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죽음의 미학】 살림, 1996 中
가혹한 자연 앞에 내던져진 나약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
동이 텄을 때, 날은 추웠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사나이가 유콘 강가의 주도로를 벗어나 흙으로 된 높은 기슭에 올랐을 때는 지독하게 춥고 잿빛도 더 했다. 맑은 날씨였지만 사물의 위에는 아침을 어둡게 하는 미묘한 우울함 같은 것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관 보자기 처럼 덮여 있었다.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상상력 결핍이었다. 그는 세상 일에 재빠르고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저 세상 일의 겉에 대해서만 그렇지 그것의 깊은 뜻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화씨로 마이너스 50도의 온도이니, 물이 어는 온도인 32도에서 부터 따지자면 영하 80도 정도가 되는 셈이다. 이런 기온을 불편할 정도의 취위를 나타내는 것으로만 받아 들였을 뿐, 어떤 한계내의 열과 추위에서만 살 수 있는 온혈 동물로서의 자신의 나약함과 인간 전체의 나약함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영생불멸이라는 추측의 차원이라든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나이의 뒤에는 그 지방 고유의 에스키모 개인 늑대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잿빛 털로 뒤덮여 있고, 사촌격인 야생늑대와 겉으로나 기질로나 거의 다르지 않았다. 개도 이 혹한에 기가 꺽여 있었다. 개는 지금이 길을 나설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개의 입김이 얼어붙어 털 위에 고운 서리가루처럼 달여 있었는데, 얼어붙은 입김 때문에 개의 빰, 주둥이, 눈썹 부분이 특히 하얗게 보였다. 사나이의 붉은 턱수염과 콧수염에도 마찬가지로 서리가 내렸는데 개의 것 보다 더 단단했다. 이렇듯 쌓이는 모든 것은 고드름 처럼 얼어붙었고, 고드름은 사나이가 따뜻하고 김이 서린 입김을 내 쉴때 마다 점점 길어 졌다.
그는 얼마나 추운지 알아보기 위해 침을 뱉았다. 침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얼어 붙어 그를 놀라게 했다. 다시 침을 뱉았다. 그러자 채 눈에 떨어지기도 전에 침이 공중에서 얼어 붙었다.
이미 두 발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불을 피우기 위해 그는 장갑을 빼야 했기 때문에 손가락도 빠르게 마비되어 갔다. 한 시간에 4마일 정도의 속도로 걸을 때 그의 심장은 피를 몸과 손발 구석구석까지 뿜어 냈다. 그러나 멈추자마자 심장의 고동도 약해졌다. 말하자면, 우주공간의 한기(寒氣)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 지구라는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을 내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사나이는 마침 그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한기가 내리칠 때 따라오는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몸의 피는 그 충격에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불타는 성냥은 피시식하며 눈 속으로 떨어졌지만, 자작나무 껍질에는 불이 붙었다. 마른풀과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불 위에 놓기 시작했다. 꽤 큰 새파란 이끼덩어리가 작은 불 바로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이끼를 꺼내려고 했으나, 몸은 떨렸기 때문에 이끼에서 빗나갔고, 그 결과 그나마 작은 불 한가운데를 헤집어 놓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뭇가지들은 다시 모을 가망이 없을 정도로 산산히 흩어졌다. 하나씩 연기를 피식내고는 나뭇가지의 불이 꺼졌다.
희미하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중압적인 공포가 사나이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이 단순히 손가락과 발가락이 언다든지 혹은 손발을 잃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을 가능성이 높은 생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 공포감은 더욱 커져 갔다.
두 발이 너무 얼어서, 달리다가 땅을 쳐서 몸의 무게를 받을 때에도 느낄 수 없는 정도인데다가 그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신기하였다. 땅 표면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것 같았고, 땅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개 달린 머큐리 신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신이 땅을 스치며 다닐때 지금의 자기가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다가 사나이는 평생 맛본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개는 그를 쳐다보면서 앉아 기다렸다. 짧은 낫이 거의 끝나면서, 긴 황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개가 보기에는 불을 피울 기미 같은 것이 없었다. 게대가 개의 경험으로도 눈 속에 이렇듯 앉아서 불을 지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황혼이 짙어지자 불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억제할 수 없어, 개는 앞발을 높이 쳐들기도 하고 흔들어 대기도 하면서 작은 소리로 낑낑댔다. 잠시 후 개는 큰 소리로 낑낑댔다. 조금더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 곁으로 바싹 기어들어가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 때문에 개는 털을 꼿꼿이 세우고는 물러 났다. 개는 얼마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차가운 하늘에 높이 솟아 춤추듯 반짝이며 밝게 빛나는 별들 아래서 길게 울부짖었다.
작가의 말처럼 우주공간의 한기(寒氣)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 지구라는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을 내리쳤고, 때 마침 그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에 있었던 한 사나이에게 그 한기의 엄청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얼어 죽어가는 과정을 마치 기록영상처럼 감정이입 없이 보여준다.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한계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을 역설적으로 보충해 주는 듯 하다.
『숲 속의 죽음』이라는 소설에서 처럼 여기에서도 개가 등장한다.
인간과 함께 하면서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증언자이자, 죽음의 의식을 집행하는 사도처럼...
| 2009-01-31 16: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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