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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December 11, 2017

다시, 가라타니고진(柄谷行人) 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윤리21』를 다시 한번 일독 하면서 몇 가지 책에서 발췌하여 간단하게 메모를 남겨 본다.  


I. 쓰기와 읽기에 대하여,,,


예술가(작가)와 타자(독자); “이 두사람의 내부에 각각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 그것을 엄밀하게 비교하기 위한 방법 따위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만약 어느 한쪽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쪽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한다면, 예술 전체가 붕괴될 것이고 예술이 지닌 힘 전체가 소멸될 것입니다”  - Paul Valery


작품을 둘러싸고 양쪽의 과정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불투과적이라는 점.


‘쓰는’ 일은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하기 전 사회에서는 “사건”은 단지 기억만 되면 충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억력이 좋아서도 사건이 적어서도 아니고, 사건이 끊임없이 신화적 구도로 환원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쓰는 일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일에 의해서 이 분열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분열”이란 무엇인가? 사건을 경험하는(기록하는) 자의 자가 구조적 분열?


‘언어는 저자의 의도를 배반하며 원래와 다른 것을 의미하고 만다’


말이 음성이든 문자든, 어떤 외재성으로서 타자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의미”는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맹목성, 또는 외부성.  “의미”를 어떤 대상물이나 심상에서, 또는 그 어떤  개념이나 이데아(내적원인, 심층원인)로 부터 끌어 내려는 난감함.


읽는 다는 것; 단편으로서의 텍스트, 결코 투명한 의미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텍스트를 발견(읽는) 것. 즉,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읽는 것…


II. 마르크스, 그 가능성..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1985년 문고판 후기 ; “상품의 가치는 처음부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교환된 결과로서 주어진다. 사전에 내재하는 가치가 교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기서 두 가지 포인트를 생각하게 된다;


  1. 결과는 원인을 소급한다. 또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 중, 특정한 “원인”을 호출한다.
  2.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 가치설”에 대한 비판 ; 생산물이 교환되지 않아도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의 “(내재된)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대한 비판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생산 곧 차이/차이화이지 생산의 내용(노동가치)이 아니다. 가치 생산적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마르크스의 독특함은 어떤 철학을 수립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보는 그의 태도에 있고, 또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한데 있다. 『자본 Das Kapital』 이란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마르크스의 독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고전경제학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독해방법이야 말로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자본』 이외의 다른 곳에서  Marx의 사상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력이 상품이다라는 명제의 난감함 ;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도 마찬가지지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은 어떻게 측정되어야 하는가? 다른 상품으로 표현되는, 즉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의 합? 또는 화폐형태로 표현? 그 화폐형태라는 실체는 무엇인가?


III. Ideology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온데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비판했던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해석”이다. 진리라고 믿는 의식체계,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Ideology : “허위의식”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 규칙에서 출발하는 것, 자신의 생각, 믿음이 “진리”라는 믿음. “진리의식” → 이 부분은 지젝Zizek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와 맞물려 다시 한번 살펴 봐야겠다.


IV. 내면 - 풍경 - 고백 -병


기독교의 고백이라는 제도;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가 아니라,,, 감춰야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할 무언가를, 혹은 내면을 창조한다.


내면의 창조/발견 = 풍경의 발견 ;  내면 - 풍경 - 고백 -병의 순환고리...


왜 항상 패배자(피지배자) 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의지 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결코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병을 필요로 한다;  니체가 말했듯이 “기독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가 파고 들어가는 지점은 무력감과 원한으로 가득찬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인임을 포기하고 신에게 완전히 복종Subject 함으로써 주체Subject를 획득하였다.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 말로 신학,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가령, 인간과 미생물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는 철저히 신학적인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 속에서는 세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산재되어 있는 "악"인 것이다.

뭔가 어떤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한 관념, 미혹을 경계하라.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 칭했던 것은 무언가 “심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원근법적 배치속에서 무의미하고 부조리 한것으로 배제 되어 있던 것의 강조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Freud의 새로움은 “심층”의 거부에 있음에도, 그가 심층의 발견자로 간주된 것이다.



V. 바깥쪽에서 보기...


“의심”의 근원/장소…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계시”로부터 찾고 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의심을 신탁에서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심의 장소는 역사적인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사상체계의 경계성, 차이성으로 존재하는 공간/장소이다. 사이, 경계, 바깥쪽에서 보기…


“바깥쪽”에서 본다 ;  바깥쪽이란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 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장소.


어떤 면에서 이 외부성이라는 것은, 지젝Zizek이 지적한 “레닌의 외부성” 과도 닿아 있다.


VI. 자유와 책임의 문제


칸트Kant 가 이야기한, “자유로워지라”라는 지상명령..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라라는 지상명령 → 자유로운 “주체”는 윤리적 차원에서 타자에 대한 응답 response = 책임 responsibility 에서만 나타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의무)에만 존재 한다.


자유自由;  스스로 그러함, 스스로 말미암음. 자기원인. 그리고 타자(물자체 Thing Itself) 자유로써 인정


전후 일본의 무책임의 체계; 전후(일본패전) 최초의 수상이 ‘일억총참회’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전쟁의 책임을 일부 지도자(천황)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최고 지도자의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전체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결국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의 체계..


‘무지’에 책임이 있는가? 나는 몰랐다 또는 시켜서 했다라는 핑계; 인식적 무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원인을 묻는 한 책임은 나오지 않는다.  원인에 대한 책임은 불가능하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은 (종교적) 속죄로써 대신 할 수 없다. 해서는 안된다


VII. 기타
사마천이 분노와 수치 때문에 세계의 기록을 완성하려고 했을까? 오히려 세계의 기록을 완성하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분노나 치욕이 따라 다닌다. 그러한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는 잠재적 ‘성직자’ 계급으로 사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이었다. 레비스트로스; “사회의 작동은 잠재적 에너지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 그 차이는 사회계급의 다양한 형태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페르소나; 사회적 가면… 가면은 그냥 말 그대로의 거짓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이다. 동화는 근본적으로는 어린아이가 부재하는 문학이었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동화란 어린이의 문학이 아니라, 어른의 문학이다. 공격성/적대성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에서 유래한다. “뭐든 오십보백보인데, 난 오십보와 백보는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해. 굉장히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오십보 만큼은 다르지. 그리고 그 다름이라든지 차이라는게 나한테는 결국 절대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선택할 뿐이다” 죽은자는 항상 산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 기독교의 창시자 바울(Paul) - 예수의 죽음을 재 해석한 사람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엥겔스(Engels) - 마르크스 최초의 독자이자 해석가 오리엔탈리즘; 서양의 <기대지평>, 그 입맛에 맞춰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사람이 가족을 ‘자연’으로(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 ‘가족’ 이라는 것도 그 어떤 자의성 속에 노출되어 있다라는 것… “그것은 갑작스럽게 피어난 꽃이고, 따라서 씨를 남기지도 않았다” 역사란 단선적인, 확실한 혈통 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시 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론으로서는 진부할 지언정, 실천으로서는 신선한 말",,, 우리 사회에도 많다.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이 ‘이론으로만 소비되고 소멸되어버린 것’에 대한 조사弔辭. 진실의 가면,, 진실 자체를 이용해서 타자를 속인다. 자연(풍경)에 민족성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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