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인간 문화의 발전 과정과 동일한 종교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가장 명료하게 알려진다. 인간에게 자연인이라는 술어가 어울리는 한, 인간도 신도 역시 단순한 자연신이다. 인간이 집 안에서 살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의 신들도 역시 신전에 둘러쌓여 살게 된다. 신전이란 단지 인간이 아름다운 건물로 인정하는 가치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종교의 명예를 위한 신전은 실제로는 건출물의 명예를 위한 신전인 것이다. 인간이 미개와 야만의 상태에서 문화에로 올라감과 함께, 인간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앟은 것이 구별되는 것과 함께, 동시에 신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별이 발생한다. 신은 존엄성의 개념, 최고 위엄의 개념이며, 종교적 감성, 최고의 적합한 감정이다. 후기의 교양 있는 희랍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위엄, 정신의 위대성, 부동의 평정함, 쾌활이라는 개념을 신들의 상像에 구상화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왜 이런 특성이 신의 속성이며 술어가 되었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런 특성이 그들 스스로의 신성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 예술가들은 모든 불쾌하고 경멸할 만한 정서를 배제하였던 것일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어떤 적합하지 않은 것, 위엄을 손상하는 것, 비인간적인 것, 따라서 비신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호머의 신들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한다. 즉, 음식은 신적인 향락이다. 체력은 호머의 신들의 특성이다. 제우스는 신들 중에서 제일 힘이 강한 신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체력 자체가 어떤 영광스러운 것, 신적인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전사의 덕이 옛날 독일인들에게는 최고의 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고의 신은 군신軍神 Odin이며, 전쟁은 "근본 법률 혹은 최고의 법률"이었다. 최고의 참된 신적 존재는 신성의 특성이 아니라 특성의 신성 혹은 신적 성질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학이나 철학에 의해 신, 절대자, 실체로 인정되었던 것은 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 그것이 바로 신이다. 즉 특성, 성질 규정성, 현실성 일반이 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무신론자, 즉 보통 의미에 있어서의 무신론자는 오직 신적 본질, 예를 들면 사랑, 지혜, 정의와 같은 술어를 무로 간주하는 사람뿐이며 이들 술어의 주어를 무로 간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주어를 부인한다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술어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술어는 독자적인-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술어는 그것들의 내용을 통해 인간에게 승인하도록 강요한다. 술어는 참이라는 것을 자신을 통해 직접 인간에게 밝힌다. 술어는 그들 자신이 확증하고 확신한다. 신의 실존이 망상이라고 해서 선, 정의, 지혜가 망상일 수는 없다. 또 신의 실존이 진리이기 때문에 선, 정의, 지혜가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의 개념은 정의, 자비, 지혜의 개념에 의존한다. 자비롭지도, 정의롭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이 없다면 자비, 정의, 지혜도 없는 것이다. 신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성질 자체가 신적이기 때문이며, 그 성질이 없으면 신은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의, 지혜(일반적으로 신의 신성을 형성하는 규정은 어느 것이나)는 그 자체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식된다. 그러나 신은 규정, 성질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신과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신을 바로 나의 정의 혹은 무엇인가 다른 성질의 이념의 현실성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만 나는 신을 신 자신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주어로서 규정된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술어인 성질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때엔 제 1급의 본질의 지위나 신성의 지위는 실제로 주어가 아니라 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많은 특성, 실은 서로 모순되는 특성이 하나의 본질에로 통합되어 이 본질이 인격적인 본질로서 파악되고, 따라서 특히 인격성이 강조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종교의 기원을 잊는 것이며, 또 반성의 표상에 있어서 주어로부터 구별 혹은 분리될 수 있는 술어가 근원적으로 참 주어였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나 희랍 사람들은 우유성Akzidenzen을 실체로 신화하였으며 덕, 기분, 정서를 독립적인 존재로서 신화하였던 것이다. 인간 특히 종교적인 인간은 자신에겐 만물의 척도이며 현실성의 척도이다. 그는 인간에게 외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인간의 마음에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단지 불가사의한, 증명할 수 없는 음향이라 할지라도 특수한 신적 존재로서 인격화한다. 종교는 세계에 있는 모든 대상을 포괄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교적 존경의 대상이었다. 종교의 본질과 의식 속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인간 자신과 세계에 관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 종교는 배타적으로 자체의 내용은 조금도 갖지 않는다. 로마에서는 공포의 정서조차도 그것들을 위한 신전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심정의 현상을 존재자로 삼았고 그들의 감정을 사물의 성질로 삼았으며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를 세계를 지배하는 위력으로 삼았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이 지금 알려져 있는 것이든가 혹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든가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의 특성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존재로 삼았던 것이다. 악마, 요괴, 마녀, 유령, 천사는 종교적 정서가 분리되지 않은 채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한 성스러원 진리였던 것이다.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와의 동일성을 염두에서 없애고 그것과 함께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동일성을 염두에서 추방하기 위해 사람들은 신이 무한한 존재로서 다양한 술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충일充溢이라는 표상에 의지하였다. 이들 술어 중에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단지 일부분뿐이다. 그리고 실은 우리와 같은 종류의 것 혹은 우리와 유사한것 뿐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적인 본질(혹은 인간과 유사한 본질)과는 전혀 다른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외의 술어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술어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미래, 즉 피안의 세계에서 비로소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나 다양함으로 한 편이 인식되고 조정되는 것과 함께 즉시 다른 편도 인식되거나 조정될 수 없는 많은 술어의 무한한 충일 혹은 집합은 단지 다양한 존재 혹은 개인의 무한한 충일 혹은 집합 속에서만 실현되고 확보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인간의 본질은 다양한 술어로 이루어져 있는 무한한 부富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다양한 개인의 무한한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인간은 모든 인류의 새로운 술어이며 새로운 재능인 것이다. 인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만큼 인류는 더 많은 힘, 더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각 개인 안에서 다양하게 규정되고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은 하나의 독특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충일하는 술어의 신비란 무한히 다양하고 또한 무한히 규정될 수 있으나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본성으로서의 인간 본성의 신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무한한, 현실적으로 무한한 규정이 풍부한 본질은 단지 감성의 영역 안에서만, 단지 시간 공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로 다양한 술어가 있는 곳에는 다양한 시간이 존재한다. 이 인간은 탁월한 음악가, 탁월한 저작가, 탁월한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연주도 하고, 저작도 하고, 치료도 할 수는 없다. 여러 대립과 모순을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 속에서 결합하기 위한 수단은 헤겔의 변증법이 아니라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신의 개념과 결합된 무한히 많고 다양한 술어들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개념, 단순한 환상, 감각 세계로부터 도출된 개념에 불과하다-그러나 실존적 상황이 없고 실존의 사실성은 없다. 그와 같은 개념은 정신적 즉 추상적이고 단순한 유일한 존재로서의 신적 존재와는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술어는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술어가 다른 모든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술어 사이에는 어떤 현실적인 구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현재의 술어 속에 미래의 술어를 갖기 않고 또 현재의 신 안에 미래의 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 나는 미래의 신 안에 현재의 신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두 개의 다른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각주;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현재의 신과 미래의 신 사이의 구별은, 전자는 신앙, 표상, 상상의 객체이며 후자는 직접적인, 즉 인격적-감성적인 직관의 객체라고 하는 것에 한한다. 신은 현세에도 내세에서도 동일하지만 그러나 현세에서는 불명료하지만 내세에서는 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차별성이 바로 신의 유일성, 통일성, 단순성에 모순되는 것이다. 왜 수여된 술어가 신에 관한 술어인가? 왜냐하면 그 술어가 신적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제한도 아무 결함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술어들은 왜 신에 관한 술어인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아무리 다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꼭 같이 완전성과 비구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에 관한 술어르 ㄹ무한히 표상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일치하며 각개의 술어로 하여금 신적 속성 혹은 술어로 만드는 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스피노자는 신적 실체의 무한히 많은 속성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유와 연장외에는 무엇 하나 이름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것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들은 그 자체가 쓸모없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무수히 많은 술어를 가지고도 결국 두개의 술어-사유와 연장-에 관해서 말하는 것 밖에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유는 실체의 속성인가?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그 자체에 의해 의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어떤 불가분자, 완전자, 무한자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왜 연장, 물질은 실체의 속성인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체에 대해 관계에서 사유에서와 같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술어에 관한 무한히 많은 술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정성, 구별이 아니라 그것들의 비차별성, 동등성이 술어를 실체의 속성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혹은, 오히려 실체가 무한히 많은 술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실체가 본래 아무 술어도 갖지 않은, 즉 어떤 규정된 현실적인 술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의 무한한 일자는 상상의 산물인 무한한 다양성에 의해서 보충된다. 술어는 수다數多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하다(각주; 수다數多가 아니라 다양하다) 진실로 적극적인 술어는 사유와 연장이다. 이 두 술어를 가지고 언표할 수 있는 것은 이름도 없는 무수한 술어를 가지고 언표할 수 있는 것보다도 무한히 많다. 왜냐하면 사유와 연장에 의해서는 어떤 규정된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유와 연장에 의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는 어떤 일에 대해 감격한다든가 어떤 것을 결심하기에는 너무 냉정하다. 실체는 어떤 것이 아니기 위하여 오히려 무無인 것이다.
그런데 주어 혹은 본질의 본성은 전적으로 주어 혹은 본질의 규정안에 있다는 것, 즉 술어가 참된 주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만일 신의 술어가 인간 본성의 규정이라면 신의 술어와 주어도 역시 인간 본성의 주어라는 것도 역시 증명된다. 그러나 신에 관한 술어는 한 편으로는 일반적인 것이며 다른 편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것이다. 신에 관한 일반적 술어는 형이상학적인 술어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술어는 종교에 있어서는 단지 가장 외면적인 결합점 혹은 기초로서만 쓸모가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적인 술어는 종교의 특징적인 규정은 아니다. 오직 인격적 술어만이 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술어에 있어서 신적 존재가 종교의 대상이다. 그와 같은 인격적 술어란, 예를 들면 신은 인격이요 도덕적인 율법의 제공자, 인류의 아버지, 거룩한 자, 외로운 자, 선한 자, 자비로운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개념 규정에 관련해서 곧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혹은 적어도 결국 명백해질 것이다. 즉 이런 규정들은 전적으로 인격적인 규정으로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규정이라는 것과 결과적으로 종교적 인간은 신에 관련할 때에 특히 자기 자신의 본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 있어서 이들 술어는 신 자신의 존재와는 구별되는, 인간이 만든 신에 관한 표상이나 심상들이 아니라 진리, 사실, 실제성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의인 표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종교에 있어서 의인 표현은 의인 표현이 아니다. 종교에 관한 이러한 규정은 신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종교적 본질인 것이다. 오성은 종교를 반성하고 또 종교를 변호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직면해서는 종교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이 오성만이 신에 관한 술어를 심상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 신은 실재의 아버지, 실재의 사랑, 실재의 자비이다. 왜냐하면 종교에 있어서 신은 현실적이고 살아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신의 참 규정은 또한 살아 있는 인격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성의 최대의 분격을 주는 규정, 오성이 종교를 반서앟ㄹ 때에 거부하는 규정이야말로 바로 신의 가장 충족한 규정인 것이다. 종교는 주관적으로는 정서이다. 따라서 종교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도 역시 신적 본성의 정서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도 역시 신적 본성의 정서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노여움조차도 신에게 결코 불명예스런 정서가 아니다. 단 어떤 사악함도 이 노여움이 기초가 되지 않을 때에 한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즉 본질로 보아서 신이 인간적이면 인간적일 수록 외관으로 신과 인간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 다시 말하면 종교에 관한 반성이나 신학에 의해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동일성이 점점 더 부정되는 것이며, 인간에 대해서 바로 인간적인 것으로서 그의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적인 것은 점점 더 저하된다는 것이다(각주;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이 아무리 크게 생각된다하더라도 그래도 양자 사이의 비유사성은 한층 더 큰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안된다"-Later Conc. can. Z. 인간과 신 사이의 궁극의 구별, 일반적으로 유한한 본질과 무한한 본질 사이의 궁극의 구별은 어떤 것과 무 사이의 구별, 유와 비유非有 사이의 구별이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본질과의 공재성이 폐기되어 있는 것은 단지 무에 있어서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적이고 사변적인 상상은 그 궁극의 구별에까지도 뛰어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산은 종교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을 특징짓는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신적 존재의 직관 혹은 규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의식의 대상인 것과 같이 인간의 직관은 단지 소극적이여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직관엥 불과하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신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빈곤하게 되어야 하며, 신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에게서 끌어 낸 것은 신에게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보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신 안에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자기 속에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본질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이 무엇 때문에 같은 것을 두번 조정하고 그리고 두 번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끌어 낸 것,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결해 있는 것, 이것을 인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중요하게 신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승려들은 신에게 순결을 서약하였다. 그들 자신에 있어서 이성애를 억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신에 하늘나라에, 신 안에, 성녀 마리아에 있어서 여인의 상, 사랑의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표상된 이상적인 여인이 현실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만큼 그들은 실재의 여인 없이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감성의 부정에 큰 의의를 두면 둘 수록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처녀가 그 만큼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에 있어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나 신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감성적인 것이 부정되면 될 수록 감성적인 것이 희생으로 바쳐지는 대상인 신은 그만큼 더 감성적이다. 즉 사람들이 신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그것에 사람들은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은 특별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에서 최고인 것은 당연히 그의 신의 의미에서도 최고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드는 것은 신에게도 역시 마음에 드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불결하고 또 자신들이 싫어하는 동물을 여호와에게 바친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치가 있는 동물, 히브리 사람들 자신이 먹던 동물이 또한 신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감성의 증거움을 부정하여 특수한 제물, 신의 마음에 드는 희생물을 만드는 곳에서는 감성에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방기한 감성적 즐거움 대신에 신이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방기된 즐거움은 부지중에 회복되는 것이다. 수녀는 신과 결혼한다. 수녀는 하늘나라의 신랑을 맞이하고 신부는 하늘나라의 신부를 맞이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처녀는 단지 종교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진리의 현저한 한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 부정한 것을 신 안에서는 긍정한다.(각주; 예를 들면,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자기를 경멸하는 사람은 신에게 있어서는 존경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신에게는 마음에 든다. 만일 너희가 신의 눈 속에서 크게 되고 싶다면 너 자신의 눈에서는 적게 되어라! 왜냐하면 너희가 인간에 의해서 경멸되면 될 수록 신의 옆에서는 그만큼 존중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과 세계를 제거한다. 그러나 종교는 그것이 현실적이든 혹은 상상적인 것이든 인간이나 세계의 결함과 제한, 공허한 것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나 적극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자신이 제거한 것 혹은 제거한다고 믿는 것을 제거나 부정속에서 또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종교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또 다시 신 안에 조정하는 것이다. 단, 종교가 그와 같이 의식적으로 부인할 때에도, 종교에 의해 부인된 것은 무엇인가 그 자체가 실재적인 것이고, 참된 것이며, 때문에 부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기의 이성理性을 부양한다.
인간은 자기로서는 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의 사상은 단지 현실적이며 지상적인 것 뿐이다. 인간은 단지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신 신의 사상은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사상이다. 신은 인간처럼 머리 속에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마치 교사가 학생들의 이해력에 순응하는 것처럼 신은 인간의 환경과 오성의 힘에 순응한다. 신은 자신의 선물과 계시의 효과를 엄밀하게 계산한다. 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관찰한다. 신은 모든 일, 가장 지상적인 것, 가장 비속한 것, 가장 악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신 안에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그의 인격성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인간에게는 전능하며 제한되지 않은 존재인 신이 인격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명예, 자신의 자아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신이 인간에게는 모든 것 속에서 오직 자기만을, 오직 자기의 명예만을,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이며 주아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을 다른 모든 것을 싫어하는 독특한 아욕我慾의 자기만족이며 이기주의의 자기향락으로서 묘사한다(각주; "신은 단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단지 자기 일만을 생각하며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행할 수 있다. 신은 인간을 만듦으로써 자기의 이익과 명성을 구한다" - S.P.Bayle의 「철학사 및 인류사에의 한 기여」) 더 나아가서 종교는 인간 본성의 성상으로서의 선도 부인한다. 인간은 사악하며, 타락해 있으며 선할 능력이 없다. 반면에 신은 오로지 선이며, 선한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은 대상화된 선으로서 언표되지 않을 것인가? 만일 내가 절대적으로 즉 천성적으로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신성하지 않다면 어떻게 신성한 것과 선한 것이 나에게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때 이 대상이 나에게 밖에서 주어진 것인가 혹은 안에서 주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만일 나의 심성이 사악하고 나의 오성이 타락해 있다면 어떻게 나는 신성한 것을 신성한 것으로서, 선을 선한 것으로 지각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나의 정신이 미학적으로 열등하다면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그림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지각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나 자신은 화가도 아니고 또 나 자신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산출해 낼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외부에 있는 아름다움을 지작함으로써 미적 감정과 미적 오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인간 본성의 신성함과 자비로움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나의 본성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것, 공통성의 유대로 전혀 나와 결합되어 있지 않은 것, 그러한 것을 나는 생각할 수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것은 나에게는 나의 인격성에 대한 대립물로서만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것은 나의 본성과의 통일로서만 대상인 것이다. 신성한 것은 깊은 죄에 대한 가책이며 그 신성한 것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신성한 것에서 나는 나 자신을 비난하는 반면 나는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의 규정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가능성이 없는 당위는 우스꽝스러운 요괴이며 심성에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선을 나의 사명이나 율법으로서 인식하는 것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을 나 자신의 본질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본성에 의해 나와 구별되는 다른 본성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죄를 죄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죄를 나와 나 자신과의 모순으로서, 즉 나의 인격성과 나의 본질성과의 모순으로서 느낄 때에만 죄를 죄로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로서 생각되는 신적 본질과의 모순으로서 죄악감은 증명 불가능하며 또 무의미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1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