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송림(松林)과 단종(端宗)의 비극적 슬픔을 간직한 육지속의 작은 섬 청령포.
세조에 의해 17의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유배지이다.
청령포, 한자로는 淸(水+令,물수변+명령령)浦라고 쓰여 있다.
세조에 의해 17의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유배지이다.
청령포, 한자로는 淸(水+令,물수변+명령령)浦라고 쓰여 있다.
청령포 건너는 길...
배로 건너는데 채 1분 남짓이나 걸릴까
단종어소(端宗御所)의 전경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기와집)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고,
어소의 담장안에는 영조대왕의 친필을 새긴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時遺址, 여기가 단종이 머물던 옛터이다) 라는 비석이 있다.
현재 건물은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동영상 : 단종어소의 전경]
어제시(御製詩);
영월에 유배되어 온 어린 임금이 지은 詩인듯..
千秋無限寃(천추무한원) 寂寧黃山裡(적녕황산리)
萬古一古魂(만고일고혼) 蒼松繞舊園(창송요구원)
嶺樹三天老(영수삼천로) 溪流得石喧(계류득석훤)
山深多虎豹(산심다호표) 來夕掩紫門(래석엄자문)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萬古一古魂(만고일고혼) 蒼松繞舊園(창송요구원)
嶺樹三天老(영수삼천로) 溪流得石喧(계류득석훤)
山深多虎豹(산심다호표) 來夕掩紫門(래석엄자문)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동영상 : 단종어소 내부 및 어제시]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時遺址碑)
1769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162cm의 크기의 오석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時遺址, 여기가 단종이 머물던 옛터이다)라는 영조대왕의 친필을 음각하였고, 뒷면에는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堅石 地名 淸령(水+令,물수변+명령령)浦,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時遺址, 여기가 단종이 머물던 옛터이다)라는 영조대왕의 친필을 음각하였고, 뒷면에는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堅石 地名 淸령(水+令,물수변+명령령)浦,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음송(觀音松)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때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라는 전설이 있다.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라는 뜻에서 관음송이라고 불리웠다고... 소나무의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라는 뜻에서 관음송이라고 불리웠다고... 소나무의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
노산대(魯山臺)
세조에 의해 상왕(上王)에서 강봉된 명칭이 노산군(魯山君).
여기서 한양땅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며 지내던 곳.
여기서 한양땅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며 지내던 곳.
노산대쪽에서 바라다본 망향탑(望鄕塔)쪽의 층암절벽과 지는 해...
[동영상 : 노산대에서 바라다본 풍경]
금표비(禁標碑)
이 금표비는 단종이 유배되어 있던 곳을 일반 백성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앞면에는 청려포금표[淸령(水+令,물수변+명령령)浦 禁標] 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동서로 삼백척, 남북으로 사백구십척과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마찬기지로 금지에 해당된다(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라고 쓰여져 있다.
청령포에서 다시 건너와 바라다본 송림속의 석양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먹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장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조린 시가 생각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 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 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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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관광안내책자에 나오는 단종에 대한 간략한 약사(略史) -
단종(端宗) ;
단종은 1441년 7월 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홍위(弘暐).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尹祥)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 18일 문종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나(재위기간 1452~1455년) 박팽년, 성삼문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 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단종(端宗) ;
단종은 1441년 7월 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홍위(弘暐).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尹祥)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 18일 문종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나(재위기간 1452~1455년) 박팽년, 성삼문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 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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