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책(『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When We Are No More- How Digital Memory Is Shaping Our Future』)의 한 구절; "오늘날 웹페이지는 바뀌거나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평균 100일 동안 유지된다"
웹 사이트의 생애주기나 디지털 데이터/정보의 생성~폐기의 주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통계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휘발성 강한 디지털 형태의 정보와 지식의 저장(아카이브)의 문제도 중요한 Agenda 이다.
미국은 거대 데이터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고, 민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Archiving 작업들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한국어로된 디지털 정보와 자료에 대한 기록보관은?? 너무 방대한 문제라서 개인적인 사고의 확장에 더이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
.
.
집단기억의 보관, 트윗의 아카이브. 좋은 시도였는데,, 2017년 말 프로젝트 중단. “미국 의회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트윗을 아카이브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내년부턴 선별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
.
“수학적 정밀성”으로 계산한 지구의 창조 시기.
기원전 4004년.
이러한 진지함은 여전히 널리 존재한다...
.
.
“과학자scientist” 라는 용어의 탄생...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는 없다라는 자존심? 때문??
.
.
자기 노출이 심한 몽테뉴…
Search This Blog
Thursday, February 15, 2018
Wednesday, February 14, 2018
[Web Scrap] 러시아에서 처형당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RUSSIA BEYOND 라는 사이트의 기사 Scrap
[원본글] https://kr.rbth.com/opinion/2017/03/16/reosiaeseo-ceohyeongdanghan-hangug-coecoyi-gongsanjuyija-gim-alregsandeura_720858
러시아에서 처형당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문화 MARCH 16 2017 안드레이 란코프
1918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김 알렉산드라(본명 김애림)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 밝혀져.1918년 러시아 극동은 피비린내나는 내전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적군과 백군 양 편 모두 잔혹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며 상대편 처형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그런 처형 중 하나가 1918년 9월 16일 이른 새벽 아무르 강 연안의 최대 도시인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있었고 그날 한 무리의 공산당원들이 백군 병사들의 총에 처형됐다.
총살된 이들 중에는 폴란드식 성을 가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만 보고 그녀를 판단하면 안된다. 그녀는 김애림이란 이름의 한국계 여성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는 매우 희귀했다. 최근 들어 러시아와 한국 학자들(보리스 박, 벨라 박, 김철훈)의 노력으로 이 위대한 여인의 일생을 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공산주의자가 되기까지
알렉산드라의 부친은 1869년 경에 러시아에 정착한 표트르 김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정교회에 귀의한 고려인이었다. 알렉산드라가 태어난 1885년 그는 항간에 실력있는 통역가와 번역가로 알려져 있었다.
1896년 표트르 김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거대 토건 사업인 동청철도(東淸鐵) 부설 현장에서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덕분에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정규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이는 당시 고려인 가정의 여자 아이에게는 드문 기회였다. 건설 현장에서 표트르 김은 폴란드계 러시아 철도 기술자인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와 친구가 됐다.
1902년 표트르 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친구인 스탄케비치 가족은 알렉산드라를 떠맡았고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당시 러시아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사회주의 좌파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그녀는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그 무렵 알렉산드라는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두 사람은 1910년 경 이혼했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중국인, 고려인 노동자들이 벌목공으로 일하고 있던 우랄산맥 일대에서 중국어와 한국어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1917년 초 그녀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이상적인 후보자
볼셰비키당 조직지도부에게 그녀는 신이 보내준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언어에 능통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고 헌신적인 여성, 동양여성의 외모를 가졌지만 흠결없는 고상한 러시아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김은 극동의 한국인 사회에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는 임무를 받고 바로 극동으로 파견됐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그녀는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위원으로 임명됐다.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녀가 맡은 직책은 그저 상징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대한 지역의 외교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시 그녀가 외무위원으로서 내린 결정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로, 알렉산드라 김은 ‘반혁명 장교들’에게 사형 선고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갖고 그녀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당시는 잔혹한 일상이 수없이 반복되던 내전 시기였다. 게다가 그녀를 체포한 백군들 또한 그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 결코 자비와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1918년 8월 하바롭스크는 백군에 의해 포위됐고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서둘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르 강을 운항하는 기선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기선은 곧 백군의 의해 나포됐고 알렉산드라 김을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공산당 간부 전원이 체포되어 종국에는 처형됐다. 한국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될 뻔한 한 여성의 생애가 그렇게 마감됐다.
.
.
오늘 새로운, 대단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pic.twitter.com/Ouip8HMmOP— 神의 냉랭한 품속 (@nomadic_crow) February 14, 2018
.
.
김알렉산드리아에 관한 추가적인 기사 시사저널 1993년도 기사 |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1부)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08192
아령실기(俄領實記)를 통해 연해주 한인들에 대해 기록을 남겼던 "뒤바보" 계봉우(桂奉瑀)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2년(1920) 4월 17일자, 20일자, 22일자에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간략한 전기를 남겼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35&cid=51289&categoryId=51289&expCategoryId=51289
여기 사진에서는 기사의 상세한 내용을 판독하기는 어렵다.
아령실기(俄領實記)를 통해 연해주 한인들에 대해 기록을 남겼던 "뒤바보" 계봉우(桂奉瑀)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2년(1920) 4월 17일자, 20일자, 22일자에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간략한 전기를 남겼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35&cid=51289&categoryId=51289&expCategoryId=51289
여기 사진에서는 기사의 상세한 내용을 판독하기는 어렵다.
[Web Scrap] 영암 박씨 러시아파 후손의 굴곡진 인생 드라마
RUSSIA BEYOND 라는 사이트의 기사 Scrap
[원본글] https://kr.rbth.com/society/2013/05/29/42101
영암 박씨 러시아파 후손의 굴곡진 인생 드라마
문화 MAY 28 2013 엘레나 김 RUSSIA포커스
1916년에 찍은 러시아 영암 박씨의 2대인 박양남의 아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오른쪽 셋째 어른)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마르타(맏딸), 마리야(둘째 딸), 부인 나탈리아, 무릎 위 카탸, 마트베이(그리고리가 안고 있는 둘째 아들), 형의 손자(이름 미상), 맏아들 마르틴. (사진제공=박씨 문중)
러시아 한인 이주 150년 ··· 본지가 찾아낸 ‘박양남 족보’로 본 고려인의 삶
1863년 여름~가을 무렵 연해주 노브고로드 경비대 부근(현 포시에트항)에 13~14세대의 한인 가구가 등장했다. 러시아 땅에 처음 출연한 한인이다. 이를 1863년 11월 30일 노브고로드 경비대장 랴자노프 중위가 연해주의 제1군사 지사인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카자케비치 해군 소장에 보고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 제국은 1854~1855년 영국·프랑스 함대가 극동 점령을 시도한 뒤 이곳으로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사 거점을 강화하는 등 극동 개발에 열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카자케비치 소장은 티진헤 강(러시아 이름 비노그라드나야 강) 유역에 정착하게 해 달라는 한인들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1864년 9월 21일 랴자노프 중위는 한인들이 티진헤 마을(러시아 이름은 랴자노프 중위의 이름을 딴 '슬로보다 랴자노프카')을 만들어 열심히 농사를지었다. 랴자노프는 이런 내용을 담은 한인 보고서를 지사에 제출하면서 이들에게 빵 판매와 제분소 건설을 허가하고 '보조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1864년 9월 21일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날로 간주됐다.
이에 따라 올해는 러시아의 한인 이주 150년이 되는 해다. Russia포커스는 초창기 러시아 한인 역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영암(靈巖) 박씨 가문의 역사가 담긴 족보를 발굴했다. 러시아어로 돼 있는 주요 기록엔 굶주림 때문에 1869년 선조 박양남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정, 이들을 따듯하게 대했던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또 그의 아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사진)의 가계를 통해 스탈린의 숙청 광풍이 몰아닥친 30년대 비극사와 이후 러시아에 뿌리내리는 과정도 잘 보여준다. 이 족보는 후손 박 라리사(61·우파 거주)가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한문으로 조선시대문중사를 쓴 두 장짜리 앞부분과 러시아 내의 가족사를 기록한 30여 쪽의 러시아어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러시아어 족보는 후손들이 태어난 해의 갑자도 일일이 기록, 족보를 만든 사람의 한국적 정체성이 담겨 있다.
가족에 따르면 '족부'로 불리는 이 기록은 단일본으로 전해져 오다 1991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사는 박양남의 손자 박 마르틴(당시 82세)이 영암 박씨 문중 500주년을 기념, 17권을 만들면서 여러 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풍부한 내용을 담은 러시아어 본은 영암 박씨 후손의 슬프고 굴곡진 러시아 드라마를 보여준다.
가문의 기원
러시아어 기록에 따르면 영암 박씨의 역사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떠난 영암 출신의 박동에서 시작됐다('족부'는 이를 1461년으로 본다). 동은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고위 관료인 '식관'이 됐다. 그러나 왕(세조로 추정)과의 갈등으로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유배된 뒤 후손이 수백 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또 본관을 '넨암 박'으로 기록했다. 족보는 18세기 접어들 무렵 '넨암 박씨 8대손 박 사수르'와 '임선과 증석'이 정리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러시아어 기록은 발음 문제에 오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문 기록엔 본이 '영암(靈巖)'으로 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입북 시조가 돈(敦)씨이다. 문과를 봐 경성에서 예조정랑으로 입시했는데 과생들이 그를 쫓아내 경흥부 송상동으로 가게 됐다. 현재 8대다. 조상의 사적을 모르게 될 것을 우려해 기록을 후인에게 남긴다. 건륭11년(1746년 )영암 후인 박시등 씀."
"기록을 14ㆍ15ㆍ16대까지 참고했다. 이후 서로 멀어지고 가문의 사람들이 서로를 잘 몰라 큰일을 같이 상의할 수 없고, 이에 족보를 수정하고 기록해 후대에 넘긴다. 광서 18년(1855년) 임진 12월."
러시아 시조의 탄생
1820년 영암 박씨 러시아파 시조인 박양남이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1869년 양남은 조선 내 기아와 탄압을 피해 아내, 두 아들과 함께 러시아로 건너왔다(이때는 고종 7년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나고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국내가 극단적으로 어수선해지는 시기다). 비슷한 이유로 피난 온 6명의 한인과 함께 연해주 수이푼 시(현재 우수리스크)에 푸칠로프카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곳은 포시에트의 첫 한인 정착지 바로 옆이다. 푸칠로프카의 한국 이름은 육성촌(6姓村)이다(朴ㆍ金ㆍ李ㆍ千ㆍ黃ㆍ吳씨).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제정 러시아는 소수 민족에 우호적이었고, 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주자들이 황제를 최고 권력자로 인정하고, 세금을 내며 법률을 준수하면 지원했다. 한인도 환영 받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들어온 이들에게 매달 가족당 보리 1푸드(16.38㎏)씩 배급했다. 보리는 130㎞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줬고 양남은 매달 왕복했다.
러시아정교회로 개종
1870년 박씨 일가는 다른 한인처럼 정교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러시아 국적을 얻었고, 그에 따라 제정 러시아 군대에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부지런히 일해 넉넉하게 살았다. 이름을 이반으로 바꾼 양남은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뒀다. 그 가운데 현재 셋째 아들인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사진의 남자)의 기록만 남아 있다. 그는 경찰 보조 관리관으로 있다가 나중에는 조그만 식용유 공장을 세웠다. 양남의 땅은 7㏊(2만여 평)나 됐고 방이 여덟 개인 집에서 살았다. 1912년 정착촌에 학교가 세워졌고 양남의 결혼한 자식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을 학교로 보냈다. 1913년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해 황제를 알현했다.
혁명과 내전 뒤 뿌리 내리기
혁명과 내전에 대해 족보는 '무섭고 어수선했다'고 할 뿐 별 기록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1929년에 다시 이어진다. 이 시점부터는 셋째 아들인 그리고리 가족의 이야기가 집중된다. 그에 대해선 두 번 결혼해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뒀다는 기록만 있다. 1930년대에 그리고리 가족은 극동을 떠난다. 그리고리와 첫 부인 사이에 태어난 맏딸 베라만 극동에 남았다. 두 명은 첼랴빈스크로 가고 나머지는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 소련인들은 한 곳에 오래 살지 않았다. 소련은 빠르게 발전 중이었다. 수천 개의 공장이 만들어지고 신도시도 조성됐다. 사람들은 들떴다. 그리고리의 자식들도 공부나 다른 이유 때문에 뿔뿔이 떠났다. 이들은 서로 도왔지만 경제적 지원은 나이가 많은(사진 왼쪽에서 둘째) 마리야가 맡았다. 그녀는 소련의 당 활동가였던 레프 유와 결혼한 뒤 함께 극동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아무르 강 유역 콤소몰스크의 당 구역위원회 서기가 됐고 마리야는하바롭스크 시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마리야는 멀리서도 가족을 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결혼해 하바롭스크·무르만스크 등으로 제각각 삶의 터전을 찾아나갔다.
직격탄, 숙청과 강제 이주
1930년대 말 사회는 불안해졌다. '인민의 적'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정권에 반대하거나 다가오는 전쟁에서 소련 편에 설 것이란 믿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한인에게도 칼날이 날아왔다. 마리야(그리고리의 셋째 딸)와 남편 레프가 모스크바로 불려간 뒤 레프가 투옥됐다. 공업전문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막내딸 카챠(사진 무릎에 앉은 여자아이)는 케샤 박을 만나 결혼한 뒤 야로슬라블로 이사했는데 몇 년 뒤 케샤가 체포됐다. 지금도 후손들은 왜 체포됐는지 모른다. 대재앙의 전조였다. 대대적 투옥이 시작되면서 그리고리 이바노비치의 딸들은 모두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37년 10월 극동의 한인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시작했다.
당시 그리고리의 맏아들 마르틴(1909년생) 가족만 극동에 있었다. 마르틴은 24시간 내에 짐을 챙기고 떠나야 했다. 화물칸 하나에 네 가족씩 밀어넣고, 몇 주간을 그냥 달렸다. 기차는 사람들을 허허벌판에 내려놓고 떠나기도 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건자재와 식품을 주긴 했지만 살 곳이 없는 그들은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나야 했다.
세월이 흘러 마르틴 가족은 카자흐스탄의 카잘린스크 시에 정착했다. 박양남의 3대손인 그는 학교 교무부장이 됐고 누나 마르파 가족도 카자흐스탄으로 합류했다. 그리고리 첫 부인의 딸인 베라는 남편과 사별한 뒤 우즈베키스탄의 한인 집단농장(콜호즈) '폴랴르나야 즈베즈다(북극성)'로갔다. 마리야는 동생 카챠가 사는 첼랴빈스크로 갔다. 마리야는 결핵을 앓다 세상을 떠났고 카챠는 언니의 자식들을 도맡아 키웠다.
다시 모인 가족들
전쟁이 끝나고 형제 자매가 다시 모였다. 마르파는 아이들과, 마트베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마르틴은 가족을 이끌고 '폴랴르나야 즈베즈다' 콜호스에 있는 맏누이 베라에게로 갔다. 그 무렵 '폴랴르나야 즈베즈다'는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농장이었다. 1951년 그리고리의 부인 나탈리아 오(사진의 엄마)가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모든 가족이 모였다. 막내딸 카챠도 갔다. 본지가 박양남 후손의 드라마를 찾아낼 수 있던 것은 이 카챠의 손녀 예카테리나 김 덕분이다.
양남의 6대손, 신세대
양남의 후손은 그 뒤 옛 소련 국가로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에 사는데 연락이 안 되는 가족들도 있다. 6세대가 지난 뒤 서로의 존재감이 흐려져 있다. 그러나 박양남의 피를 이어받은 신진 동양학자인 예카테리나 김 같은 이는 "할아버지가 슬퍼하실 거예요. 그래도 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씁니다"라고 말한다. 노보시비르스크 소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의 고고학ㆍ민속학 연구원 과정에 다니는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한인 디아스포라와 러시아 내 한인 정체성'을 연구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150년 사는동안 한인의 독특한 정체성이 형성됐어요. 많은 한인은 한국어를 모르며 러시아에 동화되어 살지만 나는 한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
.
.
재미있는 건 아이들의 이름이 러시아식 이름이지만, 돌림자로 이름짓는 습성 때문인지 "마"로 시작하여 이름을 지었다. 사진의 왼쪽부터 마르타(마르파?), 마리야, 엄마의 무릎에 있는 카챠, 아빠 앞에 있는 마트베이, 그리고 맨 왼쪽 맏아들 마르틴. 막내딸 카챠만 빼고 모두 "마"자로 시작.— 神의 냉랭한 품속 (@nomadic_crow) February 14, 2018
박환,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1920~30년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골프장 캐디 사진.
한국계로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 캐디로 일하고 있다.
(사진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091&cid=51289&categoryId=51289&expCategoryId=51289 )
- 박환,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러시아정교 한인학교의 학생들(1904년)
한국계로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 캐디로 일하고 있다.
(사진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091&cid=51289&categoryId=51289&expCategoryId=51289 )
- 박환,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러시아정교 한인학교의 학생들(1904년)
Thursday, February 08, 2018
『사기』 를 읽으며 몇 가지 메모 & Scrap
처음 복날을 정하고 개고기를 먹었다라는 기록;
"진(秦) 덕공(德公)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해, 개를 잡아서 열독(熱毒)을 제거했다"
- 『사기』, 권5. 진본기[秦本紀], 사마천
권력자와 놀다 패가망신한 사례. 억울함 ;
"진(秦) 무왕은 힘이 세어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역사(力士)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이 모두 큰 자리에 올랐다. 무왕이 맹열과 세발솥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8월, 무왕이 죽자 맹열은 멸족당했다"
- 『사기』 권 5. 진본기[秦本紀]
아는것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특히나 자기자신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교훈;
사마천 曰 "나는 다만 한자(韓非子)가 「세난」 편을 짓고도 스스로는 재난을 피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논평 : 마부와 말은 무슨 죄가 있어서 대신 목이 베어 엉뚱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
.
춘추전국시대 관련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당시에 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현재의 “국가” 개념과는 상당히 다름. 오히려 현재의 “회사”라는 개념에 더 부합하는... 공자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던거 보면...
.
.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의 초상화. 선은 단순한데 얼굴의 표정이 묘하게 살아 있는 느낌..
.
.
인간의 증오와 복수심이라는게 그 막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춘추전국시대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가하고, 예양이란 사람은 지백을 죽인뒤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하고.. 당의 측천무후는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를 잘라 항아리에 염장을 하기도 하고...
역사의 기록이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함; 다섯갈래로 찢겨 죽은 항우項羽..
척부인[戚夫人]의 비극...
.
.
속세를 피해(?) 궁전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간 하급관리 동방삭[東方朔]... 뭐 요즘말로 세금도둑이라 칭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편으론 이렇게 살다가는 것도 부럽다.
"진(秦) 덕공(德公)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해, 개를 잡아서 열독(熱毒)을 제거했다"
- 『사기』, 권5. 진본기[秦本紀], 사마천
권력자와 놀다 패가망신한 사례. 억울함 ;
"진(秦) 무왕은 힘이 세어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역사(力士)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이 모두 큰 자리에 올랐다. 무왕이 맹열과 세발솥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8월, 무왕이 죽자 맹열은 멸족당했다"
- 『사기』 권 5. 진본기[秦本紀]
아는것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특히나 자기자신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교훈;
사마천 曰 "나는 다만 한자(韓非子)가 「세난」 편을 짓고도 스스로는 재난을 피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논평 : 마부와 말은 무슨 죄가 있어서 대신 목이 베어 엉뚱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
.
춘추전국시대 관련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당시에 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현재의 “국가” 개념과는 상당히 다름. 오히려 현재의 “회사”라는 개념에 더 부합하는... 공자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던거 보면...
.
.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의 초상화. 선은 단순한데 얼굴의 표정이 묘하게 살아 있는 느낌..
.
.
인간의 증오와 복수심이라는게 그 막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춘추전국시대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가하고, 예양이란 사람은 지백을 죽인뒤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하고.. 당의 측천무후는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를 잘라 항아리에 염장을 하기도 하고...
역사의 기록이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함; 다섯갈래로 찢겨 죽은 항우項羽..
척부인[戚夫人]의 비극...
.
.
속세를 피해(?) 궁전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간 하급관리 동방삭[東方朔]... 뭐 요즘말로 세금도둑이라 칭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편으론 이렇게 살다가는 것도 부럽다.
이항억의 『연행일기』 中
조선인을 대상으로 처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
1863년 1월 28일~29일 중국 베이징 러시아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가 이항억 등 조선 연행사 일행을 촬영한 사진. (사진출처 : http://www.donga.com/news/View?gid=25448998&date=20100116 )
사진찍을때의 자세한 상황은 이항억의 『연행일기』 1863년 1월 28일 & 29일 기사 참조. 재밌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76124&categoryId=58227&cid=58227
.
.
북경에서 공중목욕탕에 가본 이야기와 서양여자 구경한 이야기도 있음...
공중목욕탕체험: 밤에 관초와 함께 걸어서 목욕갱(沐浴炕)으로 갔다. 관에서부터 서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가서 5리쯤에 있었다...목욕갱은 궁륭형(穹隆形)으로 수백 칸이 되었다. 갱에 들어가니 훈기가 방에 가득해서 나도 모르게 땀이 흘러내렸다. 저쪽 사람 5 · 60인도 모두 벌거벗고 목욕하고 있었다
.
.
빚쟁이 운전기사 때문에 차를 우회하여 목적지에 도착; "나는 차부(車夫)가 동악묘 앞 점포 마을에 있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고 해서 죽어도 그곳으로는 통과하지 않으려 하여 영통교 서쪽에서부터 곧바로 화대문(花大門)에 이르러 옥하관에 들어 왔다" - 1862년 12월 26일, 이항억의 『연행일기』 中
1863년 1월 28일~29일 중국 베이징 러시아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가 이항억 등 조선 연행사 일행을 촬영한 사진. (사진출처 : http://www.donga.com/news/View?gid=25448998&date=20100116 )
사진찍을때의 자세한 상황은 이항억의 『연행일기』 1863년 1월 28일 & 29일 기사 참조. 재밌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76124&categoryId=58227&cid=58227
.
.
북경에서 공중목욕탕에 가본 이야기와 서양여자 구경한 이야기도 있음...
공중목욕탕체험: 밤에 관초와 함께 걸어서 목욕갱(沐浴炕)으로 갔다. 관에서부터 서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가서 5리쯤에 있었다...목욕갱은 궁륭형(穹隆形)으로 수백 칸이 되었다. 갱에 들어가니 훈기가 방에 가득해서 나도 모르게 땀이 흘러내렸다. 저쪽 사람 5 · 60인도 모두 벌거벗고 목욕하고 있었다
.
.
빚쟁이 운전기사 때문에 차를 우회하여 목적지에 도착; "나는 차부(車夫)가 동악묘 앞 점포 마을에 있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고 해서 죽어도 그곳으로는 통과하지 않으려 하여 영통교 서쪽에서부터 곧바로 화대문(花大門)에 이르러 옥하관에 들어 왔다" - 1862년 12월 26일, 이항억의 『연행일기』 中
Saturday, February 03, 2018
『일본서기日本書記』 를 읽으며 몇 가지 메모 & Scrap
2018年01月18日(木)
『일본서기日本書記』 한글 주해본을 읽는데,, 1대 천황이라는 신무천황神武天皇 기사 중에 재미있는 글이 있다. 기원전 663년 가을 8월, 토전현(菟田縣)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마치고 천황은 술과 고기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토전(菟田)의 고성(高城)에 도요새 그물을 치고 내가 기다리는데 도요새는 안 걸리고 매가 걸렸다. 전처(前妻)가 반찬거리를 달라면 메밀의 열매가 없는 것을 많이 주고, 후처(後妻)가 달라면 제현목(齊賢木)과 같이 열매가 많은 것을 많이 주어라" - 『日本書記』 제3권, 神武天皇 기사 中
이 노래가 기원전 663년 당시의 노래인지, 아니면 책을 편찬하던 8세기 당시의 노래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노래에 표현된 옛 사랑(전처)와 지금의 사랑(후처)에 대한 차별적 대응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기사에 나타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동진 경로를 현재의 지도에서 따라가 보면, 키타큐슈쪽에서 히로시마, 오카야마, 오오사카를 거쳐, 기원전 662년에 나라(奈良)에 도읍을 정하고 기원전 660년 2월 11일 왕위에 올라 왕조를 개시...
2018年01月19日(金)
서기 479년, 백제 동성왕의 즉위 관련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
곤지扶餘昆支가 개로왕의 명에 따라 왜(倭, 야마토)로 간게 461년경. 일본에서 다섯아들을 두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으니, 아이를 아무리 빨리 낳아도 도착후 1~2년 후. 둘째 아들인 말다(末多)가 동성왕東城王으로 즉위한 시점이 479년 이니, 동성왕이 즉위한 나이는 대충 10대 중반 이지 않았을까?
한가지 궁금한 것은, 태어나면서 부터 계속 외국(倭)에서 살았다면, 동성왕에게는 당시의 왜어가 모국어 였을거 같은데 언어소통에 문제는 없었을까? 아니면 백제어-왜어를 동시 구사하는 Bilingual 이었나?
하기야 과거 유럽국가들의 왕족들을 보면 지배/운영하는 나라는 달라도 서로 얽히고 얽힌 왕실가문간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던거 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제 16권, 무열천황武烈天皇 ; 무열에 대한 기사는 온갖 기행과 잔혹한 싸이코/쏘시오패쓰적인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긱주: 무열의 실존 여부에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며,, 성군의 마지막 후계는 폭군이라는 중국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을 수...
2018年01月22日(月)
죽음을 표현하는 말에도 위계가 있다. 붕(崩), 몽(蒙), 졸(卒)...
그리고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도 달라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3년(509년) 기사 中; "2월 임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사는 백제 백성 중에 본관지로부터 부랑 도망하여 호적에서 삭제된 지 3~4대가 지난 자를 조사하여 백제로 보내어 관(貫)에 올렸다"
그리고 6년(512년) 12월의 기사에는 백제가 왜에게 임나의 4개 현을 달라고 해서 백제에 할양하였다 라는 기사에서 보면,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백제와 임나는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에 쉽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나라' 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반파국(伴跛國)과 기문(己汶)의 땅 관련 분쟁 기사 등을 보면, 백제(공주)와 임나(가야)지역 사이에 다양한 소국(小國)들이 있어서 통일된 영토체계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교통과 통제가 가능했을까? 둔창처럼 원격/직할 지배 및 수취체계??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23~24년(529~530년경)의 모야신(毛野臣)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니,,, 가도에 근거지를 잡고 온갖 폐악질을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이미지가...
2018年01月23日(火)
고래로 부터 싸움을 하기 전에 서로의 관등성명과 나이를 밝히는게 예법이었다...
.
.
옛날에는 외국의 사신으로 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고 또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게 걸렸음. 일례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 관련 기사를 보면, 570년 4월 고구려 사신단 난파 등 천신만고 끝에 왜에 도착. 흠명의 병환~죽음, 새로운 왕의 취임 등 으로 인해 2년여를 대기함
572년 민달敏達 제위. 당해년 5월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를 전달 받음. 6월에는 사신단 내부에서 부사들이 협작하여 대사를 피살하는 사건 발생. 그해 여름 7월 고구려 사신단이 왜를 출발해 귀국행. 출발~귀국까지 2~3년여 걸림. (중간에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발생함..)
참고로,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의 해독에 애를 먹은 일본. 고구려 국서가 중국식 한자 체계가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호화된 외교문서이다 보니 아마 그랬을 수도...
.
.
562년 신라의 임나(가야) 침공, 복속/합병 관련 기사,,
얼마나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었으면 이런 기사를..
.
.
『일본서기日本書紀』 599년(추고 7년) 9월에, "백제가 낙타 한마리, 당나귀 한마리, 양 두마리, 희 꿩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 백제는 낙타를 어디서 구해왔을까? 기르기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래서 인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일본이 비슷한 외교적 선물로 한반도에 앙갚음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백제가 보낸 낙타 때문이지 않을까?ㅎㅎ 조선왕조실록에 태종때 일본에서 보내온 코끼리 두마리가 국가재정을 파탄내 어쩔 수 없이 코끼리를 섬으로 유배시킨 이야기가 나옴...
『일본서기日本書紀』 618년(추고 26년) 8월에 고구려 사신이 와서 수나라 양제가 30만 무리를 일으켜 침략했으나 물리친 사실과 함께, 토산물과 낙타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도 있음.
낙타 관련 추가 기사; "657년(제명 3년) 백제에 갔던 왜의 사신이 돌아와 낙타 한마리와 노새 두마리를 바쳤다. 679년(천무 8년) 10월 신라가 낙타를 보내왔다"
2018年01月25日(木)
.
.
천무 13년 윤4월, "나이 40 이상의 여자는 모발을 묶거나 묶지 않거나(髮之結不結), 또 말을 세로로 타거나 가로로 타거나(及乘馬縱橫) 마음대로 하라(並任意也)"라고 했다는데,, 말을 가로로 타거나 세로로 타거나,, 어떤 자세일까??
.
.
내가 남의 족보를 정리하고 있다ㅋㅋㅋ
『일본서기日本書紀』 읽다가 족보가 꼬이는 것 같아서 3권 중 일부만 간략하게 정리해 봄...
.
.
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장례식 끝나고 매장하는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듯,,, 천무天武의 경우 686년 9월에 죽었는데, 688년 11월에 장사를 지냈다고 함. 근 2년간 장례식을 치룸...
2018年01月31日(水)
황제의 선조와 해녀(龍女)간의 교합과 배신이라는 반복적인 설화; 남자들이여 여자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말라...
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도 비슷한 전승에 속하지 않을까? 물론 선녀와 나무꾼에서는 납치, 강제혼의 이야기도 포함되긴 하지만...
『일본서기日本書記』 한글 주해본을 읽는데,, 1대 천황이라는 신무천황神武天皇 기사 중에 재미있는 글이 있다. 기원전 663년 가을 8월, 토전현(菟田縣)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마치고 천황은 술과 고기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토전(菟田)의 고성(高城)에 도요새 그물을 치고 내가 기다리는데 도요새는 안 걸리고 매가 걸렸다. 전처(前妻)가 반찬거리를 달라면 메밀의 열매가 없는 것을 많이 주고, 후처(後妻)가 달라면 제현목(齊賢木)과 같이 열매가 많은 것을 많이 주어라" - 『日本書記』 제3권, 神武天皇 기사 中
이 노래가 기원전 663년 당시의 노래인지, 아니면 책을 편찬하던 8세기 당시의 노래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노래에 표현된 옛 사랑(전처)와 지금의 사랑(후처)에 대한 차별적 대응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기사에 나타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동진 경로를 현재의 지도에서 따라가 보면, 키타큐슈쪽에서 히로시마, 오카야마, 오오사카를 거쳐, 기원전 662년에 나라(奈良)에 도읍을 정하고 기원전 660년 2월 11일 왕위에 올라 왕조를 개시...
2018年01月19日(金)
서기 479년, 백제 동성왕의 즉위 관련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
곤지扶餘昆支가 개로왕의 명에 따라 왜(倭, 야마토)로 간게 461년경. 일본에서 다섯아들을 두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으니, 아이를 아무리 빨리 낳아도 도착후 1~2년 후. 둘째 아들인 말다(末多)가 동성왕東城王으로 즉위한 시점이 479년 이니, 동성왕이 즉위한 나이는 대충 10대 중반 이지 않았을까?
한가지 궁금한 것은, 태어나면서 부터 계속 외국(倭)에서 살았다면, 동성왕에게는 당시의 왜어가 모국어 였을거 같은데 언어소통에 문제는 없었을까? 아니면 백제어-왜어를 동시 구사하는 Bilingual 이었나?
하기야 과거 유럽국가들의 왕족들을 보면 지배/운영하는 나라는 달라도 서로 얽히고 얽힌 왕실가문간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던거 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제 16권, 무열천황武烈天皇 ; 무열에 대한 기사는 온갖 기행과 잔혹한 싸이코/쏘시오패쓰적인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긱주: 무열의 실존 여부에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며,, 성군의 마지막 후계는 폭군이라는 중국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을 수...
2018年01月22日(月)
죽음을 표현하는 말에도 위계가 있다. 붕(崩), 몽(蒙), 졸(卒)...
그리고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도 달라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3년(509년) 기사 中; "2월 임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사는 백제 백성 중에 본관지로부터 부랑 도망하여 호적에서 삭제된 지 3~4대가 지난 자를 조사하여 백제로 보내어 관(貫)에 올렸다"
그리고 6년(512년) 12월의 기사에는 백제가 왜에게 임나의 4개 현을 달라고 해서 백제에 할양하였다 라는 기사에서 보면,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백제와 임나는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에 쉽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나라' 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반파국(伴跛國)과 기문(己汶)의 땅 관련 분쟁 기사 등을 보면, 백제(공주)와 임나(가야)지역 사이에 다양한 소국(小國)들이 있어서 통일된 영토체계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교통과 통제가 가능했을까? 둔창처럼 원격/직할 지배 및 수취체계??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23~24년(529~530년경)의 모야신(毛野臣)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니,,, 가도에 근거지를 잡고 온갖 폐악질을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이미지가...
2018年01月23日(火)
고래로 부터 싸움을 하기 전에 서로의 관등성명과 나이를 밝히는게 예법이었다...
.
.
옛날에는 외국의 사신으로 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고 또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게 걸렸음. 일례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 관련 기사를 보면, 570년 4월 고구려 사신단 난파 등 천신만고 끝에 왜에 도착. 흠명의 병환~죽음, 새로운 왕의 취임 등 으로 인해 2년여를 대기함
572년 민달敏達 제위. 당해년 5월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를 전달 받음. 6월에는 사신단 내부에서 부사들이 협작하여 대사를 피살하는 사건 발생. 그해 여름 7월 고구려 사신단이 왜를 출발해 귀국행. 출발~귀국까지 2~3년여 걸림. (중간에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발생함..)
참고로,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의 해독에 애를 먹은 일본. 고구려 국서가 중국식 한자 체계가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호화된 외교문서이다 보니 아마 그랬을 수도...
.
.
562년 신라의 임나(가야) 침공, 복속/합병 관련 기사,,
얼마나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었으면 이런 기사를..
.
.
『일본서기日本書紀』 599년(추고 7년) 9월에, "백제가 낙타 한마리, 당나귀 한마리, 양 두마리, 희 꿩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 백제는 낙타를 어디서 구해왔을까? 기르기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래서 인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일본이 비슷한 외교적 선물로 한반도에 앙갚음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백제가 보낸 낙타 때문이지 않을까?ㅎㅎ 조선왕조실록에 태종때 일본에서 보내온 코끼리 두마리가 국가재정을 파탄내 어쩔 수 없이 코끼리를 섬으로 유배시킨 이야기가 나옴...
『일본서기日本書紀』 618년(추고 26년) 8월에 고구려 사신이 와서 수나라 양제가 30만 무리를 일으켜 침략했으나 물리친 사실과 함께, 토산물과 낙타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도 있음.
낙타 관련 추가 기사; "657년(제명 3년) 백제에 갔던 왜의 사신이 돌아와 낙타 한마리와 노새 두마리를 바쳤다. 679년(천무 8년) 10월 신라가 낙타를 보내왔다"
2018年01月25日(木)
땅이 갈라지고 집이 움직여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잠을 너무 곤하게 잔 건지 아니면 왠 만한 지진은 그려러니 적응이 되서 그런건지ㅎㅎ
.
.
천무 13년 윤4월, "나이 40 이상의 여자는 모발을 묶거나 묶지 않거나(髮之結不結), 또 말을 세로로 타거나 가로로 타거나(及乘馬縱橫) 마음대로 하라(並任意也)"라고 했다는데,, 말을 가로로 타거나 세로로 타거나,, 어떤 자세일까??
.
.
내가 남의 족보를 정리하고 있다ㅋㅋㅋ
『일본서기日本書紀』 읽다가 족보가 꼬이는 것 같아서 3권 중 일부만 간략하게 정리해 봄...
.
.
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장례식 끝나고 매장하는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듯,,, 천무天武의 경우 686년 9월에 죽었는데, 688년 11월에 장사를 지냈다고 함. 근 2년간 장례식을 치룸...
2018年01月31日(水)
황제의 선조와 해녀(龍女)간의 교합과 배신이라는 반복적인 설화; 남자들이여 여자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말라...
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도 비슷한 전승에 속하지 않을까? 물론 선녀와 나무꾼에서는 납치, 강제혼의 이야기도 포함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