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 입구에 있는 상할머니(증조모) 공덕비,,,
한처안동권씨기행비韓妻安東權氏紀行碑
예로 부터 부인의 덕은 유순해야 했다. 어떤 시련과 고통도 감수해야 했고 추호도 기망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없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어려서부터 응원공(鞏묶을공字 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이하 ?는 본인의 짧은 한자실력으로 인해 확실치 않은 해석이다)사를 시작으로 여사를 배우게 하고 삼종지도와 사덕의 미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 모교를 받지 않고도 곤순의 덕을 익혀 고석현원에 부끄럽지 않게 일생을 살다가신 한 떨기 난초여사가 있으니 안동권씨 길창군 양촌근의 후 민옥의 녀이다. 부인은 자색이 정숙하여 일찌기 효우의 도를 알았고 배(?)귀하여 편고 섬기기를 재가시 부모 섬기듯 하여 정성감지를 행
여 소홀할가 조심하더니 고씨 내종으로 기년을 와석신음하자 부인이 주소시측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마침내 천년으로 종하자 애례비진하니 송산에 살때의 일로 고로상전하여 지금도 칭송이 그치질 않고 있다. 부군은 금계한씨 문충공 교의 후 일수로 기골이 장대하고 성질은 단순하였다. 경대여빈하여 내순승천하며 봉선목족범절에 열성을 다하여 인리를 감화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인가. 어느날 갑자기 부군이 출가하여 족적을 감춘지 이심여년, 가세는 어렵고 이자 재강이라. 부인이 동춘서직하여 근근호구하면서도 숙명이려니 생각하여 갖은 유혹을 다 뿌리치고 백집소행이 척촌도 부재지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미년경에 부군이 강원등지에 살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불원천리 몸소 달려가는 선위열사유래하여 동거한지 수월에 또 다시 신의 시샘인가 불행히 성붕하니 그 애통최절이 보는 이의 간장을 녹이는 듯 하였다. 애장제존을 고례대로 행하고 아들을 의방으로 가르쳐 병이 병직의 이름에 손색이 없이 길러내었다. 신묘정월이십삼일과 기유십이월이십육일은 생과 졸이고 수는 실십구이다. 병이가 오남을 두고 병직이 이남을 두어 증현이 만당하고 하나같이 착하고 재주있어 문호가 번창하니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 향당의 흠선을 받아 오더니 병이씨가 오래가면 갈 수록 행적이 묻힐가 두려워하여 금춘 유회에 구십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여 향약 향교 양장을 보이면서 입석기사가 여하오 하자 첨(?)왈 가 라 하거늘 나에게 그 글을 청한다. 부인의 송산 사는 내 일찌기 익히 들었고 요전으로 이거 하여서
는 이웃에서 조석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대략기술하고 이어 명을 붙인다.
강동성하 몇 해런가 도규로 보내옵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직기로 지새웠네
효순하고 인고하여 처도 지켜 다했으니
지나는 길손들아 빈마지정 배워가소
단기 사천삼백삼십일년(서기 1998년) 무인전춘일
충주박수섭찬
려산송명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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