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라는 책을 읽다 보니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나자렛의 요셉에 대한 헌사』라는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아래의 내용 또한 나자렛의 요셉에 대한 두번째 헌사이다.
성자 요셉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성자였던 까닭에 성화에서 언제나 단역으로 그려질 뿐이었다. 심지어 중세의 종교극에서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다. 말하자면 복음서의 가르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하는 악의 화신처럼 여겨졌다. 수도 세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며 언제나 술에 취해있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가장행렬 때에도 요셉의 역할은 마을에서 으뜸가는 바보에게 맡겨졌고 이런 전통은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요셉은 성화에서 단독으로 그려진 경우도 없었지만 전경(前景)에 그려진 경우도 없었다. 심지어 예수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서도 요셉은 성모와 아기 예수에 비해서 뒤쪽에 그려져 있었다. 오셉에 대한 홀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방박사나 안나 성녀와 엘리자베스 성녀보다도 요셉은 늘 뒤쪽에 그려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요셉에 대한 대우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요셉에 대한 올바른 평가 때문이 아니라 성(聖) 가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었다. 그 후부터 요셉은 늙은 멍청이에서 조금씩 기품있는 인물로 변해갔다. 또한 늙은 모습 대신에 한창 나이의 건강한 사내나 능력있는 목수 또는 어엿한 양부(養父)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편견을 단번에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는 애매한 위치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예수를 그의 아들이라 믿었던 것이 이단에 속했기 때문이다.
(15세기나 16세기 초에 그려진 성화들 속) 요셉은 중세 중기나 봉건시대에 비해서는 덜 홀대받고 있었지만, 예수의 아버지로 완전히 인정 받은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존경하거나 경배할 만한 인물은 아직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그림에서는 요셉이라는 인물의 특이한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요셉은 카인도 아니었고 유다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배신자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인물이었고 상반된 면을 지닌 인물이었다. 성모만큼 신성시된 인물도 아니지만 보통사람처럼 평범한 인물도 아니었다.
아버지 아닌 아버지였으며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성가신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애매한 인물, 규범에서 벗어난 인물, 요컨데 15세기에 줄무늬가 상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닌 인물이었다.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이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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