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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01, 2025

책,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by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는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끝난 에도(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 백성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지에 주목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과 그들이 아팠을때 어떻게 병을 고쳤는지에 관해, 그리고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민이 과거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어떻게 입신양명의 길을 찾았는가에 관해서 의학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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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막부시대를 열면서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던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정치, 군사, 경제, 과학, 문화적으로 퇴보했다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에도막부시대 일본은 현대적인 국가 이미지의 단일한 나라가 아니라 약 300여 다이묘들에 의해 쪼개져 독립적으로 다스려지던, 약 300여개의 소국가가 공존하던 '하나의 닫힌 세계'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분할된 닫힌 세계에서 당시 막부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그들의 위계를 영지에서 쌀이 얼마나 생산되는 가를 가지고 정했으며, 세금도 화폐나 다른 물건이 아닌 쌀로만 수취하는 구조였다. 농민들은 생산량의 1/3은 황실과 막부에 1/3은 번주(다이묘)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들간의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들면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굶어 죽는 계층은 바로 쌀을 생산하는 농민 계층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로 기근이 발생해서 도시에서도 쌀값이 오르면 지방에 영지가 있는 다이묘들은 자기 지역의 쌀을 대도시로 수출해서 차익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면 쌀을 생산하는 지방에서 정작 비축미가 부족한 상황이 반복되고 그러다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기근이 일어나서 농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구조에서 영주(다이묘)-무사(사무라이) 집단 vs. 피지배 백성들 사이의 계급갈등이 심화되면서 에도시대에는 '하쿠쇼잇기(百姓一撥)'라는 농민봉기가 2,809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급적 대립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 농촌이 상업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경제력에 따라 분화한 상층농민과 하층농민의 대립구도로 변화하면서 '무라카토소도(농촌소동)' 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닥치면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떠도는 유랑민이 되거나, 입을 줄이기 위한 영아살해, 기아(아이 버리기) 등의 습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초한 인재이기도 했다. 에도막부는 유일한 유럽 교역국인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점하면서 도호쿠지역의 국제무역을 막는 한편, 전국 다이묘들의 격(格)을 쌀 수확량으로 측정하고 세금도 쌀로 수취함으로써 도호쿠 지역의 번들이 쌀농사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근본적으로 없앴다. 그리고 16~17세기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자체 건조하였던 일본이 막부의 원양 항해 금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형 배로 연안만 운향하게 됨으로써 수송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에도 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피지배민이 일본 바깥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원양 항해용 배의 건조도 금지했으며, 그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 수록 더 나온다는 말처럼 쥐어짜고 착취하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초래한 퇴보 상태에서도 일본 피지배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를 이루어 나갔다. 

중세까지는 대가족과 예속민이 넓은 농지에 동원되어 영지를 경영했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면서 소농체제로 농업생산구조에 변화가 발행하기 시작한다. 에도시대에는 소가족이 자신의 좁은 농지를 근면하게 경작하면서 농업생산량도 늘리고 평균 수명을 높여 가게 된다. 가족구성원도 기존의 대가족 체계에서 4~5인 가족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1754년에 작성한 <아시 도잔 상서>에  50~60년전, 즉 1600년대 말쯤까지는 집마다 자녀를 5~8명 낳아 길렀는데, 요즘에는 한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르지 않습니다"라는 세태 한탄의 기록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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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만난 흥미로운 내용은; 

1.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지금은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라고 당연시 되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 사람이 인구의 상당수에 달했다는 사실. 특히 하층 예속민일 수록 겨우 끼니를 잇는 수준으로 삶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기는 불가능했다. "하야미 아키라가 현재의 고쿠라 지역에서 1622년 작성한 인구 조사 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6~50세의 예속민 여성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전체의 8.7%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서도 유사한데, "1630년 경상도 산음현 호적에 따르면 상민 가운데 27.3%가 1인가족이었고, 천민 가운데 32.8%가 1인 가족이었다". 소위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2. 아프면 의사를 찾는 습관의 시작...

중부 일본의 시나노 지역에서 1760년에 작성된 가훈서인 <가훈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몇 명 있더라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면 안된다. 장남은 집안을 잇게 하고, 둘째 부터는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가 되도록 가르쳐라". 많지 않은 재산의 장자상속제도하에서,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어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계급에 편입/입신양명 할 수 없던 둘째 이하 자식들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당시 의사가 되려는 자중에는 의사 집안 출신자 이외에도 농민, 떠돌이 무사인 로닌, 떠돌이 종교인인 슈겐, 신사를 관리하는 가누시 등이 있었다. 빈농층은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경제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각번과 도시에 의사학교가 다수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고, 의사면허를 주면서 의사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한다. 

1706년에 작성된 시나노 지역의 우에다번 99개 마을을 조사해서 작성한 인구 통계사 <우에다번 마을 명세장>에 따르면 "종교 관계자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고, 말을 치료하는 마의가 12명, 마을 의사는 3명"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1820년대 나카조 다다시치로가 자쓴 <견문집록>에는 "옛날 덴메이(1781~1789) 연간에는 지역거점인 마쓰시로 이외에 마을 열 곳당 한 명 비율로 의사가 있었지만, 지금(가세이 연간)은 의사가 마을마다 한사람씩, 또는 한 마을에 두세 사람이 있기도 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비추어 보았을때 1706년경에는 마을 33개당 의사 1명이었는데, 1780년대에는 마을 10개당 의사 1명, 19세기 전기에는 마을 하나당 의사 1명이 존재하게 되었응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의사의 숫자가 늘고 시골 마을 마다 의사가 있게 되면서 예전에는 병이 나거나 아프면 무당을 찾거나, 그럴 경제적 능력도 안되면 하는 수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아프면 의사를 찾는 환경과 습관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

책, 『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 by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는 덴노(천황)나 막부의 쇼군 중심의 일본사가 아닌, 각 권마다 주제어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 전쟁과 바다는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 이후 동북아시까지 이르런, 무력/폭력을 동반한 해상무역과 카톨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16~117세기의 일본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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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개척하던 대항해 시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등의 유럽국가들은 전 세계에서 군사력을 앞세워 무역을 전개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유럽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이 최신식 무기와 상업,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앞세워 인도양을 휩쓸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맞닦뜨린 것은 명청시대 중국과 일본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거침없는 무력을 행사하며서 폭력과 학살로 학살로 지배하던 것과는 다르게, 당시 중국과 일본을 군사력으로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 하자 '조용히' 무역에만 종사하는 모습을 보인게 된다. 

일본이 전국시대에서 에도막부시대로 넘가는 시기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이 일본 규슈지역에 무역거점을 마련하면서 일본은 유럽 문명과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를 통해 중화 문명 이외의 또 다른 거대하고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이 중화 문명 단 하나뿐인 시대에서 중화 문명과 유럽 문명 가운데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히 선택할 수 있는 상대주의 시대로 바뀌게 된것이다. 일본은 중화문명과 유럽문명의 경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16~17세기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운데 앞의 두 사람,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럽으로 부터 새로운 세계관과 군사기술을 배워 중화 문명을 뛰어 넘고 나아가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러한 해외 확장의 시도의 첫발이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였던 대륙 정복 계획은 한반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정치/경제/군사적 한계에 부딪쳤고 도요토미가 죽으면서 야망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거대한 배와 조총, 대포를 가지고 전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고 있는 유럽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명나라, 조선과의 화해를 통해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한 원인과 배경에는 새로 권력을 잡고 막부체계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내부의 안정적인 지배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문명과의 접촉으로 전파된 카돌릭의 위협도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서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일본안의 덴노나 쇼군보다 바다 바깥 로마에 살고 있는 교황에게 충성하는 주민이 수십만(20~30만)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통제 바깥에 놓여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본인 마을에도 일본인 수십만명이 살고 있었던 상황이라, 당시 일본 국내 상황에 불만을 품은 피지배층이 유럽의 침략에 호응해서 내부로부터 봉기하거나, 동남아시아에 나가 있는 일본인들이 유럽 세력을 안내해 일본을 침략할 수도 있다라는 불안감, 그리고 일본지역 내부적으로 카톨릭 세력 vs. 불교/신도 세력간에 종교전쟁을 방불케 하는 갈등으로 인한 충격과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유럽인들이 아프르카에서 노예로 잡은 흑인들도 와 있었고, 오늘날 멕시코에 해당하는 누에바에스파냐를 스페인이 식민지로 삼았다는 정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도쿠가와 막부는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하고 일본내의 외국인 카톨릭 신부/선교사들과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추방 또는 처형하면서 일본에서 가톨릭을 지워나가게 된다. 또한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로마까지 항해할 수 있는 유럽식 배 만드는 조선술을 폐기하는 등, 기술적 퇴보를 감수하면서 까지 일본인과 유럽 세력의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하였다. 

참고로, 당시 일본내의 가톨릭 전파와 유럽 문명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단편으로, 1582년 오무라 스미타다, 오토모 소린, 아리마 히루보두 세 가톨릭 다이묘가 후원하여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로마에 까지 갔다가 1590년에 귀국한 네명의 소년사절단, '덴쇼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 과 1613년 센다이를 출항하여 멕시코를 거쳐 스페인과 로마를 방문하고 다시 멕시코와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1620년에 귀국한 '하세쿠라 사절단'의 경우 처럼, 단지 유럽 카톨릭 신부나 선교사의 일본 왕래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직접 로마까지 방문하고 올 정도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유럽의 '종교'는 차단하였지만 '무역'은 분리하여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네덜란드와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서는 류쿠(오키나와)왕국과, 홋카이도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민족과 교역을 하는 네개의 창구 시스템을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유럽 여러나라(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사람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와서 동시대적으로 지식과 물자를 전해주며 자유롭게 교류하던 시절과는 다르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에는 일본이 교류하는 유럽 국가를 네덜란드 한 나라로 제한하고 교역도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으로 제한하는 한편 일본인이 네덜란드인을 직접 만나는 일도 제한하게 된다. 이러한 단절과 쇄국은 같은 시기 유럽을 중시으로 한 전 세계의 움직임과 비교했을때 동시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퇴보였다라는게 저자의 평가이다. 

<<일본인 이야기 1.전쟁과 바다>>는 도쿠가와 막부 초기까지 유럽과의 접촉이 가져온 영향과 일본의 대응을 '조총(무력)과 가톨릭' 라는 키워드로 살펴 보고 <<일본인 이야기 2.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에서는 이후 에도막부 시대의 일본 백성, 그 중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삶과 그들을 치료해준 의료/의학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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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낀 점은; 어느 나라의 역사를 현재의 국가/영토 개념틀안에서 국수주의적으로 볼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관련 세력간 다양한 교류의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해양세력을 중심으로하는 문명간, 지역간 교류/교역의 역사는 고대부터 그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식과 과거사에 대한 지식이 몹시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인식과 접근법은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이야기하였던 내용과 부합한다라고 볼 수 있다. 16~17세기 일본의 역사도 '일본' 이라는 단일 국가의 역사로만 바라보았을 때는 전체적인 모습과 그 실상을 놓치기 쉽다. 당시 유럽 여러나라의 '동인도회사'들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전개한 무력을 동반한 해상무역이 일본에 까지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상호 교류와 교역, 충돌과 전쟁의 역사는 일본만의 역사가 아닌 조선, 명나라, 대만, 류큐, 태국(아유타야),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역사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내용 중 ; 

당시 유럽세력, 특히 포르투칼 상인들이 주요하게 취급하던 상품은 일본인 노예였다라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히라도에서 포루투갈인들은 주로 일본일은 노예로 수출하는데 종사하였다... 히라도에서 수출되는 주요 상품은 은, 철, 조총, 도검류, 노예, 선원, 용병 등이었다... 일본인 노예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까지 수출되었고, 일본인 용병은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에서 스페인과 싸우는데 동원되었다". 

우리가 왜구라고 부르는 해적집단은 사실 중국(명나라)-일본-유럽인들로 구성된 무장해상집단, 밀무역집단 이었다라는 사실도 새롭다. 

아유타야(현재의 태국)에 대한 이야기 중 '일본에서 태어나 동남앗아로 건너가 일본인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아유타야의 정치세계에 입문하여 오캬 세나피묵이라는 관직에 오른 야마다 나가마사라, 그리스 출신으로 야유타야 나라이왕 재임시절에 수상에 임명되었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예수회 신부 콘스탄틴 파울콘, 그리고 콘스탄틴 파울콘의 아내 마리아 구요마르 데 피나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추방당한 카돌릭교도 일본인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었다라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6~17세기 일본과 동남아시아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얽힌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왕조 중심의, 왕들의 연대기 중심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모습들인 것이다.

Saturday, September 27, 2025

2025/09/27 장봉도 트레킹

오늘은 등산모임 친구들 15명과 장봉도 트레킹을 위해 삼목항에서 08:10 배를 타고 장봉도로... posted at 08:08:14 

갈매기 날아 다닌다 posted at 08:21:08  


2025/09/27 장봉도 트레킹 :: 인천 영종도 삼목항에서 08:10 배를 타고 장봉도로 들어가 건어장해변에서 가막머리 전망대를 돌아보는 해안길을 따라 걷다 원점복귀하여, 주변 해안에 있큰 공룡 해식동굴을 둘러봄. 건어장해변에서 해식동굴 가는 길은 장봉도 현지 가이드이신 숏다리 댕댕이님이 길 안내를 해 주었다. 

** 트레킹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QC0gskKLfY

Sunday, September 21, 2025

2025/09/20~09/21 양평 국수리 자전거 캠핑

탄천•한강합수부 자전거길에 두꺼비가 로드킬을 당해 쥭어있다 posted at 08:43:32 20285/09/20
이제, 구름 걷히고 해뜬다 posted at 10:03:11 2025/09/20
국수리에 캠핑 사이트 구축완료 posted at 15:46:35 2025/09/20


**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HdIGuFrL_8

Sunday, September 14, 2025

2025/09/14 WJ과 함께 검단산~남한산성 트레킹

오늘은 WJ과 함께 검단산~남한산성 돌아보기로.. 0825 하남검산역에서 출발. 0935 검단산정상~1020 고추봉~1050 용마산~1200 엄미리계곡입구 부근 만두집에 들어가 만두전골로 1300까지 점심~약수산~남한산~남한산성 북문(전승문)~16:00 고골계곡으로 내려와 트레킹 종료. 약 23k. 7h30m. 하남으로 이동하여 맥주 한잔하고 귀가. 

  

Saturday, September 13, 2025

2025/09/13 Seoul Trail 러닝을 계획 했으나,,,

갈매역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오늘 갈매중앙공원에서 구리시 걷기•달리기대회 참석한 친구 행사 끝나면, 같이 Seoul Trail : 망우•용마산~아차산 코스 돌기로 하였다. posted at 11:34:54  ...하려고 하였으나, 계획과 현실은 다른 법! 1155 BK와 구리 갈매중앙공원에서 시내 도로를 따라 약 11k 달리다, 나는 힘 들어 구의동에서 따릉이를 빌려 타고 BK는 달려 잠실대교 넘어 잠실 새내에 1420경 도착. 또 다른 친구 WJ과 만나 낮술 길~게 하다, 1800경 끝내고 지하철 타고 귀가. posted at 18:36:16 

 

Tuesday, September 09, 2025

2025/09/09 멧돼지 방귀뽕

챨리와 함께 슬렁슬렁 멧돼지 방귀뽕 코스를 달린다 posted at 13:30:38 

Charlie 와 함께 슬렁슬렁, 멧돼지 방귀뽕 코스를 달렸다. 방구를 쬐끔 크게 뀌었다😹

Sunday, September 07, 2025

2025/09/06 태백 트레일 레이스

내일 태백 트레일 러닝 대회 참여하기 위해 사당에서 19:00 버스타고 출발 대기 중. 친구 두명과 같이 뛰기로... posted at 19:59:06 2025/09/05

내일 태백 트레일 30k 참가 예정 posted at 21:03:58 2025/09/05  

1920경 사당을 출발한 버스는 밤길을 달리다 치악휴게소에 들러 20분간 쉬었다 다시 어둠 속을 헤치고 달려 1100경 태백 오투 리조트에 도착. posted at 23:00:35 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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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0 숙소에서 대회장소로 이동, 0630 트레일 출발, 태백산 천제단 거쳐 1340경 CP3 어평재휴게소에서 레이스 중단 약 30km, 7h10m. 원래 참가신청한 30k 코스가 아니라, 50k 참가한 친구둘이 함께 뛰자하여 50k 코스 중 30k만 달림. posted at 14:25:30 2025/09/06

오늘 달린 코스. 어평재에서 종료. posted at 14:40:51 2025/09/06  

같이 뛰던 한 친구가 다리에 쥐가 나서 더이상 진행이 어렵고, 나도 발가락에 물집 잡히고 새끼 발가락 쪽이 아파 같이 중도 포기하고 나머지 한 친구만 끝가지 달리기로 하고 2시경 길을 떠났다.posted at 14:42:10 2025/09/06


대회장에 와서 씻고 간단히 음식을 먹은 후 아직 51k 달리고 있는 친구를 기다린다. 언제 finish line에 들어 올지는 몰라... posted at 16:46:47 

사당역에 21:20 도착, 사당역 근처에서 늦은 뒷풀이하고 집에 가기 위해 이제 지하철로.. 오늘 또 하루가 길다ㅎ posted at 22: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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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6 태백 트레일 레이스]
금요일 1920경 사당을 출발한 버스는 밤길을 달리다 치악휴게소에 들러 20분간 쉬었다 다시 어둠 속을 헤치고 달려 1100경 태백 오투 리조트에 도착. 다음날 0500 숙소에서 대회장소로 이동, 0630 트레일 출발, 태백산 천제단 거쳐 1340경 CP3 어평재휴게소에서 레이스 중단 약 31km, 7h10m. 원래 참가신청한 30k 코스가 아니라, 51k 참가한 bk, wj이 함께 뛰자하여 51k 코스로 바꿔 뜀. 같이 뛰던 bk가 다리에 쥐가 나서 더이상 진행이 어렵고, 나도 발가락에 물집 잡히고 통증때문에 중도 포기하고 wj만 끝가지 달리기로 하고 2시경 CP3 어평재휴게소에서 길을 떠났다. wj 만항재~함백산 산길을 쏜살같이 달려 1700에 finish line에 골인!


Friday, September 05, 2025

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Material Civilization, Economy and Capitalism』 by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옛날 프랑스에선 국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 시체를 머리, 심장, 나머지 몸통 등으로 떼어 내어 각기 다른 곳에 묻었다 하네... 파리 시내에 위치한 군사병원인 발 드 그라스는 죽은 왕이나 왕족의 심장을 보관한 곳. -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中 posted at 07:08:56 2025/07/08

모잠비크의 카프르족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 "원숭이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만일 그들이 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잡아다가 일을 시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노예사냥, 노예무역. posted at 07:43:51 2025/07/08

"옥수수를 재배하는데는 1년에 50일의 노동밖에 필요하지 않으며...따라서 그들은 자유롭다. 어쩌면 너무 자유롭다...옥수수가 없었다면 마야나 아즈텍의 거대한 피라미드도, 쿠스코의 성벽도, 또는 마추픽추의 인상적이고 놀라운 건조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posted at 18:05:26 2025/07/08

서유럽에서 포크사용이 일반화 된것은 1750년 경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우리가 이 도구를 사용하기를 하느님이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왜 손가락을 주셨겠는가?" 라고 독일의 한 목사는 한탄을 하였다. posted at 08:20:34 2025/07/10

몽테뉴는 음식을 너무 빨리 먹어서 '때로는 너무 급한 나머지 내 손가락을 깨뭅니다'라고 사과하는 것을 보면 그는 포크가 뭔지 모르고 살았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닭 스튜 요리를 손가락으로 먹는데 아주 능숙하였다고 전한다. posted at 08:22:18 2025/07/10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 일상생활의 구조. 76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인간 사회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방대한 기술... posted at 07:28:57 2025/07/15

'인간모터' : 양쯔강에서 베이징까지 가는 대운하위의 가장 높은 수문인 천비첩(天飛妾)은 문을 여닫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배들 들어올려 한쪽 운하에서 다른쪽 운하로 옮겼는데, 운하의 양쪽에서 400~500명, 혹은 배의 무게와 크기에 따라 그 이상의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밧줄을 잡아당겨 운반. posted at 07:39:13 2025/07/15

화폐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멸시-초기의 경제학자들 역시 화폐에 대한 멸시를 떨쳐 내지 못했다. 박물관에 걸려 있는 화폐를 다루는 사람들의 그림을 보라. 화가들은 일반 사람들의 증오와 멸시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일상생활의 구조, 페르낭 브로델 posted at 18:38:49 2025/07/16

환어음이 "이자를 감출 수 있게 해 준다" ; 옛날에는 교회에서 '이자'를 엄금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자를 주고 받는 것이 필수 불가결 했으므로 교회의 규제를 교묘히 피해가는 장치가 발달했다. 환어음이 그러한 장치였다. 환어음은 신용거래(Credit)과 환거래(Currency Exchange)의 두 가지 역할을 하였는데, 돈을 갚을 때 환율을 실제보다 약간 높게 계산하여 실제적으로 이자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posted at 18:40:28 2025/07/16

도시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발췌... posted at 08:24:57 2025/07/28

브로델의 책에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관련 내용중 겨울에 네바강에서 얼음 슬라이드 타는 이야기 관련해서는, "Land of the Firebird - The Beauty of Old Russia" by Suzanne Massie 의 책에서 스크랩 해 놓은게 있다. uquehan.blogspot.com/2016/12/scrap-… posted at 08:35:58 2025/07/18

Infrastructure라 할 수 있는 물질생활과 그 위층인 교환/시장경제는 접촉면이 연속적인게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이라는...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교환의 세계, 서론 중.. posted at 08:54:41 2025/07/19

1596년 6월 22일 자바섬 반탐 항의 다양한 봇짐장수/행상인들의 모습... posted at 14:21:47 2025/07/24

Hommage. 臣誓 ; 하위의 봉신이 상위의 주군에게 하는 충성의 서약 의식. 오마쥬... posted at 14:24:07 2025/07/24

해적선도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해적선의 의장사업은 주식 응모 방식이 이미 확립된 관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소액 자본 주식들로 나뉘어 있어서 해적들이 거두어온 이익이 왕국의 곳곳에 퍼집니다" -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국왕에게 올린 청원서 중... posted at 07:32:59 2025/07/29

국가와 자본, 그리고 독점... posted at 08:19:43 2025/07/29

저출산 문제와 노동력의 재생산... posted at 09:53:37 2025/08/01 문뜩문뜩 생각해 본다. 여기 지금을 사는 나의 삶이 전쟁의 폭력으로 부터 멀어져 있도, 먹을것의 절대량이 부족해 인육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를... 과거 역사를 읽을때 마다 이런 행운은 쉽지 않은 듯... 아무리 사회가 고도화 되어도 인간다움의 삶이 먹을게 없어 인간을 살육하고나 먹을게 없어 인간을 잡아먹는 나락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고... 설마 문명 개화하고 진보한 인간사회가 그런 폭력적인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겠어라는 순진한 희망사항은 그런 사태가 발생되어야 현실로서 체험할꺼고..난 인류사회가 풍요와 행복의 천년/만년왕국이 쭉~ 이루어 나갈꺼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언젠가는 그런 파국/파동을 지나리라.. posted at 20:44:37 2025/08/01

백년전쟁의 결과 잉글랜드가 대륙으로부터 축출/배제되어 섬 나라화 되면서 내부의 식민지를 개척;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posted at 08:25:10 2025/08/21

백귀, 붐비 Vumbi posted at 07:55:47 2025/08/27

육상에서는 황제가 수탈 하고, 해상에서는 다국적 해적집단들이 약탈하고,, posted at 16:11:53 2025/09/04

유럽에 의한 힌두교의 발견은,, 18세기말 이후의 일이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중. posted at 17:10:02 2025/09/05

Monday, September 01, 2025

책, 『모비딕 Moby-Dick; or The Whale』 by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의 소설 『모비딕 Moby-Dick; or The Whale』 의 줄거리(너무 유명하여 모두들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 이지만)를 간략히 축약하자면 ; 

작중의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다리 한쪽을 잃은 에이해브(Ahab) 선장이 지휘하는 피쿼드호를 타고 낸터킷을 출발하여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다. 낸터킷에서 출항한 고래잡이 배 피쿼드호는 대서양을 건너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으로 항해한 후 태평양에 이른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딕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그는 바다에서 만나는 다른 고래잡이 배 선장들에게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고 다닌다. 그리고 드디어 흰 고래, 모비딕을 만나 고래 등에 작살을 꽂지만 그 작살 밧줄에 목이 걸려 바다로 떨어진다. 모비딕에게 들이 받힌 피쿼드호와 보트들이 바닷속으로 침몰하여 이슈메일을 제외한 모든 선원들이 바닷물 속에 잠겨 사망한다. 나, 이슈메일은 야만인 이교도 선원인 퀴케그의 관이었던 구명부표에 의지해 표류하다가 주변을 순회하던 다른 고래잡이 배 레이첼호에 의해 구조된다. 

고래잡이라는 내용으로 본다라면 단순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모비딕은 단순한 해양모험소설이 아닌 수 많은 상징과 은유를 품은 다면적인 소설이다. 기독교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와 다양한 인물들이 뒤엉킨다. 광기어린 에이허브 선장과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극단적인 대립, 선원 공동체내의 종교, 인종, 계층간 갈등, 각기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인 캐릭터와 심리가 복합적으로 뒤얽힌 장엄한 서사시이다. 

1851에 출간된 모비딕은 출간 당시 평론가들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대중적/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소설이었다. 출간 당시 모비딕은 지적재산권 보호 등의 문제로 영국에서 먼저 출간 되었는데, 영국에서 출간된 판본에는 원고 전달 상의 문제로 한쪽 짜리 분량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가 빠져 버렸다. 그 에필로그에는 침몰한 피쿼드호와 보트에서 살아남은 이슈메일이 구조되는 경위가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영국 평론가들은 피쿼드호가 침몰하면서 화자인 '나'를 포함해 모든 선원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죽어버린 '나'가 이야기를 쓸 수 있느냐며 문제 제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엉터리다, 소설 문법도 모르는 자가 쓴 책이다' 라는,, 오늘날 보면 어이없는 평가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멜빌 탄생 100주년을 맞이 하면서 그의 소설은 미국 평론가와 작가들에게 재 평가 되기 시작하였다. 모비딕은 획기적인 퓨전풍 스토리텔링, 독창적인 작품 구조,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 이야기와 상징의 절묘한 조합, 인생의 신비를 둘러싼 깊은 종교적, 철학적 탐구, 뛰어난 유머감각과 풍자, 열린 결말 등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의 작품으로 재평가 되면서 미국 평론가와 문학계로부터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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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Ahab 선장의 추격과 복수의 대상으로 상정된 흰 고래,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자는 소설의 해제에서 색깔이 흰 고래는 한가지로만 해석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 독자가 부여하는 빛에 따라 상징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흰 고래의 상징은 종교, 신화, 사회, 심리, 철학적 측면에서 각각 신, 괴물(악, 악마적존재), 부당한 사회제도(예. 노예제), 심리적 트라우마, 존재의 신비(궁극적 진리)로 해석했다. 모비딕 자체가 어떤 상징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기 보다는,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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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구는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딕을 잡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특별히 명령하여 제작한 작살에 세 이교도; 타슈테고, 퀴케그, 다구의 피를 묻히며 마지막 죽음의 담금질을 하며 외치는, "주의 이름이 아니라 악마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는 대사이다. 이 구절은 한글로 번역된 글자 보다는 라틴어로 읽었을 때가 더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Ego non baptizo te in nomine Patris, sed in nomine diaboli"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도 같은 결의! 신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모비딕을 파괴하겠다는 결심의 선포! 하지만 그 작살은 이슈메일이 암시하였 듯이 결국은 Ahab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작살이 된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르고 태어난다. 하지만 고요하고 은밀하며 늘 우리 곁에 있던 삶의 위험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제가 갑자기 방향을 튼 죽음과 마주할 때다"

그 목에 둘러진 밧줄, 작살에 묶인 밧줄은 Ahab 를 바닷속 심연으로 끌고 들어 간다.  

어찌보면 Ahab의 영혼은 모비딕에게 다리 하나를 물여 뜯겼을 때 이미 바닷 속 심연에 가라앉았다고 볼 수 있다. 

"바다는 조롱하듯이 그의 유한한 육체만 물 위에 띄웠고, 영원한 영혼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모비딕의 등에 꽂힌 작살의 밧줄은 심연에 가라앉은 그 영혼을 찾아 육체를 데려가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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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설속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Deleuze의 Ahab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자. 들뢰즈는 에이허브를 단순히 복수심에 미친 광인이 아닌, 복수를 넘어서는 고래와의 동일화, 단지 복수심에 모비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형시켜 가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 즉 고래되기(becoming-whale) 로 이해한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에이허브 선장처럼 고래를 쫓다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線)을 넘어갑니다. 궁극적으로 죽음과 자살을 구분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속(加速) 같은 것이 있는지..."

들뢰즈는 에이헙은 자신의 한계를 끊임 없이 확장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인물이라 평가한다. 과정에서 자신을 변형 시키고 무한한 존재의 힘과 합일, 또는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가속 시키는 정열적 인간, 그것이 들뢰즈가 바라보는 Ahab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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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간의 상업/산업적 탐욕에 의해 무참히 학살 당한 고래에 대한 사죄는 별도로 필요하다. 
인간의 고래들에 대한 학살의 죄는 어떻게 용서 받을 것인가?

히스코드 윌리엄스 Heathcote Williams 글로 고래에게 헌시를 바친다.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 그들의 왕국, 
   푸른 심연속에서 고래는 노래한다.
   시간을 초월한 그들의 숨결,
   별빛 처럼 깊은 그들의 눈.

   오, 고래여.
   너의 노래는 자연의 힘을 말하고,
   공유된 의식의 세밀함을 전하며,
   고래의 꿈, 조상의 전설,
   이상적인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의 작살이 너의 심장을 꿰뚫었다.
   포경선은 너의 피로 바다를 물들였다. 
   한때 바다를 울리던 너의 합창은,
   이제 침묵 속으로 스러진다.

   오, 거대한 방랑자여
   너의 고통은 우리의 죄다.
   너의 노래가 다시 바다를 채우길..."

어느 날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차가운 쇠붙이와 날카로운 창이 날아 들어 너의 피와 너의 기름을 원했지. 고요했던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고 너의 노래는 절규가 되어 메이리 쳤다. 인간의 타락과 탐욕이 앗아간 고요한 바다의 영혼. 부디 용서해 주오. 인간의 사악한 영혼을...

책,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by 기시미 이치로(岸絹一郞)

기시미 이치로(岸絹一郞)의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은 누구든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 그는 '트라우마'는 없다라고 잘라 말하며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에 현재의 괴로움에 시달리는것이 아니다. 원인론을 맹신하며 사는 경우, 우리는 타인이 건네는 알량한 위로에 기대어 한 발짝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아들러는 인간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용기,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라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대나 비난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평범한 내가 싫어 자꾸 삐뚤어지려는 대신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권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은이는 아들러를 가르켜 용기의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1장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자기의 삶을 살아라는 조언이다. 어떤 사람이 아들러에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들러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한 의미와 목적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책임감의 회피를 위한 자기합리화, 구실들을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 이라고 부른다. 

2장 평범해질 용기에서 글쓴이는 육아와 교육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며 자기수용과 (통제할 수 없는 외부세계/현실의) 인정에 대해 이야기 한다.

3장 행복해질 용기에서는 수평적 인간관계에 대한 자세와 행복해지기 위한 세가지 조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자기수용, 우리는 다름사람을 믿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다라는 타자 신뢰,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때 행복해진다라는 타자 공헌-에 대해 이야기 한다. 

4장에서는 아들러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 5장에서는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한 글쓴이의 해제(解題)라 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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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기시미 이치로가 책의 5장에서 설명하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러의 심리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는 우리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인지론이다. 그리고 문제가 어디서 생겨났는가를 문제 삼는 원인론이 아닌 어디로 향해 가는가를 중시하는 목적론이다"

사람은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저마다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세계를 이해한다. 아들러는 우리가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인지론적 바탕위에 아들러는 인간 행동과 사건의 원인을 과거의 인과론적 원인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인(目的因)'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행동 목적은 "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이는 도덕적인 좋고 나쁨의 의미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한다/추구한다라는 뜻일 뿐이다. 

이러한 의지는 어찌보면 니체가 말한 Will to Power의 그러한 '의지'라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아들러는 결정론에 반대하여 개인의 주체성,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그 어떤 행위나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주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책임을 묻는 엄격한 심리학이자 용기 있게 자신의 문제와 직면하기를 촉구하는 용기의 심리학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 책을 통해 알게 된 추가적인 정보 : Adler의 "개인심리학 Individualpsychologie"은 "분할할 수 없는 것(in-dividu-um) 으로서의 인간"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뉘앙스, 선입견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감이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아들러의 심리학이라 고쳐 부른다.

Saturday, August 30, 2025

2025/08/30 천마산 산보

산보하러 나가야 하는데, 천둥번개에 비가 많이 내리네,, posted at 06:48:36
요란한 천둥번개속에 길을 나선다 posted at 07:15:33

동기들 등산모임에서 명산 100산 마친 친구가 오늘 천마산에서 세레모니 하겠다고 해서 몰려 가는 중.. 이 친구 리딩으로 천마산 갔다가 거미줄과 밀림을 헤치며 내려오던 때가 2021년 6월 27일 일요일 이었네ㅎ x.com/nomadic_crow/s… posted at 08:40:23 

천마산, 곰탕속에서 시야가 꽉 막혔다 posted at 11:18:18   

천마산 정상에서 100산 완등 세레모니하고 내려와 점심 먹으러 오다. posted at 13: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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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보 및 뒷풀이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pE1YbfIZ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