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군부내 비밀조직인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부터 시작한 이집트의 오래된 군부 및 군부출신의 독재정권(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의 친미군부정권의 역사와 무슬림형제단의 관계도 애매하고,,, 군부와 무슬림형제단, 결국 같은 무리들끼리의 권력투쟁인건지, 뭐,,, 구체적인 지식과 이집트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기사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현재 상황도 이해불가인데,,,
인터넷 구글링하다가 나온 이야기/글 들,,,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의 구성원 마져도 성공한 장사치나 기업가 고위관료 군장성등으로 대체되며 미 CIA나 영 M16 같은 스파이 조직들이 개입한 정황들은 곳곳에서 발견"
"즉 타락한 이슬람근본주의 정치단체와 제국주의의 이해가 맞아 이집트가 반제 반서방 자주국가로 혁명화 되는것을 두려워한 제국들의 정치적 음모적 꼼수..."
"이집트 군부의 입장과 개입여부,,, 문제는 이집트 군부의 주요인사들이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라는 것. 그러나 아무리 군부실세라 하여도 거대한 파도와 같은 이집트 민중들의 힘을 결코 무시할수 없어 전세 역전을 위해 민중혁명에 잠시 가담.."
무르시, "미국정부의 비호아래 최고군사위원회와의 '은밀한 거래'로 정권을 획위했으나, 결국, 무바라크 전대통령이 남겨놓은 문제들로 인해 무바라크 정권을 몰아낸 '무슬만 형제'는 마찬가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미궁속을 헤매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이 지배해왔고 쿠데타로 물러난 무르시는 이슬람 형제단 출신이며 친 서방노선을 고집,,, 이집트 민중은 이슬람 형제단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것이며, 또한 매국매판적 부르조아세력의 정치지배를 반대.."
한국 이집트 대사관앞에서 시위를 하던 "이집트인 두 명은 자신의 옷에 아랍어로 ‘나는 무슬림이지만 무슬림형제단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글귀를 써왔다. 그들은 “종교가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이 문제”라고..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혁명을 배신했다.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기독교, 시아파 무슬림과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이교도라며 종교 갈등을 부추겼다"문제는 이번 쿠데타를 일으킨 같은 "무슬림형제단"인 군부의 의중. 무슬림형제단이 제국주의와 밀담을 통해 일단 무르시를 실각시키고 다시 군부/무슬림형제단 출신을 내세우면,,, 이건 진짜 친위쿠데타. 이집트나 한국이나,, 미제국과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인민들이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
인터넷 글을 검색하다 보니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나름 깊이 있는 기사를 발견. 아래는 기사 전문이다.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정체는?
[기고] 이집트 혁명의 주역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김애화(새세상연구소 연구위원)
입력 2011-03-19 14:37:00 l 수정 2011-03-19 15:12:33
http://www.vop.co.kr/A00000374223.html
이집트 혁명 기간 중 대중적 정치세력으로 가장 크게 부상한 것이 무슬림 형제단이다. 미국 오바마 정부를 비롯한 서방은 계속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노골적인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해외 언론의 보도 내용은 스펙트럼이 다양한 듯하다. 반미적 이슬람주의부터 세속적 이슬람주의, 중도적 정치세력까지 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병원, 보육원 등에서 자선활동을 하는 모습을 통해 헌신적인 대중조직의 모습을 부각하는 내용도 있다.
와중에 이집트 혁명을 이끈 주역들 사이에서 무바라크 퇴진 후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 행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무바라크 정당인 NDP(국민민주당)와의 정치적 타협 속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투표는 19일 진행될 예정이다. 이집트 혁명에 참가한 정치세력들은 이번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개헌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무슬림 형제단의 실제 정치적 성격은 무엇일까. 이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는 해외 언론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이집트 혁명의 주역들
이집트 혁명의 주역으로 네 가지 정치세력을 들 수 있다.
그 첫번째가 청년층이다. 이들에 의해 시위가 시작됐고 이들은 1백만 명 이상을 조직했다. 청년층은 사회.경제적 시스템에 대립하며 사회적 부정의와 점증하는 불평등에 반대해왔다. 따라서 이들이 '반자본주의'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좋은 측면에서의 민족주의자이자 반제국주의자이다. 이들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집트가 종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용인하는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민주적이며, 내부 리더십은 중앙집중적이지 않다.
두번째 정치세력은 급진적 좌파세력으로 이들의 전통은 공산주의다. 청년층은 반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위계적인 정당 구조에 속하길 원치 않는다. 그러나 청년층은 좌파세력과 관계가 나쁘지 않다. 이 두 세력은 지도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으며 혁명 과정에서 함께 행동해왔다.
세번째 정치세력은 중산층 민주시민이다. 이들이 혁명에 참가한 것은 이집트 체제가 극도의 경찰국가 체제이자 마피아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소 기업가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이러한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국가로부터 시련을 받아왔다.
물론 이들은 좌파가 아니며 자본주의, 기업, 시장을 인정한다. 완전히 반미는 아니며, 이스라엘을 좋아하지 않으나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 또한 민주주의자들이다. 군부, 경찰, 마피아 갱의 집중에 반대하고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바라데이(Mohamed ElBaradei)가 이 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엘베라데이는 미국인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이브하다는 평을 받는다.
네번째 주역이 바로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슬림 형제단은 민주화 시위 기간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시위 과정을 보면 시위는 청년층에 의해 시작됐고 이어 급진적 좌파가 참여했다. 시위 둘째날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참여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 발생 초기 4일 동안은 시위를 거부했었다. 이들은 시위가 경찰 탄압에 의해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이 오히려 확산되는 것을 보고 이들 지도자들이 시위 참가를 결정했다.
체제와 무슬림 형제단의 협력과 긴장관계
현재까지 이집트의 체제와 무슬림 형제단은 외형상 대립적으로 보여왔지만 사실상은 연맹 관계다.
체제와 무슬림 형제단의 협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무슬림 형제단은 1928년에 창립되었다. 그 당시 슬로건은 "코란은 우리의 헌법이다"였다. 이는 이슬람을 재구축한다는 이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초정통파(ultra-orthodox)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에 창립자인 바나는 비밀기구를 만들었다. 지하 경찰과 군사조직이었다. 형제단은 이집트 왕조 시절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높은 수준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종종 파르크 왕에 협조해 왕의 정적에 대항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적은 좌파,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와프드 정당을 포함한다.
형제단은 이슬람에 기반한 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들은 지배세력과 때때로 공통의 정치적 동기를 가져왔다. 무슬림 형제단은 지난 50년 동안,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하는 전투적인 공격수로 체제에 봉사하곤 했다. 형제단은 좌파와 민족주의 그룹에 침투하는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국 영국의 보호를 받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협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단히 독립적이어서 종종 지배권력과 강하게 대립했다. 지배층의 고위급 인사를 암살하곤 했다. 나세르에 대한 암살 기도를 하기도 했다.
1970년 나세르의 사망 후 권좌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 정권은 나세르주의자 또는 급진적 좌파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무슬림 형제단을 이용하고, 지위를 높여주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사다트 정권의 경제적 자유화 정책에 완전히 동의했다. 사다트는 나세르의 유산(국유화)을 모두 해체했다. 이는 무슬림 형제단 내에 신흥 부르주아의 힘을 키웠다.
무슬림 형제단은 보수적인 종교 정치운동을 하였다. 주요 관심은 여전히 이집트의 정치적 문화적 기구를 이슬람주의화하는 것이었다. 또 입법의 기본으로서 샤리아(sharia)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사다트는 민족주의자 반대파를 억압하고 그의 권력을 이념적으로 합법화하려고 종교 카드를 사용했다. 1979년 이란혁명이 일어난 후 6주도 채 안 돼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약을 맺었다. 또 무슬림 형제단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이집트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이집트 헌법을 바꾸어 모든 법의 근본은 샤리아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헌은 평화협약을 위해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부족했다. 이로써 사다트와 무슬림 형제단의 협조는 막을 내렸고, 사다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는가 하면 지도부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무바라크 집권 후 이들은 곧 석방됐다. 무바라크는 초기 사다트의 열정적인 스타일과 달리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견제하면서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무바라크 또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슬림 형제단과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바라크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이 교육기관, 사법제, TV 미디어를 운영하게 했다. 이를 이용해 무슬림 형제단은 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처음으로 베일을 씌웠고 이슬람법을 사회에 소개했다. 미디어를 통해 이들은 공공 여론에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무슬림 형제단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이들은 교사, 의사, 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동시에 그들로부터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만 절대적인 빈곤층이 5백만 명이다. 무슬림 형제단은 정치적 의식이 낮은 가난한 이들 중에서 용병을 조직한다.
90년대까지 무바라크 체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무슬림 형제단은 새로운 활동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과거를 청산하고 지역 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이들은 지역의 병원, 은행 등을 운영하고 구제활동 등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의 영향으로 무슬림 형제단은 2005년 총선에서 88석의 의석을 확보, 전체 의석의 20%를 차지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보면 무바라크 집권 기간 동안 부시 행정부는 무슬림 형제단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이를 시도하지 못했다고 미국 관리가 밝힌 바 있다. 그 후 미국과 무슬림 사이에는 공식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다. 오바마 행정부도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표명했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군과의 어떤 협상에든 자신들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무슬림 형제단의 성격
무슬림 형제단은 정치적으로 중도파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종교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사회적 배경에 있어 보수적이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2007~2008년 파업 당시 정부와 함께 노동자들의 파업에 반대했고, 노동자들이 시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토지개혁에 반대한다.
일부 학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근본주의적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 가능성이 있고 이집트를 더 좋게 만들려는 것 뿐이며, 이들은 이집트를 완전히 전통적인 이슬람 법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의 법이 이슬람 법과 일치하길 바란다. 2007년 이들은 정치프로그램 안을 발표했었는데, 이 안에 몇 가지 문제가 되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로 이뤄진 비선출위원회가 이집트 정부를 감독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코란에 위배되는 국가의 법을 감시하고 이슬람 법에 정치적 통치가 합치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뿐 아니라 많은 무슬림 형제단 관리들은 여성의 역할과 비무슬림 소수자의 처리에 대해 논쟁적인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향후 이집트 정국과 이집트 혁명의 주역들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영리하다. 이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체제의 협상 원칙을 받아들였다. 시위 대중이 무바라크가 과도정부 수반으로 지명한 오마르 술레이만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을 때 무슬림 형제단은 술레이만의 협상 제안에 동의했다.
또 무바라크가 결국 물러났을 때 이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투옥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군부를 칭찬했다. 이들은 합법 정당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과도정부의 여러 정치일정 결정 과정에 무슬림 형제단 대표가 참가하고 있다. 반면 혁명의 주역인 청년층과 좌파세력은 소외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지금 19일 개헌에 동의하면서 이집트 시위 시작 때부터 미국이 주장해왔던 "질서 있는 권력 이양"에 기여하고 있다.
청년층과 좌파세력이 과도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 즉각적인 해산과 비상령 해제, 자유로운 시위의 허용이다. 또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빠른 선거가 아니라 긴 시간의 자유를 허용하라는 것이다. 만일 즉각적으로 선거가 진행되면 많은 면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유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직돼 있기 때문이다. 또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 반면 좌파와 청년층은 그 후에나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청년층과 좌파세력은 행동 능력을 가진 대다수 세력이다. 그러나 '나쁜 시나리오'도 예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파와 무슬림 형제단이 청년층을 분열시키려 노력하는 것이고, 무슬림 형제단이 이들을 공격할 가능성이다. 이에 대한 루머도 나온다. 시위 기간 중 1만7천명의 수감자가 감옥에서 도망쳤는데, 탈옥 후 이들에게 친-무슬림 형제단의 무기와 자금, 뱃지가 주어졌으며 감옥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카이로에서 그는 중동지역 민주화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었다. 이는 이집트 야당 세력에게 힘을 주었다. 엘바라데이가 주축이 돼 2010년 2월 자유주의 성격의 정치연합 '변화를 위한 연합(the National Association for Change)'이 결성됐다. 무슬림 형제단은 일정 기간 주저한 끝에 이 연합에 가입했다.
몇 개월 후 형제단은 자유주의자들이 총선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요구를 거절했다. 형제단은 첫 총선에 참가해 의회에서 많은 의석을 얻길 바랐다. 그러나 집권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형제단도 결국 결선을 보이콧하게 됐다.
이처럼 무슬림 형제단의 성향은 개혁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조차 좇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정치 행보는 19일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19일 투표에 부쳐지는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며 새 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이미 실패로 끝난 헌법을 되돌리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우리가 성취한 혁명을 모욕하는 것"이라면서 새 헌법, 새 대통령선거와 의회선거를 요구했다.
향후 정국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현 집권세력의 결합이 공고해지며 무슬림 형제단은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면서 이집트 혁명 기간 드러났던 다른 정치세력과의 갈등은 더 커질 것이다. 서방의 관심사이기도 한, 이들이 집권세력과 샤리아법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지 아니면 집권세력과 협조해 샤리아법을 수용할 것인지는 이집트 혁명의 주역들과 힘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것이다.
*참조한 해외언론
http://newsclick.in/node/2012
http://motherjones.com/politics/2011/02/what-is-the-muslim-brotherhood?page=1
http://axisoflogic.com/artman/publish/Article_62279.shtml
http://www.indypendent.org/2011/03/08/the-muslim-brothers-in-egypt%E2%80%99s-orderly-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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