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처음에는 외래(외국)어 인줄 알았는데,,, 한국말이다 ;
배론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배론성지(舟論聖地)의 모습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에 희생된 무명순교자를 위한 묘
배론 신학교(성 요셉 신학교) ; 한국 최초의 신학교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당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배론학당젼경 옛 사진
배론 신학교(성 요셉 신학교); "1831년에 설정된 조선 교구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836년 이땅에 들어오자마자 신학생들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신학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은 여러가지 문제(국경통과 문제 등)가 있었다. 그래서 이 땅에 신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구장 직무대행인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메스트르(Maistre) 신부에 의해서 신학교(1855.2~1866.3)가 세워졌던 것이다. 신학교의 이름은 1861년 10월에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서 '성 요셉 신학교'로 명명되었다. 메스트르(Maistre) 신부는 1843년 부터 배론에 와 살던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초가집을 빌려 1855년 초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의 책임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푸르티에(Pourthie 1856.8~1866.3)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1862~1866.3) 신부였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치고 배웠다. 또 두 서양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기도 하였고, 배론 교우촌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신학생들은 설립 직후 6명, 1859년 7명, 1863년에는 10명이었다. 그런데 성직자 양성의 열매가 맺을 무렵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1866년)로 말미암아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3명의 신학생들은 서울에서, 장주기는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3월 30일 순교하였다.... 특히 신학교의 집 주인이었던 순교자 장주기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요셉 성당
황사영(黃嗣永) 토굴
황사영순교현양탑(黃嗣永殉敎顯揚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백서 ; "1801년에 시작된 신유박해를 피하여 서울에 살던 황사영은 이곳에 몸을 숨겼다. 그해 2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자신의 신분을 감춘채 부모의 상을 당한 이씨라고 하면서 천주교신자인 김귀동의 집 뒤에 있는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속에 은신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신유박해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교회의 재건을 위해 백서(帛書)를 썼는데,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 가량 되는 명주천위에 122행, 13,384자로 된 것이다. 황사영은 백서에 박해의 진행과정과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30여 명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순교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어서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교회가 재건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북격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게 5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박해로 인해 피폐된 조선교회를 위한 재정적 도움. 둘째, 북경 교회와 조선 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안. 셋째,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 넷째, 청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킨뒤 친왕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케하고 조선왕을 부마로 삼자는 것. 다섯째, 서양의 선박과 군사, 무기를 얻어와서 조선에 출정한 뒤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방안... 그런데 이 백서가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지기전에 9월 29일 체포되고 백서 또한 압수 되었다. 황사영은 같은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처형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諡福式)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증정되었고, 현재 백서의 원본은 교황청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개인적 느낌으론,,, 황사영의 백서 내용을 가만 보자면 당시대의 관점에서도 그렇고, 현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신앙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대역부도의 죄가 있는 듯.
최양업 신부 묘소 및 조각공원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의 묘가 있는 곳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의 묘가 있는 곳
[동영상 : 최양업 신부 조각 공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 "그의 부친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39.9.12))이고 모친은 순교자인 이성례(마리아 +1839.12.27)이며, 그는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며 자랐다.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들에게 신학교육을 받고,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귀국후 12년 동안의 사목 활동은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순방이었다. 1850년 1월 부터 1861년 6월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지역만을 담당하였다. 관할지역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였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말미암아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그해 11월경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당시 신학교가 있었던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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