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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31, 2012

『나라야마부시고(楢山節考)』

『나라야마부시고(楢山節考) - 첫번째 | 2007/08/22 01:55

근 10 여년 만인가? 나라야마부시고(楢山節考)를 다시 읽게 되었다... 어찌어찌 버려지지 않고 책장 한켠을 지켜온 "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2(죽음의 미학)"을 10 년이 지나  다시금 손에 쥐었다. 오늘 다시 읽는, 예전의 그 이야기는 젊은시절의 감흥과는 다른 또다른 감회이다.

나라야마(楢山)-졸참나무산, 그 곳은 자연적,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경제적 빈궁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형성된 일상의 삶의 결과-사회적 관습-이 강제하는 죽음은 가히 먼 옛날이나 가상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리라..

고도문명사회(!)인 "선진국"을 향해 매진하는 오늘날 그 동안 겪은 우리 사회의 경험들-"퇴출"-과 무에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오히려, 오린 할머니의 "기꺼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더욱 치열해진 현대적 삶의 참혹한 현실에 비하면 가히 목가적이고 철학적이다.

"고려장"... 아마도 그것은 후대에 씌워진 과거에 대한 오만한 폄하이리라. 그나저나 MC Sniper의 "고려장"이라는 노래를 듣노라면 가슴을 파고 헤집는 통한을 느끼게 되지만... 실상은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 조부모님께 따뜻한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하는 내 모습은 가히 졸참나무산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닷뻬이 보다 무에 그리 낫다 하겠는가...


『나라야마부시고(楢山節考)- 두번째 | 2009-02-03 02:45:29

문화-사회적 풍습, 또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이유로 인한 삶으로부터의 강제적 퇴출.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그 묘한 매력에 자꾸 읽게 된다. 뭐 작가와의 정신적 감응성 파동이 일치하거나, 또는 소설이 나타내주는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함몰성이 강해서 그럴 수도…

오린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거나 비껴서지 않으며 오히려 정성껏, 기쁜 마음으로 준비한다. 홀아비가 된 아들의 며느리도 들이고, 졸참나무산으로 가는 날 손님들에게 대접 할 음식이며 술도 준비하고, 나이 칠십이 가까왔음에도 부끄럽게도 튼튼한 이빨을 부싯돌로 깨뜨리기도 하며…

오린은 오래 전부터 졸참나무산으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였다. 갈 때에 한 잔씩 대접할 술도 미리 장만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산으로 가서 깔고 앉을 깔개 같은 것은 벌써 3년 전부터 만들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오린은 주위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부싯돌을 집어 들었다. 입을 벌리고 아래위 앞니를 부싯돌로 딱딱 쪼아 댔다. 단단한 생 이빨을 두들겨서 망가뜨리려 하는 것 이었다. 쿵 쿵 하고 머리가 울려서 기분 나쁘게 아팠다. 하지만 참고 계속해서 두드려 대면 언젠가는 이가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빠지는 것이 하나의 낙처럼 되어 있어, 요즘은 그 아픔마저 차라리 기분이 좋아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졸참나무산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 이빨 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빼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참나무산으로 갈 때에는 닷뻬이 등의 등판대기에 얹혀서, 이도 빠진 얌전한 늙은이가 되어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이가 빠지도록 부싯돌로 쪼아서 망가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척박한 현실의 삶이 가하는 고통과 경제적 제약은 늙은이를 잉여인간으로 만들내며 그 잉여인간로 하여금 사회와 삶으로 부터의 퇴출을 최촉한다.

육근 육근 육근이여
수행은 편할 것 같지만
편하질 않지
어깨는 무겁고
짐은 괴롭고
아 육근청정 육근청정

나라야마(楢山) ; 졸참나무산으로 갈때 부르는 노래이다.
장송곡이라 함이 옳겠다.

오린 할머니가 그 졸참나무산으로 가던 날, 그녀의 소원대로 하얀 함박눈이 내려 그녀의 죽음을 축복한다...

오린은 꺼림칙해하는 닷뻬이를 한바탕 꾸짖듯이 채근해서 졸참나무산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그 다음날 온 가족이 먹을 흰 밥도 지어놓았고 표고도 송어도 다마에게 미리 잘 알려 주었다. 온 가족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뒷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닷뻬이가 둘러멘 등판때기에 올라탄 것이다.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았지만 꽤나 추운 밤이었고, 하늘은 잔뜩 흐려서 달빛마저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닷뻬이는 장님 걷듯이 더듬거리며 걸어 갔다. 오린과 닷뻬이가 나간 뒤에 다미는 이불을 들치고 일어났다. 그리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루터기에다 두 손을 짚고 칠흑 어둠 속을 뚫어 보며 그녀대로 전송을 하였다.

닷뻬이는 바위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눈앞에 오린이 앉아 있었다. 등에서 머리 위로 깔개를 짊어지다시피 올려놓고 눈을 피하고 있었으나, 앞머리에도 가슴에도 무릎에도 눈은 덮여 있어, 마치 흰 여우마냥 한 곳만을 뚫어 지게 바라보면서 염불을 외고 있었다.

닷뻬이는 커다란 목소리로, “어머니, 눈이 와요” 오린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닷뻬이 쪽으로 흔들었다. 그건 돌아가거라, 돌아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 꽤나 춥지요 잉”

오린은 몇 번 거푸 머리를 모로 저었다. “어머니 눈이 와서 운이 좋으시겠구먼요” 그리곤 다시 “산으로 가는 날에…” 하고 노래가락 문구를 덧 붙였다.

눈송이는 더욱 굵어져 탐스러운 함박눈이었다. 닷뻬이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해가 지고 어두워져 있었다.

게사요시는 간밤에 치르고 남은 술을 마시고 취한 모양으로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운이 좋아, 눈이 와서 할매는 엄청나게 운이 좋아. 야아 정말로 눈이 왔군” 하고 신이나서 감격하고 있었다.

죽음이라기 보단 자살이다. 강제된 그러나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런 자살. 

이 소설은 오래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하였다. 영화 또한 소설의 텍스트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잘 표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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