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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16, 2013

2013/01/15 집안의 풍경

 인형의 집

Art Gallery of Lauren

 언젠가 출근할때 이 넥타이 한번 차고 나가야 하는데...

 싼타할아버지와 엘모. 짠~짠~짠!. 둘다 건드리면 시끄럽다.

 에이프릴(April)과 꼬마 알라뮤트

 밀림의 세계 by Lauren

거기에 몰래 숨어있었네... 늑대!

Sunday, January 13, 2013

2013/01/13 국립민속박물관내의 추억의 거리 풍경들...


다음 주면 또 멀리 떠나는 딸 로렌과 함께 찾은 경복궁 근처 국립민속박물관.
거기엔 추억의 거리 풍경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다. 
사진으로 보는 옛 시절의 추억들...

학교 교실의 모습.
이제 8살 되는 딸에게 설명을 해 주기 참 애매하고 어려운...
암튼 피아노 닮은 오르간 소리에 맞춰 음악시간에 노래를 불렀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겨울엔 석탄 난로위에 얹어 덮혀 먹었다라는
주절이 주절이 이야기를 해도 알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약속다방. 만남의 장소.
다방 내부를 들여다 보니 사람들이 
들어가서 차를 마실 수가 있는 구조.
그러나 가게에서 파는게 아닌,
내부에 있는 자판기에서 100~300원 넣고 뽑아 먹는...

 TV 월 할부로 판다라는 광고전단지...
이것 저것 광고, 홍보, 정부의 계몽 전단지 보면 나름 재미있다.
  
참,,, 아련한 TV. 1977년 겨울인가? 
아버지가 시골 장터에서 리어커에 싣고 집에 가져온 TV가 
금성사에서 나온 미닫이 식의 아래 모양의 테레비였다.  

레코드, 축음기 파는 가게를 재현한 모습

 만화가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예전엔 흔했던 그 빨간 공중전화.
저것도 도시로 나와서야 봤지, 그전에는 볼 일이 없었다.

어릴적 고향에선 마을에서 공동으로 돈을 모아 이장집에
겨우 전화하나 들여놔 전화오면 이장 아저씨가 스피커 방송하면
그 전화 받으려고 밥 먹다 말고 열심히 이장집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아이와 아빠가 함께 하는 Cigar Gum ; 
"아빠도 나도 함께 하는 해태 시가- 껌" - 해태제과공업주식회사근제...

 고교 얄개...
  
우리는 젖먹을 때부터 먹은 원기소!
근데 난 이게 뭔지 모르겠음.
시골에선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고 먹어본 일이 없어서..
 
 아래 제품광고 보면,,, 참 착하다 ㅋㅋㅋ

 코카골라 광고하시는 이분.. 누군지 아시겠죠?

 어둠속에 떠는 놈들은 지금도 많다...
 
이발관 내부의 모습

숨은그림찾기 ; 아빠와 딸을 찾아라.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옛날 담배 ; 금잔디, 새마을, 아리랑, 비둘기...
난 피워본게 하나도 없다. 저걸 피워볼 군번은 아니라서...
 
 음식점(국밥도 팔고, 술도 파는)의 모습

Feuerbach,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후기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
[미래철학의 근본원칙]과 더불어 여기 블로그에 Archive 해 보았다. 

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단, 왠지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오래되어  쉽게 구할 수 없는것 같아, 예전에 구매해서 가지고 있던 책의 전문을 블로그에 옮겨 보았다. 책의 맨 뒷장을 보니 1990년 인쇄/발행본의 책 값이 2,500원 이다. 

참 아련한 시기에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이렇게 Softcopy로 남겨 본다.

기독교의 본질 전체 Softcopy본에 대한 글은 아래의 링크 참조 ::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목차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_1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목차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목 차 -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판의 저자 서문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1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2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1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2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3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4.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5.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6.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7.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8.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9.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10.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결론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결론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결 론 ]

우리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모순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순 속에서 기독교-종교 일반에 특유한 본질-의 위로 우리 자신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실제적이며 명백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두철미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며 신의 본질의 비밀은 인간 본질의 비밀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그것의 내용인 인간성에 관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는 오히려 자신을 인간적인 것에 대립시킨다. 

혹은 적어도 종교는 종교의 내용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공공연한 고백과 수긍은 역사의 필연적인 전환점이 된다. 즉 신 의식은 종 die Guttung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고백, 인간은 단지 자신을 자기의 개성 혹은 인격서의 제한위로 높일 수 있으며 또 높여야 한다는 것 뿐이고, 자기의 종속의 법칙이나 본질 규정 위로 높일 수 없으며 또 높여서도 안된다는 고백, 인간은 인간의 본질 이외의 어떤 본질도 절대적인 신적 본질로서 사유하고, 감지하고, 표상하고, 느끼고, 믿고, 의욕하고,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다는 고백이 그것이다(각주1; 내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이란 자연을 포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연의 본질에 속하는 것 것(이것은 비속한 유물론의 주장과 반대이다)과 같이 자연 또한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적어도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절대적" 철학의 비밀이기도 한 주관적 관념론의 주장과 반대이다) 우리는 다만 인간과 자연의 결합에 의해서만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이기주의를 초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단지 부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판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오직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분리할 뿐이다. 단 허위로부터 분리된 진리는 언제나 낡은 진리에서 구별된 하나의 새로운 진리이다. 종교는 인간 최초의 자기의식이다. 종교가 신성한 것은 그것이 최초의 의식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의 최초의 것, 즉 신은 이미 증명된 것과 같이 그 자체가(진리에 의하면) 제 2의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단지 인간의 본질 자체가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있어서 제 2의 것, 즉 인간은 제 1의 것으로 조정되고 또 언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떤 도출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근원적인 사랑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그 때에만 사랑은 진실하고 신성하며 신뢰할 만한 힘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본질이 인간 최고의 본질이라면 그 때에는 실천적으로도 최고이며 제 1의 율법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이것은 최상의 실천적 근본 명제이며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다. 친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간단히 말해서 도덕적인 관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진실로 종교적인 관계이다. 삶은 일반적으로 그 본질적인 관계에 있어서 철두 철미 신적 성질의 것이다. 삶은 그것의 종교적 봉헌을 처음으로 목사의 축복을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그 자체 외적인 부가물에 의하여 대상을 신성화하려 한다. 종교는 이에 의하여 스스로 자체만을 신성한 권력으로 언표한다. 종교는 그 자체 이외에는 단지 지상적인 비신적 삶의 관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으로 종교는 이 관계들을 성화하고 봉헌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사랑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결혼(각주2; 물론 오직 사랑에서 생긴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결혼만이 신성하다. 왜냐하면 단지 외적 제한을 유대로 하고 있을 뿐 자체 안에 있어서 만족하고 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사랑의 자기제한을 유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결혼, 간단히 말하면 스스로 맺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않는 결혼은 결코 진실한 결혼이 아니며 그러므로 참된 도덕적인 결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은 자체에 의하여 맺어지고 결합의 본성에 의하여 신성하다. 다만 진실한 결혼, 결혼이나 사랑의 본질에 상응하는 사랑만이 종교적인 결혼이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인 관계들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다. 모든 도덕적인 관계들이 도덕적이며 모든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배양되는 것은 다만 관계들이 이미 자체에 의하여 종교적 관계로 인정되는 곳에서뿐이다. 진실한 우정이 존재하는 것은 우정의 한계가 종교적 성실에 의하여 지켜지며, 믿는 사람이 신의 가치를 지키는 것과 같은 성실에 의하여 지켜지는 곳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의 우정, 재산, 결혼, 복지는 신성하며 또 당신에게 있어 신성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그 자체에 있어서 신성하게 하라!

기독교에 있어 도덕률은 신의 계명으로서 파악된다. 도덕 그것이 종교성의 규준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이 종속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해서 그 자체가 종교의 의의를 갖지는 못한다. 종교의 의의는 신앙에 속할 뿐이다.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본질로서의 신은 도덕 위를 떠돈다. 그리고 인간에겐 오직 타락만이 귀속하는 것에 반하며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본질로서의 신에겐 최선의 것이 소속한다. 인간은 생활과 인간에게 바쳐져야 하는 모든 성향과 그의 최선의 모든 힘을 요구를 갖지 않은 그 본질을 향해 낭비한다. 실제의 일은 자기 성질이 없는 수단이 되고 단지 표상되고 상상된 것의 원인만이 실제의 원인이 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으 ㄹ희생으로 제시해 준 은혜를 신에게 감사한다. 인간이 자기의 은인을 향햐 말로 표현하는 감사는 단지 표면저인 감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감사는 그의 은인에게 향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해당한다. 인간은 신을 향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배은망덕하다(각주3;"신이 통치, 주인, 피조물을 통하여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조물로 몰리며, 피조물에 기대에 창조주에 의지하지 않는다-그들은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에게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왕들로부터 신들을 만들었던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 혹은 은혜가 왜 신으로부터 오며 절대로 피조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인가를 알 수 없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피조물에 의해서 신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우리를 돕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수단이다"-Luther)

이와 같이 종교에 있어서의 도덕적 성향은 몰락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을 향하여 인간을 바친다. 피비린내나는 인간 희생은, 사실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비밀의 조야한 감성적 표현에 불과하다. 피비랜내나는 인간 희생이 신에게 바쳐지는 곳에서 이런 희생은 최고의 희생에 해당하며 감성적 생활은 최고의 선으로 인정된다. 사람들은 바로 이 때문에 생명을 신에게 바치고 특별한 경우에 그것에 의해 신에게 최대의 영예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만일 기독교가-적어도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는-더 이상 피비린내나는 희생을 신에게 바치지 않는다면, 이는 다른 이유들을 제지하고 다만 감성적 생활이 더이상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대신에 혼을, 심성을 바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감성적 생활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책임-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것과 같은 책임-을 종교적 책임을 위한 희생으로 제공하고, 인간에 대한 관계를 신에 대한 관계를 위한 희생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공통사이다. 기독교도들은 신의 무요구성-이것은 오직 순수한 숭배의 대상인데-의 개념에 의하여 확실히 많은 퇴폐한 표상들을 제거하여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무요구성은 단지 종교 특유의 본질을 확실하게 할 수 없는 추상적, 형이상학적 개념에 불과하다. 숭배의 필요는 오직 한 측면, 즉 주관적 측면으로 옮겨 놓으면 모든 일면성이 그런 것과 같이 종교적 감성을 냉냉하게 한다. 그러므로 상호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 주관적 요구에 상응하는 규정이 신 안에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모든 현실적 규정은 상호성에 근거하고 있다(각주4;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 상 2장 30절. "오! 선하신 아버지시여! 영원한 증오에 가장 합당한 가장 저급한 벌레조차도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벌레는 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혹은 오히려 자기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Bernardus ad Thomam. 이것은 매우 아름답고 중대한 언표이다. 만일 내가 신에게 찬성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게 찬성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수동형은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능동형이며 객체는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주체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임을 뜻하는 것이며 사랑받는다는 것은 신임을 뜻하는 것이다. 신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하며 인간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중에야 비로소 처음의 일이 전도되고, 수동형은 능동형으로 전화되며, 능동형은 수동형으로 전화된다)

종교적 인간이 신에 대한 일을 생각하는 것은 신이 그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가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 대하여 질투가 심하다. 종교는 도덕에 대하여 질투한다(각주5;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좋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 하리니 이느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사사기 7장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신다. 무릇 사람을 믿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믿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예레미아 17장 5절. "신은 우리의 금이나 육체나 재화를 요구하지 않고 그것을 황제에게, 즉 세계나 국가의 대표자에게 주고 그리고 황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이며 최선의 것인 혼을 자신을 위해 보류하였다. 우리가 신을 믿는 것과 같이 사람은 혼을 신에게 주어야 한다"-Luther) 종교는 도덕에서 최선의 힘을 흡수한다. 종교는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주지만 그러나 신은 것은 신에게 준다. 그리고 진실한 온 마음의 성향, 즉 심성은 신의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신성하였던 시대에는 결혼이나 재산, 국법이 존경된 것을 본다. 그것은 그 근거를 종교 안ㄴ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자연적-인륜적-법률적 의식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식에 의하여 법률적이고 인륜적인 관계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법률을 법률 그 자체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 자에게 법률은 결코 종교에 의하여 신성한 것으로 되지 않는다. 재산은 신적 제도로서 표상된 것에 의하여 신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신적 제도로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신의 술어 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신적이기 때문에 신의 술어인 것이다. 이교도들이 빛이나 샘을 숭배하는 것은 빛과 샘이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것 차에의 의하여 인간에게 어떤 은혜적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며 고뇌하는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빛이나 샘의 우수한 성질 때문에 그것들에게 신적 영예를 표시하는 것이다.

도덕이 신학에 기초를 두고 법률이 신의 제정에 의존하는 곳에서 우리는 가장 부도덕하고 가장 불법적이고 가장 유해한 사물을 정당화하며 확립시킬 수 있다. 내가 도덕을 신학에 근거지을 수 있는 것은 오닉 나 자신이 이미 도덕에 의하여 신적 본질을 규정하였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나는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의 어떤 규준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에서 내가 모든 가능한 것들을 도출할 수 있는 부도덕하고 자의적인 기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도덕을 신을 통하여 기초를 세우려 한다면, 나는 도덕을 이미 신 안에서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나는 도덕이나 법률을-간단히 말하면 모든 본질적인 관계들을-그것 자체를 통해서만 기초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진리가 명하는 대로 진실하게 기초지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들 자체에 의해서 기초될 때뿐이다. 어떤 것을 신 안에 조정하거나 혹은 신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은 이성의 눈을 벗어나서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는 일 없이 그것을 의심할 수 없는, 상처나게 할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서 설정하는 것 이외의 다른 뜻이 없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교활한 의도가 없는 곳에서 조차도 자기기만은 도덕이나 법률을 신학 위에 확립하려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법을 성실하게 취급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선동이나 위로부터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기독교적 국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이성적인 국법, 적법적인 국법, 인간적인 국법을 필요로 할 뿐이다. 바른 것, 참된 것, 선한 것은 도처에 그 신성화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 즉 자체의 성질 안에 가지고 있다. 도덕을 성실하게 취급하는 곳에서 도덕은 바로 그 자체에 있어서 신적인 힘으로 인정된다. 만일 도덕이 자기 자신 안에 아무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는 도덕을 위한 아무 내적인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은 그때 종교의 근거 없는 자의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자각적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다만 어떤 환상의 파괴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 환상은 어떻든 상관이 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실제적 생활의 힘을 없애며 그와 같이 진리와 덕에 대한 감각을 말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 가장 내적이고 진실한 성향인 사랑까지도 종교성을 통하여 표면적-환상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랑은 인간을 단지 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다만 표면적으로 인간을 사랑할 뿐이고, 실제는 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종교적 관계를 전도하기만 하면 된다. 즉 우리는 종교가 수단으로 설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파악하고 종교에 있어서 종속적인 것 부차적인 것, 조건인 것을 주요 사항, 원인에로 높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환상을 파괴하고 투명한 진리의 빛을 우리 눈앞에 갖는 것이다. 세례와 만찬의 성배들(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상징이다)은 우리의 이 진리를 확증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세례의 물은 종교에 있어선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성령은 이 수단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 규정을 통하여 이성과 사물의 본성의 진리와의 모순에 빠진다. 일면으로는 물의 자연적 성질에 어떤 중요한 것이 있고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그 성질이 무이며 신의 은총과 전능의 단순한 자의적 수단이다. 우리가 이것들과 다른 것들의 참기 어려운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세례에 진실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물 그 자체의 의의의 표시로서 고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세례는 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불가사의한, 그러나 자연스런 작용을 우리에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은 실제로 인간에게 물리적인 작용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도덕적이고 지적인 작용을 부여한다. 물은 단지 육체의 더러움에서 인간을 순화할 뿐만 아니라 물 속에서 인간을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게도 한다. 즉 물 속에서 인간은 보다더 분명하게 보고, 보다더 분명하게 생각한다. 물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보다더 자유롭게 느끼는 것이다. 물은 욕망의 열화를 꺼버린다. 얼마나 많은 성자들이 악마의 유혹을 초극하기 위하여 물의 자연적인 성질에로 도피하였던 것인가! 은총에 의해서 거부된 것이 자연에 의해서는 허용되었다. 물은 단지 식이요법의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학의 영역에도 속한다. 자신을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목욕하는 것은 비록 최저의 덕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덕이다(각주6; 분명히 기독교의 세례 역시 단지 고대 자연 종교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자연 종교에 있어서는 페르시아의 종교의 경우와 같이 물은 종교적 정화의 수단이었던 것이다-S. Rhode. 그러나 여기서 세례는 기독교에 있어서보다 훨씬 더 진실한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훨씬 깊은 의미도 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자연 종교에 있어서 세례는 물의 자연적인 힘과 의의에 근거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고대 종교의 이와 같은 단순한 자연관에 대하여 우리의 사변적-신학적인 초자연주의는 아누 감각도 이해력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 이집트인, 헤브루인이 육체의 청결을 종교적 의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의 성자들보다도 훨씬 더 이성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성자들은 그들 종교의 초자연적인 원리를 육체의 불결속에서 명확하게 확증하였다. 이론에 있어서의 초자연주의는 실천에 있어서의 반자연주의가 된다. 초자연주의는 단지 반자연주의에 대한 완곡어에 불과하다)

소나기를 만나면 아욕의 정념이 사라진다. 물은 자연과 친숙해지기 위한 가장 가깝고도 제일가는 수단이다. 목욕은 우리의 자아성을 자연의 객관적 본질속에서 분리시키는 화학적 과정이다. 물 속에서 위로 떠오른 인간은 재상한 새로운 인간이다. 만일 우리가 상상된 초자연적인 은총의 수단을 자연적인 수단과 바꾸어 놓는다면, 은총의 수단 없이 도덕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교의는 하나의 좋은 구실을 가지고 있다. 도덕은 자연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도덕은 가장 단순한 자연적 수단과 결부되어야 한다. 가장 깊은 비밀은 비속한 것이나 일상적인 것 속에 가로놓여 있다. 초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은 실제의 비밀을 환상적인 비밀들을 위해 희생으로 바치며, 예를 들면 지금의 경우엔 물의 실제의 기적적인 힘을 상상된 기적적인 힘에 희생으로 바치는 것과 같이 비속한 것이나 일상적인 것을 무시한다. 물은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단순한 은총 수단 혹은 의약이다. 그러나 물이 효과를 내는 것은 종종 그리고 규칙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일회적 작용으로서의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무의미한 제도이든가 혹은 만일 그것에 실제의 작용이 결합된다면 미신적인 제도이든가이다. 이에 반해서 만일 세례 중에 물의, 일반적으로 자연의,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치료력이 추체화되어 찬미된다면 세례는 이성적이며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의 성례는 보충을 필요로 한다. 보편적인 생활요소로서의 물은 우리에게 자연으로부터의 우리의 근원을 상기 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근원을 식물이나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에 있어 우리는 순연한 자연의 위력 아래 굴복한다. 물은 자연적인 평등과 자유의 소재이고 황금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무기계와 함께 자연적이라고 하는 공통의 이름 아래 포괄하는 동물계와 식물계로 부터 구별한다. 즉 우리는 자연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의 구별, 우리의 본질적인 차이를 찬미하여야 한다. 우리의 이 차이의 상징들이 포도주와 빵이다. 포도주와 빵이란 질료에 관해서 말하면 자연의 산물이고 형상에 따르면 인간의 산물이다. 만일 우리가 물에 있어서 "인간은 자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면, 포도주와 빵에 의해서 우리는 "자연은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적어도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자연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자연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적-정신적인 활동은 물에서는 몰락하고 포도주와 빵에서는 자기만족을 얻는다. 포도주와 빵은 초자연적인 산물이다. 단 그것은 이성과 자연에 모순되지 않는 유일하게 타당하고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이다. 만일 우리가 물에서 순수한 자연력을 숭배한다고 하면 포도주와 빵에 있어서는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의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제는 다만 의식에까지 성숙한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세례는 이미 어린 아이들에게도 역시 베풀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동시에 자연에 대한 정신의 바른 관계를 찬미하는 것이다. 즉 자연은 소재를 주고 정신은 형상을 주는 것이다. 세례의 성례는 자연에 대한 감사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빵과 포도주의 축제는 인간에 대한 감사를 주입한다. 포도주와 빵은 가장 오래된 발견에 속한다. 포도주와 빵은 우리에게 인간이 인간의 신이며 구세주라는 진리를 현재화하며, 구체화한다.

음식은 성만찬의 비밀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실은 원래 종교적인 할동인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각주7;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 일보다도 용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먹지 않으면 춤을 추지 못한다'라고 보통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즐거운 머리는 만복 위에 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며 사람들은 이것을 곧 익혀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 그리스도도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 필요한 일을 행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도 감미롭고 즐거운 식시를 준비하여 나는 너희에게 어려운 일을 과하지 아니하고 만찬을 정하였다'"-Luther) 그러므로 당신을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한 조각의 빵에, 그리고 또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한 모금의 포도주에, 그대에게 이들 유익한 선물을 보내는 신-인간-을 생각하라! 그러나 인간에 대한 감사 때문에 자연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 포도주는 식물의 피이며 빵은 식물의 살이며,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의 생존의 복지를 위하여 희생으로 바쳐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식물은 당신에게 자기를 무로 하여 당신의 향유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연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또한 당신은 빵과 포도주의 자연적인 성질에 힘입고 있다는 감사를 잊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비속한 일상적 행위이며, 그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정신도 없고 심성도 없이 수행되기 떄문에 그것을 종교적 행위라고 말한다는 것을 조소하고 싶다면 조소해도 좋다. 그때에 당신은 성만찬도 역시 그것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경우에 심성도 정신도 없이 행해지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고 또 당신은 빵과 포도주를 향유한다는 것의 종교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언젠가 일상적인 활동이 비자연적-폭력적으로 중단된 상태에 당신 자신을 놓아 보라. 배고픔과 갈증은 단지 인간의 육체적 힘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및 도덕적인 힘을 파괴한다. 배고픔과 갈증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성과 오성과 의식을 빼앗는다. 오! 만일 당신이 언젠가 그와 같은 결핍과 불행을 체험한다면, 어떻게 당신은 또다시 인간성과 오성을 부여한 빵과 포도주의 자연적인 성질을 축복하며 찬미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이 우리는 범속한 것에서 범속하지 않은 의의를 획득하고 일상적인 생활 자체에서 종교적 의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단지 사물의 일상적인 범속한 경과를 중단하게 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빵이 신성하고 포도주가 신성하며 그리고 물 또한 신성할지어다! 아멘.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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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전체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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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

종교의 숨은 본질은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 본질과의 통일이다. 그러나 종교의 형식 혹은 드러나고 의식된 본질은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구분이다. 신은 인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신은 특정한 존재로서 알려진다. 그런데 사랑이란 종교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종교의 의식된 형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신과 동일화하고, 신과 인간과 동일화하며, 따라서 인간과 인간을 동일화한다. 신앙은 신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그 결과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한다. 왜냐하면 신은 인류의 신비적 종 개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으로부터의 신의 분리,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분리이며, 협동적 유대의 해소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앙을 통해 인간의 도덕이나 이성이나 진리에 대하여 단순한 감각과의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종교는 사랑을 통해 재차 이 모순에 대립한다. 신앙은 신을 개별화 한다. 신앙은 신을 하나의 특수한 다른 본질로 만든다. 사랑은 신을 일반화한다. 사랑은 신을 보통의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존재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신앙은 인간을 내부에서 자기 자신과 분열시키며, 따라서 외부에 있어서도 분열시킨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이 인간의 마음속에 만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의 신에 대한 신앙을 율법으로 만든다. 사랑은 자유이다. 사랑은 무신론자조차도 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자체가 무신론적이며 인간에 대립하는 특수한 신의 존재를 비록 반드시 이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실천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구별한다. 신앙은 진리를 오직 신앙에로 돌린다. 신앙은 한정된 특수한 진리(이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부정과 결합되어 있다)를 신앙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신앙은 본성적으로 배타적이다. 단지 하나의 일만이 진리이고 단지 한 사람만이 신이며 단지 한 사람만에게 신의 아들의 독점권이 소속된다. 다른 모든 것은 무이여 오류이며 망상이다. 다만 여호와만이 참된 신이다. 다른 신들은 공허한 우상들이다...

신앙은 특수한 명예감과 자기 감정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자연적인 인간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자기를 우수한 인간,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귀족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평민이다. 신이란 신앙에 있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한 구별과 우선이 인격화된 것이다(각주1 ; 케루수스는 기독교도들에 대해서 신에 의한 서열에서 일등임을 자랑한다는 것을 비난한다. "신이 존재하고, 그래서 후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 자신의 본질을 어떤 다른 본질로서 표상하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직접 자신 안에 두지 않고 이 다른 인격 안에 둔다. 신앙 있는 사람의 우선의 의식은 인격의 의식이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 다른 인격성 안에 가지고 있다(각주2 ; "나는 나의 행복과 죄의 서면 때문에 뻐기고 거만하다. 그러나 나의 행복과 죄의 서명은 무엇을 통해서 얻어지는가? 그거슨 타인의 명예에 의해서, 즉 주 그리스도의 명예에 의해서이다" -Luther.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 전서 1장 30절)

마치 하인이 그의 주인의 품위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것과 같이, 물론 자기는 자기 주인보다도 낮은 신분의 자유롭게 독립한 남자 이상으로 생각되는 것과 같이, 신앙이 있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다(각주3 ; 러시아의 장군, 뮌니히의 이전 부관은 "나는 그의 부관이었던 때 내가 사령관이 된 지금보다도 내 자신이 더 위대하다고 느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주에게 공적의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자기를 위해선 모든 공격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공적이 그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주의 명예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명예감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신앙은 거만하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의 우월한 감정과 자기의 자만과를 어떤 다른 인격 안으로 전이하는 것에 의하여 자연적인 거만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다른 인격이란 신앙 있는 사람보다는 더 월등하지만 그러나 신앙있는 사람 자신의 숨겨진 자기이며 그의 행복의 욕망이 인격화되어 만족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인격성은 자기가 자선가이며, 구제자이며, 구세주라는 규정-따라서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지 그 자신에게 그 자신의 영원의 구원에 관계시키는 규정-이외의 다른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의 특징적인 원리, 즉 종교는 자연적 능동형을 수동형에로 전화시킨다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이교도는 자신을 고양시키고 기독교도는 자신이 고양된다고 느낀다. 기독교도는 이교도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활동의 사상事象인 것을 감정이나 수용성의 사상에로 전환한다. 신앙 있는 사람의 겸손은 전도된 거만, 거만의 외관이나 외적 특징을 갖지 않는 거만이다. 신앙 있는 사람은 자기가 탁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탁월함은 그의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은총의 사건이다. 그는 탁월하게 되어진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보통 자신을 자기 자신의 활동의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목적이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이단자들 혹은 대체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하였다(각주4; 신앙이 아직 체내에 불, 즉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신앙에게 볼 때 이단자나 불신앙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 처벌은 신앙의 본질 안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우선 단지 신앙이 없는 자들로 부터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 없는 분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분리는 매우 비판적인 격리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자기에게 부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반대하게 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단지 신앙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신을 자기에게 반대하게 하지 않을 뿐이며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신을 자기에게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신분을 버리라고 하는 요구의 근거는 바로 이런 것 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자신에게 반대하게 하는 사람은 무가치하며, 버려져 있으며, 벌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자기에게 반대케하는 것은 그 자신 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선량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며,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악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신앙은 제한되어 있고 사로잡혀 있어서 모든 것을 호악好惡에 따라 해석한다. 신앙에 있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완고와 악의에서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적이다(각주5 ; 신약성서 속에는 이미, 무신앙에는 불복종의 개념이 결부되어 있다. "제일의 악은 믿지 않는 마음이다"-Luther) 그러므로 신앙은 다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을 동화할 뿐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밀어 낸다. 신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대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쁘게 대한다. 신앙 속에는 악한 원리가 가로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성서에는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쓰여져 있다고 해서 반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앙이 심판 및 처벌의 선고를 신에게 맡긴다고 해서 반대해서는 안 된다. 이 성경 귀절과 다른 유사한 성경의 귀절들 역시 단지 기독교의 사법에 잇어서 타당할 뿐이고 기독교의 국법에 있어서는 타당하지 않으며, 단지 도덕에 소속할 뿐이고 교의학에 소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도덕적 언표를 교으학의 영역에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미 신앙의 냉담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과 인간과의 사이의 구별은 근대인의 인도주의의 결실이다. 신앙에 있어 인간은 신앙 안에서 해소된다. 신앙에 있어 인간과 짐승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은 오직 종교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단지 신앙만이 인간을 신의 마음에 들게 하는 덕을 자체 안에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척도이며 신의 희열은 최고의 규범이다.

따라서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인간, 바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인간, 신이 승인하는 인간이다. 인간과 신앙이 있는 사람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이미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떨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지 신앙의 구별이 극히 예리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만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이다. 신앙의 구별이 흐려지면 당연히 신앙 자체도 역시 냉담하게 되고 무성격하게 된다. 신앙은 그 자체가 아무래도 좋은 사물에 있어서만 관대하다. 사도 바울의 관용주의는 신앙의 근본 조항의 승낙을 전제로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신앙의 근본 조항에 관계하는 곳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 발생한다. 비본질적인 것의 영역에 있어서는 아무 율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곳에서 당신들은 자유이다. 그러나 분명히 신앙이 당신에게 권리와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다만 당신이 신앙에 손상되지 않은 권리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그와 같이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이다. 그리스도를 찬성하기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찬성하든가 혹은 반대하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신앙은 단지 적 혹은 친구를 알고 있을 뿐 비당파성을 알지 못한다. 신앙은 오로지 그 자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비관용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언제나 신앙의 일은 신의 일이고 신앙의 명예는 신의 명예라고 하는 망상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신은 본질적으로 신앙의 대상적 본질, 신앙 그 자체에 있어서의 대상인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종교적인 심성과 의식에 있어서 신앙의 사상事象은 신의 사상과 동일화된다. 신앙에는 신 자신이 관여한다. 즉 신앙이 있는 사람의 관심은 신 자신의 가장 내적인 관심인 것이다. "너희에게 손댄 자는 主의 눈동자를 스치는 것이다"라고 예언자 사가랴는 말하고 있다"(각주6 ; 그는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말하였다. 그는 그것에 의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치 인간의 눈동자를 조금만 건드려도 상하는 것과 꼭 같이 성도들이 조금만 모욕을 당해도 신이 훼손된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통찰하게 하려는 것이다"-Salvianus. "주는 성도들이 한 번도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그들의 가는 길을 그와 같이 주의 깊게 지키고 있다" -Calvin, 「기독교의 근본 교의」 제 I 권, 제 17 장 제 6절.) 신앙을 훼손하는 것은 신을 훼손하는 것이며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사랑은 죄 안에서도 덕을 인식하고 오류 속에서 조차도 역시 진리를 인식한다. 사람들이 다신교(일반적으로 우상 숭배) 속에서 진리르 보았던 것은 신앙의 힘 대신에 인간성의 본연에 충실한 통일의 힘, 이성의 힘, 인도의 힘이 들어 앉았던 때 이래의 일이다. 혹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때 편협한 신앙 안에서 신앙이 오직 악마속에서 도출한 것을 인간적이며 자연적인 근거에 의해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직 이성과 동일할 뿐이며 신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성과 꼭 같이 자유하며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나 신앙은 소심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일반적으로 사랑이 지배한다. 이성 그 자체는 보편적인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이 지옥을 발명하였던 것이지 사랑이나 이성이 발명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옥은, 사랑에 있어서는 공포이며 이성에 있어서는 불합리이다. 지옥 안에서 단지 신앙에 혼매昏昧나 그릇된 신앙만을 보려 한다면 측은한 일일 것이다. 지옥에 관한 것은 이미 성경에도 쓰여져 있다. 신앙은 일반적으로 어디에서나 동일한 것이다. 적어도 적극적-종교적인 신앙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적극적-종교적인 신앙이란 사람들이 여기서 취급되고 또 만일 우리가 이성이나 교양의 요소를 신앙과 혼동하지 않으려 한다면 취급되어져야 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이다. 이성이나 교양의 요소가 신앙과 혼동된다면 물론 신앙의 성격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이 기독교에 모순되지 않는다면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성향 및 이 성향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도 역시 신앙에 모순되지 않는다. 신앙은 처벌한다. 즉 사랑, 인간,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행위와 모든 성향은 신앙과 일치한다. 기독교의 종교 역사의 모든 공포(이것에 대해 우리의 신앙 깊은 사람들은 그것은 기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신앙이나 기독교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교 역사상의 사랑에 모순되는 행위가 기독교와 일치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의학적 기독교의 반대자들이 기독교도들이 행한 전율할 행위의 책임을 기독교에 돌리는 것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는 동시에 기독교에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단지 신앙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종교이기도 하며,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신앙을 의무지울 뿐만아니라 사랑에도 의무 지우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행위, 이단자들을 증오하는 행위는 기독교와 일치하고 그리고 동시에 모순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기독교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재가하는 동시에 사랑없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도 재가한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사랑을 율법으로 만들었다면 기독교의 귀의자들이 옳을 것이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종교 역사상의 전율할 만한 행위를 기독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신앙을 율법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면 그 때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비난은 무조건적으로 구속없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자유하게 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만큼 높은 곳에 올려 놓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런 자유가 없었으며 또 가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을 신앙의 지배 아래 예속시킨다.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공개적인 교의에 지나지 않으며 신앙은 비의적秘義的 교의이다. 사랑은 단지 기도교의 도덕일 뿐이지만 신앙은 기독교의 종교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그것이 기독교적이며, 자체를 기독교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이미 하나의 특수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은 사랑이 본질 안에 가로놓여 있다. 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적 성질을 방기하지 않는 한, 즉 사랑을 솔직히 최상의 율법으로 만들지 않는 한 기독교적 사랑은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처 입히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기독교와 소위 이교와의 사이의 구별을 폐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적 성질을 방기하고 솔직히 최상의 율법으로 만들지 않는 한, 기독교적 사랑은 특수성을 위해 사랑의 본질과는 모순에 빠지는 사랑이며 그러므로 옛부터 바르게 풍자의 대상이 된 이상한 사랑이며, 사랑이 없는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 자체에 만족하고 있다. 진실한 사랑은 어떤 특수한 호칭도 특수한 권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예지와 자연과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즉 사랑은 종속의 통일성이 신성을 매개로 하여 실현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사랑이 어떤 인격의 이름에 근거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단지 미신적 표상(그것이 종교적 종류의 것이든, 사변적 종류의 것이든 상관 없다)이 이 인격과 결합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미신이란 언제나 종파 근성과 분립주의가 결합되어 있으며, 분립주의는 광신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사랑은 단지 종속의 통일성이나 예지의 통일성이나 인류의 본성에 기초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 근본적인 사랑, 원리를 상실하지 않은 사랑, 보증된 사랑, 자유한 사랑인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사랑은 근원, 그리스도의 사랑 조차도 유래한 근원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출된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의 전권에 의해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본질에 의하여 사랑하였던 것 이다. 만일 사랑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되어 있다면 그 사랑은 오직 이 인격의 승인이 달하는 그만큼의 하나의 특수한 사랑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 자체의 토대를 근거로 하지 않은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인가? 그와 같이 사랑은 꾸며진 사랑이며 모방된 사랑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에만 우리는 진실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사랑의 원인일까? 혹은 오히려 그리스도는 사랑의 사도가 아닌가?  인간성의 통일성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근거가 아닌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사랑은 환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나는 종속의 본질을 초월해 나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사랑은 환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나는 종속의 본질을 초월해 나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인류보다도 더 높은 것을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을 다만 사랑으로부터 봉토로 얻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미신적인 표상 속에서 인정된 것과 같은 사랑의 소유주는 아니었다. 사랑의 개념은 독립한 개념이며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승인하는 것은 그 생애가 사랑의 법칙이나 개념과 일치한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 발견할 때에만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사랑의 관념이 결코 단지 기독교와 함께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식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의 관념이 결코 기독교적인 관념만이 아니라는 것에 의해서 증명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전율이 이 관념의 출현과 평행한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인류를 인류의 개념과 모순되는 방법으로 결합한 정치의 왕국은 스스로 와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적 통일은 잔인한 통일이다. 로마의 전제주의는 내부로 향해 제국 자체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정치의 이런 비참에 의해 마음을 짓누르는 정치의 올가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로마 대신에 인류의 개념이 나타나서 그것과 함께 지배의 개념 대신에 사랑의 개념이 나타났다. 유대인 조차도 희랍적 교양의 인도적 원리 속에서 그들의 증오해야 할 종교적 종파 근성을 완화시켰다.

필로Philo는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찬미한다. 국민적 차이가 해소되었다는 것이 인류 자체의 개념 안에 가로놓여 있었다. 사유하는 정신은 벌써 일찌기 인간의 시민적-정치적 분리를 초극하였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실이 인간을 노예로부터 구별하여, 노예를 인간으로서 주인과 동격으로 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주인과 노예 사이의 교우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는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노예인 에픽테트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황제 안토니우스도 역시 스토아 학도였다. 그와 같이 철학이 인간들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스토아 학도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즉 사랑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가르쳤다(각주7 ; 소요학파 사람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만인에게 대한 사랑도 역시, 특수한 종교적인 원리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자연적인 즉 일반적-이성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언표는, 황제 안토니우스의 말인데 적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가장 명성 높게 알려진 말보다도 더 무한하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토아 학도들의 실천적 원리는 그런 하나의 사랑의 원리이다. 세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의 도시이며 인간들은 동포, 시민이다. 특히 세네카는 가장 숭고한 말 가운데서 사랑, 인자, 인도(특히 노예에 대한)를 찬미하고 있다. 그와 같이 정치적 엄숙주의와 애국적 편협성과 국한성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들 인도적 노력의 하나의 특수한 현상이었다. 즉 기독교는 이 새로운 원리의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따라서 종교적인, 확실히 무엇보다 강한 현상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교양이라는 방법으로 가치를 주장한 것이, 여기에서는 종교적 심성이나 신앙의 일로서 언표된다. 기독교 자체는 그 때문에 또다시 일반적인 통일을 특수한 통일로 만들었고 사랑을 신앙의 부대적 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이런 일에 의해서 사랑을 일반적인 사랑과의 모순에로 떨어지게 하였다. 통일은 그 근원에까지 환원되지 않는다. 민족적 차이들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제 신앙의 상위,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의 대립이 민족적 대립보다도 더 심하게 그리고 더 한층 무겁게 역사를 등장하였다.

특수한 현상에 기초된 사랑은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사랑의 본질에 모순한다. 사랑은 어떤 제한에도 견뎌 내지 않고 모든 특수성을 초극한다. 우리는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목적이라는 것에 의해, 그리고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가진 본질이라는 것에 의해 사랑의 대상이다. 이것은 종속의 법칙이며 예지의 법칙이다. 사랑은 직접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아니 사랑은 다만 직접적인 것으로서만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바로 사랑 안에서 종속을 현실화하는 나와의 사이에서 이미 자기 안에 종속을 현실화하게 되어 있는 어떤 개성의 표현을 삽입한다면, 나는 사랑의 본질을 폐기하고 우리 이외의 어떤 제 3자의 표상을 통해서 통일을 교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나에게 사랑의 대상인 경우에 그가 그 원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사성 혹은 관계 때문이며 그 자신을 위한, 즉 그의 본질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의 인격성의 경우에는 인격성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독립하여 그 인격성으로 하여금 사랑할 만한 그리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질에 상관없이 의식과 심성 안에 확립되는 것이다.

마치 이성이 종속의 객관적 실존인 것과 같이 사랑은 종속의 주관적 실존이다. 사랑과 이성에 있어서 중간 인격의 필요는 소멸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종속의 통일성이 민중 의식에 파고들어 모습을 나타낸 하나의 형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을 사랑하였다. 그리스도는 성이나 연령, 신분이나 민족성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고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논한 종교의 본성에 따라서 하나의 형상으로 보여진 것, 혹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구현된 것이다. 이 인격은 그러나 종교적 대상으로서 이해되면 단지 하나의 현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단지 하나의 이상적인 인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귀의자들의 징표로서 사랑이 언표된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종속의 통일성이 성향에 의하여 확증되고 현실화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종속은 어떤 단순한 사상思想이 아니다. 종속은 사랑의 감정이나 심성이나 정력 안에 실존한다.

나에게 사랑을 불어 넣는 것이 종속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은 종속의 심장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랑의 의식으로서 종속의 의식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동일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통일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하는 자, 자신을 종속의 사랑과 종속의 본질에 상응하는 보편적인 사랑에로 고양시키는 자는 기독교도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다(각주8 ; 행위하는 사랑은 당연히 언제나 특수한 제한된 사랑, 즉 가장 가까운 것에 향해지는 사랑이며 또한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본성적으로 보편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인간을, 인간을 위해 사랑하며 종속의 이름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적 사랑은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본성적으로 배타적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하며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이도록 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종속으로서의 종속의 의식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는 소멸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리스도의 참된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종속의 의식의 대표자이며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9.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결론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html



Saturday, January 12,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

하늘의 삶 혹은 인격의 불멸(나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지 않는다)은 기독교의 특징적인 하나의 교의이다. 확실히 인격의 불멸은 얼마간 이교적인 철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교적인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격의 불멸은 단지 환상의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격의 불멸은 그들의 근본 견해와 견관되어 있기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이 대상에 관해서 얼마나 모순투성이의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인격의 불멸은 기독교도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즉 그들은 인경의 불멸이 필연성을 가진 자명한 진리로서 명백하게 귀결된 원리를 찾아 냈던 것이다. 세계, 자연, 종속Gattung의 직관이 고대인들의 계획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생활원리와 살아 있는 주관과의 사이에 구별을 짓고, 혼이나 정신과 자기 자신 사이에 구별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종의 전체성에 소속하고 있을 뿐인 것을 직접으로 자기 자신 속에 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과 개성과의 직접적 통일성은 바로 기독교의 최고의 원리인 신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개인은 절대적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의 필연적 귀결은 바로 인격의 불멸이다. 

혹은, 오히려 인격의 불멸에 대한 신앙은 인격 신에 대한 신앙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신이 대상인 것처럼 신은 인격의, 하늘의, 불멸하는 삶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격의 불멸에 대한 신앙은 구속되지 않은 절대적 인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속되지 않은 인격성은 신이다. 그러나 하늘의 불멸하는 인격성이란 그 자신 모든 지상적인 무거운 짐과 제한을 모면한 구속되지 않은 인격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구별은 다만 신이 정신적인 하늘이며, 하늘은 감성적인 신이라고 하는 것, 신 안에서 사유되는 것은 하늘에 있어서는 공상의 객체로서 조정된다는 것 안에 있을 뿐이다. 신이란 오직 전개되지 않은 하늘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인 하늘은 전개된 신이다. 현재는 신이 하늘나라이며, 장래에 있어선 하늘이 신이다. 신은 미래의 보증이며 미래의 현재성과 실존이다. 그러나 미래의 현재성과 실존이란 아직 추상적이다. 신은 또한 예상된 개요적인 하늘이다. 우리 자신의 미래의 본질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로 부터, 현재 이 세계 안에 이 육체 안에 존재하는 우리로부터 구별되어 단지 이상적으로 대상적인 본질이 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저 세계에서 자기를 현실화하고 개별화하게 될 종속 개념이다. 

신은 저 세계에서 하늘나라의 순수한 존재자로서 실존하게 될 하늘나라의 순수하며 자유한 본질성이며 저 세계에서 축복되는 많은 개인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축복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인, 축복된, 하늘나라의 순수하며 자유한 본질성이며 저 세계에서 축복되는 많은 개인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축복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인, 축복된, 하늘나라의 생활의 개념 혹은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여기 신에게 있어선 그 자신 아직 하나의 이상적인 인격성에로 총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축복된 삶이 신과의 합일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 충분히 명백하게 언표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신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지만 저 세계에서는 장벽이 무너진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들이며 저 세계에서는 신들이다. 이 세계에서 신성은 독점물이나, 저 세계에서는 공유 재산이다. 이 세계에는 추상적인 단일성이 있고 저 세계에는 구체적인 다수성이 있다(각주1; "우리가 신과 동등할 때, 즉 신 자신이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성서는 이미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의 아들이 되는 힘이 부여된 사람들에게는 신이 되는 힘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존재하는 그대로의 신이 되는 힘도 역시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독신 생활에 관해서」. "선한 의지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러나 영생은 신 자신이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은 신성 자체이다" -Boethius. "행복은 신과 동일한 것이다" -Thomas Aq. Summa Cont. Gentiles. "다른 인간은 성직 생활에로 경신될 것이다. 그는 생활에서, 정의에서, 영광에 있어서, 지혜에 있어서 신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 -Luther)

이 대상의 인식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상상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뿐이다. 상상은 한 편에 있어서는 신의 인격성과 독립성과의 표상을 통하여, 다른 편에서는 많은 인격성이라고 하는 표상을 통하여 개념의 통일성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상상은 동시에 보통 많은 인격성을 감성적인 색채를 가지고 채색된 나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신으로 생각되는 절대적인 삶과, 하늘로 생각되는 절대적인 삶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단지 신 안에 한 점으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 하늘에서는 길이와 넓이로 연장된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불사에 대한 신앙은 순수하고 모든 제한에서 구추로딘, 따라서 바로 그 때문에 불사인 인격성에 대한 신앙이다. 불멸인 영혼과 신 사이에 만든 구별은 단지 궤변적인 구별에 불과하든가 혹은 상상적인 구별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신과 하늘나라의 본질 사이에 구별을 확정하기 위하여 하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또 다시 여러 제한을 정하고 그 행동의 여러 단계를 설치하여 그것을 분류할 때 신과 불멸인 영혼과의 구별은 궤변적 혹은 상상적인 것이다. 

신적인 인격성과 하늘나라의 인격성과의 통일성은 불사에 관한 통속적인 증명 속에서조차도 나타나 있다. 만일 이 세계의 삶과는 다른 더 좋은 삶이 하나도 없다면 신은 정의도, 선도 아니다. 그와 같이 신의 정의와 자비는 개인의 영속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가 없으면 신은 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이나 신의 실존은 개인의 실존에 의존하게 된다. 만일 내가 불사가 아니라면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불사를 부정하는 자는 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신이 확실한 만큼 그 만큼 나의 행복은 확실하다. 신은 나에게 있어서 바로 나의 행복의 확실성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관심은 내가 존재한다-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는 관심과 동일하다. 

신은 나의 숨은 실존이며 나의 확실한 실존이다. 신은 모든 주관의 주관성이며 모든 인격의 인격성이다. 그러므로 인격성에 귀속하는 것이 모든 인격들에 귀속하지 않는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법한 일인가? 신 안에서 나는 바로 나의 미래형을 현재형으로, 혹은 오히려 동사형을 명사형으로 만든다. 어떻게 한 쪽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신은 나의 소망과 감정에 상응하는 실존이다. 신은 정의의 사람이며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자비 깊은 사람이다. 자연이나 이 세계는 나의 소망과 감정에 모순하는 실존이다. 여기에서 사물은 있어야 하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세계는 소멸한다. 그러나 신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있는 존재이다. 신이 나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하는 것은 단지 신이 나의 소망의 실현자-즉 소망이 현실화하여 성취되는 형태-라고 하는 명제의 통속적인 인격화에 지나지 않는다(각주2; "만일 썩지 않은 실체가 우리에게 선이라고 한다면 신이 그와 같은 실체를 우리에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의심하려 하는 것일까?" - Augustinus) 

그러나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소망이나 동경에 상응하는 존재이다(각주3; 천국적인 실체란 정신적인 육체를 이름한다. 왜냐하면 천국적인 실체는 정신의 의지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너희에게 모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너희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너희에게 반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존재하고자 하는 동일한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 Augustinus. "그곳에는 더러운 것, 적의 있는 것, 불화한 것, 모양이 흉한 것,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Augustinus. "다만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생활한다" -Ders.) 따라서 신과 하늘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영원한 행복을 실현시키는 힘이다. 신은 모든 개개의 인격들의 행복과 불사가적 확실성을 가진 절대적 인격성이다. 신이란 인간 본질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한 최고이며, 궁극적인 확실성이다. 

불사의 교의는 종교의 결론이며 종교의 최후적인 의지가 표현되어 있는 유언장이다. 그 때문에 종교는 다른 곳에서 침묵하는 것을 여기서는 언표한다. 다른 곳에서는 어떤 다른 본질의 실존이 문제라고 하면 여기서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실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 신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이 신의 실존을 인간 자신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 신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이 신의 실존을 인간 자신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인간에게 제 1차적 직접의 진리인 것은 여기서는 그에게 파생적인 제 2차적 진리인 것이다. 내가 만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신은 신이 아니며, 만일 어떤 불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지 않으며 만사는 무가 되는 것이다. 먹고 마시자! 우리는 확실히 이러한 추론 형식을 피하는 것에 의하여 통속적인 증명 속에 가로놓여 있는 외견적인 불쾌나 현실적인 불쾌를 제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추론 형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사를 분석적 진리로 만드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신의 개념은 바로 절대적 인격성 혹은 주관성의 개념으로서 스스로 이미 불멸성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신은 나의 미래의 실존의 보증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미 나의 현재의 실존의 확실성이고 진리성이며, 나의 구원이고, 나의 위안이며, 외계의 힘에 대한 보호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사를 일부러 귀결로서 끌어 낼 필요가 전혀 없으며 또 고립된 진리로서 명시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신을 가지고 있다면 나를 불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원한 기독교적 신비가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그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사의 개념은 신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그들의 불사의 삶이 었다. 그들에게 신 자신은 주관적인 행복이었다. 그러므로 그들-그들의 의식-에 있어 신의 존재는 신 자신에 있어서의 존재, 즉 종교의 본질에 있어서의 신의 존재였다. 

이와 같이 하여 신은 하늘이며 신과 하늘은 동일물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역逆의 증명, 즉 하늘은 인간 본래의 신이다라는 증명이 더 용이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하늘을 생각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신을 생각한다. 인간의 하늘의 내용 규정성은 인간의 신의 내용 규정성이다. 인간은 자기의 하늘을 생가가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신을 생각한다. 인간의 하늘의 내용 규정성은 인간의 신의 내용 규정성이다. 구별은 다만 신에 있어서는 기획이나 초안에 불과한 것이 하늘에 있어서는 감상적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는 것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비밀을 여는 열쇠이다. 마치 하늘이 객관적으로는 신성의 본질이 해명된 것인 것처럼, 주관적으로는 종교의 가장 내적인 사상과 심성이 가장 솔직하게 언표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들은 모든 하늘나라들이 다른 것과 같이 다양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구별이 있는 것처럼 상이한 하늘 나라들이 존재한다. 기독교도들 자신도 역시 하늘을 다종 다양하게 생각한다(각주4; 그리고 기독교는 꼭 같이 그들의 신도 다종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건한 기독교적 독일인다운 사람들은 "독일적 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건한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적 신"을 가지며, 불란서 사름들은 "불란서 신"을 가지고 있다. 불란서 사람들은 실제로 선한 신은 불란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민족이 있는 한 또한 다신교가 실존한다. 어떤 민족의 실제의 신은 그 민족의 국민성이 명예로 하고 있는 덤이다)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인간적 개체에 있어서 그것이 감정에 있어서든 혹은 사유에 있어서든 상관 없이 제한이나 악으로서 현상되는 것으로 부터 순화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피안이란 제한이나 악으로 현상된 것으로부터 해방된 차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개체가 제한으로서의 제한, 악으로서의 악을 명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의식하면 할 수록 제한이 없어진 피안의 삶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만큼 더 명확하고 분명하다. 피안이란 이 세계에서 개체의 자기 감정과 실존을 침해하고 있는 제한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감정이며 표상이다. 종교의 진행이 자연적인 혹은 이성적인 인간의 진행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만 그러하다. 즉 자연적인 혹은 이성적인 인간이 최단선으로서의 직선에 있어서 이루는 진행을 종교는 곡선, 실은 원주의 선에 있어서 그린다는 것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인간은 자기의 고향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 곳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며 그는 이 곳에서 완전하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만족, 불화에서 시작하는 종교는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먼 곳에서 고향의 행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출발한 같은 점에 언제나 복귀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또 다시, 그리고 더우기 이번에는 영광스런 형태로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또한 이 세계의 삶을 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결국은 차안을 피안으로서 또다시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각주5; 그러므로 저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한 개의 이 혹은 하나의 손톱조차도 잃어져 가서는 안 된다 -Aurelius Prud. 그리고 너희 눈 속에 조야한, 육적인 그리고 그 때문에 너희에 의해서 부인된 신앙은 그것만이 모순이 없는 신안, 그것만이 성실한 신앙, 그것만이 진실한 신앙이다. 인격의 동일성에는 육체의 동일성이 필요하다). 잃어버리기로 하였으나 그러나 또다시 발견된, 그리고 재발견의 환희 속에서 더욱더 밝게 빛나고 있는 차안이 바로 피안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이 세계의 기쁨을 방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대신에 하늘의 기쁨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오히려 종교적인 인간이 이 세계의 기쁨을 방기하는 것은 이미 적어도 정신적으로 하늘의 기쁨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의 기쁨은 이 세계에 있어서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다만 하늘의 기쁨은 이 세계의 삶의 제한과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이와 같이 자연적인 인간이 직선적으로 서둘러 향해가는 목표(기쁨의 목표)에, 우회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도달하는 것이다. 상징속에 있는 본질이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는 사상事象을, 상징을 위해 희생으로 한다. 피안은 상상의 거울에 비치는 차안이다. 피안은 사람을 매료하는 상징이며, 종교의 의미에 있어서 차안의 원상 das Urbild 이다. 이 세계의 실제 생활은 단지 저 세계의 정신적-상징적인 생활의 가상이며 미광微光에 지나지 않는다. 피안은 상징 속에서 직관되어 모든 조야한 물질로부터 정화되고 미화된 차안이다.

미화나 개량은 결점이나 불쾌를 전제한다. 그러나 불쾌는 단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상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그 사상이 존재하는 그대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나는 단지 성상을 거부할 뿐 본질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사상을 전멸하려 할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을 헐어 버리기는 하지만 미화하지는 않는다. 피안에 대한 신앙은 현세를 방기하지만, 그러나 현세의 본질을 방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그대로의 현세계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피안을 믿는 사람에게도 기쁨은 마음에 드는 것이다. 누가 기쁨을 어떤 진실한 것이나 본질적인 것으로서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현세에선 기쁨 뒤에 반대의 감정이 따른다는 것, 기쁨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이미 기쁨을 신 안에 조정하는 것처럼 기쁨을 피안에-그러나 영원하며 중단되지 않는 신적인 기쁨으로-조정한다. 피안은 이 때문에 기쁨의 나라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하며 중단되지 않는 기쁨이, 하나의 존재자로서 생각되어진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안을 믿는 사람에게는 개성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다만 객관적인 충동에 의해 장애받지 않는 개성만이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성도 역시 포함시킨다. 그러나 그가 포함시킨 개성은 순수한 개성이며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개성이다. 빛은 마음에 들지만 중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력은 개인에게 제한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밤에는 인간은 자연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계에는 빛은 있으나 중력이나 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세계에는 순수한, 방해받지 않은 빛이 있는 것이다(각주6; "부활 후에 시간은 이미 낮과 밤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밤이 없는 낮이 존재할 것이다" - Damascen)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신 안에서 언제나 또다시 자기 자신에로 귀환하며,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그와 같이 인간은 차안으로부터 한껏 떨어져서 역시 또다시 결국에는 차안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신은 처음에 인간 외적으로 또한 초인간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도중 혹은 종말에 있어서는 그만큼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꼭 같이 하늘의 삶이, 처음에는 혹은 멀리서 바라볼 때에 초자연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종말에는 혹은 가까이에서 고찰되면 하늘의 삶과 자연적 생활과의 통일성이 그만큼 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최후에 육肉이나 육체에까지 퍼져가는 통일성이다. 마치 신의 직관에 있어서는 개체로부터의 본질의 분리가 중요한 것과 같이 우선은 육체로부터의 혼의 분리가 중요하다. 신의 직관에 있어서 개체는 정신적으로 죽으며, 잔존하는 사체가 인간적 개체이며, 사체로부터 분리된 혼은 신인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부터의 혼의 분리, 개체로부터의 본질의 분리, 인간으로부터의 신의 분리는 또다시 폐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합체하고 있는 제 본질을 분리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혼은 자신의 상실한 부분, 자기의 육체를 또다시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신, 분리된 혼이 또다시 실제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또다시 실제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또다시 인간이 되는 것과 꼭 같이 혼은 자기의 육체 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차안과 피안과의 완전한 통일이 이제야 또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실은, 이 새로운 육체는 빛으로 가득 찬 육에이며 정화된 육체이며 경탄할 만한 육체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적 본질과는 다른 본질이며 또한 인간적 본질과 같은 본질인 것과 같이 이 새로운 육체는 다른 육체이며 또하너 같은 육체인 것이다(각주7; "육체는 동일한 육체이며, 그래도 아직 동일한 육체가 아닐 것이다" -Augustinus)

그리고 이 일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모순되는 것을 통일하게 하는 기적의 개념에 도달한다. 초자연적인 실체는 공상의 실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초자연적인 실체는 인간의 심성에 상응하는 실체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실체는 인간을 괴롭히지 않은 실체이며 순수하게 주관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피안에 대한 신앙은 공상의 진리성에 대한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신에 대한 신앙이 인간의 심성의 진리성과 무한성에 대한 신앙인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신에 대한 신앙이 단지 인간의 추상적인 본질에 대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이 피안에 대한 신앙은 단지 추상적인 차안에 대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피안의 내용은 인격성의 행복, 즉 영원의 행복이다. 인격성은 현세에서는 자연에 의해 제한되고 침해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안에 대한 신앙은 자연의 제한으로부터 주관성의 자유에 대한 신앙이며 따라서 인격성과 무한성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격성의 영원성과 무한성이란 언제나 새로운 개체 안에서 자기를 전개하는 종속 개념안에서의 인격성의 영원성과 무한성이 아니라 이들의 이미 실존하고 있는 개체 그 자체의 영원성과 무한성이다. 따라서 피안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대한 신앙은 신에 대한 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신앙과 신에 대한 신앙속에는 동일한 내용이 있다. 신은 자연의 모든 제한을 모면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인격성이다. 신은 철두철미 인간적인 개체가 존재해야 하며 또 존재하게 될 것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한성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다. 신적 본질은 인간적 본질, 그리고 더우기 자기의 절대적 자유와 비제한성안에 있는 주관적-인간적 본질이다.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과제는 이미 마치게 된다. 우리는 신의 세계외적-초자연적-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하였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 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 있어서 재차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초이며, 종교의 중간점이며, 종교의 종점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8.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0 장 신앙과 사랑의 모순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10.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

신은 우리의 소망과 심성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사람이다. 신은 그 자신 심정의 소망이 실현 되는 것이며, 소망의 성취나 타당성의 확실성에까지 고양된 것이다. 이 확실성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며 이 확실성 앞에서는 오성의 어떤 항변이나 경험, 외계의 어떤 이론도 무력하다. 확실성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힘이다. 인간에게 있어 확실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언표는 기독교의 최고의 언표이긴 하지만 이 언표는 단지 인간적 심성의 자기확실성의 표현이며 유일하게 정당한 힘, 즉 신적인 힘으로서 인간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확실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사랑이다"라는 언표는 또한 인간의 심정의 내적 소망이 무조건적 타당성과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며, 인간의 심정에는 어떤 제한도 어떤 대립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다. 

모든 장엄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는 전세계도 인간적인 심정에 대해서는 무라고 하는 확실성의 표현이다(각주1 ; "선량하고 정직한 인간이 신의 자애로 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믿는 사람은, 인간적 본질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재화, 어떤 눈도 볼 수 없고, 어떤 귀도 들을 수 없으며 어떤 인간적 오성도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한한 자애와 무한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본질이 인간의 문제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또한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만 악덕에 굴복한다든가 신을 모독하는 생활만 하지 않는다면 전혀 아무것도 이 희망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으며 혹은 동요시킬 수조차 없는 것이다" - Cudworth) 신은 사랑이다-즉 이것은 심성이 인간의 신이라는 것,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신이며 절대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신은 심성의 본질이 대상적으로 된 것이며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심성이다. 신은 인간의 심정의 기원법이 특정한 때, 즉 확실한 축복된 현재성에로 진화한 것이며, 감정의 전능이 무분별하게 나타난 것이며, 들릴 수 있는 기도이며, 귀에 들리는 심성이며, 우리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의 반향이다. 고통은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음향에 맡겨 토로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악기를 손에 든다. 예술가는 자기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것을 대상화한 것을 통하여 그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심정에 깃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허공으로 전달하며 자기의 고통을 일반적으로 본질로 만드는 것에서 그 짐을 가볍게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탄식을 들어 주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무정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즉 눈에 보이는 대상 일반으로 부터 눈을 돌린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무정한 힘으로부터 남모르게 숨어서 자기의 고뇌를 들어 주기 바란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무거운 비밀을 말하고 자기의 억압된 심정을 털어 놓는다. 심정의 자유한 공기, 이 언표된 비밀, 이 소외된 정신적 고통-이것이 신이다. 신이란 인간의 불행에 대해, 마음 깊이 숨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다. "신이란 영혼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탄식이다"(각주2; Sebastian Frank von Woerd in Zinkgrefs Apophthegmata deutscher Nation). 이 언표는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표현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장 심각한, 가장 진실한 언표이다.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은 종교의 가장 단순한 행위-기도-에 의하여 계시된다. 기도는 성육신의 교의가 말하고 있는 것보다 무한하게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이다. 혹은 적어도 성육신의 교의가 말하고 있는 같은 정도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이다. 단 종교적 사변은 성육신이라는 교의를 최대의 비밀로서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기도는 식전, 식후의 기도나 이기주의의 기도가 아니라, 고통으로 꽉 찬 기도, 위안할 길 없는 사랑의 기도, 절망으로 시작하여 환희로 끝나는 기도이다. 

기도할 때 인간은 당신이라는 말로 신에게 말을 건다. 이리하여 인간은 소리높이 그리고 명료하게 신을 인간의 타아로 선언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본질(존재)로서의 신에게, 다른 경우에는 듣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기의 가장 은밀한 생각이나 가장 깊은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신뢰하며 확신하고 언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탄식에 대해 조금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본질(존재)에 의뢰할 수 잇을 것인가?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의 실현을 신뢰하고 표현된 심혼의 소망이외의 무엇이겠는가?(각주3 ; 신은 다만 신의 이름에 있어서 혹은 기독교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생기는 소망이나 청원을 이루게 해준다고 말하는 것, 간단히 말하면 신은 다만 신의 의지와 일치하는 소망을 충족시켜 줄 뿐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무력한 항의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는 바로 인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혹은 오히려 신은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으 행복하게 되려고 욕망한다. 개개의 이런 혹은 저런 소망은 분명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속-본질적인 경향-만 인정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청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믿음이 깊은 사람은 그 청함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하지 못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고 자위하는 것이다-Soz. B. Oration de precatione in Declamat Melanchthonis). 

이들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일을 들어 주고, 자기 자신에게 동의하여 이의도 항변도 없이 자기를 긍정하는 인간적 심성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세계라고 하는 표상을 망각하고 있지 않는 인간, 즉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단지 매개되어 있고, 여러 가지 결과는 자기의 자연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소망은 그것이 목적이 되고, 그리고 상응하는 수단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는 표상을 망각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러한 인간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오직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인간은 실현 가능한 소망을 실제의 활동의 목적에로 전화하여, 자기가 주관적으로 인정하는 다른 소망을 억압하든가 혹은 단지 주관적인 경건한 소망으로서 고찰하든가 할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세계-그는 자신을 세계의 성원이라고 생각한다-에 의하여 제한하고, 제약하여 자기의 소망을 필연성이라는 표상에 의하여 제한 및 제약한다. 

이것에 반하여 기도할 때에 인간은 그의 심성에서 세계와, 이것과 함께 매개의 사상, 의존성의 사상, 슬퍼해야 할 필연성의 사상을 배제시킨다. 그는 여기에서 자기의 소망이나 심정의 문제들을 독립적인, 전능한, 절대적 본질의 대상으로 만든다. 즉 그것들을 무제한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적 심정을 긍정하는 말이다. 기도는 인간적 심성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과의 절대적인 동일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기도란, 또한 심정의 힘은 자연의 위력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하는 확실성이며, 심정의 욕구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성이며 세계의 운명이라고 하는 확실성이다. 기도는 자연의 운행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신이 자연의 법칙과 모순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규정한다. 

기도란 인간의 심정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이다. 기도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소망에는 제한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망각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기도는 인간의 두 개의 본질에로의 분할이다-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심정과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를 소리높이, 명료하게, 힘있게 언표하는 것은 기도의 결과를 야기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불가피하게 입술 위로 흘러나온다. 심장의 압박은 입의 장벽을 폭파한다. 그러나 소리높은 기도는 단지 자기의 본질을 계시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실제로 언표되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도는 본질적인 이야기Rede이다. 

라티어의 이야기Oratio는 양자(기도와 이야기)를 의미한다. 인간은 기도에 있어서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자신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하여 숨김없이 언표한다. 인간은 자신의 심정을 대상화 한다. 여기에서 기도의 도덕적인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집중은 기도의 조건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정신 집중은 조건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그 자체가 정신 잡중이다. 즉 기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며, 외부로부터 방해하는 모든 영향을 배제하는 것이며, 단지 자기 자신의 본질과 관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내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만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마음으로부터의, 친밀한 기도만이 구원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원은 기도 자체 안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도처에 주관적인 것, 인간적인 것, 종속적인 것이 제 1 의 것, 제 1 원인, 사상事象 그 자체인 것과 같이 여기서도 이 주관적인 특성들은 기도 자체의 객관적 본질이다(각주4; 주체적 근거에서도 역시 협동적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보다 더 효과적이다. 협동은 심성의 힘을 고양시키며 자기 감정을 높인다. 사삼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면 가능하다. 고립감은 제한되어 있는 감정이다. 협동감은 자유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폭력에 위협당하면 함께 무리를 이룬다. 암브로시우스가 말한 것과 같이, 수가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수의 인간에 베풀어지는 것도 개인에게는 거부된다" -Paul. Mezger)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7.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9 장 하늘 혹은 인격의 기독교적 불멸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9.html


2013/01/11 종로의 밤 풍경들...

 이某, 권某 군과 함께 오랜만에 종로 거리에서... 
 
나까마들이 모이기 전에 종각에서 기다리며
바라다본 종각의 모습.
 
 저기 건너편 제일은행 빌딩과 옛 국세청 빌딩(삼성생명건물?)
 십 여년전, 2000년대 초반에 저기 SC제일은행 본점 빌딩에
근무하던 회사의 사무실이 있어서 약 3~4년간 근무했다.
(지방 프로젝트가 많아 지방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아
실제 근무일수로 보면 채 일년도 안될 것 같은데...)

종각옆쪽의 먹자 골목 풍경들...

아래 양꼬치집이 오늘 일차 술자리...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7 장 삼위 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이 없는 신이,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이 감정만 있고 오성이나 의지가 없는 존재도 역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다만 전인全人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존재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 일체의 의식이다. 삼위 일체는 지금까지 분리해서 고찰된 모든 규정 혹은 힘을 총괄하여 통일체를 이룬다. 이와 같이 하여 삼위 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이나 하나의 특수한 능력에로 저하시킨다.

우리는 다만 신학에 의하여 삼위 일체의 복제, 초상, 비유로서 특색짓고 있는 것, 즉 사물 그 자체를 본질, 원형, 원물로서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삼위 일체를 구상화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시도에서 사용한 명목상의 상들은 주로 정신, 오성, 기억, 의지, 사랑이었다(각주1 ; Meus, intellectus, memoria, voluntas, amor 또는 caritas)

신은 사유하고, 신은 사랑한다. 그리고 더우기 그는 자신을 사유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안에서 만나게 되는 최초의 것이다. 자기의식은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어떤 절대자로서 인간에게 육박해 온다.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는 자기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으며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전적인 존재이다.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존재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자기의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실제로 자기 자신에 있어서 절대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신, 의식을 갖지 않은 신은 신이 아니다. 마치 인간이 의식이 없으면 자기를 사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역시 그러하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혹은 신적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코 삼위일체가 이것에 의하여 철저하게 해석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의 비밀을 전적으로 위와 같이 환원하고 제한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전혀 자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될 것이다. 추상적인 본질 혹은 규정 안에서의 의식, 오성, 의지, 사랑은 다만 추상적인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자기가 살아 있는 전체성에 있어서 자기의식의 통일성은 단지 나와 너의 통일성, 관계가 풍부하며 충실된 통일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세계를 등한시한다. 내면성이 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현세로부터 괴리된 생활, 신의 안에 숨는 생활, 조용한 생활, 현세의 기쁨이 비어 있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이 자신을 현세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신 자신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본질, 세계 외적으로 초세계적인 본질 즉 엄밀하게 추상적으로,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세계의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외적인 본질로서의 신은 인간의 본질이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고, 세계와의 모든 유대와 얽힘으로부터 해방되고, 세계를 무시하고 대상적 본질로서 실현되어 직관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자기 이외의 모든 다른 것을 버리고 다만 자기만이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의 의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힘은 종교의 내부에 있어서 즉 인간으로부터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각주2 ; "신의 본질은 마치 신이 영원 이래 자기 자신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의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로부터 당신의 사랑을 빼버리라"-John Gerhard. "네가 만일 피조물의 창조주를 얻고자 한다면, 너는 모든 피조물 없이 지내야만 한다. 피조물 없이 지내는 일이 적으면 적을 수록 신없이 지내는 일이 그 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이 부여한 모든 위안과 함께 버리라" - J. Tauler. "만일 인간이, 단지 신과 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자기 마음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 조금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G. Arnold)

신 그 자체, 단순한 본질로서의 신은 전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본질-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왜냐하면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만이 고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격과 사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표시이다. 고독은 사상가의 욕구이며 협동은 심정의 욕구이다. 우리는 혼자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땐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의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와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옥직 고독한 사유 작용에 있어서만 독립적인 것이다. 고독은 자족이며, 자기만족이다.

그러나 고독한 신으로부터는 이원성, 사랑, 협동성, 현실적으로 충실된 자기의식, 다른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가 배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욕구는 종교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서 만족되는 것이다. 즉 신적 본질의 고요한 고독 속에 다른, 제 2의-인격적으로는 신과 구별되어 잇으나 본질적으로는 신과 동일한-본질이 조정되는 것에 의하여 만족되는 것이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인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며, "너"는 사랑이다. 그러나 오성을 가진 사랑, 사랑을 가진 오성이 비로소 정신이며, 비로소 전인全人인 것이다.

다만 협동 생활만이 진정한 자기 안에 있어서의 만족된 신적인 생활이다. 이 단순한 사상, 인간에게 자연으로 생득적인 이 진리는 삼위일체의 초자연적인 신비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다. 그러나 종교는 다른 모든 진리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이 진리도 역시 다만 간접적으로 즉 전도하여 언표할 뿐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여기서도 역시 "신은 협동 생활이며, 사랑과 우정의 생활이며 본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진리도 특수적인 진리로 만들며 또 참된 주어를 술어로 만들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제 3의 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제 3 인격이란 아들과 아버지의 통일이며 협동성의 개념이 전혀 불합리하게 스스로 재차 특수한 인격적 본질로서 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신의 가족, 신과 아들과의 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하여 또한 제 3의, 그리고 더우기 여성적인 인경이 하늘에 받들여졌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격성이 이 제 3의 보완적인 본질일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나 모호하고, 너무나 불확실하고, 너무나 명백하게 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상호적인 사랑을 인격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설정된것은, 마치 아버지가 마리아를 매개로 아들을 낳은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의 교합은 어떤 신성하지 않은 것이며 죄 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적인 본질이 아버지와 아들 옆에 설정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옆으로 밀어 놓았다(각주3 ; 그러나 일치서Concordienbuch와 신앙고백서 안에서 마리아는 아직도 "진실로 신의 어머니이시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녀로 계시는 축복된 처녀"라든가 "모든 최고의 찬양을 받을 만하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밀려난 여성은 그 대신에 프로테스탄트교에 대하여 심하게 복수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서 사용한 무기는 프로테스탄트교 자체에 대해, 신의 아들에 대해, 삼위일체에 대해 되돌아왔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희생으로 바친 자는 멀지 않아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비밀도 의인설적 관념으로서 희생으로 받쳐야만 한다. 여성적 본질이 배제되면 의인설적 관념은 분명히 은폐된다. 그러나 그 때도 그것은 단지 은폐될 뿐이며 폐기되지는 않는다. 물론 프로테스탄트교는 도한 하늘의 여성에 대한 욕구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트교는 지상의 여성을 팔을 벌려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교는 어머니와 함께 아들과 아버지도 역시 방기할 정도로 철저하고 용감했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적인 신은 가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적인 신이 깊고, 열렬하고, 필연적인 진실한 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실재적인 유대들의 부정에로의 대립에 있는 것이며, 은자생활, 승려생활, 수녀생활에 대립하여 있는 것이다(각주4 ;  승려는 Melchisedech와 같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없이, 계보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리고 지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으리라. 오히려 그는 자기에 관해서 마치 다만 그 한 사람과 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리라" - Specul. Monach., "Melchisedech의 예에 따르면 목사는, 말하자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라고 암브로시우스는 어딘가에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적인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삼위 일체적인 신은 실제 생활의 내용이 버려져 있는 곳에서 요구된다. 삶이 공허하면 할 수록 신은 풍요로우며 더 구체적이 된다. 현실 세계가 공허하게 되는 것과 같이 신성이 충만한 것은 같은 작용이다. 오직 가난한 인간만이 부유한 신을 가진다. 신은 결핍이라는 심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규정되고 따라서 의식적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이 공허함이나 고독함의 위안이 없는 심성이 서로 가장 친절하게 사랑하는 본질의 사회, 협회를 포함하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왜 근세에 있어서 삼위일체가 먼저 실천적 의의를 상실했고, 최후에 이론적 의의를 상실했는가에 대한 참된 설명 근거를 갖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6.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8 장 심성의 전능 혹은 기도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com/2013/01/das-wesen-des-christentum-8.html



Thursday, January 10,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

인간화 된 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인간적인 신-즉 그리스도-의 하나의 본질 규정은 열정이다. 사랑은 고난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리스도와 직접 관계되는 모든 사상이나 감정은 고난이라는 개념 속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불행의 총체이다. 이교적인 철학자들은 활동, 특히 지성의 활동을 최고의 활동, 신적 활동으로 찬미하였다. 기독교도들은 고난을 신성화하고 그것을 신의 안에서 조차 조정하였다. 만일 순수활동으로서의 신이 추상적인 철학의 신이라면, 기독교도들의 신인 그리스도는 그에 반하여 순수 열정이며 순수한 고난이다. 즉 심정의 최고의 형이상학적 사상, 심정의 지고 존재이다. 도대체 심정에 대하여 고뇌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뇌란 본래 그 자신은 고뇌를 갖지 않은 사람의 고뇌이며, 모든 고뇌를 초월해 있는 사람의 고뇌이며, 죄없는 사람이나 죄로 더렵혀지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고뇌이며, 자기희생의 고뇌이다. 그러나 열정의 역사는 인간의 심정 혹은 일반적으로 심혼에 대하여 최대의 감동을 주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심혼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심정 이외의 다른 것으로 표상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우스운 망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열정의 역사 속에는 심정의 본질 이외의 어떤 것도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또 대상화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고난의 역사는 본래 인간의 오성 혹은 시작 능력의 발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심저으이 발명이라는 것이 고난의 역사로부터 반박의 여지 없이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정은 자유로운 상상 혹은 지성과 같은 방법으로 발명되지는 않는 것이다. 심정은 수동적-수용적으로 관계한다. 심정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심정에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서 긴박한 필연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심정은 인간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일단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실은 그의 악령, 그의 신으로서의 심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심정은 그 자체, 이름은 심정과는 다른 특수한 것이기는 하지마 그러나 본질, 실체는 심정 자체의 본질인 신 이외의 어떤 다른 신도 모르고, 그것 이외의 더 높은 탁월한 존재자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심정을 통하여 선을 행하고 인간을 위해 살며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내적 갈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어떠한 인간도(가장 타락한 사람이나 가장 저열한 사람까지도) 제외하지 않는 자혜慈惠라고 하는 신적 충동을 통하여, 내적 필요 즉 심정으로 된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 자혜라고하는 도덕적 의무를 통하여, 그러므로 심저으로서 그리고 심정을 통하여 제시되는 것과 같은 인간적 본질을 통하여, 기독교의 한층 더 높고 진실한 본질 즉 신학적인 요소와 본질이나 모순으로부터 순화된 본질이 발행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앞에서 전개한 것에 의해 종교 안에서 술어인 것을 주어로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종교 안에서 주어인 것을 술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교가 부여한 신탁을 전도하여, 말하자면 역리로서 파악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은 고뇌한다. 고뇌한다는 것은 술어이다. 그러나 신을 인간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고뇌하지 않는다. 이것을 독일식으로 말하면 어떤 뜻이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뇌한다는 것은 신적이라고 하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고뇌하며 자신의 마음을 잊는 사람은 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며, 인간에 있어서 신인 것이다(각주1 ; 종교는 예를 통하여 말한다. 예는 종교의 율법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일은 율법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주는, 너희도 똑같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적게 하도록 스스로를 비우시고, 낮게 하시고, 적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Bernardus "우리는 그리스도가 보여 준 예를 열심히 주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를 감동시키며 몰아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하여 고뇌해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마음으로 부터 다른 사람들을 즐겨 돕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되는 것이다"- Luther)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도덕적, 자기행위적 고난, 사랑의 고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려는 힘을 대표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난 그 차제, 고난의 능력 일반의 표현인 한에서 고난을 대표한다. 기독교는 결코 초인간적인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신성화하는 정도이다. 이교적인 철학자는 자기 아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받았을 때 조차도 "나는 내가 가사적可死的인 것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적어도 성서의 그리스도(그러나 성서 이전의 그리스도나 성서에 없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나사로의 죽음(실은 다만 가사假死에 지나지 않았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신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만일 할 만하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Wenn es moeglich, so gehe dieser Kelch ovrueber"라고 외친다(각주2 ; 성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절에 부딪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여기에서 더 그리스도의 겸허함과 존엄함에 경탄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나의 열정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훨씬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신에게 감히 가까이 하고자 할 수 있을 것인가?" -Bernardus. 멜란히든의 친구에게 기독교도인 의사 J. Milithiu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에게 있어선 신에게 감정 혹은 감동을 귀속시킨다는 것이 우스운 일 같이 보일지라도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들의 불행에 관해서 사랑의 상처와 고통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다면 신의 안에도 신의 아들이나 우리에 대하는 유사한 사랑이 일어난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차갑지 않은, 왜곡되지 않은 사랑은 신도가 가지고 있다" - Declam, Melanchth) 그리스도는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적 감수성의 자기고백이라고 할 만하다. 기독교도는 이교적인 원리, 특히 엄격한 의지력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스토아적인 원리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감성과 감수성의 의식을 신의 의식안으로 집어 올렸다. 기독교도는 그것들이 죄 깊은 약점만 아니라면, 신의 안에서 부정되지도 않고 또 저주되지도 않는 다는 것을 알아 내는 것이다.

고난은 기독교의 최고의 계명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인류의 수난사이다. 이교도들 사이에서 감성적 쾌락의 환호가 신들에 대한 의식 속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를, 물론 고대의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혼이나 심성의 눈물과 탄식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감성적 즐거움의 소리들이 신에 대한 제의에 속하는 곳에서는 감성적인 신, 즉 삶의 신이 존경된다. 물론 감성적 즐거움의 소리는 단지 이 기쁨의 소리가 바쳐지는 신들의 본질에 관한 감성적 정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기독교도들의 탄식은 그들의 신의 가장 내면적인 심혼, 가장 내면적인 본질로 부터 나오는 음조인 것이다. 신에의 숭배(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숭배)에 있어서는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이며 궤변적인 신학의 신은 인간의 참된 신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물론 고대의 기독교도들) 눈물, 즉 참회의 눈물, 동경의 눈물에 의하여 그들의 신에게 최고의 명예를 드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눈물은 기독교적인 심정의 감성적 정점이며 그것에서는 그들의 신의 본질이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마음에 드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심정의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적 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우리를 신과 화해하게 하셨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있도록 하자. 우리는 신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괴로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신과 화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뇌의 비완료형은 구원의 완료형보다도 더 강하고 더욱 영속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다. 구원은 단지 고뇌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고뇌는 구원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고뇌는 더 깊은 심정 안에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고뇌는 모방의 대상이 되지만 구원은 모방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만일 신  자신이 나 자신을 위하여 고난받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신이 고난받은 무대인 이 타락한 지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나는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각주3 ; "나의 신은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그런데 나는 쾌락을 즐겨도 좋을 것인가?"- Form Hon. Vital. 성 Bernahard의 위서僞書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의 너의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Joh. Gerhard). 내가 신보다도 더 행복하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렇다면 나는 신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고뇌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주이신 신이 이루시는 것을 내가 본받아야할 것이 아닌가? 나는 얻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도대체 다만 신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가? 나에게 있어서 신의 고난의 역사도 역시 대상은 아닌가? 나에게 있어서 신의 고난받은 역사는 단지 차가운 상기의 대상에 불과해도 좋은 것인가? 혹은 신이 나에게 축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 고난받음은 나의 기쁨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좋다는 것인가? 그러나 누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자기의 신의 고난받음에서 자기를 제외하려고 원할 것인가?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각주4 ; "해악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다" -Luther).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제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사람, 고난받은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괴로운 시련까지도 심리학적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는 그들의 종교적 견해의 귀결인 것이다. 십자가상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을 십자가에 못박고 싶다는 욕망이 왜 생기지 않을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다른 교부들이 이교에 대하여 그와 같은 비난을 할 자격이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

신은 고뇌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신은 심정이다"라고 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근원이며 총체이다. 고뇌 없는 존재자는 심정이 없는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수난의 신이란 느끼는 신이며 다감한 신이다.(각주5 ; "신은 동정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고난 받기를 원하였으며 연민을 태우기 위하여 가련하게 되고자 하시었다." - Bernhard. "당신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육신의 약함을 경험하시었기 때문입니다" -Clemens Alex). 그러나 "신은 느끼는 본질이다"라는 명제는 단지 감정은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활동의 원천의 의식을 자기 않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뇌의 원천의 의식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느낀다. 그리고 나는 다만 너무도 빈번히 나와 나의 감정과를 대립시키는 의욕이나 사유가 나의 본질에 속할 뿐만아니라 감정도 역시 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이때 감정을 비록 모든 고뇌와 약함과 고통의 원천으로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영광스러운 신적 힘과 완전성으로서 느끼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 감정은 인간 안에 있는 음악적인 힘이다. 그러나 음악이 없는 인간은 어떤 것일까? 그러므로 인간은 멜로디나 노래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발산하려는 음악적 충동과 내적 강제를 자신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와 똑같이 필연적으로 종교적 탄식이나 눈물에서 감정의 본질을 대상적 신적 본질로서 유출시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그 자체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 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비난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를 긍정하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삶에 싫증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같이 감정을 경시하거나 억합 하지 않는 곳, 즉 감정의 존재를 기꺼이 허용하는 곳에서는 감정 안에 이미 종교적인 힘이나 의의도 역시 허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감정도 역시 이미 자기 안에로 반영되고 반성되어 신 안에 자기 자신의 거울을 들여달 볼 수 있는 단계로 높여져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게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된 것, 인간에게 참으로 만족을 주는 것, 다만 그러한 것 만이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다. 만일 당신에게 감정이 훌륭한 특성으로 생각된다면, 감정은 바로 그 때문에 당신에게 있어 신적인 특성인 것이다. 그 때문에 민감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단지 민감하고 감정이 풍부한 신만을 믿는다. 즉 그와 같은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진리를 믿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본질 속에 있는 그 자신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은 그에게 신성한 것에 관한 의식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신성한 것은 다만 인간의 가장 내부에 있는 것,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 인간의 개성의 궁극적인 근거, 본질뿐이다. 다감한 인간에게 있어서 무감한 신은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신이며, 즉 무이다. 왜냐하면, 무감각한 신에겐 인간에게 가치가 있고 신성한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의 최고의 감정이나 최고 사상의 비망록이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귀중하고 신성한 존재물의 이름을 써넣어 두는 기념첩이다.

사람이 가치 있다고 인정한 것을 수집하고 그 수집한 것을 참을성 있게 보존하여 망각의 물결이나 상기想記의 우연에(일반적으로 그 물건 자체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가정적인 안락함의 표시이며 여성적 충동이다. 자유 사상가는 낭비적이고 산만하고 방종한 생활의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 만물을 하나로 총괄하는 신앙심 있는 사람은 감상적 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편견과 승려적 자기본위, 탐욕의 위험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신앙자 혹은 적어도 불신앙자는, 적어도 신앙자에게 있어서 주관적이고 전제적이고 거만하고 경박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믿는 사람에게 신성한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신자가 단지 자기 머리 속에 보유하고 있을 뿐인 것을 신앙자는 자기 밖에, 그리고 자기 위에 대상으로서 조정하고, 그런 이유로 정식 종속관계를 자기 안에 인정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믿는 사람은 비망옥을 가지기 때문에 집합점이나 목적을 가지는 것이며 목적을 갖기 때문에 확고한 지반을 가지는 것이다.

단순히 의지나 막연한 지식이 아니라 다만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과의 통일인 목적 활동만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근거와 지주, 즉 성격을 부여하는 거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궁극 목적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 목적은 의식되고 의욕된 본질적 생활 충동이며, 천재적 눈빛이며, 자기인식의 초점이다. 즉 궁극 목적이란 인간 안에 있는 자연과 정신의 통일이다. 궁극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자기가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는 인도되는 것이다. 궁극 목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고향도 없으며 신전도 없다. 최대의 불행은 무목적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목적을 설정하는 사람조차도 아무 목적도 설정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실제로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낫게 해나간다. 목적은 제한한다. 그러나 제한은 덕의 여주인이다. 목적 그 자체에 있어서 진실하며, 본질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것에 의하여 종교를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설사 신학적 천민이 생각하는 제한된 의미에서의 종교는 아니라 하더라도, 오히려 이성 및 진리의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성의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만이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5.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7 장 삼위일체의 신과 성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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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9, 20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5 장 성육신의 비밀 혹은 심성의 본질로서의 신 ]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하여 신 혹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즉 인간은 도덕적 법칙에 있어서는 자기와 다른 존재자로서 자기에게 대립 시키는 자기본질과 사랑의 의식을 통하여 화해하는 것이다. 신의 사랑의 의식,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 인간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의 직관은 신의 성육신, 성육화 혹은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볹서잉 사실적-감성적으로 현현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은 신 자신을 위하여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가 성육신의 근거였었다. 그리고 이 욕구는 아직 오늘날도 종교적인 심성의 욕구로 되어 있다. 신은 자비심에서 인간이 되었다. 신이 현실로 인간이 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 안에서는 인간적인 신 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와 불행이 신의 마음에 울렸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신의 동정의 눈물이었다. 성육신은 그와 같이 단지 인간적으로 느끼는 존재자,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육신에 있어서 다만 인간화된 신에 멈추고 있을 뿐이라면 그 때는 물론 인간화는 놀란 만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현상한다. 그러나 인간화된 신은 단지 신화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으로 격하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 고양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1 ; "성서는 어떤 곳에서 마치 인간에 관해서와 같이 신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한 서술은 매우 사랑할 만하고 또 위안이 된다. 즉, 그곳에서 인간이 서로 흔히 이야기하는 사물에 대해 신은 친구같이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며 또 그리스도의 미래의 인간성의 비밀을 위해 마치 인간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며 고뇌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 Luther) 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즉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내기 전에 인간이 이미 신 안에 있었으며 이미 신 자신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기 않는다"라고 하는 오래된 근본 명제는 여기서도 타당하다. 자기 신하의 행복을 마음에 두지 않는 왕, 몸은 왕좌에 있어도 정신은 이미 신하의 집에 머물지 않는 그런 왕, 심성 안에 이미 국민이 말하는 것과 같이 "보통 사람"이 아닌 그런 왕, 그러한 왕은 신체적으로도 역시 인격적인 접촉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왕좌로부터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왕이 신하의 자리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신하가 왕의 자리로 올라간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만일 신하가 자기의 왕이 인격적으로 접촉해 주는 것에 의해 존경되고 행복하게 된 것과 같이 느낀다면 이 심성은 다만 가시적인 현상 그 자체에 관계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 그 심성은 오히려 심성의 현상에 관계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심성은 그 현상의 근거인 박애적인 본질이 아닌가? 그러나 종교의 진실에 있어서 근거인 것은 종교의 의식에 있어서도 귀결로 규정된다. 그와 같이 여기서는 신에의 인간의 고양은 인간의 신의 격하 혹은 하강으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신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인간화한다고 종교는 말한다(각주2 ; "신은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되었다" - Augustinus. 그러나 우리는 루터나 많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참된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곳을 발견한다. 루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세는 인간을 '신의 상, 신과 같다'고 말한 것에 의해서 그는 '신은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을 암암리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그와 같이 신의 인간화가 매우 확연하게 인간의 신성의 귀결로서 언표되어 있다)

"신은 인간이다. 혹은 인간이 된다"라는 명제 속에서 발견되는 심원한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모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 즉, 보편적이고 구속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본질의 개념 혹은 규정을 종교적인 신의 개념 혹은 규정과 혼합 혹은 혼동하는, 즉 오성의 규정을 심성의 규정과 혼합 혹은 혼동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혼동은 종교를 바르게 인식할 때에 최대의 장애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신의 인간적인 형태인 것이다. 이미 신은 본질에 있어서, 마음의 가장 깊은 근저에 있어서는 자비 깊은 즉 인간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교의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 1 인격이 성육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안에서 그리고 신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 2 인격이 성육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 2 인격은 실은, 다음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 1 인격인 것이다. 그리고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만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 개념이 없을 때에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이 매개 개념의 연관에서 고찰되면 성육은 "필연적"이라기 보다는 자명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성육은 다만 신학적인 계시에 의해서 알게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게 경험적인 혹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주장은 가장 우둔한 종교적 유물론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육은 매우 이해하기 쉬운 전제에 기초되어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육을 순수하게 사변적, 즉 형이상학적-추상적 근거에서 연역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오류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다만 성육하지 않은 제 1 인격, 어떤 희곡적 인물도 아닌 제 1 인격에 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연역이 정당화되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가 의식적으로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의 부정을 연역할때 뿐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이 예에서 밝혀진다. 인간학은 신비적 가상에 의해서 현혹된 사변과는 달리 인간화를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 고찰하지 않는다. 인간학은 오히려 인간화의 배후에서 특수한 초 자연적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환상을 파괴한다. 인간학은 이 교의를 비판하고,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생래적인 자연적 요소, 인간의 내적 근원 및 중심점으로 환원한다. 즉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의 교의를 "사랑"에로 환원한다.

이 교의는 우리에게 두 가지-신과 사랑-를 제시한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은 사랑이외의 어떤 무엇인가? 신은 사랑과 구별된 존재자인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의미는 마치 내가 인간에 대해서도 역시 "그는 사랑 그 자체이다"라고 감동하여 부르짖는 그런 의미와도 같은 것인가? 확실히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특수한 인격적 본질, 술어와 구별된 본질을 표현하는 신이라는 명사名辭를 방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같이 사랑은 어떤 특수한 어떤 것이 된다. 신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낸 것은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와 같이 배후로 밀려나서 신이라는 어두운 배후에서 멸시된다. 사랑은 비록 본질을 규정하는 특성이기는 하지만 단지 인격적인 특성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신이나 심성에 있어서, 객관적 및 주관적으로, 주어나 본질의 지위가 아니라 단지 술어의 지위를 유지할 뿐이다. 사랑은 부대 사건 또는 우연으로서 나의 눈 앞에서 사라진다. 사랑은 때로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나의 눈 앞에 나타나고, 때로는 다시 나에게서 숨어 버린다. 신은 나에게 아직 사랑 안에 있어서와는 다른 형태로서도 역시 나타난다. 즉 신은 전능이라고 하는 형태에 있어서도 역시 나타나는 것이다. 전능이란 사랑에 의해서 결박되지 않은 어두운 힘이며 또한 더 적은 정도에 있어서이기는 하지만 귀신이나 악마도 역시 참여하고 있는 힘인 것이다.

사랑이 실체, 즉 본질 그 자체에로 고양되지 않는 한에서는 사랑을 떠나서도 아직 그것 자체만은 무엇인가 주체, 사랑이 없는 괴물, 귀신적인 존재자가 사랑의 배경에 잠복하고 있다. 이것의 인격성은 사랑과 구별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사랑과 구별되어 있어 이단자들이나 불신하는 사람들의 피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열광의 환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비록 아직 종교적 의식의 밤에 결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신이 그의 신성을 소외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각주3 ; 그래서, 옛날의 무조건적인 영감이 넘치는 신앙은 성육신을 이런 의미로 찬미하였다. 예를 들면, 성 베르나르트(St. Bernard)는 "사랑은 신을 이긴다(Amor triumphat de Deo)"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신성의 현실적인 자기소외, 자기거부의 의의 속에서만 성육신의 실재성, 의의, 힘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자기부정 그 자체가 단지 공상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변화는 없다. 왜냐하면 잘 음미해 보면 신은 성육신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것, 인간적인 본질로서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에 관해서 후대의 합리주의적-정통파적인 신학이나 성서적-경건주의적-합리주의적 신학이 허구로, 옛날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환희에 취한 표상이나 표현에 반대해서 주장한 것은 주의할 만한 가지가 없다. 하물려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의 신성 그 자체에 의하면, "신은 사랑이다"라고 하는 명제에 있어서의 주어이기는 하지만 신이 자기의 신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술어인 사랑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성보다도 더 높은 힘이며 진리인 것이다. 사랑은 신을 초극한다. 사랑을 위해 신은 자신의 신적 존엄성을 희생하였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던가?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었던가? 그것은 우리가 생명이나 재산을 바치는 대상인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었던가?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던가? 신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가? 나는 신을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일 없이, 만일 신이 참으로 사랑한다면 신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신을 사랑하는 일 없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아마도 악마적인 사랑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악마도 역시 인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악마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악마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악마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 악마 자신의 위력을 확장하기 이한 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즉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선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축복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마치 성실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사랑은 일반적으로 복수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랑은 어디에서나 그 자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성육신에 관한 위조되지 않은 참된 원전은 아무 부가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과의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원전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기적인 사랑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인간적인 사랑-그리고 다만 그런 사랑만이 사랑의 이름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이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의 구제자이며 화해자인가? 그것은 신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신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인격성과 인간적인 인격성과의 구별을 초월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신이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포기한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사랑을 위하여 신을 포기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신을 사랑에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며 그리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술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열광의 나쁜 본질인 신을 가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육신으로부터 그와 같은 원전을 획득한 것에 의하여, 동시에 교의의 비진리성을 제시하고 외견적으로 초자연적-초이성적인 비밀을 인간 그 자신에게 생득인 단순한 진리에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이 진리는 다만 기독교에만 소속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발전되지 않은, 다소간 모든 종교 그 자체에 소속하는 것이다. 즉,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종교는 어느 것이나 신은 신을 존경하는 존재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은 신에게 소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신은 인간의 존경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 인간적인 신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기도는 성육신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으며 또 실제로 모든 기도가 신의 성육인 것이다. 기도에 있어서 나는 신을 인간의 비참에로 끌어들이고, 또 신으로 하여금 나의 고뇌와 욕구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신은 나의 비탄에 대해 귀를 귀울인다. 신은 나의 일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은 자신의 존엄성, 모든 휴한적인 것, 인간적인 것에 대한 초월성을 거부한다. 신은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나의 말을 들어 주고 나의 일을 측은하게 여긴다면 신은 나의 고뇌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즉 신이 인간에 관해서 고뇌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공감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공감은 공동 고뇌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감수성 없는 존재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것인가? 아니다! 나는 다만 감수성을 가진 것에 대해서만 느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나의 본질이 참여한 것 때문에 느끼는 것, 내가 그 곳에서 나 자신을 느끼는 것, 그것의 고뇌를 내가 함께 고뇌하는 것,  나는 다만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만 느끼는 것이다. 동정은 같은 본질을 전제한다. 신이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의 표현이 성육이며 섭리이며 기도인 것이다...(각주4 ; "우리는 신이 우리와 공동 고뇌에 엄습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신이 단지 우리의 눈물을 볼 뿐만 아니라 시편 56편에 쓰여 있는 것 처럼 우리의 '눈물'을 세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신의 아들은 진실로 우리의 고뇌의 심성에 엄습된다" - Melancthonis et aliorum. 루터는 지금 우리가 인용한 시편 56편, 59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눈물도 무익하게 흘려질 리는 없다. 그것은 크고 강한 문자로 하늘에 쓰여진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의 눈물을 세고 모으는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매우 감상적인 존재자인 것이다)

여기 전개된 성육신의 의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성육신의 경우와 이교적인, 그리스적인 혹은 인도적인 신들의 인간화의 경우와는 사정이 전혀 특수한(적어도 사정이 다른) 것이라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은 후에 자명하게 되겠지만 확실히 다른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진실한 것이다. 이교의 신들은 단지 인간의 소산 혹은 신화된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ㅇㅆ어서 참된 신의 관념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비로소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결합이 의의 깊게 그리고 "사변적"으로 되는 것이다. 주피터는 역시 황소로 변형된다. 이교에 있어서의 신들의 인간화는 단순한 공상일 것이다. 이교에 있어서의 신의 본질 안에는 현상 안에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현상하는 것은 신, 즉 인간과는 다른 초인간적인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항의는 언급한 주의, 즉 기독교적인 성육신의 전제도 역시 이미 인간적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의에 의해서 반박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우기 신은 자신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시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들은 신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에게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또 신에게 미지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도 역시 신의 본질 속에서는 신의 현상 속에 있는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성육신에 있어서 종교는 다만 종교가 자체에 대한 반성에서 신학으로서 말하기를 원치 않는 것, 즉 신은 철두철미 인간적인 본질이라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신인"이라고 하는 비밀은 어떤 대립물들의 신비적인 합성이 아니며 혹은 종합적인 사실도 아니다. 그런데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있어서는 신인이라는 비밀은 그와 같은 합성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변적 종교 철학은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 특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의 비밀은 분석적인 사실-인간적인 의미를 가진 인간적 말-이다. 만일 여기에 모순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모순은 이미 성육신의 앞에, 그리고 밖에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즉 모순은 섭리와 사랑의 신성과의 결합 속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의 사랑이 실제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으로부터 신의 사랑에로 이르기 위해서는 단지 제한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여 성육신은 단지 섭리나 사랑을 가장 강하게, 가장 열렬하게, 가장 감성적으로,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의 대상을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격적으로 현존하여 대상을 기쁘게 하고 사랑 그 자체를 보이게 하는 것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은혜자를 마주 본다는 것은 사랑의 가장 격렬한 희망이다. 본다는 것은 신적인 작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단순한 눈길 안에도 행복이 있다. 한 번의 눈길은 사랑의 확실성이다. 그리고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의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 이외의 다른것일리 없으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리도 엇으며 또한 그 이외의 다른 작용을 할 리도 없다. 사랑은 지속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어서의 성육신은 일시적이다. 현상은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소수의 사람밖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현상의 본질은 영원하며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아직 현상을 믿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현상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지 사랑의 직관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신을 신적 대상이나 신적 목적으로 직관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단지 자기 자신의 본질, 자기 자신과 관계할 뿐이다. 이것을 가장 명백하게, 가장 항의할 수 없도록 증명하는 것은 종교의 근거이며 중심점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신성을 소외한다. 성육신이 부여하는 고귀한 일상은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성육신에 있어서 아무 욕구도 없는 최고의 본질이 나를 위해 자신을 욕되게 하며 비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안에서 나 자신의 본질의 직관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된다든가, 인간이 신의 사랑의 궁극 목적이나 궁극 대상이 된다든가 할 때보다도 인간의 가치가 더 높게 표현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적 본질의 본질적인 규정이다. 신은 나를, 인간 일반을 사랑하는 신이다. 여기에 강조의 근거가 있으며, 이 안에 종교의 근본 열정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신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며,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근거이다. 신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야기하며 눈뜨게 한다. "우리가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먼저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각주5 ; 요한 1서 4장 19절)

그렇다면 나는 신 안에 그리고 신에 즉하여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우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우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면 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비록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애가 아닌가? 신이 인간을 사랑할 때는 인간이 바로 신의 내용이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가장 깊은 속마음이 아닌가?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심정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다! 사랑만이 인간의 심정인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며, 나의 내용이며, 나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왜 슬퍼하며, 또 왜 생활 의욕을 상실하는 것인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는 것과 함께 자기의 마음, 생활 원리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인간은 신의 심정이며, 인간의 복지는 신의 가장 내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의 대상이라면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신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적인 내용이 인간이라면, 신적인 본질의 내용은 인간적 본질이 아닌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종교의 근거이며 중심점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최고의 진리, 최고의 본질로서 대상화되어 직관된 것이 아닌가?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라는 명제는 그렇다면 동양 정신이 아닌가?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양적인 것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명제는 독일어로 말하면 "최고의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4 장 도덕적 존재자 혹은 율법으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4.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6 장 고난받는 신의 비밀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