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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31, 2012

푸코(Foucault)에 대한 철학적 초상화(肖像畵)

『푸코의 초상화』,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86년 클레르 파르네(Claire Parnet)와의 회견
   -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1995 中

푸코의 죽음을 통해서만 오는 것, ‘바로 그’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최후의 초상을 위해서 『푸코(Foucault)』(Minuit, 1986)라는 책을 썼다라는 들뢰즈.
푸코적 폭력, 그에게는 극도의 맹렬성, 억제되고 용기로 화한 맹렬성이 있었지요. (그는) ‘정열’이라는 단어에 아주 정확한 의미를 부여한 사람, 정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에이합 선장처럼 고래를 쫓다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을 넘어갑니다. 푸코의 죽음에는 그같은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죽음과 자살을 구분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속(加速) 같은 것이 있는지… 
정열, 그는 그것을 고전작가들 처럼 하나의 점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치고 그것이 끝날 때까지 양쪽으로 넘나들어야 하는 하나의 선으로 취급했습니다.
멜빌(Melville)도 얘기한 바 있지요 “나는 잠수하는 사람은 다 좋아한다. 수면가까이에서는 어떤 고기든 헤엄칠 수 있지만, 5해리 이상 내려갈 수 있는 것은 큰 고래뿐이다… 태초부터 사유의 잠수자들은 충혈된 눈을 하고 수면으로 돌아 왔다”. 극도의 육체적 훈련되 위험이 있지만 사유 역시 극단적이고 숨가뿐 훈련입니다. 사유를 하게 되면 삶과 죽음, 이성과 광기가 한데 어우러지고 있는 하나의 선(線)과 마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선이 사유자를 끌어갑니다. 사유는 그 마녀적 선 위에서만 이루어 집니다.
그 선은 윤곽이라곤 없지만 그렇다고 추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속에 있다기 보다 사물속에 있는 것이지만, 사유가 광기 같은 것과 마주치는 곳, 그리고 삶이 죽음 같은 것과 마주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 선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너무나도 난폭하고 너무도 급하게 우리를 숨쉴 수 없는 곳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이합선장의 편집광에서 보듯이 착란과 광기가 되고 맙니다. 그 선은 건너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살만한 것, 실행하고 사유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살기 위하여 선을 구부리는 것… 선의 접힘, 바로 그 자체가 푸코가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주관화 과정” 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굴곡 속의 삶.
주관화, 즉 외부의 선을 굴곡짓는 작업, 그것은 선과 대면하고 선에 올라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죽음-자살로 향하게 되겠지만, 자살은 전 인생을 사로잡는 하나의 예술이 되는 것이지요.

푸코의 초상화는 어찌보면 들뢰즈 자신의 초상화인지도 모른다.

푸코에 대한 들뢰즈의 이야기는 꼭 자신의 삶과 철학, 그리고 죽음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죽음과 자살을 구분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속 위에서 그의 사유-철학의 잠수질은 위기를 통해 진행되었고, 궁극에는 ‘전 인생을 사로잡는 하나의 예술’이라는 자살로 막을 내리게 된다.

들뢰즈와 처음 인연은 강원도 동송읍 오지리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읽었던 일간지 신문에 실렸던 그의 죽음의 소식을 통해서였다. 부고(訃告)를 통한 조우(遭遇).

| 2009-02-06 0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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