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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07, 2013

두개의 광주; 광주(廣州)와 광주(光州)의 만남,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을 통해 본 성남의 역사

와이프가 쓰는 아이패드미니 충전케이블에 문제가 생겨 강남역 프리스비에 케이블 사러가는 버스 안에서 트위터를 읽다가, 타임라인에 올라온  @hs_r 님의 트윗에 링크된 임미리님의 글을 읽다.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임미리(한국학 중앙연구원), <기억과 전망> 2013년 여름호. PDF 원문:

해당 글의 전체 내용은 위의 링크(PDF 문서) 참조.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그 집단의 조직문화에 정치적 고립에 대한 글이지만,,, 개인적으론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주사파 NL 정치집단에 대한 관심보다는 글에서 보이는 성남의 그 굴곡진 역사에 더욱 관심이 간다. 

조국근대화로 불리는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시절, 산업예비군으로서의 농민공들이 농촌 고향을 떠나 서울(주변)으로 올라와 무허가 판자집에서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다, 정부주도의 강제적인 도시개발에 쫓겨 다시 성남(당시 광주대단지)로 내몰렸던,,, 그들의 이야기. 대학교때 책을 통해 어렴풋이 알던 내용이었지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성남에 대한 첫번째 차별과 사회/공간적 배제가
"농촌에서 서울의 판잣집으로, 서울에서 다시 광주대단지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의 상당수가 호남 사람이었다.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의한 농촌에 대한 차별, 영남에 비해 호남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결과가 한 데로 모여진 것이 바로 광주대단지였다..."
성남에 대한 두번째 차별과 사회/공간적 배제는
"(분당 신도시 건설 후) 분당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남시민이 아니라 분당시민으로 불렀고 “우리 애들을 어떻게 같은 학교에보내느냐(박봉준 구술 2012/08/16)”고 항의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파트 입주 직후인 1992년부터 분당을 성남시에서 분리시키자는 주민운동이 벌어졌다"
성남에 대한 개인적 기억은, 어린시절 방학을 맞아 서울(성남) 올라와 성남 수진동에 살던 친척집의 단칸방에서 잠자던 기억,,,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물갈이로 온몸에 두드러기 생겨 생애 처음 병원가서 주사 맞았던 기억,,,

그리고 군 제대하고 90년대말 경원대 뒷편의 가파른 언덕집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기억들,,, 1996년에 분당 서현역 근처에 본사가 있던 회사에 취직을 하였는데, 당시 회사에서는 주변 몇 군데 아파트를 전세 내어 미혼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직원들에게 기숙사로 제공을 해 주었다. 당시 거처할 것이 마땅치 않던 나로서는 이게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 회사에 취직이 되자마자 분당중앙공원쪽 라이프아파트로 이불 한보따리 싸들고 들어 가서 살았는데, 1998년인가 1999년 회사가 서울 동대문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바람에 회사로부터 전세금 1,200만원 대출 받아 경원대 뒷쪽 가파른 골목길의 어느 집 반지하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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