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tagsgeschichte, 일상사란 무엇인가』 by Alf Leudtke. 이동기외 옮김, 청년사
여기서 일상사란 日常事가 아닌 日常史이다.
그러다보니 일상의 기록이나 일상다반사에 대한 담론이라기 보다는 역사(학)적 접근방법론과 '일상史'의 포지션 등에 관한 문제이다.
개별적 계기의 분석이나 장기적 시기에 대한 척도더미의 추적,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취업활동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남녀들이 반복적으로 겪는 "매일매일의 백병전"..
일상史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전승(역사, HI-story)" 속에서 배제되기 쉽상인, 대다수 이름없는 사람들의 매일매일 고생해가면서 또 가끔씩 과시적으로 소비해가면서 일궈낸(냈던) 삶과 생존의 이야기. 매일매일의 백병전에 대한 해석(?) 이라고 해야 하나... 이와 관련해서는 책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저자 알프 뤼트케와의 인터뷰 내용을 발췌해서 들어보는 것이 적합할 듯...
[알프 뤼트케 교수와의 인터뷰]-1999년 9월 6일, 독일 쾨팅엔 소재의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
애초 저는 1848년 혁명에 관심을 두다가, 그 혁명에 대한 국가 권력의 억압내지 국가의 통제기제에 대해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경찰에 대한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경찰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 경찰에 의해 체포 투옥되고 고발되는 그 구체적 사람들에 직면했습니다. 경찰에 대한 이 연구를 통해, 관료제를 위로부터 아래로의 모델, 즉 상명하달식의 기구처럼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생각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19세기 프로이센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경찰조직이나 경찰업무의 일상성 - 당시 저는 아직 이를 일상성이라고 이름 짓지는 못했습니다만 - 은 오히려 행위가 아래로부터 이루어지고, 위에서는 이를 승인하거나 때에 따라서 승인을 거부할 뿐임을 보여줍니다. 아래로부터 일반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규준을 위해 강한 압력을 행사했고, 특정한 자신들의 실천을 공증받고자 했으며, 그럼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관료제의 일상적 측면을 논문으로 쓰면서 저는 이와 같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산업노동자의 일상현실에 대한 질문을 통해 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코민테른이나 공산당 지도부가 파시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영향을 미치려고 했던 노동자들이 왜 다르게 행동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습니다. 즉 왜 대중들은 당지도부의 기대나 예상과 달리 파시즘의 대두와 권력장악에 침묵하고 말았는가가 문제제기의 요체였습니다. 이 분석에서 일상Alltag과 일상성Allteaglichkeit이란 용어는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상현실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상현실이란 말로 특정한 물질성의 존재를 함의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즉 현실이란 항상 단순히 머릿속 창작물이나 구성만이 아닌 실천을 전제한 물질성에 기반한 것이니까요.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1918~19년 파업과 혁명을 수행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1923년 민족주의적 선동에 고무되었고, 프랑스의 루르 지역 점령에 대항해 민족주의적 저항의 틀에서 부르주아지 등의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저항성이라가 보다는 "고집(Eigensinn, 고집이라는 단어보다는 아집, 특정의견을 우기는 것보다는 자기자신에게만 쏠리는 삶의 태도라고 보는게 번역자들의 의견)" 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제 3자나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강요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을 갖고자 노력합니다. 바로 이것이 1918~19년 독일의 운동과 1923년 루르 점령시기 노동자들의 태도, 즉 좌파적인 정치행동과 우파적 행동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 즉 외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거나 조정되지 않는 영역, 시간, 기회들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핵심개념인 '전유Aneignung'(자기것으로 만든다라는 의미에서의 '자기화'로도 표현될 수 있다라는게 번역자들의 의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전유란 인간들이 놓여 있는 상황들 사이에서, 그 경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또는 스스로 택한 조건들하에서가 아니라 직접 존재하고, 주어지고 전승된 상황하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이중현실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것을 꾸려나가는 행동양식은 바로 이 이중현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유는 영웅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 즉 이를테면 세계를 계획에 따라 부수어 새롭게 정돈시키는 활동 같은 것은 전혀 아니지요.
(일상史는 탈정치화라는 비판에 대하여, 일상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일상사가 탈정치환다는 비판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제한된 개념에서 나온 것이지요... 정치를 협의적으로 보지 않을 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다양한 차원의 권력들, 그리고 정치적 행위자들에 의해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도 알게 됩니다... 정치를 특정부분으로의 환원, 즉 사회적인 것이나 경제적인 것, 문화적인 것에 대비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특정 엘리트나 활동가들의 행위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순히 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도 정치적이고, 모든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역사, 사회 또는 사회적 연관관계는 정치적인 것 없이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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