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진정한 염세주의자로서 조언하자면, 세상은 한 번 살아볼 만합니다. 자살이라는 보험이 있는 한 말이에요." ; 에밀 시오랑(Emile Cioran) 10:35 AM January 27th via HootBar
[Scrap] 이방인(異邦人)으로 사는 법 - 에밀 시오랑과의 대화 :: 대산문화, 2004년 가을호 http://daesan.or.kr/webzine_read.html?uid=215&ho=10 10:33 AM January 27th via Posterous
에밀 시오랑(Emile Cioran) _ 산문가. 1911년 루마니아 출생. 현대 문명의 퇴폐를 비장한 필치로 고발하여‘절망의 심미가(審美家)’로 불림. 산문집 『절망의 정점에 대하여』 『고뇌의 3단 논법』『역사와 유토피아』 등. 1995년 사망
고종석 _ 선생님은 초기의 책 몇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어로,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습니다. 흔히 모국어는 작가에게 존재의 뿌리라고도 합니다. 외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선생님의 정체성을 위협하지는 않았습니까?
시오랑 _ 여러 차원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루마니아 사람으로서의 내 정체성, 더 정확히는 루마니아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프랑스어 작업에 치여 어느 정도 균열을 겪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루마니아 사람이기 이전에 그저 사람이고, 루마니아 출신 작가이기 이전에 그저 작가입니다. 그리고 작가의 큰 보람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공식적으로 표명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글이 될 수 있으면 널리 읽히는 것입니다. 그 글의 독자들 가운데 최량의 정신들이 포함돼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내가 프랑스어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젊은 시절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면서였습니다. 문득 이 작업의 효용에 의문이 들더군요. 번역 텍스트까지를 포함해서 루마니아어 텍스트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을 것인가, 그 가운데 최량의 정신은 얼마나 끼어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 말이에요.
고종석 _ 선생님은 결국 프랑스어의 힘, 그것은 제국주의적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힘에 굴복해 투항하신 거군요.
시오랑 _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만유인력까지를 ‘제국주의적’이라고 표현하는 선생의 그 느슨한 언어 사용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요.
고종석 _ 문화적 만유인력이라는 표현이 재미있군요. 누구나 인정하듯, 존재하는 자연언어들의 질량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왜 굳이 프랑스어였습니까? 선생님이 젊었던 시절에도 이미 영어의 질량은 프랑스어보다 훨씬 더 컸고, 독일어의 질량 역시 그 못지 않았을 텐데요.
시오랑 _ 사실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이전에 독일어로도 글을 써본 적이 있어요. 베를린에서 공부할 때였지요.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내게 영어도 프랑스어보다 더 낯설지는 않았지요. 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루마니아어를 버리기로 했을 때, 그 빈자리를 독일어나 영어로 채울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내가 루마니아어를 버릴 결심을 했을 때, 나는 우연히 프랑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쿠레슈티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장학금을 받아 베르그송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구실로 파리로 왔고, 이 도시에서 기나긴 학창을 보내고 있었죠. 그 논문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고, 나는 파리의 가장 늙은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아무튼 루마니아어를 버리기로 했을 때, 내 주위에서 난무하는 외국어는 영어나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습니다. 영국이나 독일로 근거지를 옮길 만한 경제적 여유도, 별다른 동기도 없었고요.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어 쪽으로 건너갔지요.
고종석 _ 선생님의 그 결심은 루마니아어 문학에는 불행이었겠지만, 선생님에게는 다행이었군요. 방금 내비치셨던 대로, 선생님이 루마니아어로만 글을 썼다면 그 글을 읽어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무튼 사람들은 선생님이 20세기 프랑스 문학사의 가장 뛰어난 산문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의 그 결심은 선생님에게만이 아니라 프랑스어 문학에도 다행이었군요.
시오랑 _ 나를 추어올리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결국은 대부분의 책을 갈리마르에서 낼 수 있었으니, 내가 파리 문단에서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것은 이 언어가 단지 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언어가 독일어나 영어와도 다른 특별한 외국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뭐랄까, 내게 프랑스어는 동맥경화에 걸려있는 언어 같았습니다. 수세기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가들이, 그 가운데 상당수는 대단히 뛰어난 작가들이었지요, 그 작가들이 섬세히 갈고 닦아 놓은 이 언어가 그 과거의 무게로 내 상상력을 짓눌러 글쓰기의 재량을 억압하는 느낌이었어요. 그 전에 내가 독일어나 영어 같은 외국어로 글을 쓸 때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 언어들을 이용한다는 느낌이었는데, 프랑스어로 글을 쓸 때는 내가 이 언어의 촘촘하고 다닥다닥한 구조가 허용하는 생각만을 표현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고종석 _ 선생님은 지금 프랑스어를 비난하는 체하면서 그 언어를 추어주고 계시군요. 정확히는 프랑스어 문학을 추어주고 계시군요. 제 생각에는 영어 문학이나 독일어 문학도 프랑스어 문학 못지않게 뛰어난 작가들을 많이 내놓은 것 같아요. 그 작가들도 영어와 독일어를 섬세히 갈고 닦아 반들반들한 문학언어로 만들어 놓았죠.
시오랑 _ 아, 그런가요. 아무튼 내 느낌이 그랬다는 겁니다. 선생의 말대로 사람들이 나를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어 산문가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면, 그건 단지 내가 운이 좋아 그렇게 됐다는 거죠. 내 글의 상당 부분이 아포리즘이라는 것도 프랑스어가 내게 외국어라는 사실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관련이 있어요. 나는 외국어로 수다를 떨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 육중한 외국어로 두서너 문장을 써놓고 그것을 되풀이 읽으며 기우고 고치고 다듬었지요. 내가 루마니아어로 글을 썼다면 그런 번거로운 퇴고를 실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와 프랑스어 사이에 존재했던 메울 수 없는 틈 때문에 나는 미련스레 퇴고를 되풀이했던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 프랑스어 문장을 읽을 만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나를 아포리즘으로 밀친 동력은 니체를 아포리즘으로 밀친 동력에 견주면 다소 불순한 데가 있었던 겁니다.
고종석 _ 그런데 외국어로서도 영어나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사뭇 달랐다는 선생님의 느낌은 자연언어들의 표현 능력에 내재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시오랑 _ 그건 참 미묘한 질문이군요. 그 잠재력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역사의 우연으로 그 자연언어가 얼마나 풍성한 문학을 축적했느냐에 따라 어떤 시점에서 지닌 표현 능력에는 차이가 있는 것 아닐까요? 질량이 큰 언어일수록 표현 능력도 더 클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만 해 둡시다.
고종석 _ 선생님이 루마니아 출신의 21세기 작가라면 지금 질량이 가장 큰 언어, 그것도 압도적으로 큰 언어인 영어로 글을 쓰실 가능성이 있습니까?
시오랑 _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21세기를 살아보지 못했고, 적어도 내가 아랫세상에 존재했던 1995년까지는 프랑스어가 그리 위축된 언어가 아니었으니,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환경을 조건으로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파리를 좋아했어요. 해 뜨기 직전이나 해 진 직후 뤽상부르 공원 앞에서 생미셸 대로를 따라 센강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 돌아오는 것이 내 생애의 가장 큰 행복이었지요. 전원은 전원대로 걷는 맛이 있겠지만, 내가 가 본 유럽의 도시로서 파리만큼 걷기 좋은 도시는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오직 영어만 사용된다면 혹 모르되, 그 곳에서 프랑스어가 사용된다면 나는 21세기에 생을 다시 부여받는다고 해도 프랑스어로 쏠릴 것 같군요. 그러니까 내가 루마니아어를 버리고자 했을 때 우연히 파리에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우연이지만, 그것은 지금 돌아보면 내게 매우 행복한 우연이었습니다.
고종석 _ 프랑스나 파리의 이미지에는 뭔가 사람들의 허영을 채워주는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리나 프랑스는 그 바깥 세계 사람들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몫에 비해 턱없이 높이 평가받고 사랑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 세세한 사연은 오직 조물주만이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아까 작가의 큰 보람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글이 될 수 있으면 널리 읽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 글의 상표가 돼버린 짙은 염세주의와는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시오랑 _ 그것이 존재의 모순이겠지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골칫거리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나는 늘 절망의 꼭대기에서 살았습니다. 내가 84세로 고종명하리라고는 나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염세주의는 제스처가 아니었어요. 나는 삶과 세상의 부조리, 소외, 권태, 역사의 포악성, 질병으로서의 이성 따위에 넌더리가 났어요. 그러나 내게는 보험이 하나 있었지요. 언제라도 자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순간 스스로 내 생을 끊을 수 있다는 최후의 희망을 원기소로 삼아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니 어느덧 84년의 생애가 흘러가더군요. 세계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내가 역설했을 때 거기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그 한 편, 내 글을 누군가가 읽어주고 거기 공감하기를 바랐다는 것도 내 욕망의 또렷한 일부분이었습니다.
고종석 _ 젊은 시절의 선생님을 파시즘 쪽으로 밀친 것이 그런 절망이었습니까?
시오랑 _ 선생의 언어 사용은 계속 느슨하군요. 파시즘이라. 이 말은 언제부턴가 전형적인 으르렁말이 돼 버렸죠. 누구나 적을 비난할 때 이 말을 사용하는 바람에 파시즘은 모든 나쁜 것, 모든 싫은 것을 의미하는 거의 무의미한 말이 돼 버렸어요. 좋아요. 한 때의 내가 정치적 파시즘에 이끌렸던 것을 인정합니다. 부쿠레슈티대학에 다니던 시절 내가 잠시 철위대와 끈이 닿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엘리아데나 이오네스코도 잠시 그 언저리를 어슬렁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내가 친구들까지 변호할 필요는 없겠군요, 나는 이내 이 폭력의 철학에 시큰둥해졌습니다. 세상과 삶에 대한 내 절망이 근본적이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면 그 쪽에 내 몸뚱어리를 걸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나는 오로지 자살의 가능성에 기대어, 내 뜻과 상관없이 부여받은 생애를 벌레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벌레처럼 사는 삶인 바에야, 이방인으로 사는 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일상적 씁쓸함에서 침전된 어떤 달콤함이 있었어요.
고종석 _ 선생님의 글도 그렇지요. 선생님이 절망을 얘기할 때도 거기선 문득 어떤 달콤함이 배어 나오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는 선생님의 글을 철학적 로맨스라고도 했지만요.
시오랑 _ 여전히 내 절망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비난처럼 들리는군요. 그래요, 누구도 남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요. 아무튼 내 생애의 대부분을 나는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파리 경찰국의 형사에게도, 조물주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말이에요. 그리고 진정한 염세주의자로서 조언하자면, 세상은 한 번 살아볼 만합니다. 자살이라는 보험이 있는 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