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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09, 2025

2025/11/08 황매산 산보

오늘은 합천 황매산 산보가 있어 버스는 양재에서 0720경 출발, 죽전에서 사람들 태워 대전을 지나가는 중. 날이 흐릿하다. posted at 09:12:37 

황매산, 근 20년 지나 다시 와 보네. posted at 11:05:39 

황매산 산보. 돛대바위. posted at 12:55:29  

억새는 이미 져서 사그러 들었고, 날이 흐릿하긴 했지만 즐거운 산보였다.    

2025/11/08 황매산 산보 strava.app.link/PbD0T0qU7Xb

** 산보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L2jOgiAco

Sunday, November 02, 2025

2025/11/02 인릉산 산보

등산 동아리에서 진행한 동네 마실 프로젝트 참여. 처음 가본 동네 산인데 육산으로 자전거나 달리기 코스로 아주 좋은,,, 동네산 인릉산에 뜀뛰기하러 자주 가야겠어요ㅎ

책, 『유토피아 Utopia』 by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는 플라톤의  국가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와 함께 이상국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 Thomas More 는 『유토피아』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든 악, 즉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악에 대한 치료법을 철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유토피아』 는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여 상상력이 풍부해던 여행가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Raphael Hythlodaeus)와 저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된 일종의 우화이자 사회비판서이다. 

제1권은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으로 여기에는 종교개혁 직전인 16세기 초 영국의 사회적 상황을 묘사하며 비판하고 있다. 모어는 사회악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사유재산제를 지적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교회와 같은 몇몇 권력있는 단체들이 부, 특히 토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과 토지를 잃게 되었으며 실업과 빈곤이 야기되었다. 그로 인하여 도둑, 강도 등의 범죄가 성행하자 국가는 혹독한 법률을 만들어 도둑들을 사형에 처했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를 마련할 별다른 길이 없었으므로 범죄는 날로 심해져 갔다. 책의 이야기 중에는 본격적인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로의 이행을 위한 전 단계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현상 중 Enclosure 운동이라는,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 표현되던, 토지로 부터의 농민들의 축출과 가진 것은 몸(노동력)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들여다 본다.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거리는 귀족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부귀를 누렸고 법률가들은 책략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상인들의 윤리는 땅에 떨어졌다. 사회가 이토록 문란한 가운데서도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아첨만을 일삼았으며 궁정의 고문관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토머스 모어의 가슴속에는 가난한고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아첨만을 일삼는 관리들에 대한 경멸과 증오, 그리고 기회주의자들인 궁정의 고문관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1권에서는 핍박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토머스 모어의 사랑과 더불에 사회적 불합리와 관리들에 대한 비판을 여러 형태로 보여 주고 있다. 

제 2권에서는 제 1권과는 다른 형식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랑과 희망이 코믹한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 2권은 상상속의 섬인 유토피아, 즉 이상사회의 모습을 여러가지 주제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독재와 사치가 사라지고 사유재산을 모르며 국가에 유익한 노동은 유일한 직업으로 간주된다. 토머스 모어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회로 묘사한 제 1권에 대비하여 평소에 희망하던 완벽한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그는 제 2권에서 첫째, 유토피아의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면과 둘째, 유토피아의 철학적, 교육적인 면, 셋째, 가정생활 전쟁, 종교적인 면을 그리고 있으며 넷째, 가장 훌륭한 복지국가로서의 유토피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직업, 사회구조, 교역, 도덕과 철학, 학문, 결혼풍습, 행정과 법률, 대외관계, 전쟁, 종교, 노예제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 유토피아 사회가 정말로 완벽한 이상향, 천년왕국의 모습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독자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像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는 휴머니즘의 보편적 정신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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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Oj(not) TO πor(place)를 합쳐서 만든 조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라는 뜻이다. Thomas More 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합리적인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라는 낙관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이상향,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있다. 모어는 16세기 영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패를 비판하지만 현실의 문제점(예, 사유재산제도)를 제거하면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가 가능하다는 개혁적 이상을 품고 있다.

이러한 토머스 모어의 휴머니즘적 관점과 입장은,  『걸리버 여행기』 를 통해 18세기 당대 영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인간본성의 근본적인 결함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품고 조롱하였던, 조나단 스위프트의 인간본성에 대한 혐오와 디스토피아적인 입장과는 대조를 보인다. 

<<유토피아>>는 르네상스 휴머니즘 정신- 인간의 존엄성, 이성에 대한 신뢰, 교육의 중요성, 세속적 행복의 추구 등- 이 사회개혁의 청사진으로 구체화된 대표적인 저서이지만, 한편으로 모어가 묘사하고 있는 유토피아는 이성(理性)과 합리성에 기반한 사회가 아닌, 종교와 신앙에 바탕을 둔 국가라는, 기독교 신앙 및 호교론(護敎論)적인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라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유토피아인들은 이성만으로 영혼불멸과 신의 섭리를 깨닫고 믿게 되었다고 묘사 되지만, 이 믿음이 사회 질서 유지의 필수조건으로 기능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이는 이성만으로는 사회를 지탱하는 궁극적인 도덕적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라는 More의 호교론적 인식, 즉 기독교적 믿음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유토피아의 핵심제도인 공동소유(사유재산폐지)도 단순히 경제적 평등의 개념보다는 기독교적 공동체주의와 초기 교회의 이상을 반영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by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사랑과 그 결실로서의 결혼이라는 낭만주의적 환상에서 벗어나 진부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조국을 위해 봉사하거나 희생하는 것 보다 더 영웅적인 행위"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일상의 삶이라는 진부하고도 황량한 사막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용기'만을 가지고 고군분투한다라면 조만간 지쳐서 말라 죽어가고 말 것이다. 불편한 진실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가끔 '판타지'의 힘도 필요하다;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저자는 책에서 낭만주의에서 현실주의로의 이행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 삶을 구성하는 두 축은 냉랭한 현실과 낭만적 판타지 일 수 밖에 없다.

. . . . . . . . . . . [책 내용 요약]  . . . . . . . . .

다른 사람이 영혼의 짝이라는 느낌, 확신, 또는 그 환상은 아주 순식간에 찾아 올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이름을 알 필요도 없다. 객관적 지식은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 중요한 것은 직관, 즉 이성의 정상적인 작동 과정을 건너뛴 자연발생적인 감정이다. 영혼의 짝을 찾는다는, 자신의 잃어버렸던 반쪽을 찾았다는 환상, 낭만적 믿음. 

평범한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짜릿한 섹스를 경험하며, 인생을 함께 하자며 장밋빛 청혼을 하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참으로 낭만적이며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행복한 결말이다. 결혼제도가 확립된 이후로 이렇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자 완성이라 믿고, 그러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는다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일 수 있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위안을 얻기 바란다. 사랑과 그 사랑의 결실로서 결혼은 그러한 욕구를 채워주는 완벽한 제도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동화의 품속에 안겨 살 수 는 없다. 

이야기속의 주인공 라비와 커스틴, 그러나 그들은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라비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 서로 죽이고 싶은 마임이 들고, 몇 번은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사는 동안 수십번의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 스토리이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결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결혼 1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도 무한히 친절한 도박.

결혼 2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결혼 1은 결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의 상황이라면, 결혼 2는 가장 친밀하다고 믿는 반려자와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 물어뜯고 싸우며, 배신, 질투, 권태, 증오로 얼룩져 펼쳐지는 결혼 후의 상황을 이야기 한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였다. 경제적인 이유, 정략적 목적, 종교적 관습, 또는 강요된 폭력에 의해... 그런 '합리적'인 결혼에서 외로움, 강간, 간통, 폭력, 가혹함, 육아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 생겨났다. 합리적인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에서 보아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으며, 편의주의적이고, 편합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며, 모욕적이다. 

영원히 사랑에 정박해 있는 결혼은 드물거나, 없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지치고 감정은 메말라 간다. 결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낭만에서 멀어져 에밀 졸라의 현실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인가? 

저자는 낭만주의를 넘어서 냉랭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진실의 사막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하리라는 착각,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박, 완벽한 인생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제약적인 일상을 살아가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도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용기가 삶의 사막을 헤쳐 나가는 동력인 것이다.

Saturday, November 01, 2025

2025/11/01 광청종주

광교 저수지 근처 등산로 입구에서 닭개장으로 아침을 먹고, 0750 반딧불이화장실에서 출발-0915 광교산 시루봉 통과-0938 백운산-1013 바라산-바라산365희망계단은 오르는 자에겐 고문계단-1048 우담산-1115 하오고개. 하오고개에서 점심먹고 1138 출발-1210 국사봉-1235 이수봉-1312 매봉전망대-1342 옥녀봉-1414 양곡도매시장. 약 25km. 6h25m. 내려와서 AT센터 근처애서 늦은 점심을 순대국집에서...

2025/11/01 광청종주(/w bk) strava.app.link/JYqiL0PWVXb

Sunday, October 26, 2025

2025/10/26 도봉산 산보

도봉산 . 암벽을 기어 오르는 사람들.. posted at 10:17:32 

단풍..
   

도봉산 산보 마치고 지하철 타고 이수까지 가서, 같이 산보한 친구 두명과 2차하고 이제 집으로... posted at 19:24:08 

2025/10/26 도봉산 산보 strava.app.link/Rbwm3yQXLXb 09:05 도봉산역에서 출발 만월암~대포능선~망월사~14:00 망월사역. 망월사역에서 도봉산역으로 걸어와 7호선 전철타고 복귀.

** 산보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s9gMEhXgzk

Sunday, October 19, 2025

2025/10/18 설악산 울산바위 우중산보 & 대포항에서 하루...

오늘은 등산모임에서 10월 정기산행이 잡혀서 설악산 울산바위 가는데, 날이...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posted at 08:28:53 2025/10/18

빗속에서 10:20 신흥사에서 흔들바위~울산바위 올랐다가, 비에 젖어 13:40 다시 신흥사로 하산. posted at 13:47:57 2025/10/18

정암해변쪽으로 나와 늦은 점심먹고 울산바위 산보팀과 헤어져, 버스타고 속초 대포항으로 이동. 또 다른 팀과 대포항에서 합류하기로... posted at 16:04:34 2025/10/18 대포항에서 친구 SW & WJ 둘을 만나 낮술이 밤술까지 이어져 22:30에 지쳐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 산보 사진과 동영상 정리하다 이제 잠자리로... posted at 23:16:12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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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항 posted at 08:33:41 2025/10/19
오늘 울산바위 다시 도전. 어제의 날씨 보상을 받아야겠다. 정군, 박군과 함께 설악소공원으로 이동. 술먹고 힘들다 하는걸 억지로 끌고 간다 posted at 09:44:07 2025/10/19

정상에서 폭포가 흘러 내린다  

설악산 토왕성폭포 posted at 10:21:48 2025/10/19
(동영상)


울산바위 재도전 실패. 설악소공원 차가 막혀 들어가기가 어렵고 행락객이 많아 중도 포기하고 복귀하기로. posted at 10:49:39 2025/10/19

속초에서 서울로 돌아와 자양동에서 13:00~14:30까지 점심겸 낮술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빨래 돌리고 이제 좀 쉰다. posted at 16:48:43 2025/10/19 ** 설악산 울산바위 우중산보 동영상 :https://youtu.be/ZzhVGiqgMuQ

책, 『철학의 위안』 by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책, 『철학의 위안』 by Alain de Botton 을 읽다 적어본다. 

1. 소크라테스, 그는 "종교적 이단을 설교...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시민으로부터 종교적 이단으로 고소되어 사형을 당하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는 이단자, 선동꾼, 사이비교주, 종교적 사기꾼이었음이 확실하다. 예수를 비롯한 그런 유사한 사례는 너무 많지 않은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공동체 파괴적인 범죄였는지 당시 사회의 종교/윤리/도덕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혹은 그 사형의 핵심 원인은 종교적인것에서 더해 정치적 이유가 가미된 것일 수도 있고.. 그는 성가신 쇠파리, 혹은 모기 같은 존재를 자처했다. 누군가 혹은 뭔가를 자극하고 일깨우며 계몽하겠다는 망상을 가진,, 졸다 깨어난 소나 말의 뒷꼬리 일격에 사라질 그런 존재.

2. 
‘소획행’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Epicurean 을 ’쾌락 추구에 몰두하는; 그러므로 안일을 좋아하고, 감각적이고, 탐욕스러운‘으로 풀이되어 있다.  한편, 서기 120년대 (현재 튀르키예의) 소아시아 남서쪽 귀퉁이에 있던 인구 1만명의 도시 오이노안다의 중심에 자리잡은 장터에 길이 80미터, 높이 4미터의 거대한 석벽이 세워졌는데,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거기에는 에피쿠로스의 슬로건이 새겨졌다 ; ‘사치스런 음식과 음료들은...절대로 해악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육신에 건강을 가져다 주지 못하리라’ 에피큐리어니즘 Epicureanism 의 핵심은 인간의 불안, 우울증, 욕망, 고통과 고뇌로 부터 벗어나 행복(쾌락)을 찾는 것에 있다.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나 니르바나에 이르는 가르침을 설법했던 붓다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에피쿠로스는 함께 모여 토론하고 사색하는 심리치료/심리상담 공동체를 통해 우정, 자유, 사색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3. 세네카의 죽음 :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 세네카는 황제 네로의 명에 의해 자신의 정맥을 끊었다. 하지만 죽음도 순조롭지 않았다. 발목과 무릎 뒤쪽을 끊었으나 나이가 든지라 피가 빨리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독약을 달라고 부탁했다. 독약까지 마셨건만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증기탕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했고 거기서 서서히 질식해 죽어갔다" (이 광경은 노구의 송시열이 사사를 받을때, 사약 한 그릇으로 효과가 없어 사약을 여러 사발 마셨으나 쉽게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Memento Fortuna ; 운명의 여신 Fortuna 는 '도덕적 재판관'이 아니다. 어떠한 불행, 행운이 도덕적 처벌이나 보상이 아닌 나의 희망과는 별개인 힘의 작용, 사건이다. 이 우주에는 우리의 희망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힘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 그렇게 많은 장례 행렬이 문 밖을 지나가도 우리는 절대로 죽음을 곰곰히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한에서는 죽음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지 마라)

4. 몽테뉴
. 육체..를 제약이나 감옥이라 볼 것인가?
. "내가 살고 있는 가스코뉴의 풍토에서, 사람들은 인쇄된 글로 나를 보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멀어지면 멀어 질 수록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  몽테뉴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또 그의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갈아주곤 했던 그의 가족과 하인들의 행동에서는 사후에 그에게 바쳐진 세상의 경배는 말할 것 없고, 생전에 파리에서 얻었던 그의 명성에 대한 숭배의 흔적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다. 

5. 쇼펜하우어; 약간은 '루저'의 삶을 살았던 찌질한 철학자
. Wiile zum Leben, Will to Life. 삶에의 의지, 생에 대한 의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1820년의 쇼펜아우어 : Hegel에 대한 평가와 열등감
악담과 혹평. 헤겔에 대한 쇼펜아우어의 평가,,
posted at 09:47:07 2023/05/03

. 1831년의 쇼펜아우어 : 17살 소녀에게 추근거림

43살 먹은 늙은 쇼펜아우어가 17살짜리 플로라 바이스에게 수작을 걸며 백포도 한 송이를 건네 주었는데, 플로라는 늙은 쇼펜아우어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끼며 그 포도를 슬그머니 물속으로 빠뜨려 버렸다.
posted at 09:53:48 2023/05/03 ** 쇼펜아우어라는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 posted at 12:44:49 2016/12/02

6. 니체 : 스위스 국적을 가진 철학자. 스위스 남동부 알프스 지역인 엥가딘의 질스-마리아라는 마을에서 살면서 산을 오르내리다 심심할때 글을 쓰곤 하였다.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의 전부 또는 핵심적인 대목을 질스-마리아라는 산골 마을에서 썼다.

Sunday, October 12, 2025

2025/10/12 청계산 한바퀴

청계산 한바퀴. 옛골 성남누비길 입구. posted at 12:00:04 

매봉전망대. 빗방울이 굵어진다. posted at 13:53:06 
2025/10/12 청계산 한바퀴 : 1057 양재AT센터~1155 옛골등산로입구~1300 이수봉~1350 매봉전망대~1430 옥녀봉~15:10 개나리골입구~15:30 양재AT센터. 19km. 4h30m.

Thursday, October 09, 2025

2025/10/08~10/09 양평 용문 자전거 캠핑

WJ, BK와 함께 양평 용문 비룡마을 강가에서 자전거 캠핑. 팔당까지 자전거로 달려 팔당에서 지하철 타고 용문으로 점프. 용문역에서 캠핑장소로 자전거 타고 이동. 이튿날, 비룡마을 강가에서 용문역으로 이동, 용문역에서 팔당까지 지하철 타고 점프하여 팔당역에서 내려 자전거타고 하남쪽으로 넘어가 쌈밥집에서 점심 먹고 자전거 타고 집으로 복귀. 집에 돌아와 자전거 닦아 집안으로 옮기고, 짐 정리하고, 말릴거는 널어 놓고, 빨래 돌리고, 씻고 나니 16:30.  

Monday, October 06, 2025

2025/10/06 추석날 고향에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도 연로하시니 작년부터 음식준비, 차례상도 없애고, 차례 지내는 것도 없애고, 작은 아버님들도 더 이상 명절에 시골집에 모이지 말고 각자 집에서 명절 쉬는 것으로 바꾸고 나니, 명절에 뭐 특히 할 일 없이 빈둥빈둥. posted at 11:18:12 

오랜만에 귀한걸 발견. 산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으름(어름, 일면 조선 바나나) 발견. posted at 15:46:07   

Friday, October 03, 2025

2025/10/03 청계산 한바퀴

비가 그쳤으니 이제 동네 한바퀴 돌아야겠다. posted at 12:06:53 
혈읍재 지나 매봉가는 길인데 지금은 또 빗방울이 굵어진다. posted at 14:43:03 

청계산 매봉 전망대 posted at 14:48:54   


양재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는 길에 밤을 한웅큼 주워 까먹으며 내려왔다 posted at 15:53:52  청계산 한바퀴 돌고 월하,, 아니 순대국앞에서 독작하노라...

2025/10/03 청계산 한바퀴 : 오락가락 하는 빗속에서 동네 옆산, 청계산 한바퀴. 1210 양재꽃시장~1310 옛골마을 등산로 입구~1320 봉오재~1495 이수봉~1445 매봉전망대~1520 옥녀봉~1600 양재화물터미널. 19km. 4h13m.  

Wednesday, October 01, 2025

책,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by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는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끝난 에도(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 백성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는지에 주목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과 그들이 아팠을때 어떻게 병을 고쳤는지에 관해, 그리고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민이 과거제도가 없던 사회에서 어떻게 입신양명의 길을 찾았는가에 관해서 의학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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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막부시대를 열면서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던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정치, 군사, 경제, 과학, 문화적으로 퇴보했다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에도막부시대 일본은 현대적인 국가 이미지의 단일한 나라가 아니라 약 300여 다이묘들에 의해 쪼개져 독립적으로 다스려지던, 약 300여개의 소국가가 공존하던 '하나의 닫힌 세계'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분할된 닫힌 세계에서 당시 막부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그들의 위계를 영지에서 쌀이 얼마나 생산되는 가를 가지고 정했으며, 세금도 화폐나 다른 물건이 아닌 쌀로만 수취하는 구조였다. 농민들은 생산량의 1/3은 황실과 막부에 1/3은 번주(다이묘)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들간의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들면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굶어 죽는 계층은 바로 쌀을 생산하는 농민 계층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로 기근이 발생해서 도시에서도 쌀값이 오르면 지방에 영지가 있는 다이묘들은 자기 지역의 쌀을 대도시로 수출해서 차익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면 쌀을 생산하는 지방에서 정작 비축미가 부족한 상황이 반복되고 그러다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기근이 일어나서 농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구조에서 영주(다이묘)-무사(사무라이) 집단 vs. 피지배 백성들 사이의 계급갈등이 심화되면서 에도시대에는 '하쿠쇼잇기(百姓一撥)'라는 농민봉기가 2,809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급적 대립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 농촌이 상업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경제력에 따라 분화한 상층농민과 하층농민의 대립구도로 변화하면서 '무라카토소도(농촌소동)' 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 자연재해, 기근이 닥치면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떠도는 유랑민이 되거나, 입을 줄이기 위한 영아살해, 기아(아이 버리기) 등의 습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초한 인재이기도 했다. 에도막부는 유일한 유럽 교역국인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점하면서 도호쿠지역의 국제무역을 막는 한편, 전국 다이묘들의 격(格)을 쌀 수확량으로 측정하고 세금도 쌀로 수취함으로써 도호쿠 지역의 번들이 쌀농사 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근본적으로 없앴다. 그리고 16~17세기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자체 건조하였던 일본이 막부의 원양 항해 금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형 배로 연안만 운향하게 됨으로써 수송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에도 시대 일본의 지배층은 피지배민이 일본 바깥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원양 항해용 배의 건조도 금지했으며, 그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 수록 더 나온다는 말처럼 쥐어짜고 착취하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초래한 퇴보 상태에서도 일본 피지배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를 이루어 나갔다. 

중세까지는 대가족과 예속민이 넓은 농지에 동원되어 영지를 경영했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면서 소농체제로 농업생산구조에 변화가 발행하기 시작한다. 에도시대에는 소가족이 자신의 좁은 농지를 근면하게 경작하면서 농업생산량도 늘리고 평균 수명을 높여 가게 된다. 가족구성원도 기존의 대가족 체계에서 4~5인 가족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1754년에 작성한 <아시 도잔 상서>에  50~60년전, 즉 1600년대 말쯤까지는 집마다 자녀를 5~8명 낳아 길렀는데, 요즘에는 한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르지 않습니다"라는 세태 한탄의 기록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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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만난 흥미로운 내용은; 

1.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지금은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라고 당연시 되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 사람이 인구의 상당수에 달했다는 사실. 특히 하층 예속민일 수록 겨우 끼니를 잇는 수준으로 삶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기는 불가능했다. "하야미 아키라가 현재의 고쿠라 지역에서 1622년 작성한 인구 조사 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6~50세의 예속민 여성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전체의 8.7%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서도 유사한데, "1630년 경상도 산음현 호적에 따르면 상민 가운데 27.3%가 1인가족이었고, 천민 가운데 32.8%가 1인 가족이었다". 소위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2. 아프면 의사를 찾는 습관의 시작...

중부 일본의 시나노 지역에서 1760년에 작성된 가훈서인 <가훈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몇 명 있더라도 재산을 분할 상속하면 안된다. 장남은 집안을 잇게 하고, 둘째 부터는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가 되도록 가르쳐라". 많지 않은 재산의 장자상속제도하에서, 그리고 당시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어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계급에 편입/입신양명 할 수 없던 둘째 이하 자식들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하급무사, 의사, 승려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당시 의사가 되려는 자중에는 의사 집안 출신자 이외에도 농민, 떠돌이 무사인 로닌, 떠돌이 종교인인 슈겐, 신사를 관리하는 가누시 등이 있었다. 빈농층은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경제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각번과 도시에 의사학교가 다수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고, 의사면허를 주면서 의사의 숫자도 증가하기 시작한다. 

1706년에 작성된 시나노 지역의 우에다번 99개 마을을 조사해서 작성한 인구 통계사 <우에다번 마을 명세장>에 따르면 "종교 관계자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고, 말을 치료하는 마의가 12명, 마을 의사는 3명"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1820년대 나카조 다다시치로가 자쓴 <견문집록>에는 "옛날 덴메이(1781~1789) 연간에는 지역거점인 마쓰시로 이외에 마을 열 곳당 한 명 비율로 의사가 있었지만, 지금(가세이 연간)은 의사가 마을마다 한사람씩, 또는 한 마을에 두세 사람이 있기도 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비추어 보았을때 1706년경에는 마을 33개당 의사 1명이었는데, 1780년대에는 마을 10개당 의사 1명, 19세기 전기에는 마을 하나당 의사 1명이 존재하게 되었응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의사의 숫자가 늘고 시골 마을 마다 의사가 있게 되면서 예전에는 병이 나거나 아프면 무당을 찾거나, 그럴 경제적 능력도 안되면 하는 수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아프면 의사를 찾는 환경과 습관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