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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y 31, 2025

책, 『이야기의 탄생 The Science of Story Telling』 By Will Storr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 이야기는 나(=소설이나 영화속 주인공, 또는 독자/관객)의 의지와 관계없이 닥쳐온 외부의 사건/변화로 부터 시작된다라는...당연하다 생각하고 무심코 넘겨버려 잊혀질 질문과 답에 대해, 저자는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재조명해내며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서사의 시작. 그것은 결함있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세계인식모형(=뇌세포가 만들어낸 환각/망상)에 빠져 있는 주체가 외부의 현실 사건에 부딪치면서 겪는, 세계모형과 주관적 신념의 불일치, 갈등, 혼란과 공포로 부터 시작된다. 대체로 우리 인간은 자신의 통제모형이 잘못되거나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이나 세계인식모형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방어적이 되거나, 반대로 폭력적/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모형(환각)을 합리화, 정당화하며 스스로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외부세계(타인과 사건)는 주인공(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더더욱 강렬하게 압박해 들어 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함있는 통제모형(환각)에 집착하다 몰락하는 유형이 있고, 반대로 자신의 통제모형에 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세계에 대한 모형에 균열이 생기고 깨지는 사이 이전에는 억압되어 있던 다른 의지와 생각, 여러개의 자아가 표면으로 떠올라 주체를 지배한다. 자신의 환각/망상의 결함을 인식하고 세계모형에 대한 변화를 거부하는 자신의 마음과 싸우는 인물, 곧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다. 

주체가 최후의 결전에서 결함있는 자신의 세계모형을 완전히 바꾸려면 거의 초인적인 힘과 용기를 내야 한다. 공포와 무질서, 예측불가능성이 난무 하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반응하는 자는 영웅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아는 몰락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 하는 영웅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지적,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의 모습에 독자/관객들이 공감하며 위안을 얻는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자 가치라는 것에 동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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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윌 스토는 이야기 창작 이론가들이 서사에 관해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이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이 우리의 뇌와 마음에 관해 연구한 내용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뇌과학 기반의 글쓰기에 대해 연구해 왔고, 그 결과로 만들어 진 책이 『이야기의 탄생 The Science of Story Telling』 이다. 저자에 따르면 뇌가 우리의 생각과 현실을 구축하고 왜곡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때, 좀 더 생생한 인물과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 윌 스토는 기존의 플롯 중심의 접근 방식 대신 뇌과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수많은 고전명작, 대중과 평단의 갈채를 받은 소설, 영화, TV 드라마 작품들을 깊이 분석한다.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에서 각기 다른 층위의 스토리텔링을 탐색한다. 
1장.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작가와 우리(독자)의 뇌가 저마다의 생생한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지 알아 본다. 
2장. 결함있는 자아에서는 세계(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결함있는 세계모형(환각)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을 만나본다. 
3장. 극적질문에서는 주인공의 잠재의식으로 들어가 인간의 삶을 기괴하고 복잡하게 뒤틀고, 우리의 이야기를 강렬하고 예상할 수 없고, 감상적으로 만드는 숨은 갈등과 의지를 밝힌다. 
4장. 플롯과 결말에서는 이야기의 의미와 목적을 들여다 보고 플롯과 결말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저자는 다음의 일반적인 5막 구조의 플롯 분석을 통해 고전 명작, 소설, 영화, 드라마의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밝힌다. 

1막. 결함있는 통제모형; "이게 나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다"

결함있는 주인공의 주관적인 세계인식모형(=통제이론: 뇌에서 만들어낸 외부세계와 자신에 대한 주관적 환각)이 예기치 못한 외부환경의 변화(사건의 발단)에 의해, 새로운 심리 세계로 끌려 들어 간다.

2막. 반응 및 변화의 시도 : "다른 방법이 있는가?"

사건의 덫(Plot)에서 주인공의 낡은 통제이론이 검증되고 깨지기 시작한다. 긴장과 전율이 고조 되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인식모형에 변화를 시도한다. 

3막. Plot(외부세계/사건)의 반격 :"방법이 있다. 나는 변했다"

주인공은 새로운 전략으로 반격하지만 음울한 긴장이 지배하고 외부세계/사건의 공격과 강도는 더더욱 격렬해진다. 

4막. 좌절, 회의, 그리고 선택의 갈등 : "그런데 나는 변화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가?"

혼돈이 일어난다. 주인공이 가장 낮고 암울한 지점으로 떨어진다. 주인공은 자신의 믿음/결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사건이 주인공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을 해야 한다. 

5막. 영웅적 투쟁 및 통제의 회복 :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면서 긴장이 고조된다. 절정에 이르러 주인공은 마침내 플롯(외부세계/사건/타인)을 완벽히 통제하면서, 극적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이 나온다. 다시금 세상에 대한 紳적 통제력을 회복한다.

책, 『고전의 시작 : 사회과학편』 by 황광우, 홍승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읽기 시리즈, 사회과학편.

저자는 사회과학의 5가지 주제별로 각 5권의 책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주제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입장을 살펴본다.

2부 정치와 이념에서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쑨원의 <삼민주의>, 하이에크의 <예종에의 길>을 통해 동서양에 걸쳐 시대나 사상의 차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돌아 보게 한다. 

3부 법의 탄생에서는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메인의 <고대법>, 켈젠의 <순수법학>에 대해 해설한다.

4부에서는 사회과학의 지평을 넓힌 생각의 전환이라는 주제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캉유웨이의 <대동서>, 그람시의 <옥중수고>, 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소개한다. 

5부 내면의 탐색에서는 뒤르켐의 <자살론>, 피아제의 <아동 지능의 근원>, 융의 <심리학과 종교>, 파노프스키의 <시각에술에서의 의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연구 대상의 내면을 깊이 있게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의 영역을 개척한 다선 편의 글을 소개한다.

*한줄평 : 25권의 책을 소개하다 보니 내용이 취사선택되고 축약되면서 깊이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저자와 책에 얽힌 다양한 관점이나 분석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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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전의 시작 : 사회과학편』 에서 새롭게 알게된 하나의 책을 고르라면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를 들 수 있다. 아직 브로델의 책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책 소개를 통해 알게된 브로델의 자본주의에 대한 독특하고 의미있는 관점이 내겐 큰 소득이었다. 

소위 자유주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움직이며, 독점은 비정상적인 특수 현상이라 본다. 하지만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투명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경쟁이 없는 독점과 패권에 의한 "반(反)시장"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투명한 영역으로 특권을 가진 세력이나 집단이 아니라 시장을 규제하는 법규, 제도,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힘이 지배하는 곳으로 특정 집단이나 세력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이는 전통적인 통념인 "자본주의=자유시장경제" 라는 등식을 깨트린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자본주의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구조를 가만 돌이켜 보면 브로델의 관점이 가히 정확하다.

Tuesday, May 27, 2025

책, 『인간 실격』 by 다자이오사무 太宰治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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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작가의 자서전적인 글. 대체로 무기력하고 침울할 뿐, 개인적으론 별 감흥이 없다. 그의 죽음의 방식도 회피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밖에...

Monday, May 26, 2025

2025/05/25 북한산 산보(족두리봉~문수봉~의상능선)

허당맹탕님과 함께 느즈막히 12시에 출발~19:30 종료

녹번동 장미공원쪽에서 족두리봉으로 올라~향로봉~비봉~사모바위~승가봉~문수봉~남장대~나한봉~부암동암문~증취봉~용혈봉~용출봉~가사당암문~의상봉~북한산성탐방센터. 
약 11 km를 걸었다.


Sunday, May 25, 2025

2025/05/24 장성 축령산 산보

도란도란 친구들과 장성 축령산 산보.
07:00 양재 출발~11:00 장성 대덕마을 입구에서 산보 시작~축령산 정상~편백나무숲길을 걸어 15:00 대곡영화마을로 하산. 8km 걸었다.
편백나무숲 길과 곳곳에 피어난 꽃들을 즐기며 행복한 시간...






Wednesday, May 21, 2025

책, 『나는 왜 쓰는가』 by 조지 오웰(George Orwell)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예전에 E-Book 으로 대충 읽었던 조지 오웰의 책,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펼쳐 읽어 보았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라고 설명...

1. 오웰이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 부랑자/노숙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스파이크> :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저기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 뿐이다... (부랑자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2. 영국 식민 통치의 앞잡이, 버마 식민지 경찰로 일 할 당시 사형 집행 업무에 참여한 이야기 <교수형> :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3. 발정난 코끼리가 족쇄를 풀고 뛰쳐 나가 사람을 밟아 죽이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어쩔 수 없이 분위기에 떠 밀려 코끼리를 총으로 쏴서 죽여야 했던 이야기 <코끼리를 쏘다> :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 

4. <Spilling the Spanish Beans> : 1936~1939 스페인 내전 시기,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반혁명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 프랑코 파시스트 보다는 혁명을 더 두려워 했다. 혁명을 분쇄하라!

<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 스페인내전 참여때를 회상하다: "1936년 스페인에서 우리는 평범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너그러운 감정과 제스처가 평소보다 쉬운 때였던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여남은 가지는 댈 수 있는데, 남들이 딱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있는 무엇, 즉 당시의 특별한 분위기, 남루한 옷과 빛깔 화사한 혁명 포스터, 누구한테나 쓸 수 있는 ‘동지’라는 단어, 얇은 종이에 찍어 푼돈에 팔던 반파시스트 가요, 무지한 사람들이 중요한 말이겠거니 해서 딱할 정도로 자주 쓰던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 같은 말과 긴밀히 어우러져 있는 일들이다"

"이 사람(이탈리아 민병대원)의 최후가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이런저런 비감悲感에 젖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레닌 병영’이었으니 그는 아마도 트로츠키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였을 텐데, 우리 시대의 특수한 여건에서 그런 종류의 사람은 게슈타포한테 살해당하지 않으면 대개 GPU(소련 국가정치보안부)한테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5. 프랑스 식민지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대체로 눈에 잔 안띈다. "열대의 픙경에선 이상하게 사람만 빼 놓고 모든게 눈에 잘 들어 온다. 말라붙은 땅도 석류도, 야자수도, 먼 산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러나 밭에서 괭이질하고 있는 농부만은 꼭 놓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부색이 흙색과 같으며, 그래서 보는 재미가 훨씬 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매일 오후 아주 나이 많은 여인들이 장작을 한 줌씩 지고서 내가 살고 있는 집 앞길로 줄지어 지나간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나이와 햇볕에 미라처럼 바짝 말랐으며, 예외없이 아주 작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주 동안 매일 언제나 같은 시간에 노년의 여성들이 장작을 지고서 줄지어 집 앞을 절뚝절뚝 지나갔건만,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눈에 분명히 비치었건만, 나는 사실 그들을 봤다고 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건 장작이 지나가는 행렬이었다. 내가 우연히 행렬을 뒤따라가다가 묘하게 들썩거리는 장작더미에 시선이 끌려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가련한 흙빛의 육신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반으로 접혀버린, 뼈와 가죽만 남다시피 오그라든 육신들 말이다"

6. 기억의 재구성. 과거가 더 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여러해에 걸쳐 따로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볼 때 하나로 압축되며, 서사가 가미되기 때문이다.

7. 영국이란 나라 : “영국은, 자주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처럼 보배 같은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벨스의 묘사처럼 지옥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집안을,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8. 진영논리 : "영국의 보수당원이라면 유럽에서의 민족자결권은 옹호하겠지만 인도의 그것에는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한 채 반대할 것이다.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주체에 따라 선악 여부가 판가름되며, ‘우리’ 편이 저지른 일이면 어떠한 무도함이라도(고문, 인질 이용, 강제노동, 대대적인 추방, 재판 없는 투옥, 날조, 암살, 민간인폭격) 도덕적으로 색깔을 못 바꿀 게 없다"

9.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라는 에세이는, 글 쓰는데 있어 좋은 충고를 담고 있으니 읽어 볼 만하다.

10, 정치적 글쓰기 :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는 일반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관여해야지 ‘작가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Sunday, May 11, 2025

2025/05/10 지리산 산보

금요일  22:55 동서울에서 성삼재행새벽 3시경 성삼재 도착성삼재휴게소에서 간식을 먹고  내리는 새벽에 출발노고단~삼도봉~연하천 대피소까지 내내 비바람 맞으며 걷다함께한 도란도란 친구들이  이상 종주 진행이 어렵다하여 벽소령 가기전에 음정마을쪽으로 내려왔다비바람 맞으며  21km 걸었다.바람..바람...우박..진달래.추워서 덜덜... 음정마을에서 차를 얻어타고 다시 구례 피아골에 있는 친구네 시골집으로 가서 따듯한 하룻밤 보내고하동 화개장터에서 09:55 버스 타고 귀가






스트라바기록 : https://strava.app.link/kKJbMFaMgTb

동영상 : https://youtu.be/_SWTAB7VN8k?feature=shared

Sunday, May 04, 2025

2025/05/03~05/04 장봉도 트레킹

친구 (SW & WJ) 함께 배낭을 메고 삼목항에서 장봉도로 떠나다

05/03 오후 13 못되어 영종도 삼목항에 도착배를 타기 전에 점심을 먹자하여 선착장 근처 음식점에 들어가 푸짐한 점심과 ~하게  일병으로 시작하는 즐거운 하루😻

장봉도에 입도하여 건어장해변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15:30 트레킹 시작해안 트레킹 길을 따라  4km 걸어 17:00 장봉도 가막머리 전망대에서 진지를 구축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른 저녁을 하다짧은 낙조를 바라 보았다해떨어 지고 나니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로얄쌀루트를 곁들여 멜랑꼴리한 노래를 들으며 밤하늘의 희뿜한 초승달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21:00 각자 텐트로...

이튿날 05/04 아침 간단히 끓여 먹고 09 30분경 가막머리에서 출발능선타고 섬을 횡단하여 13:10 장봉선착장에 도착하여 트레킹 종료. 14:00 배를 타고 삼목항으로 복귀하다.




Friday, May 02, 2025

2025/05/02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에 전기모터와 배터리 달았던 업체에 가서 모터와 부속품 제거하고 

 근처 자전거 정비샵에 가서 체인 교체뒷쪽 1 스프라켓 교체

변속기 세팅하고 안양천 따라 달려 집으로… 

결과적으로 소머리코스 돌았다.


https://strava.app.link/pyLDz2sp3Sb


* 참고 : 예전 전기모터 달던 엘리제 기록 2021/11/20

Thursday, May 01, 2025

책, 『모든 것은 빛난다 All Things Shining』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연 '허무주의'의 시대인가?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허무주의'라는 것; 신의 부재로 인한, 신적 성(聖)스로움의 의미체계가 없는 것..을 왜 허무주의라고 규정하는가? 라는 의문부터 든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저자들이 이야기 하는 논조에 공감하지 못해서 드는 의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래에 묘사된 세계가 암담한 허무주의적 세계의 모습 아닌가?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우주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신의 얼굴에 쓰여 있다는 생각은 단테 세계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달리 말해서 중세 기독교왕국은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는 세계였다. 상상할 수 있는 한 허무주의에 가장 반대되는 세계가 이 세계였다. 중세의 세계에서 본래적인 의미를 갖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세계는 이런 의미들로 충만해 있었다"

저자들은 인간에 의해 버려진 신(神), 축출된 신의 자리에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채우려는 노력과 그 실패가 허무주의의 본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허무주의(Nihilism)란 기독교적 신의 부재일 뿐, 삶의 부정을 의미하는게 아니라고 본다.니체의 말처럼 신의 죽음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커다란 기쁨이다. 오히려 Deleuze 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삶의 긍정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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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中 디스(Dis) 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디스의 도시는 감옥이 아니며 죄 많은 영혼을 가두기 위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신을 들이지 않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거기에 사는 영적 '죄인'들은 자기충족적인 존재로서, 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반면교사인 사탄이라 불리운다. 그러한 사탄의 이미지는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모습과 정확히 부합한다.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서, 즉 내적인 사유와 욕망과 의지를 갖는 존재로서 이해하게 되었다..(중략).. 데카르트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주체와 대상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신의 피조물로 이해했다. 데카르트 이후 우리는 자신을 거의 무한히 자유로운 '의미의 할당자'로 보게 된다. 이런 할당자는 자신이 선택한 의미만을 자기 주변의 무의미한 대상들에게 부여한다"

데카르트에 이어 칸트는 자율적 주체에 대해 정의한다. 자율적 주체란 스스로 입법하는자, 자신이 세운 법률에 따라서 행동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자율성 'Auto-nomy' 에 대한 그리스의 어원을 살펴보면, Nomos 는 법(法)을 뜻 한다. 문자 그대로 자율성 Autonomy 은 자신의 법에 따르는, 반면 타율성 Hetero-nomy 는 타인의 법에 따른 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의지, 욕망, 감정, 판단에 따르는 자율적 주체라는 고군분투의 이미지가 주는 아름다움이, 신적 성스러움이 라는 이미지보다 못 하다 누가 말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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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저자들은 현대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신적 성(聖)스로움을 회복하기 위해 제시한 답은 '다신주의 Polytheism' 라 할 수 있다. 그 관점에서 Physis, Poiesis/Techne, Meta-Poiesis 라는 개념과, 퓌시스, 포이에시스 & 테크네를 아우르는 '메타 포이에시스 Meta-poiesis' 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메타 포이에시스는 어느 하나에 얽매이거나 치우침 없이 그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 기술, 그리고 그것들 사이를 부단히 옮겨 다니는 기술을 뜻 한다.이것은 일종의 들뢰즈가 이야기한 파도타기 또는 동양사상에서 이야기 하는 중용의 도와 그닥 차이가 없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저자들은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유일신교가 아닌 多神주의적 포용성을 이야기 하지만, 신에게로의 귀의라는 주장의 결론은, 그게 유일신교냐 다신교냐의 차이는 의미 없다고 본다. 결국 노예를 자처하는 결과 뿐...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노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계속해서 존재 하리라는 것. 인류라는 종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한 우주의 줄다리기 게임을 피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이 책 속에서 멜빌 Melville 의 <모비딕 Moby Dick> 이야기에서 인용한 문구를 상기해 본다.

"Ego non baptiso te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 sed in nomine Diaboli"

책, 『신, 만들어진 위험 Outgrowing God』

Outgrowing God; 신을 넘어서는 성장, 성숙. 이 책은 청소년(및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 비판서라 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언명이 나온지도 꽤 오래지만, 여전히 신(그리고 종교)는 죽지 않고 인류의 삶을 거대하게 지배하고 있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의 문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의 문제는 곧 인간 자신의 문제이기에...

리처드 도킨스가 『신, 만들어진 위험 Outgrowing God』 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神의 정의, 대상은 다음과 같다;

"우주를 설계할 만한 과학적,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설계자로서의 神), 세상 모든 존재의 생각과 기도를 들을 여력이 있으며(전지전능하며 기복의 대상으로서의 神), 인간의 선행과 죄에 일일이 신경쓰고 사후에 상을 내리거나 처벌하는 존재(심판자로서의 神, 그리고 선의 기준으로서의 신)".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존재의 궁극적 원리로서의 神 이라는 범신론적 사상도 포함될 수 있다. 

사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神 이라는 존재 그 자체라기 보다는,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 믿음, 행동,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 모든 곳에서 무수히 많은 신이 숭배를 받아 왔고 또 받고 있는데, 왜 당신이 믿는 神만이 옳은가?" 를 비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유효한 출발점이라 본다. 

저자는 1부에서는 신화와 그 기원,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믿음의 기원과 그 허상에 대해 살펴본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실증적인 증거, 앎에 의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희망이나 욕망, 또는 무지에 의한 믿음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믿음은 어떠한 선한 기준 또는 신의 역사(役事)에 의해 당연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란 공동체의 문화와 교육, 그리고 특히나 가족이나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과 세뇌로 인해 신을 신을 믿게 된 것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2부에서는 우주와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들어 과학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틈새를 신으로 메우려하는, '설계자로서의 신'의 존재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진화과 시간의 힘에 의한 생성. 그 것이 우주와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의 원인이지 신이라는 설계자의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과학이라는 무기로 신을 넘어서고자 한다.

무신론자인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비판이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라면, 신의 문제라는 것이 단지 과학의 대상 또는 과학적 비판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 사회적 관계망, 문화의 문제인데 과학이라는 하나의 측면에서만 바라본 점이 한계이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