 즉 노숙자의 개념에 들어간다
https://twitter.com/PasteCat/status/932284409905999873

Wednesday, December 13, 2017

[Scrap] 『믿음에 대하여 On Belief』,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다시, 『믿음에 대하여 On Belief』,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철학의 신화(종교)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 신화는 Logos 의 실체이며 제거되지도 않고 그 안에 완전히 자리잡지도 못하는 외래 침입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밝혔듯이 계몽(이성) 자체가 신화,,

자신의 의지와는 반해서 그를 사로잡은 기생적인 외부침입자에 의해 식민화된 존재로서의 주체에 의해 경험된다.

자본주의 자체의 본유의 환상으로서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로서 “공산주의”?

악의 평범성/진부함; 한나 아렌트가 강조 하였듯이 아우슈비츠의 인내하기 어려운 공포는, 가해자들이 밀턴의 사탄 처럼 “악이 나의 선이 될지어다”라고 말한 바이런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다. 놀랄만한 진짜 이유는 자행된 공포와 가해자들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특성간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에 있다” → 한국의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는데 참여한 그 많은 참여자들(군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리라…

나도 누군가에게는 악인이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때는 추종해야할 원칙들만이 남는다.

서구 철학의 시발점에 대해 하이데거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순수한 사상가로 지칭하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붓다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단지 말씀이 있었을 뿐이다…

믿는다는 것. 믿음(Belief)과 신앙(Faith)

-  믿음  : “사람은 x 의 존재를 믿지 않고도 x를 믿을 수 있다. 또는 사람은 x의 존재를 믿고도 x를 믿지 않을 수 있다”

- 신앙 : 약정이나 맹약. 신과의 언약, 계약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자유를 위한 기회로써 복지국가의 철수에 의해 야기된 불안정을 제공하면서,,,  “우리는 장기적인 고용의 안정 대신에 단기 계약에 의존하여 매번 직업을 바꾸어야 한다. 왜 그것을 고정된 직업의 제약(속박)으로 부터 자유롭게 된 것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 창조하고 숨겨진 잠재력을 계발하며 실현할 기회로 보지 않는가?” 라고 꾸짖고 있다.

Monday, December 11, 2017

현실로의 도피,,,


[꿈으로 부터 현실로의 도피],  “현실은 꿈을 지탱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이라는 말에 잠시 멈춰 섰다. 뭔가 역설적인 이야기. 그 꿈이라는게, “성공의 목표” 뭐 그런게 아니라 Freud적 의미의 꿈이며, 현실이라는 것도 환상의 구성물이라고,,, 혼란하고 불투명한 현실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환상”이며,, 결국 “현실”이라는건 환상 구성물일 뿐이라는...

“현실=꿈으로 부터의 도피=환상의 구성물”의 등가식...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lavoj Zizek

다시, 가라타니고진(柄谷行人) 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윤리21』를 다시 한번 일독 하면서 몇 가지 책에서 발췌하여 간단하게 메모를 남겨 본다.  


I. 쓰기와 읽기에 대하여,,,


예술가(작가)와 타자(독자); “이 두사람의 내부에 각각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 그것을 엄밀하게 비교하기 위한 방법 따위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만약 어느 한쪽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쪽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한다면, 예술 전체가 붕괴될 것이고 예술이 지닌 힘 전체가 소멸될 것입니다”  - Paul Valery


작품을 둘러싸고 양쪽의 과정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불투과적이라는 점.


‘쓰는’ 일은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하기 전 사회에서는 “사건”은 단지 기억만 되면 충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억력이 좋아서도 사건이 적어서도 아니고, 사건이 끊임없이 신화적 구도로 환원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쓰는 일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일에 의해서 이 분열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분열”이란 무엇인가? 사건을 경험하는(기록하는) 자의 자가 구조적 분열?


‘언어는 저자의 의도를 배반하며 원래와 다른 것을 의미하고 만다’


말이 음성이든 문자든, 어떤 외재성으로서 타자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의미”는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맹목성, 또는 외부성.  “의미”를 어떤 대상물이나 심상에서, 또는 그 어떤  개념이나 이데아(내적원인, 심층원인)로 부터 끌어 내려는 난감함.


읽는 다는 것; 단편으로서의 텍스트, 결코 투명한 의미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텍스트를 발견(읽는) 것. 즉,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읽는 것…


II. 마르크스, 그 가능성..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1985년 문고판 후기 ; “상품의 가치는 처음부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교환된 결과로서 주어진다. 사전에 내재하는 가치가 교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기서 두 가지 포인트를 생각하게 된다;


  1. 결과는 원인을 소급한다. 또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 중, 특정한 “원인”을 호출한다.
  2.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 가치설”에 대한 비판 ; 생산물이 교환되지 않아도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의 “(내재된)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대한 비판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생산 곧 차이/차이화이지 생산의 내용(노동가치)이 아니다. 가치 생산적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마르크스의 독특함은 어떤 철학을 수립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보는 그의 태도에 있고, 또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한데 있다. 『자본 Das Kapital』 이란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마르크스의 독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독해방법이야 말로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자본』 이외의 다른 곳에서  Marx의 사상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력이 상품이다라는 명제의 난감함 ;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도 마찬가지지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은 어떻게 측정되어야 하는가? 다른 상품으로 표현되는, 즉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의 합? 또는 화폐형태로 표현? 그 화폐형태라는 실체는 무엇인가?


III. Ideology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온데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비판했던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해석”이다. 진리라고 믿는 의식체계,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Ideology : “허위의식”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 규칙에서 출발하는 것, 자신의 생각, 믿음이 “진리”라는 믿음. “진리의식” → 이 부분은 지젝Zizek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와 맞물려 다시 한번 살펴 봐야겠다.


IV. 내면 - 풍경 - 고백 -병


기독교의 고백이라는 제도;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가 아니라,,, 감춰야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할 무언가를, 혹은 내면을 창조한다.


내면의 창조/발견 = 풍경의 발견 ;  내면 - 풍경 - 고백 -병의 순환고리...


왜 항상 패배자(피지배자) 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의지 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결코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병을 필요로 한다;  니체가 말했듯이 “기독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가 파고 들어가는 지점은 무력감과 원한으로 가득찬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인임을 포기하고 신에게 완전히 복종Subject 함으로써 주체Subject를 획득하였다.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 말로 신학,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가령, 인간과 미생물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는 철저히 신학적인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 속에서는 세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산재되어 있는 "악"인 것이다.

뭔가 어떤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한 관념, 미혹을 경계하라.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 칭했던 것은 무언가 “심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원근법적 배치속에서 무의미하고 부조리 한것으로 배제 되어 있던 것의 강조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Freud의 새로움은 “심층”의 거부에 있음에도, 그가 심층의 발견자로 간주된 것이다.



V. 바깥쪽에서 보기...


“의심”의 근원/장소…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계시”로부터 찾고 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의심을 신탁에서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심의 장소는 역사적인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사상체계의 경계성, 차이성으로 존재하는 공간/장소이다. 사이, 경계, 바깥쪽에서 보기…


“바깥쪽”에서 본다 ;  바깥쪽이란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 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장소.


어떤 면에서 이 외부성이라는 것은, 지젝Zizek이 지적한 “레닌의 외부성” 과도 닿아 있다.


VI. 자유와 책임의 문제


칸트Kant 가 이야기한, “자유로워지라”라는 지상명령..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라라는 지상명령 → 자유로운 “주체”는 윤리적 차원에서 타자에 대한 응답 response = 책임 responsibility 에서만 나타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의무)에만 존재 한다.


자유自由;  스스로 그러함, 스스로 말미암음. 자기원인. 그리고 타자(물자체 Thing Itself) 자유로써 인정


전후 일본의 무책임의 체계; 전후(일본패전) 최초의 수상이 ‘일억총참회’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전쟁의 책임을 일부 지도자(천황)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최고 지도자의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전체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결국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의 체계..


‘무지’에 책임이 있는가? 나는 몰랐다 또는 시켜서 했다라는 핑계; 인식적 무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원인을 묻는 한 책임은 나오지 않는다.  원인에 대한 책임은 불가능하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은 (종교적) 속죄로써 대신 할 수 없다. 해서는 안된다


VII. 기타
사마천이 분노와 수치 때문에 세계의 기록을 완성하려고 했을까? 오히려 세계의 기록을 완성하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분노나 치욕이 따라 다닌다. 그러한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는 잠재적 ‘성직자’ 계급으로 사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이었다. 레비스트로스; “사회의 작동은 잠재적 에너지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 그 차이는 사회계급의 다양한 형태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페르소나; 사회적 가면… 가면은 그냥 말 그대로의 거짓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이다. 동화는 근본적으로는 어린아이가 부재하는 문학이었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동화란 어린이의 문학이 아니라, 어른의 문학이다. 공격성/적대성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에서 유래한다. “뭐든 오십보백보인데, 난 오십보와 백보는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해. 굉장히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오십보 만큼은 다르지. 그리고 그 다름이라든지 차이라는게 나한테는 결국 절대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선택할 뿐이다” 죽은자는 항상 산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 기독교의 창시자 바울(Paul) - 예수의 죽음을 재 해석한 사람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엥겔스(Engels) - 마르크스 최초의 독자이자 해석가 오리엔탈리즘; 서양의 <기대지평>, 그 입맛에 맞춰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사람이 가족을 ‘자연’으로(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 ‘가족’ 이라는 것도 그 어떤 자의성 속에 노출되어 있다라는 것… “그것은 갑작스럽게 피어난 꽃이고, 따라서 씨를 남기지도 않았다” 역사란 단선적인, 확실한 혈통 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시 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론으로서는 진부할 지언정, 실천으로서는 신선한 말",,, 우리 사회에도 많다.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이 ‘이론으로만 소비되고 소멸되어버린 것’에 대한 조사弔辭. 진실의 가면,, 진실 자체를 이용해서 타자를 속인다. 자연(풍경)에 민족성을 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