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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03, 2018

『일본서기日本書記』 를 읽으며 몇 가지 메모 & Scrap

2018年01月18日(木)

『일본서기日本書記』 한글 주해본을 읽는데,, 1대 천황이라는 신무천황神武天皇 기사 중에 재미있는 글이 있다. 기원전 663년 가을 8월, 토전현(菟田縣)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마치고 천황은 술과 고기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토전(菟田)의 고성(高城)에 도요새 그물을 치고 내가 기다리는데 도요새는 안 걸리고 매가 걸렸다. 전처(前妻)가 반찬거리를 달라면 메밀의 열매가 없는 것을 많이 주고, 후처(後妻)가 달라면 제현목(齊賢木)과 같이 열매가 많은 것을 많이 주어라" - 『日本書記』 제3권, 神武天皇 기사 中

이 노래가 기원전 663년 당시의 노래인지, 아니면 책을 편찬하던 8세기 당시의 노래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노래에 표현된 옛 사랑(전처)와 지금의 사랑(후처)에 대한 차별적 대응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기사에 나타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동진 경로를 현재의 지도에서 따라가 보면, 키타큐슈쪽에서 히로시마, 오카야마, 오오사카를 거쳐, 기원전 662년에 나라(奈良)에 도읍을 정하고 기원전 660년 2월 11일 왕위에 올라 왕조를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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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01月19日(金)

서기 479년, 백제 동성왕의 즉위 관련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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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扶餘昆支가 개로왕의 명에 따라 왜(倭, 야마토)로 간게 461년경. 일본에서 다섯아들을 두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으니, 아이를 아무리 빨리 낳아도 도착후 1~2년 후. 둘째 아들인 말다(末多)가 동성왕東城王으로 즉위한 시점이 479년 이니, 동성왕이 즉위한 나이는 대충 10대 중반 이지 않았을까?

한가지 궁금한 것은, 태어나면서 부터 계속 외국(倭)에서 살았다면, 동성왕에게는 당시의 왜어가 모국어 였을거 같은데 언어소통에 문제는 없었을까? 아니면 백제어-왜어를 동시 구사하는 Bilingual 이었나?

하기야 과거 유럽국가들의 왕족들을 보면 지배/운영하는 나라는 달라도 서로 얽히고 얽힌 왕실가문간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던거 보면 대충 이해가 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제 16권, 무열천황武烈天皇 ; 무열에 대한 기사는 온갖 기행과 잔혹한 싸이코/쏘시오패쓰적인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긱주: 무열의 실존 여부에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며,, 성군의 마지막 후계는 폭군이라는 중국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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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01月22日(月)

죽음을 표현하는 말에도 위계가 있다. 붕(崩), 몽(蒙), 졸(卒)...
그리고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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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3년(509년) 기사 中; "2월 임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사는 백제 백성 중에 본관지로부터 부랑 도망하여 호적에서 삭제된 지 3~4대가 지난 자를 조사하여 백제로 보내어 관(貫)에 올렸다"

그리고 6년(512년) 12월의 기사에는 백제가 왜에게 임나의 4개 현을 달라고 해서 백제에 할양하였다 라는 기사에서 보면,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백제와 임나는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에 쉽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나라' 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반파국(伴跛國)과 기문(己汶)의 땅 관련 분쟁 기사 등을 보면, 백제(공주)와 임나(가야)지역 사이에 다양한 소국(小國)들이 있어서 통일된 영토체계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교통과 통제가 가능했을까? 둔창처럼 원격/직할 지배 및 수취체계??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천황繼體天皇 23~24년(529~530년경)의 모야신(毛野臣)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니,,, 가도에 근거지를 잡고 온갖 폐악질을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이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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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01月23日(火)

고래로 부터 싸움을 하기 전에 서로의 관등성명과 나이를 밝히는게 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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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외국의 사신으로 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고 또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게 걸렸음. 일례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 관련 기사를 보면, 570년 4월 고구려 사신단 난파 등 천신만고 끝에 왜에 도착. 흠명의 병환~죽음, 새로운 왕의 취임 등 으로 인해 2년여를 대기함

572년 민달敏達 제위. 당해년 5월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를 전달 받음. 6월에는 사신단 내부에서 부사들이 협작하여 대사를 피살하는 사건 발생. 그해 여름 7월 고구려 사신단이 왜를 출발해 귀국행. 출발~귀국까지 2~3년여 걸림. (중간에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발생함..)

참고로,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국서의 해독에 애를 먹은 일본. 고구려 국서가 중국식 한자 체계가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호화된 외교문서이다 보니 아마 그랬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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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년 신라의 임나(가야) 침공, 복속/합병 관련 기사,, 
얼마나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었으면 이런 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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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 599년(추고 7년) 9월에, "백제가 낙타 한마리, 당나귀 한마리, 양 두마리, 희 꿩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 백제는 낙타를 어디서 구해왔을까? 기르기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래서 인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일본이 비슷한 외교적 선물로 한반도에 앙갚음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백제가 보낸 낙타 때문이지 않을까?ㅎㅎ 조선왕조실록에 태종때 일본에서 보내온 코끼리 두마리가 국가재정을 파탄내 어쩔 수 없이 코끼리를 섬으로 유배시킨 이야기가 나옴...

『일본서기日本書紀』 618년(추고 26년) 8월에 고구려 사신이 와서 수나라 양제가 30만 무리를 일으켜 침략했으나 물리친 사실과 함께, 토산물과 낙타 한마리를 바쳤다라는 기사도 있음.

낙타 관련 추가 기사; "657년(제명 3년) 백제에 갔던 왜의 사신이 돌아와 낙타 한마리와 노새 두마리를 바쳤다. 679년(천무 8년) 10월 신라가 낙타를 보내왔다"



2018年01月25日(木)

땅이 갈라지고 집이 움직여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잠을 너무 곤하게 잔 건지 아니면 왠 만한 지진은 그려러니 적응이 되서 그런건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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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 13년 윤4월, "나이 40 이상의 여자는 모발을 묶거나 묶지 않거나(髮之結不結), 또 말을 세로로 타거나 가로로 타거나(及乘馬縱橫) 마음대로 하라(並任意也)"라고 했다는데,, 말을 가로로 타거나 세로로 타거나,, 어떤 자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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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의 족보를 정리하고 있다ㅋㅋㅋ 
『일본서기日本書紀』 읽다가 족보가 꼬이는 것 같아서 3권 중 일부만 간략하게 정리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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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장례식 끝나고 매장하는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듯,,, 천무天武의 경우 686년 9월에 죽었는데, 688년 11월에 장사를 지냈다고 함. 근 2년간 장례식을 치룸...


2018年01月31日(水)

황제의 선조와 해녀(龍女)간의 교합과 배신이라는 반복적인 설화; 남자들이여 여자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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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도 비슷한 전승에 속하지 않을까? 물론 선녀와 나무꾼에서는 납치, 강제혼의 이야기도 포함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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