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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December 28,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어거스틴주의Augustianinsmus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us와의 차이는 단지 후자가 합리주의의 유형으로 표현하는 것을 전자는 종교의 유형으로 표현한다는 것 속에 존립하여 있을 뿐이다. 양자는 같은 것을 말하며 똑같이 선을 인간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나 이것을 펠라기우스주의는 직접적으로 합리주의적-도덕적 형식으로 말하며, 어거스틴주의는 간접적으로 신비적 즉 종교적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다.(각주; 펠라기우스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에 매우 많은 힘을 부여하며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기도하는 마음을 약화시킨다"-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를 반박하여 장ㄴ과 은총에 관하여 논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단지 조물주 즉 자연을 기저로서 가지고 있을 뿐이며 구주 즉 종교적 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펠라기우스주의는 신을 부인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그 대신에 인간을,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독립적인 본질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높여 신으로 삼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같은 저서 제 33장 및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반대한 곳을 참조하라. 어거스틴주의는 인간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신을 인간에게로 저하시키고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굴욕까지 받게 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 어거스틴주의는 신을 인간의 지위에 놓는다. 양자의 귀결은 같다. 구별은 단지 가상이며 경건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거스틴주의는 단지 뒤집어진 펠라기우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주의가 주체로서 조정한 것은 어거스틴주의는 객체로서 조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쪽 모두가 똑같이 인간에게 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신에게 부여되는 것은 실은 인간 자신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인간의 신에 관해서 단언하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단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악마를 자신의 신으로서 가지고, 그리고 악마가 악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최고 존재로서 존경하며 찬미할 때에만 어거스틴주의가 진리,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와 대립되는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존재를 신으로 존경하는 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인간성의 근본적 타락에 관한 교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과 동일한 교의, 즉 인간은 어떤 선도, 실은 어떤 일도 자기 자신에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써는 행할 수 없다는 교의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힘과 자발적-도덕적 활동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이 신 안에서도 역시 도덕적 활동을 부정하고, 동양의 허무주의자 혹은 범 신론자와 똑같이 신적존재란 절대로 의욕하지 않으며 혹은 행위하지도 않는 존재, 무관한 존재,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할 때에만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신을 활동적인 존재, 그리고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활동적이며 도덕적으로 비판적인 존재로서 규정하는 사람-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선에는 보상하고, 악을 벌하고, 악을 거부하고, 악을 힐난하는 존재로서 규정하는 사람-은 단지 의관적인 인간의 활동을 부인할 뿐, 실은 인간의 활동을 최고이며 가장 확실한 활동으로 만들 것이다. 신을 인간적으로 행위하게 하는 사람은 인간적 활동을 신적 활동이라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활동적이 아닌 신, 그리고 도덕적으로 혹은 인간적으로 행위적이 아닌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성의 개념을 행위의 개념에 의존시킨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인간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 활동보다 더 높은 활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대상화하고, 그리고 다음에 또다시 자신을 주체나 인격으로 전화하여서 대상화된 존재의 대상으로 삼는다(각주;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대상화인 종교적인 자기대상화는 확실히 반성이나 사변의 자기대상화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에서 충분히 명백하게 언명되어 있다. 반성이나 사변의 자기 대상화는 자의적인 것이지만 종교의 자기 대상화는 자의적이 아니고 필연적인 것이다. 마치 종교적 자기 대상화의 필연성은 예술이나 언어의 필연성과 같은 것이다. 때가 감에 따라 물론 신학은 끊임없이 종교에 일치하게 된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인간은 자신을 사유하고, 자신에게 있어선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에게 대상이다라는 것은 대상의 대상, 즉 다른 대상의 대상으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지금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하여 하나의 대상이다.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신에게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신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에 대해 생기 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은 인간이 선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면 신의 자애 없이는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인간은 인간 행위의 무의미성을 철회한다. 즉 인간의 자기 성향과 행위를 신의 대상을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표로 삼으며-정신의 대상은 행위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신의 행위를 인간 구원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인간 해위를 의미있게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외관적으로는 가장 낮게 천시당하는 반면 실은 가장 높게 올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하여서 오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 행위의 목표를 인간의 도덕적이고 영원의 구원 이외의 다른 곳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목표가 없는 것이다. 신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신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와는 다른 행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행위라면 그것이 어떻게 나를 대상으로 내 안에서 작용할 수 있겠는가? 만일 신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면 신의 행위가 어떻게 인간적인 목표, 즉 인간을 선하고 행복하게 하는 목표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목표는 행위를 규정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인간이 도덕적인 개선을 자신의 목표로 설정한다면 인간은 신적 결단과 신적 기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만일 인간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면 신은 인간적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에 상응하는 인간적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하나의 대상으로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자기의 행위를 자신과 구별되는 대상적 행위로서 직관하며 선을 오직 대상으로서 직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충동과 동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선)으로 부터 받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자기 외부에서 찾고 이 본성을 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행에 대한 충동이 오직 그가 선하다고 하는 곳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은 자명하며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신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추상화된 최고의 주체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모든 선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이 주체가 되면 될수록 인간은 더욱 자신의 추체성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신 자신은 인간이 포기한 인간 자신이고, 그 포기한 자신을 다시 소유한다고 자신에게 변명하기 때문이다. 동맥의 활동은 혈액을 가장 외부에까지 보내고 정맥의 활동은 혈약을 다시 내부로 끌어들인다. 생명 또한 일반적으로 끊임없이 심장 수축과 심장 이완에 의해 존립하는 것이다. 종교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종교적 심장 수축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자신으로부터 몰아내고 인간은 인간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내던진다. 종교적 심장 이완에 있어서 인간은 일단 거부된 본성을 또 다시 자기의 심장속으로 받아 들인다. 오로지 신만이 스스로 행위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거부력의 작용이다. 신으 내 안에서, 나와 함께, 나를 통하여, 내 위에, 나를 위하여 행위하는 존재이다. 신은 나를 구원하는 원리이며 나의 선한 성향과 행위의 원리이며 결국 나 자신의 선한 원리이고 본성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견인력의 작용이다.

위에서 일반적으로 서술된 종교의 발전 과정은 특히 인간이 점점 더 신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점점 더 승인한다고 하는 것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처음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없이 자기의 외부에 조정한다. 이것은 특히 계시의 신앙 속에 나타난다. 후세대 혹은 문화가 발달된 민족에 대해선 자연이나 이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전 세대 혹은 아직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민족에 대해선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적 충동도 역시-뿐만아니라 청결에의 충동조차도-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例에서 우리는 동시에 다시 인간이 자신을 거부하면 할 수록 신은 바로 그만큼 낮아지며 평범한 인간의 유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상식적인 예의의 요구조차도 자발적으로 완수할 능력을 상실할 때보다 인간의 겸손이나 자기부인이 더 멀리 나아갈 때가 있을 것인가?(각주; 신명기 23장 12, 13절)

이에 반해서 기도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열정을 그들의 상상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한다. 기독교는 단지 선한 열정, 선한 성향, 선한 사랑만을 신의 계시, 신의 역사役事 즉 신의 성향, 신의 열정, 신의 사상으로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신이 제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은 말이 되어 나오고 원인은 결과와 같은 종류의 것이며 자기를 계시하는 존재는 계시와 같은 종류이다. 오직 선한 심성안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신은 그 자신 도덕적 완전만을 자기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신이다. 기독교는 내면적-도덕적 청정을 육체적 깨끗함과 구별한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하였다(각주; 예를 들면, 창세기 35장 2절 및 레위기 11장 44절, 20장 25절을 참조하라).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신에 의하여 명해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낼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은 외면적인 일에 있어서조차도 자기 자신의 의지라곤 없었다. 그 종교의 위력은 음식물에 관한 일에까지도 뻗쳐 있었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이 모든 외면적인 일들에 있어서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였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외부인 신 안에 놓았던 것을 인간 안에 놓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증주의의 가장 완결된 나타남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도는 교양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자유 사상가였다. 사물은 그와 같이 변한다. 어제까지고 여전히 종교였던 것이 오늘은 이미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된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2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3 장 오성의 본질로서의 신
http://uquehan.blogspot.kr/2013/01/das-wesen-des-christentum-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인간 문화의 발전 과정과 동일한 종교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가장 명료하게 알려진다. 인간에게 자연인이라는 술어가 어울리는 한, 인간도 신도 역시 단순한 자연신이다. 인간이 집 안에서 살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의 신들도 역시 신전에 둘러쌓여 살게 된다. 신전이란 단지 인간이 아름다운 건물로 인정하는 가치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종교의 명예를 위한 신전은 실제로는 건출물의 명예를 위한 신전인 것이다. 인간이 미개와 야만의 상태에서 문화에로 올라감과 함께, 인간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앟은 것이 구별되는 것과 함께, 동시에 신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별이 발생한다. 신은 존엄성의 개념, 최고 위엄의 개념이며, 종교적 감성, 최고의 적합한 감정이다. 후기의 교양 있는 희랍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위엄, 정신의 위대성, 부동의 평정함, 쾌활이라는 개념을 신들의 상像에 구상화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왜 이런 특성이 신의 속성이며 술어가 되었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런 특성이 그들 스스로의 신성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 예술가들은 모든 불쾌하고 경멸할 만한 정서를 배제하였던 것일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어떤 적합하지 않은 것, 위엄을 손상하는 것, 비인간적인 것, 따라서 비신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호머의 신들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한다. 즉, 음식은 신적인 향락이다. 체력은 호머의 신들의 특성이다. 제우스는 신들 중에서 제일 힘이 강한 신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체력 자체가 어떤 영광스러운 것, 신적인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전사의 덕이 옛날 독일인들에게는 최고의 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고의 신은 군신軍神 Odin이며, 전쟁은 "근본 법률 혹은 최고의 법률"이었다. 최고의 참된 신적 존재는 신성의 특성이 아니라 특성의 신성 혹은 신적 성질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학이나 철학에 의해 신, 절대자, 실체로 인정되었던 것은 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 그것이 바로 신이다. 즉 특성, 성질 규정성, 현실성 일반이 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무신론자, 즉 보통 의미에 있어서의 무신론자는 오직 신적 본질, 예를 들면 사랑, 지혜, 정의와 같은 술어를 무로 간주하는 사람뿐이며 이들 술어의 주어를 무로 간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주어를 부인한다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술어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술어는 독자적인-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술어는 그것들의 내용을 통해 인간에게 승인하도록 강요한다. 술어는 참이라는 것을 자신을 통해 직접 인간에게 밝힌다. 술어는 그들 자신이 확증하고 확신한다. 신의 실존이 망상이라고 해서 선, 정의, 지혜가 망상일 수는 없다. 또 신의 실존이 진리이기 때문에 선, 정의, 지혜가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의 개념은 정의, 자비, 지혜의 개념에 의존한다. 자비롭지도, 정의롭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이 없다면 자비, 정의, 지혜도 없는 것이다. 신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성질 자체가 신적이기 때문이며, 그 성질이 없으면 신은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의, 지혜(일반적으로 신의 신성을 형성하는 규정은 어느 것이나)는 그 자체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식된다. 그러나 신은 규정, 성질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신과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신을 바로 나의 정의 혹은 무엇인가 다른 성질의 이념의 현실성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만 나는 신을 신 자신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주어로서 규정된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술어인 성질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때엔 제 1급의 본질의 지위나 신성의 지위는 실제로 주어가 아니라 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많은 특성, 실은 서로 모순되는 특성이 하나의 본질에로 통합되어 이 본질이 인격적인 본질로서 파악되고, 따라서 특히 인격성이 강조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종교의 기원을 잊는 것이며, 또 반성의 표상에 있어서 주어로부터 구별 혹은 분리될 수 있는 술어가 근원적으로 참 주어였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나 희랍 사람들은 우유성Akzidenzen을 실체로 신화하였으며 덕, 기분, 정서를 독립적인 존재로서 신화하였던 것이다. 인간 특히 종교적인 인간은 자신에겐 만물의 척도이며 현실성의 척도이다. 그는 인간에게 외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인간의 마음에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단지 불가사의한, 증명할 수 없는 음향이라 할지라도 특수한 신적 존재로서 인격화한다. 종교는 세계에 있는 모든 대상을 포괄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교적 존경의 대상이었다. 종교의 본질과 의식 속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인간 자신과 세계에 관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 종교는 배타적으로 자체의 내용은 조금도 갖지 않는다. 로마에서는 공포의 정서조차도 그것들을 위한 신전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심정의 현상을 존재자로 삼았고 그들의 감정을 사물의 성질로 삼았으며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를 세계를 지배하는 위력으로 삼았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이 지금 알려져 있는 것이든가 혹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든가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의 특성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존재로 삼았던 것이다. 악마, 요괴, 마녀, 유령, 천사는 종교적 정서가 분리되지 않은 채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한 성스러원 진리였던 것이다.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와의 동일성을 염두에서 없애고 그것과 함께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동일성을 염두에서 추방하기 위해 사람들은 신이 무한한 존재로서 다양한 술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충일充溢이라는 표상에 의지하였다. 이들 술어 중에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단지 일부분뿐이다. 그리고 실은 우리와 같은 종류의 것 혹은 우리와 유사한것 뿐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적인 본질(혹은 인간과 유사한 본질)과는 전혀 다른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외의 술어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술어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미래, 즉 피안의 세계에서 비로소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나 다양함으로 한 편이 인식되고 조정되는 것과 함께 즉시 다른 편도 인식되거나 조정될 수 없는 많은 술어의 무한한 충일 혹은 집합은 단지 다양한 존재 혹은 개인의 무한한 충일 혹은 집합 속에서만 실현되고 확보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인간의 본질은 다양한 술어로 이루어져 있는 무한한 부富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다양한 개인의 무한한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인간은 모든 인류의 새로운 술어이며 새로운 재능인 것이다. 인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만큼 인류는 더 많은 힘, 더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각 개인 안에서 다양하게 규정되고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은 하나의 독특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충일하는 술어의 신비란 무한히 다양하고 또한 무한히 규정될 수 있으나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본성으로서의 인간 본성의 신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무한한, 현실적으로 무한한 규정이 풍부한 본질은 단지 감성의 영역 안에서만, 단지 시간 공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로 다양한 술어가 있는 곳에는 다양한 시간이 존재한다. 이 인간은 탁월한 음악가, 탁월한 저작가, 탁월한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연주도 하고, 저작도 하고, 치료도 할 수는 없다. 여러 대립과 모순을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 속에서 결합하기 위한 수단은 헤겔의 변증법이 아니라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신의 개념과 결합된 무한히 많고 다양한 술어들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개념, 단순한 환상, 감각 세계로부터 도출된 개념에 불과하다-그러나 실존적 상황이 없고 실존의 사실성은 없다. 그와 같은 개념은 정신적 즉 추상적이고 단순한 유일한 존재로서의 신적 존재와는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술어는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술어가 다른 모든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술어 사이에는 어떤 현실적인 구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현재의 술어 속에 미래의 술어를 갖기 않고 또 현재의 신 안에 미래의 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 나는 미래의 신 안에 현재의 신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두 개의 다른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각주;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현재의 신과 미래의 신 사이의 구별은, 전자는 신앙, 표상, 상상의 객체이며 후자는 직접적인, 즉 인격적-감성적인 직관의 객체라고 하는 것에 한한다. 신은 현세에도 내세에서도 동일하지만 그러나 현세에서는 불명료하지만 내세에서는 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차별성이 바로 신의 유일성, 통일성, 단순성에 모순되는 것이다. 왜 수여된 술어가 신에 관한 술어인가? 왜냐하면 그 술어가 신적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제한도 아무 결함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술어들은 왜 신에 관한 술어인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아무리 다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꼭 같이 완전성과 비구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에 관한 술어르 ㄹ무한히 표상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일치하며 각개의 술어로 하여금 신적 속성 혹은 술어로 만드는 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스피노자는 신적 실체의 무한히 많은 속성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유와 연장외에는 무엇 하나 이름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것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들은 그 자체가 쓸모없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 무수히 많은 술어를 가지고도 결국 두개의 술어-사유와 연장-에 관해서 말하는 것 밖에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유는 실체의 속성인가?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그 자체에 의해 의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어떤 불가분자, 완전자, 무한자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왜 연장, 물질은 실체의 속성인가?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체에 대해 관계에서 사유에서와 같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술어에 관한 무한히 많은 술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정성, 구별이 아니라 그것들의 비차별성, 동등성이 술어를 실체의 속성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혹은, 오히려 실체가 무한히 많은 술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실체가 본래 아무 술어도 갖지 않은, 즉 어떤 규정된 현실적인 술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의 무한한 일자는 상상의 산물인 무한한 다양성에 의해서 보충된다. 술어는 수다數多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하다(각주; 수다數多가 아니라 다양하다) 진실로 적극적인 술어는 사유와 연장이다. 이 두 술어를 가지고 언표할 수 있는 것은 이름도 없는 무수한 술어를 가지고 언표할 수 있는 것보다도 무한히 많다. 왜냐하면 사유와 연장에 의해서는 어떤 규정된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유와 연장에 의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는 어떤 일에 대해 감격한다든가 어떤 것을 결심하기에는 너무 냉정하다. 실체는 어떤 것이 아니기 위하여 오히려 무無인 것이다.

그런데 주어 혹은 본질의 본성은 전적으로 주어 혹은 본질의 규정안에 있다는 것, 즉 술어가 참된 주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만일 신의 술어가 인간 본성의 규정이라면 신의 술어와 주어도 역시 인간 본성의 주어라는 것도 역시 증명된다. 그러나 신에 관한 술어는 한 편으로는 일반적인 것이며 다른 편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것이다. 신에 관한 일반적 술어는 형이상학적인 술어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술어는 종교에 있어서는 단지 가장 외면적인 결합점 혹은 기초로서만 쓸모가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적인 술어는 종교의 특징적인 규정은 아니다. 오직 인격적 술어만이 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술어에 있어서 신적 존재가 종교의 대상이다. 그와 같은 인격적 술어란, 예를 들면 신은 인격이요 도덕적인 율법의 제공자, 인류의 아버지, 거룩한 자, 외로운 자, 선한 자, 자비로운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개념 규정에 관련해서 곧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혹은 적어도 결국 명백해질 것이다. 즉 이런 규정들은 전적으로 인격적인 규정으로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규정이라는 것과 결과적으로 종교적 인간은 신에 관련할 때에 특히 자기 자신의 본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 있어서 이들 술어는 신 자신의 존재와는 구별되는, 인간이 만든 신에 관한 표상이나 심상들이 아니라 진리, 사실, 실제성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의인 표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종교에 있어서 의인 표현은 의인 표현이 아니다. 종교에 관한 이러한 규정은 신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종교적 본질인 것이다. 오성은 종교를 반성하고 또 종교를 변호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직면해서는 종교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이 오성만이 신에 관한 술어를 심상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 신은 실재의 아버지, 실재의 사랑, 실재의 자비이다. 왜냐하면 종교에 있어서 신은 현실적이고 살아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신의 참 규정은 또한 살아 있는 인격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성의 최대의 분격을 주는 규정, 오성이 종교를 반서앟ㄹ 때에 거부하는 규정이야말로 바로 신의 가장 충족한 규정인 것이다. 종교는 주관적으로는 정서이다. 따라서 종교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도 역시 신적 본성의 정서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도 역시 신적 본성의 정서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는 노여움조차도 신에게 결코 불명예스런 정서가 아니다. 단 어떤 사악함도 이 노여움이 기초가 되지 않을 때에 한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즉 본질로 보아서 신이 인간적이면 인간적일 수록 외관으로 신과 인간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 다시 말하면 종교에 관한 반성이나 신학에 의해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의 동일성이 점점 더 부정되는 것이며, 인간에 대해서 바로 인간적인 것으로서 그의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적인 것은 점점 더 저하된다는 것이다(각주;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이 아무리 크게 생각된다하더라도 그래도 양자 사이의 비유사성은 한층 더 큰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안된다"-Later Conc. can. Z. 인간과 신 사이의 궁극의 구별, 일반적으로 유한한 본질과 무한한 본질 사이의 궁극의 구별은 어떤 것과 무 사이의 구별, 유와 비유非有 사이의 구별이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본질과의 공재성이 폐기되어 있는 것은 단지 무에 있어서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적이고 사변적인 상상은 그 궁극의 구별에까지도 뛰어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산은 종교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을 특징짓는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신적 존재의 직관 혹은 규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의식의 대상인 것과 같이 인간의 직관은 단지 소극적이여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직관엥 불과하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신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빈곤하게 되어야 하며, 신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에게서 끌어 낸 것은 신에게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보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신 안에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자기 속에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본질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이 무엇 때문에 같은 것을 두번 조정하고 그리고 두 번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끌어 낸 것,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결해 있는 것, 이것을 인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중요하게 신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승려들은 신에게 순결을 서약하였다. 그들 자신에 있어서 이성애를 억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신에 하늘나라에, 신 안에, 성녀 마리아에 있어서 여인의 상, 사랑의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표상된 이상적인 여인이 현실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만큼 그들은 실재의 여인 없이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감성의 부정에 큰 의의를 두면 둘 수록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처녀가 그 만큼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에 있어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나 신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감성적인 것이 부정되면 될 수록 감성적인 것이 희생으로 바쳐지는 대상인 신은 그만큼 더 감성적이다. 즉 사람들이 신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그것에 사람들은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은 특별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에서 최고인 것은 당연히 그의 신의 의미에서도 최고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드는 것은 신에게도 역시 마음에 드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불결하고 또 자신들이 싫어하는 동물을 여호와에게 바친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치가 있는 동물, 히브리 사람들 자신이 먹던 동물이 또한 신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감성의 증거움을 부정하여 특수한 제물, 신의 마음에 드는 희생물을 만드는 곳에서는 감성에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방기한 감성적 즐거움 대신에 신이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방기된 즐거움은 부지중에 회복되는 것이다. 수녀는 신과 결혼한다. 수녀는 하늘나라의 신랑을 맞이하고 신부는 하늘나라의 신부를 맞이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처녀는 단지 종교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진리의 현저한 한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 부정한 것을 신 안에서는 긍정한다.(각주; 예를 들면,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자기를 경멸하는 사람은 신에게 있어서는 존경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신에게는 마음에 든다. 만일 너희가 신의 눈 속에서 크게 되고 싶다면 너 자신의 눈에서는 적게 되어라! 왜냐하면 너희가 인간에 의해서 경멸되면 될 수록 신의 옆에서는 그만큼 존중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과 세계를 제거한다. 그러나 종교는 그것이 현실적이든 혹은 상상적인 것이든 인간이나 세계의 결함과 제한, 공허한 것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나 적극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자신이 제거한 것 혹은 제거한다고 믿는 것을 제거나 부정속에서 또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종교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또 다시 신 안에 조정하는 것이다. 단, 종교가 그와 같이 의식적으로 부인할 때에도, 종교에 의해 부인된 것은 무엇인가 그 자체가 실재적인 것이고, 참된 것이며, 때문에 부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종교에 있어서 자기의 이성理性을 부양한다.

인간은 자기로서는 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의 사상은 단지 현실적이며 지상적인 것 뿐이다. 인간은 단지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신 신의 사상은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사상이다. 신은 인간처럼 머리 속에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마치 교사가 학생들의 이해력에 순응하는 것처럼 신은 인간의 환경과 오성의 힘에 순응한다. 신은 자신의 선물과 계시의 효과를 엄밀하게 계산한다. 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관찰한다. 신은 모든 일, 가장 지상적인 것, 가장 비속한 것, 가장 악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신 안에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그의 인격성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인간에게는 전능하며 제한되지 않은 존재인 신이 인격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명예, 자신의 자아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신이 인간에게는 모든 것 속에서 오직 자기만을, 오직 자기의 명예만을,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이며 주아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을 다른 모든 것을 싫어하는 독특한 아욕我慾의 자기만족이며 이기주의의 자기향락으로서 묘사한다(각주; "신은 단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단지 자기 일만을 생각하며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행할 수 있다. 신은 인간을 만듦으로써 자기의 이익과 명성을 구한다" - S.P.Bayle의 「철학사 및 인류사에의 한 기여」) 더 나아가서 종교는 인간 본성의 성상으로서의 선도 부인한다. 인간은 사악하며, 타락해 있으며 선할 능력이 없다. 반면에 신은 오로지 선이며, 선한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은 대상화된 선으로서 언표되지 않을 것인가? 만일 내가 절대적으로 즉 천성적으로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신성하지 않다면 어떻게 신성한 것과 선한 것이 나에게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때 이 대상이 나에게 밖에서 주어진 것인가 혹은 안에서 주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만일 나의 심성이 사악하고 나의 오성이 타락해 있다면 어떻게 나는 신성한 것을 신성한 것으로서, 선을 선한 것으로 지각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나의 정신이 미학적으로 열등하다면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그림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지각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나 자신은 화가도 아니고 또 나 자신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산출해 낼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외부에 있는 아름다움을 지작함으로써 미적 감정과 미적 오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인간 본성의 신성함과 자비로움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나의 본성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것, 공통성의 유대로 전혀 나와 결합되어 있지 않은 것, 그러한 것을 나는 생각할 수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것은 나에게는 나의 인격성에 대한 대립물로서만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것은 나의 본성과의 통일로서만 대상인 것이다. 신성한 것은 깊은 죄에 대한 가책이며 그 신성한 것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신성한 것에서 나는 나 자신을 비난하는 반면 나는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의 규정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가능성이 없는 당위는 우스꽝스러운 요괴이며 심성에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선을 나의 사명이나 율법으로서 인식하는 것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을 나 자신의 본질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본성에 의해 나와 구별되는 다른 본성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죄를 죄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죄를 나와 나 자신과의 모순으로서, 즉 나의 인격성과 나의 본질성과의 모순으로서 느낄 때에만 죄를 죄로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로서 생각되는 신적 본질과의 모순으로서 죄악감은 증명 불가능하며 또 무의미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1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3/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33.html


곽노현, 사후매수죄....

법리적 해석의 문제를 떠나서 돈 이야기 해보자면 ;

곽노현교육감이 박명기교수에게 건넨 "2억원에 대해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2억원은 액수가 너~무 적었다. 물론 2억이 통상적인 부조금으로 너무 많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지만 전후사정을 보면 그렇지 않다.

교육감선거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박명기교수는 중도사퇴하고 이후 곽노현교수가 교육감에 당선되었고 선관위로 부터 선거비용 35억원을 보전받았다. 그런데 중되사퇴한 박명기교수는 단 한 푼의 선거운동 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고 7억 이상의 빚더미에 올라 않았다. 강경선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박명기교수는 극단적인 상태에 있었다라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곽노현 교육감은 당연히 박명기의 선거비용을 일부라도 보조해 줘야 하는게 맞지 않는가? 쌩까고 나 몰라라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박명기교수에게 돈 준 것이 정당하며, 나는 2억이 아니라 빚을 변제할 수 있는 7억을 줬어야 하는게 맞다라고 본다.


"곽노현 교육감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운동비 보전 명목으로 35억 원을 받았으며, 후원금 등으로 인해 기대하지 않았던 1억5천만 원의 초과 수입까지 발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단 한 푼의 선거운동 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고 7억 이상의 손실을 본 옛 경쟁자이자 동료에게 2억 정도 도와주는 것이 그토록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님은 금방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 [권재원의 교육창고] 괴상망측한 판결, 곽노현은 한국판 드레퓌스가 됐다 2012-09-27 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197

Thursday, December 27,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된 것은, 감성적 대상에 관해서조차도,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해당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대상 의식은 자아 의식과 구별된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 의식은 자아 의식과 일치한다. 감성적 대상은 인간 밖에 있고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 자신 내면적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아 의식, 인간의 양심과 같은 친밀한 대상이다. 즉, 종교적 대상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친밀한 대상이다. 예를 들면, 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신은 감성적-육체적인 사물보다도 더 가깝고 더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용이하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각주 ; 「원리론」 제 5권, 제 16장) 감성적 대상은, 그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대상이며 심성에서, 판단력에서 독립하여 있다. 그러나 종교의 대상은 선택된 대상이며 가장 우수한 제 일급의, 최고의 존재이다. 종교적 대상은 비판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 즉, 종교적 대상은 신적인 것과 비신적인 것의 구별을 전제하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숭배할 가치가 없는 것의 구별을 전제한다(각주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옥타비안Octavian」 제 24장에서 이교도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사람들이 신을 존경하기 이전에 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의 대상은 인간의 대상적 본성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명제가 어떤 제한도 없이 타당할 것이다. 인간의 사유와 성향은 신의 사유나 성향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神의식은 인간의 자아 의식이며 神 지식은 인간의 자아 지식이다. 그대는 인간의 신으로부터 인간을 인식하며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부터 인간의 신을 인식한다. 인간과 인간의 신은 동일하다. 인간에게 신인 것은 인간의 정신이고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정신, 인간의 마음, 인간의 심정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신이 언표된 것이다. 종교란 인간의 숨은 보물이 엄숙하게 개막되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사상이 고백되는 것이며 인간의 사랑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고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의식인 종교가 인간의 자아 의식으로서 특징지어질때 마치 경건한 인간이 신에 대한 자아 의식이 자신의 본질의 자아의식이라는 것을 직접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직접적 의식의 결핍이 바로 종교의 특유한 본질을 기초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종교는 인간의 최초의 자아 의식이며, 실은 간접적인 자아 의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디서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와 같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철학에 선행한다.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전에 자신의 밖에서 잘못 인정한다. 인간 자신의 본성은 최초로 다른 존재자로서 대상이 된다. 종교는 인류의 본성의 어린아이다운 측면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기의 본성을(즉 인간을) 자기 밖에서 본다. 어린아이로서의 인간은 타인으로서의 자기에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에 ㅇㅆ어서의 역사적인 발전은 초기의 종교에 의해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후에는 주관적인 것으로서 인정된다는 것, 즉 신으로 직관되고 숭배되었던 것이 후에는 어떤 인간적인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는 것이다. 전에 종교였던 것이 후에는 우상숭배가 된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숭배해 왔다. 인간은 자기를 대상화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대상을 자기의 본성으로서 인삭하였던 것은 아니다. 후의 종교는 거기까지 진보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있어서 진보란 어느 것이나 인간의 자아 인식을 한층 더 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는 어는 것이나 언니들에게 우상 숭배녀라는 각인을 찍고 자신들만을 그러한 운명의, 즉 종교 일반적인 본성의 예외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특정한 종교는 이미 종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교는 종교 일반의 죄-만일 이것을 죄라고 말해도 괜찮다면-를 다만 자신 이외의 종교에만 투입한다. 그 종교는 하나의 다른 대상, 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전의 종교의 내용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종교는 종교의 본질을 기초하고 있는 필연적이며 영원한 법칙을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의 대상이나 내용이 초인간적인 것이라고 망상한다. 그러나 그 대신 종교를 고찰의 대상으로 하고 ㅇ있는 사상가는 종교 자체에 숨어 있는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바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신과 인간)의 대립은 착각이라는 것, 즉 그 대립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인의 본성 사이의 대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기독교의 대상과 내용은 모두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자신과의 관계, 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과 자기의 본성, 즉 자기의 주관적인 본성과의 관계이다. 신적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혹은 좀더 바르게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개의 인간, 즉 현실적-육체적 인간의 제한에서 분리되어 대상화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인과 구별되어 대상화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적 본성은 인간본성이 개인과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성으로서 직관되고 존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본성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성의 규정이다(각주; "신의 완전성은 우리의 영혼의 완전성이다. 그러나 신은 완전성을 무제한하게 점유하고 있다. 우리는 약간의 능력, 약간의 인식, 약간의 착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에 있어서는 완전인 것이다." - Leibniz, 「변신론」 서언.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뛰어나게 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질에 있어서도 역시 고유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은 영혼의 본질 규정에도 역시 속하지 않는다 - 닛사(Nyss)의 성 그레고리우스 「영혼에 관하여」, Lips, 1837. p.42. "그러므로 모든 지식 중에서도 가장 좋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인식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안다면 그때 그는 또한 신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교육자」 제 3권 제 1장.)

신적 존재의 술어, 즉 성질 혹은 규정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승인되지만 그러나 주어, 즉 술어의 기체基體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주어의 부인은 무신앙이나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의 부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규정도 없는 것, 술어가 없는 것은 나에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나에겐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규정을 폐기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규정이 없는 존재는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이며,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는 허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게서 모든 규정을 빼앗아 버리는 곳에서는 신은 인간에게 단지 소극적인, 즉 허무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결코 규정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확실하고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무규정성 그리고 이것과 동일한 불가 인식성은 근대의 소산이며 근대적 불신앙의 산물일 뿐이다.

이성이 유한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또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다만 감성적 향락 혹은 종교적 감정 혹은 미적 직관 혹은 도덕적 심성을 절대적인 것,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곳에서만 그러하다. 그와 같이 신의 불가인식성 혹은 불규정성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교의로서 언표되고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 대상(神)이 이미 인식의 관심사가 아닌 경우이다. 그리고 또 현실성만이 인간의 마음을 끌고, 인간에게 현실적인 것 만이 본질적-절대적-신적 대상이라고 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아직, 동시에 이 순수하게 세속적인 경향과 모순되는 종교심의 낡은 잔재가 현존하고 있다. 인간은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종교적 양심 앞에서 신을 잊고, 속세에서 길을 잃고 있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신의 불가인식성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인간은 신을 실천적으로 행위에 의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호와 생각하는 것은 모두 현세의 것이다-그러나 인간은 이론적으로 신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신의 실존을 배격하지 않고 신의 존립을 승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실존을 배격하지 않고 신의 존립을 승인한다. 그러나 신의 실존은 인간에게 관계가 없으며 인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신의 실존은 단지 소극적인 실존, 실존 없는 실존, 자기 자신에 모순되는 실존이다. 즉, 영향이라는 점에서 보아 비존재와 구별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적 본성에 관해 적극적-규정적 술어를 부인한다는 것은 종교를 부인하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그 자체를 위해 종교의 가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인으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심하고 교활한 무신론에 불과하다. 규정된 술어에 의해 신을 유한화한다는 의견적-종교적 공포는 단지 신에 대해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신을 망각하려는 믿음 없는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유한하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존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모든 현실적인 실존, 즉 진실로 실존하는 실존은 질적으로 규정된 실존이다. 신의 실존을 진정으로, 실제로 믿는 사람은 신의 감성적인 성질에도 부딪치지 않는다. 규정에 의해서 모욕을 느끼는 신은 실존하려는 용기도 힘도 없는 것이다. 질은 실존의 불, 산소, 소금이다. 실존 일반, 즉 질이 없는 실존은 무의미한 실존이다. 그러나 신 안에는 종교 안에 있는 이상의 것은 없다. 오직 인간이 종교에 대해 취미를 잃고, 종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곳에서만 신의 실존은 무미 건조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서술한 직접적인 방법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법으로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신적 본성의 술어가 유한한, 특히 인간적인 규정이라는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부는 거부된다. 인간에겐 신에 관해 규정된 개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규정을 보호조차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신에 관해서 바로 인간적인 표상 이외의 어떤 표상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이들 규정이 물론 신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의의가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신의 모습은 나에게 보이는 모습대로, 즉 인간의 본질(속성)과 비슷한 본질을 지닌 존재 이상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신 자체에 있어서의 존재와 나에 대한 존재를 구별하는 것은 종교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게다가 그 자체가 근거 없는 구별이다. 나는 신이 자신에 있어서 혹은 자신을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인지 아닌지 조금도 알 수가 없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이 나에게는 신의 전부이다. 나에게 있어서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할 때의 규정 속에 그 자신의 존재의 신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신은 나를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관계에 있어 신의 존재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그는 신의 그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꼭 인간 일반에게 존재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와 같이 인간이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과를 구별지을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초월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즉, 나는 대상이 단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서만 자체에 있어서 있는 것과 나를 우해 존재하는 대상과의 구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나의 절대적 척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곳, 또 대상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나는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과의 구별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나의 개념은 주관적인 개념일 수 잇다. 즉 종속Gattung과 결부되지 않은 표상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표상이 종속의 척도에 상응한다면 자체에 있어서의 존재와 나를 위한 존재 사이의 구별은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 표상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종속의 척도는 인간의 절대적 척도, 법칙, 규준이다.

그러나 종교는, 바로 종교가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이나 규정은, 인간이 신에 관한 참된 표상이나 규정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각 사람이 가져야 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표상이나 규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종교는,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이나 규정은 인간이 신에 관한 참된 표상이나 규정을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각 사람이 가져야 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표상이나 규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종교는, 신에 관해 부여하는 표상은, 인간성에 필연적인 표상-아니, 객관적으로 신에게 적합한 표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다른 종교의 신들은 단지 신에 관한 표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종교가 신에 관해 가지고 있는 표상은 신 자신이며, 표상하는 신은 진정한 진실한 신, 자체로서 존재하는 신이다. 종교는 다만 숨겨진 것이 없는 전체적인 신에게만 만족하는 것이다. 종교는 신 자신, 신의 인격을 원한다. 종교가 신의 본성을 폐기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종교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종교가 만일 참된 신의 소유를 단념한다면 그때 종교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회의론은 종교의 큰 적이다. 그러나 대상과 표상 사이의 구별, 자체에 있어서의 신과 나를 위한 신 사이의 구별은 회의론적 구별이며 따라서 믿음이 없는 구별이다.

인간에게 자존적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최초의 존재, 인간이 더 이상 높이 생각할 수 없는 존재-그는 바로 인간에게 신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대상의 경우 그 자체로서 무엇인가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신이 새(Vogel)에게 대상이라면 신은 날개가 달린 존재로서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에게는 최고의 존재,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날개가 달려 있는 존재로서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에게는 최고의 존재,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날개가 달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가 "내가 보는 신은 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새에게 최고의 존재란 바로 새의 본질이다. 새에게서 이런 개념을 제거 시킨다면 새에게서 최고 존재의 개념을 제가하는 것이다. 어떻게 새가 신 자체의 모습에 날개가 달려 있는지 아닌지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신 자체의 모습이 내가 보는 신과 같은가를 묻는 다는 것은 신이 신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며 자신을 자기의 신 위에다 두는 것이며 신에 대항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술어는 의인 표현, 즉 인간적 표상에 불과하다는 인간의 의식이 있는 곳에는 이미 회의, 불신앙이 신앙을 정복했던 것이다. 이 의식으로 부터 술어의 형식적인 부인으로 나아가고 또 다시 이 부인에서 술어와 관계 있는 주어의 부인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심정의 비겁함과 오성의 나약함에서 오는 철저하지 못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술어의 대상적 진리를 의심한다면 당신은 그들 술어의 주어의 진리성도 의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술어가 의인 표현이라면 그 술어의 주어도 역시 의인 표현인 것이다. 만일 사랑, 자비, 인격성이 인간적 규정이라면 당신이 전제한 주어, 신의 실존, 일반적으로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신앙도 역시 의인 표현-철저하게 인간적 전제-이다. 시에 대한 신앙 일반이 인간적 표상 방법의 한계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보다 높은 존재-그리고 당신이 가정한 보다 높은 존재-는 아마도 그를 자체에서 매우 축복받고 있으며 또 그들 자신과 매우 화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보다 높은 존재 사이의 긴장을 느끼는 일이 없다. 신을 알면서도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 축복을 알면서도 자신은 축복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분열이며 불행이다(각주; 그러므로 피안에 있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그 같은 분열도 역시 폐기된다. 피안에 있어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 곳에선 아마도 인간은 단지 상상의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신의 의지로부터 구별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조금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피안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구별도 대립도 모두 소멸한다. 그러나 신만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미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엄에 대립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존엄한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높은 존재는 이 불행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한 존재는 그들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어떤 표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이 신적 성질로서 사랑을 믿는 것은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을 현명하며 자애로운 존재자라고 믿는 것은 당신 자신이 자비심이나 오성보다 더 좋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고 또한 신은 주체 혹은 본질이라는 것을 믿는-실존하는 것은 실체 혹은 인격 혹은 그 외 어떤것으로 규정되고 특성지어진다 하더라도 본질이다-것은 당신 자신이 실존하기 때문이며 당신 자신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한다든가, 자비롭다든가, 현명하다는 것 보다 더 높은 인간적 선을 알지 못한다. 그와 같이 당신은 실존한다는 것, 주체가 된다는 것보다 더 높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 의식, 모든 행복의 의식은 본질 의식, 실존 의식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에게 있어 현명한 존재이며, 축복된 존재이며, 자비로운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당신에게 있어 실존자이며 본질이다. 신적 술어와 신적 주체 사이의 구별은 단지 당신에게는 주체, 실존이 의인 표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런 본질이라는 것 속에서는, 신이 당신에게 실존자이며 본질이지만, 반대로 신의 성질(술어)은 의인 표현으로서 나타난다는 필연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성질의 필연성, 즉 신이 지혜로우며 선하며 의롭다고 하는 필연성은 인간 존재와 동일한  직접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식 사유, 활동에 의해 매개된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명한 사람이든 혹은 바보이든, 착한 사람이든 혹은 악인이든 나는 주체이며, 본질이며, 나는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제일의 것이고, 인간의 표상에 있어서는 근본 본질이고 술어의 전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술어를 버린다. 그러나 신의 실존은 인간에게 기정의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대상적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존재)과 성질 사이의 그와 같은 구별은 오직 표면적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의 필연성은 다만 술어의 필연성 속에 가로놓여 있다. 당신은 다만 인간적 본질로서만 본질인 것이다. 당신의 실존의 확실성과 살재성도 당신의 인간적 성질의 확실성과 실재성 속에만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주어로 하여금 주어이게 하는 것은 술어 안에만 있다. 술어는 주어의 진실이다. 주어는 단지 인격화된 술어이며 실존하는 술어이다. 주어와 술어는 단지 실존과 본질처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어의 부인은 주어를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적인 본질에서 인간적 성질을 빼버린다면 인간적 본질 속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일상 생활어에 있어서조차도 사람들은 신적 본질 대신에 섭리, 전지, 전능이라는 신적 성질의 말을 사용한다.

신의 실존의 확실성은 인간에겐 대단히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자신의 실존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말하였다. 신의 실존의 확실송은 오직 신의 성질의 확실성에 의존한다. 즉, 신의 실존의 확실성은 어떤 직접적인 확실성은 아니다. 기독교도에세는 기독교적인 신의 실존만이 확실성이며 이교도에게는 이교적인 신의 실존만이 확실성이다. 이교도는 주피터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교도는 주피터의 본성에서 전혀 성나게 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그 외의 다른 성질에 있어서도 신을 표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 그 성질이 확실성이며 신적 실재성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술어의 실재성만이 실존을 보증하는 것이다.

인간은,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현실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근원적으로 참된 것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표상된 것, 몽상된 것, 상상된 것과는 대립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존재의 개념,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제 1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혹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진리를 실존에 의존시키며 그 결과로써 실존을 진리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성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종교는 마치 인간이 그의 본성을 파악하여 최고의 존재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다양한 것만큼이나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 이 규정성은 인간에겐 진리이며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동시에 최고의 실존 혹은 오히려 실존 자체이다. 왜냐하면 오직 최고의 실존만이 본래적인 실존이며 실존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이 규정된 존재라는 같은 이유에 의해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인 존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질 혹은 규정서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성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실존, 현실성을 단지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희랍 사람에게서 그의 특성을 제거한다면 그의 실존을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종교에 대해서, 즉 상대적으로 신의 실존에 관한 확실성은 직접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희랍 사람이 희랍 사람이었다는 것이 필연적인 일인 것처럼, 희랍 사람의 신들은 필연적으로 희랍적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실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란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직관이 인간의 본질과 동일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직관이 인간의 본질과 동일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본직적 직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직적 직관이 인간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인간을 활기 있게 하고, 규정하고, 지배하기도 하는 것이다.

증명의 필요, 본질 혹은 성질과 실존과의 매개의 필요, 회의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단지 내가 나 자신의 본질로부터 분리하는 것만이 나에게 있어서는 의심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본질인 신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나의 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신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즉 신의 술어가 철학적 추상에 의해서 매개될 때에만 주어와 술어, 실존과 본질을 구별하는 일이 생긴다. 실존 혹은 주어(주체)가 술어 이외의 어떤 것이며, 직접적인 것이며, 의심할 수 있는 술어와는 구별된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망상이 발생하는 것도 역시 위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 술어를 갖는 신은 또한 추상적 실존을 갖는다. 실존이나 존재는 성질이 다양한 만큼 다양하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2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2/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23.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

인간의 이성 혹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제한한다는 것은 모두 기만이나 오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로서의 인간 존재는 자기를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느끼고 또한 인식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인간의 개체와 짐승의 개체와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제한이나 자기의 유한성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의 완전성이나 무한성이 그에게 있어서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개인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감정의 대상으로서든지, 양심의 대상으로서 든지, 사유하는 의식의 대상으로서든지 어느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제한을 종의 제한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인간의 개체가 자기의 종과 동일시하는 기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만은 안일함, 태만, 허영, 이기심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순전히 나의 제한으로서 알고 있는 제한은 나를 낙담시키고 수치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 수치심, 이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개성의 제한을 인간 본질 일반의 제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나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이상 무엇을 마음써야 할 것인가? 그렇다 그 제한은 나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오성의 책임이 아니라 종족 자체의 오성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개체의 절대적 본질인 인간의 본성과 종족의 본질을 유한하고 제한된 것으로서 규정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도 모독적인 오류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자도 자기 자신에 있어서 제한된 존재자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오히려 자체 안에 그리고 자체에 대하여 무한하며, 자기의 신, 자기의 최고의 본질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자의 제한은 모두 단지 그 존재자 이외의 그리고 그 존재자 이상의 다른 존재자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하루살이의 생명은 더 오래살고 있는 동물의 생명과 비교하면 대단히 짧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살이에게는 이 짧은 생명도 다른 동물에게 있어서의 수년의 생명만큼이나 긴 것이다. 모충이 살고 있는 나뭇잎은 그 모충에게 있어서는 전 세계이며 무한한 공간이다.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그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자의 재능이며, 그 존재자의 능력이며, 그 존재자의 부이며, 그 존재자의 장신구이다. 그 존재자의 존재를 비존재로서 지각한다든가, 그 존재자의 부를 결핍으로서 지각한다든가, 그 존재자의 재능을 무능으로서 지각한다든가 하는 일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만일 식물이 눈, 취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모든 식물은 자기의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단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식물의 오성, 그식물의 취미는 그 식물의 본질의 생산력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물의 본질의 생산력이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그 식물의 오성, 그 식물의 취기마 최고의 것으로서 긍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 오성이나 판단력은 이미 이 특정한 본질의 오성이나 판단력이 아니고 어떤 다른 본질의 오성이나 판단력이 될 것이다. 본질의 척도는 또한 오성의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본질이 제한되어 있다면 감정도 제한되어 있고 이성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본질에 있어서 제한된 오성은 제한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히 행복하고 또 만족해 하는 것이다.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훌륭하고 신적인 힘으로 생각하고, 찬미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제한된 오성은 또한 자기 편에서도 제한된 본질을 찬양한다. 제한된 오성은 제한된 본질의 오성이다. 양자는 가장 엄밀하게 적합한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불화할 수 있을 것인가? 오성이란 본질의 시야이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의 눈이 다다르는 한 연장되는 것이며 또 역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의 본질이 연장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어떤 짐승의 눈은 그 짐승의 욕구를 넘어서 멀리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한되지 않은 자기의식은 당신의 본질이 도달하는 곳까지 이를 것이며, 그리고 당신은 그곳까지 신이다. 오성과 본질 사이의 분열,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의 사유력과 생산력 사이의 분열은, 한 편에서는 보편적 의미를 갖지 않은 단순한 개인적 분열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단지 외견적인 분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쓴 졸렬한 시가 졸렬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졸렬한 시를 쓰고도 그것을 자기의 오성 속에서 좋은 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 같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본질에 있어서도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그 때에 당신은 사유능력의 무한성을 사유하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만일 무한자를 느낀다면 그 때에 당신은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는 것이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그 자체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은 그 차체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만일 당신이 음악에 대한 감각이나 감정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때에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도 당신의 귀 옆을 스쳐가는 바람이나 당신의 발 옆으로 흘러가는 실개천에서 듣는 소리 이상의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멜로디가 당신을 감동시킬 때 당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멜로디 속에서 당신이 들 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심장의 소리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감정의 대상은 오직 그 자신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은 다만 감정에게만 말하는 것이며, 감정은 단지 감정에게 즉 그 자체에게 있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감정의 독백이다. 그러나 철학의 대화도 역시 사실은 단지 이성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은 단지 사상에게만 말을 하는 것이다. 결정체의 색채미는 감관을 황홀하게 하지만 이성의 흥미를 갖는 것은 단지 결정체의 법칙뿐인 것이다. 이성에 있어서는 단지 이성적인 것만이 대상이다(각주 ; "오성은 다만 오성과 오성에서 유출된 것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 Reimarus)

그러므로 형이상학적-초인간적인 사변 철학 그리고 종교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단지 파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 수단, 기관Organ의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인 모든 것은 진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근원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정이 종교의 본질적인 기관이라면 신의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나타난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감정은 신적인 것의 기관이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숨어 있기는 하나 그러나 진실한 의미는 감정이 인간의 본질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고 가장 뛰어난 것, 즉 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감정의 본질 자체가 신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은 감정을 통해서 신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신적인 것은 단지 신적인 것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신은 단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의 본성은 사실은 감정의 본질이 그 자체에 황홀해지고 스스로 환희에 도취된 감정, 즉 자신의 충만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환희에 도취된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으로, 종교의 주관적인 본질로서 주장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인 표현에서 객관적인 가치가 상실되고 만다는 것을 보아도 분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감정을 종교의 제 1 원리로 주장할 때에는 과거에 그렇게도 신성하다고 하던 기독교 교리들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감정의 입장에 있어서 역시 아직도 대상이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그래도 대상이 가지가 있는 것은 오로지 감정 때문이며, 감정은 아마도 우연적인 이유에서 그 대상과 결부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다른 대상이 똑같은 감정을 격하게 자극한다면 그 대상도 똑같이 환영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대상이 무관삼한 것이 되는 이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일단 감정이 종교의 주관적 본질이라고 언표되었을 때, 그것은 실제로 또한 감정이 종교의 객관적인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감정이, 적어도 직접적으로, 종교의 객관적 본질로서 언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직접적으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확실히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해서 승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감정 그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단언되고 따라서 특히 종교적인 감정과 반종교적 감정 혹은 적어도 비종교적인 감정과의 구별이 폐기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폐기는 단지 감정만을 신적인 것의 기관으로서 인정한다는 입장에서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당신은 감정을 무한하고도 신적인 존재의 기관으로 만드는 것은 감정의 본질이나 본성 이외의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감정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감정 일반의 본성은 또한 각각의 특수한 감정의 본성이 아닌가? 따라서 무엇이 이 감정을 종교적 감정이 되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일정한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대상은 다만 냉담한 오성 혹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일 때에만 종교적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이 종교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감정이 대상의 구별 없이 나누어 갖는 감정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전적으로 그것이 감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감정의 종교성의 근거는 감정의 본성이며 감정 자체 안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의해서 감정은 절대자로서, 신적인 것 자체로서 언표된 것이 아닌가? 만일 감정이 자체에 의하여 선하고 종교적이라면, 즉 거룩하고 신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자체 안에 자신의 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감정의 객체를 확립하고 동시에 당신의 감정을 진실하게 해석하려고 당신의 반성과 함께 무언가 이종적인 것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즉 당신은 개인적인 감정과 감정의 보편적인 본질 또는 본성과 구별하여, 제약된 개인으로서의 당신 안에 있는 감정을 속박하고 있는, 방해하면서 불순하게 하기도 하는 영향으로부터 감정의 본질을 분리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대상화하여 무한자라고 언표하고 그 무한자의 본질로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정의 본성뿐이다. 결국 당신은 다음과 같은 신 규정 이외에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은 순수하고, 무제한하고, 자유한 감정이다"라고 하는 규정뿐이다. 당신이 여기서 그 이외의 신을 조정한다면 그 각각의 다른 신은 당신의 감정 밖에서 밀어 넣어진 신인 것이다. 감정은 정통 종교적 신앙의 의미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이다. 정통적 종교로서의 신앙은 외적 대상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대상적인 신을 거부한다. 즉 감성은 자체에게 신이다. 감정의 입장에서는 단지 감정의 부정만이 신의 부정이다. 당신은 단지 너무나 겁이 많고 혹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으므로 당신의 감정이 은밀히 긍정하고 있는 것을 말로써 고백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당신은 외적인 배려에 속박되어 있는 감정의 정신적 숭고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심정의 종교적인 무신론에 직면하여 전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신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낡은 물음과 의문으로 또 다시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감정이 종교의 본질로서 규정되는 곳에서는 소멸되는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것이다. 감정은 당신의 가장 내적인 힘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으로부터 구별된 힘, 독립된 힘이다. 즉 감정은 당신의 안에 있으며, 당신의 위에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당신의 가장 고유한 본질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본질을 다른 본질로서 그리고 다른 본질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감정은 당신의 신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 안에 있는 본질로부터 다른 대상적 본질을 구별하려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감정을 초월하려 하는가?

그러나 여기서 감정은 단지 하나의 예例로서 강조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상의 본질적 기관으로 규정하는 다른 모든 힘, 능력, 잠재력, 실재성, 행위-이들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의 경우에도 사정은 이와 같은 것이다. 주관적인 혹은 인간의 편에서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객관적으로 혹은 대상의 편에서도 역시 본질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 한 번도 자기의 참 본질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상상을 매개로 하여 자기보다 더 높은 종류의 개인을 생각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종이나 본성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이상의 이러한 개인에게 부여하는 본질 규정은 언제나 그 자신의 본질로부터 이끌어 내진 규정 혹은 특성이다. 즉, 인간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사실은, 단지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대상화) 그려 낼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확실히 인간 이외에도 사유하는 존재자가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을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질적"으로가 아니라 "양적"으로 풍부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다른 행성들에서도 여기에서와 같이 동일한 운동법칙이 타당한 것 처럼 감각과 사유의 법칙도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별들에도 생명이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와는 다른 존재자가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곳에도 우리와 같은 존재자 혹은 우리와 닮은 존재자가 더 많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각주 ; "음악이나 수학이 부여하는 만족은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많은 존재자들에게도 확산되어 있다는 것은 참인 것 같다" 이것은 바로 "質은 동일하고 음악이나 과학에 대한 감각은 같은 것이며 향유자의 수도 제한되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Chist. Huygens, 「우주론」, 제 1권)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1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 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 (1/3)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13.html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법...

대한민국에서는 죄를 지어 감옥에 자주 가는 사람들은 가중처벌이 아닌 특별 "감형"을 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암튼,,, 한국의 법은 이상해. 술먹고 아동성폭행하면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라고 특별 "감형" 하질 않나,,,,

[뉴스] 영화 ‘도가니’에서 성폭행 가해자의 실제 인물인 인화학교 전 행정실장이 항소심에서 감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감형 사유에 대해 "김씨가 이번 사건 범행 전인 지난 2006년과 2008년 강제추행 사건으로 두 차례 수감생활을 하는 등 비슷한 범행으로 3차례에 걸쳐 재판과 복역을 경험한 점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고..(http://enews.mt.co.kr/2012/12/2012122713453128068.html?rnd=64751) -->이건 가중처벌해야 하는거 아닌가??? 젠장..

Tuesday, December 25, 2012

나자렛의 요셉에 대한 헌사

(실제 예수의 탄생일인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성탄절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즈음하여 나자렛의 요셉에 대한 헌사 ;

"요셉은 전통적으로 예수의 아버지가 아닌 예수의 양부라고 표현된다" -위키피디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 성모 마리아로 숭앙받는(거의 女神의 지위를 점하는) 반면, 아버지 목수 요셉은 성부의 자리를 야훼에게 내어주고(? 빼앗기고) 양부의 위상으로, 凡夫의 미천하고도 낮은 자리로 임하셨도다...(나중에 교회에 의해 보호성인으로 추존되긴 했지만)

누가 그랬던가 '자연은 미혼모이고, 합법적인 아버지의 부재이다' 라고... 그런면에서 종교(적 신화)도 그 프레임웍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 듯...

2012/12/25 오대산 소금강계곡 山步


새벽 한시반에 잠에서 깨어 좀처럼 잠을 못이루고 뜬 눈으로 온밤을 지세우다가
눈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눈꽃 구경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밤새 내린 하얀 눈위로 내 발자욱이 졸졸 함께 따라 나섰다.

6시32분 동서울버스터미널발 장평/진부/횡계행 버스를 타고 진부로... 

그제는 횡계까지 가서 대관령~선자령~보현사로 해서 강릉으로 갔는데, 
오늘은 진부에서 진고개로 가서 오대산 노인봉~만물상~소금강 코스.

등반지도... 
오른쪽 코스이다. 약 14km, 7시간 코스란다...

8시30분 버스에서 두시간 가량 선잠이나마 부족한 잠을 자고 일어나니 진부버스터미널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 들렀다가 김밥한줄 사서 택시를 타고 진고개 등산로 입구로 이동. 
택시비 19,000원이 나온다.

9시 조금 넘어 진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시작. 오르자마자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눈꽃 구경 왔는데 매서운 바람에 눈꽃과 주변풍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서운 바람이 옮겨다 놓은 눈더미속을 헤쳐나가는데 허겁지겁....

혼자 걷는데 바람 소리가 무섭다. 눈 쌓인 산행길도 만만치 않고... 
바람에 날려 얼굴을 때리는 눈가루가 심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길을 걷는 내내 혹시나 앞이나 뒤에 사람이 있을까 둘러 보아도 아무도 없다.
바람의 울음 소리는 공포감을 불러 일으켜온다.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힘들다. 
간밤에 통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바람에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날씨까지 혹한이라 더욱 힘들었다. 

11시경 노인봉 비상대피소에 도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갑게 인사하는 아저씨들이 세명이 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 분들은 당진에서 왔는데 어제 밤에 올라와서 여기 대피소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추위와 허기감에 김밥을 꺼내 먹는데 배낭에 넣어 두었던 김밥이 혹한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당진에서 올라온 한 아저씨가 
"방금 식사를 끝마쳤는데.... 
조금 더 일찍 왔으면 따뜻한 라면 국물이라도 같이 나눠 먹었을텐데" 
하면서 식사하면서 삶은 따뜻한 계란 두개를 내 주셔서 김밥과 함께 먹었다. 
그 분들은 일년에 수 차례 오대산을 오르신다고 한다. 난 오늘이 처음. 

김밥과 삶은 계란 두개로 식사를 마치고 나선 그분들이 끓여준 
따뜻한 커피 한잔까지 서비스로 얻어 마시고 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다시 출발...

그런데 오늘 오대산 산행에서 만난 분들은 
노인봉 비상 대피소에서 만난 당진에서 오신 세분과 
소금강계곡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카메라 들고 사진찍으로 올라가는 분 한 분 포함,,, 
총 4명이었다. 그야말로 단독산행.


노인봉을 지나 가는 길에 만난 바위.
나뭇가지와 바위틈으로 햇살이 아름다운데,,,
실제로는 바람에 몸이 휘청휘청... 온몸은 후들후들ㅠㅠ

눈밭과 바람속을 걷고 또 걸어 소금강 계곡쪽으로 내려오다 보니 백운대 라는곳에 다다랐다. 

백운대의 바위

그런데 바위밑을 가만 보면 조그마한 돌 위에 거대한 암석을 올려놓은 듯...
이게 자연적인 것인지, 사람이 만든 인공물인지는 모르겠다.

조금더 내려오다 보니 만물상이라는 곳이다. 

만물상의 풍경








이게 귀면암이라던가?

소나무가 옷을 벗었다...

얼어붙은 구룡폭포

바위틈의 물들도 여울을 지으며 얼어 붙었다

계곡의 물은 얼음 천막을 치며 천막안으로 흐르고...

소금강 계곡 내려오는 길목의 풍경들





거진 다 내려오는 길목에 왠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절의 길목에 있는 공중전화 부쓰.
사실 거기인 공중전화뿐만 아니라 이동통신 중계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찰 입구의 식수대... 물이 꽁꽁.

산에서 거의 다 내려와 소금강분소 내려가는 길목에
백구 한마리가 따사로운 겨울 햇볕을 쬐고 있다.

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분소에 도착한게 두시 조금 넘은 시간. 
약 14km에 7시간 가량 소요된다고 했는데 
조금 빨리 걸었던 건지 대략 5시간 걸렸다.

소금강분소에서 2시25분경 시내버스타고 강릉으로... 
버스터미널에서 서울가는 강릉발 3시 45분 차를 타고 귀가.

Monday, December 24, 20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

종교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옛날의 무비판적인 동물학자들은 확실히 코끼리가 다른 훌륭한 성질과 함께 종교심이라는 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리의 종교는 단지 우화의 영역에 속할 뿐이다.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 중의 한 사람인 퀴비에(Cuvier, 1769~1832)는 자신의 관찰에 의거하여 코끼리가 개보다 조금도 정신적 단계가 높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통속적인 해답은, "그것은 의식意識 이다"라는 명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그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자기 감정이라든가, 감성적 식별력이라든가, 지각이라든가 하는 의미에서의 의식, 그리고 외적 사물을 일정하게 현저한 표징에 따라서 판단한다라는가 하는 의미에서의 의식조차도 동물에게서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의식은 다만 자기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있어서만 존재할 뿐이다. 짐승은 분명히 개체로서는 자기에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짐승은 자기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짐승은 종種으로서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짐승에겐 자기 이름을 지식에서 유도하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이 있는 곳, 그곳에는 학문을 위한 능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학문은 種의 의식이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개체와 교섭하고, 학문에 있어서는 종과 교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자기 자신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성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는 존재만이 다른 사물 혹은 존재를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서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짐승은 오직 단순한 생활을 하지만 인간의 이중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즉 짐승에 있어서는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이 합일되어 있지만 인간은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 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 생활은 자기의 종이나 자기의 본질에 대해 관계를 가진 생활이다. 인간은 사유한다. 즉 인간은 대화한다. 인간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짐승은 자기 외부의 다른 개체가 없으면 종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이 없어도 사유 및 대화와 같은 종속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동시에 나와 너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타인의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다만 자기의 개성이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종이나 본질도 역시 사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은 단지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실은 유한하고 제한된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것에 대해서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와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또한 그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과 거동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식물에 구속되어 있는 모충毛蟲이 가지고 있는 의식은 또 그 한정된 영역 이상으로 넓혀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모충은 확실히 그 식물을 다른 식물과 구별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제한된 의식, 그러나 그것은 바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오류가 없는 의식을 의식이라 부르지 않고 본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 혹은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의식과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은 불가 분리적인 적이다. 제한된 의식은 아무 의식도 아니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총괄적이며 무한한 성질의 것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은 의식의 무한성에 관한 의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한한 것에 관한 의식에 있어서 의식하는 주체의 본질이 의식하는 주체에 대해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은 인간 속에 있는 본래의 인간성, 종Gattung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각주 ; 천박한 유물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단지 의식에 의해서 짐승과 구별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의식이 추가된 동물이다." 따라서 이 유물론자는 의식에까지 깨어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전체 본질의 질적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해서 동물의 본질을 결코 경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장소가 아니다) 인간의 독특성과 본연의 인간성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는 이성, 의지, 애정이다. 사유의 힘, 의지의 힘, 애정의 힘을 갖춘 사람을 비로소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힘이고, 애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 사랑, 의지의 힘은 완전성이며, 최고의 정력이며, 인간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그리고 인간 생존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며,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이다.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의직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지의 자유이다. 우리는 인식을 하기 위하여 인식하고, 사랑을 위하여 사랑하고, 의욕을 위하여 즉 자유를 위하여 의욕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단지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이 참되고 완전하고 신적이다. 오직 사랑이 그러한 것이며, 이성이 그러한 것이고, 의지가 그러한 것이다. 인간안에 있는 그리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는 이성, 사랑,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상상력, 환상, 표상, 사념)과 의지, 살ㅇ 혹은 애정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은 무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인간은 이것을 소유할 수도 없고 또 만들 수도 없다-을 근거짓는 요소로서, 그리고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고, 인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힘으로서, 신적이며 절대적인 힘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댛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것이다(각주 ; "사람의 의견은 어느 것이나 매우 강하기 때문에 사름은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자기 의견을 발표할 정도이다" - 몽테뉴Montaigne)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감정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저항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에 저항한다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누가 압도적인 멜로디의 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멜로디의 위력이란 느낌의 위력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음악은 감정의 언어이며, 멜로디는 소리 있는 감정이며 자체를 전달하는 감정이다. 누가 사랑의 위력을 경험한 일이 없거나 혹은 적어도 그 위력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랑과 개개인의 인간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인가? 인간이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오히려 사랑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 인간을 감동시켜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에로 향할 때 이 죽음을 초극하는 힘은 그 사람 자신의 개인적인 힘일까, 혹은 오히려 사랑의 힘일까? 그리고 한 번이라도 진실로 사유해 본 일이 있는 사람으로 그 누가 조용하고 떠들썩하지 않는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숙고에 잠겨서 당신 자신과 당신 주위의 것을 잊는다면 그때 당신은 이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당신이 이성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흡수되는 것은 아닐까? 학문적 환희는 이성이 당신에 대해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개가凱歌가 아닐까? 지식에의 욕망은 불가항력적이고 모든 것을 초극하는 힘이 아닐까? 그릭고 당신이 어떤 격정을 억제한다든가 어떤 습관을 폐기한다든가 하는, 즉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극복하여 승리를 획득한다면 그때 이 승리하는 힘은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힘인가, 혹은 오히려 당신을 정복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개인적 약점에 대항하는 분개로 당신을 채우는 도덕의 힘이나 의지의 정력은 아닐까?(각주 ; 개인이라는 단어는 물론 모든 추상적인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확실하지 않으며, 애매하여 오해를 야기하기 쉬운 단어이다. 이와 같은 개인과 사랑, 이성, 의지 사이의 구별이 자연에 근거되어 있는 구별지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 책의 주제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힘, 성질, 본질 규정을 인간으로 부터 떼내어 그것을 독립적인 본질로서 신화한다. 그래서 종교가 다신교의 경우와 같이 그것들 각 개체를 그것만으로 하나의 본질에로 총괄하는지 어떤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위의 이유에 의해서 이들 신적 본질을 설명하든가 인간에로 환원하든가 할 때에도 역시 개인과 사랑, 이성, 의지와의 구별지음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 구별은 단지 대상에 의해서 제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 구별은 또한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또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논리적으로도 기초지어져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들 자기의 정신, 자기의 두뇌, 자기의 심장과 구별하여 마치 그것들 없이도 자기는 어떤 것일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션시해 보여주는 그런 위대한 모범적인 인간은 이 명제를 그들의 삶에 의하여 확증하였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행위의 대상인 목적을 실현하다는 하나의 지배적 근본 열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대상은 그 주체 잔신의 대상적인 본질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체가 자신을 관계시키는 대상이 종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각개의 양태에 있어서는 상이한 많은 개인에게 공통된 하나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이 각각 성질을 달리하는 개인에게 있어서 객체인 것과 같이 적어도 그들 각개 자신의 대상적 본질인 것이다.

그와 같이 태양은 여러 행성들의 공통적인 객체이다. 그러나 태양은 지구에 있어서 대상인 것과는 다른 조건 아래에서 수성, 금성, 토성, 그리고 천왕성에 있어서 대상인 것이다. 각각의 행성은 그것 자체의 태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황성을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 그 태양은 지구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물리적 현존Dasein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천문학적-과학적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한 태양이 천왕성상에서는 지구상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날뿐만아니라 천황성상에 있어서의 태양은 실제로 지구상에서의 태양과는 다른 태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에 대한 태양의 관계는 동시에 지구 자체에 대한 관계, 지구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지구의 관계인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지구의 대상으로서 갖는 크기와 빛의 강도의 척도는 지구의 특유한 성질을 결정하는 거리의 척도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행성은 그 자체의 태양에 있어서 그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즉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하여 인간을 인식한다. 대상에서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한 객관적 자아이다. 그리고 이말은 정신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대사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조차도 역시 인간에겐 대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대상인 한에 있어서, 인간 본질의 현시Offenbarung 이다. 달도, 태양도, 별도 인간에게 "너 자신을 알도록 하라"고 말한다. 인간이 달이나 태양이나 별을 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본다는 것, 이것은 그것들이 인간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동물은 단지 삶에 필요한 광선을 받을 뿐이지만, 반면에 인간은 인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실제로는 인간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별빛까지도 지각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만이 이해利害를 떠나 순수하고 지적인 기쁨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만이 눈의 이론적 즐거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현세나 현세의 필요물과 공통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해를 떠난 빛을 바라보는 눈은 그 빛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과 자기 자신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눈은 천상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눈에 의해서만 지구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은 하늘로 향한 눈길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천문학자였던 것이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사명을 상기하게 한다. 즉 인간은 오직 행동을 위해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명상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자는 인간 자신의 본질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대상의 힘은 곧 인간 자신의 본질의 힘이다. 그와 같이 감정의 대상의 힘은 감정 자체의 힘이며, 이성의 대상의 힘은 이성 자체의 힘이며, 의지의 대상의 힘은 의지 자체의 힘이다. 음악적 솔에 감동한 사람은 감정에 지배된다. 즉, 적어도 음악적 소리에 자기와 일치하는 요소를 발견하는 감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 자체가 아니라 단지 내용이 풍부한, 의미에 가득 찬, 감정에 가득 찬 멜로디만이 감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단지 감정을 전달하는 감정, 즉 감정 자체, 감정 자체의 본질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의지 또한 그러하며, 이성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욕, 정감, 사유는 완전성, 본질성, 실재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이성을, 감정을 가지고 감정을, 의지를 가지고 의지를 제한된 유한한 힘으로써, 즉 쓸모없는 힘으로 감각한다든가 혹은 지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즉, 유한성과 허무성은 동일한 것이며 유한성은 다만 허무성에 대하여 미화된 표현일 뿐이다. 유한성은 형이상학적-이론적 표현이며, 허무성은 병리학적-실천적 표현이다. 오성에 있어서 유한적인 것은 심정에 있어서는 허무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 감정, 이성을 유한한 힘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모든 완전성, 모든 힘, 모든 본질성은 그 자체를 직접 검증하고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 의욕, 사유의 활동을 완정성으로서 느끼지 않고서는 사랑한다든가, 의욕한다든가, 사유한다든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고, 의욕하며,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어떤 특수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의식하는 존재자로부터 구별된 것도 아니다. 의식이 의식하는 존재자로부터 구별된 것이라면 그 존재자가 어떻게 자신을 의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완전성을 불완정서으로서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감정을 제한된 것으로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사유를 제한된 것으로서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의식이란 자기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애이며 자기 자신의 완정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본성의 특징적인 표식이다. 의식은 단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 속에서만 실존할 뿐이다. 인간의 허영심까지도 이 진리를 확증한다. 인간은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의 형태에 만족한다. 이 자기만족은 그의 형태의 완전성과 미의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귀결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자체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필연적으로 그 자체에 대하여 기쁨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형태는 필연적으로 그 자체를 자체 안에서 주시한다. 인간이 단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형태에 대해 자만할 때 그것은 허영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형태 일반을 감탄할 때엔 허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 형태 일반을 감탄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형태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한 형태를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각주 ;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Cicero의 「신의 본질에 관해서」 제 1권. 그리고 이것은 결코 인간의 제한성의 표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자도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동물의 형태의 아름다움, 식물의 모양의 아름다움, 자연 일반의 아름다움도 즐긴다. 그러나 단지 절대적이고 완전한 형태만이 질투 없이 다른 존재자의 모양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각각의 존재자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존재를 사랑하여 또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선이다. 베이컨Bacon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또한 알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탁월한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체를 긍정하고 자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긍정의 최고의 형태, 즉 그 자체가 영예, 완전성, 행복, 선善인 형태는 의식이다.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판의 저자 서문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2.html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2/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22.html

기독교 호교론(護敎論)자로서의 니체(Nietzsche)?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야 雜說 하나 ;

철학자 니체(Nietzsche)를 이야기 하면 보통은 반기독교주의 철학자로 인식되는 듯 하다. 사실 Nietzsche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양해서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호교론(護敎論)자가 아닌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니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중적(?) 글귀 ; "신은 죽었다", 여기에 달리는 댓글들; "그러는 니체 너도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 죽음"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서 상징되는, 인간에 의한 신의 타살을 의미하지 않을까?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Anti-Christ] 등 많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 가장 친숙하고 널리 읽히는게 아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보면, 이것은 마치 예수가 광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산상수훈을 하는 모습을 그리는 듯한(혹은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대중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그리는 듯한) 이미지이다. 그 자체의 내밀한 내용에서는  Zarathustra(배화교에서 이름을 따오긴 했지만)가 적그리스도 라든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또 다른 초인(Superman)은 아니다.

니체의 저작들이 Anti-Christ적인 요소를 가졌다 함은,,, 그게 예수그리스도 자체를 향한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예수 자체가 아닌, 예수 사후에 조직화된 교회, 교부/성직자, 그들의 종교철학, 종교권력 등의 총체로서의 기독교 정신)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그런 이미지가 굳혀질 수도 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자에 대한 비판보다는 현재 권력을 쥔자에 대한 비판이 더더욱 직접적인 반응이 온다.

그런측면에서 보면 니체는 그리스도라는 종교(교회)에 대한 비판자였을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비판자, 반대자는 아니다.

그러나 니체가 주장하듯 기독교 종교/교회체계를 비판하고 원형(源形)으로서의 예수, 본원적 예수정신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순간, 또 다시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원형(源形)이라는 것, 본연의 예수정신이라는 것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서 -마치 예수 사후의 기독교 역사처럼- 그가 비판하던 기독교 역사의 도돌이표를 그릴 수 밖에 없는 운명. 예수정신(혹은 神의 본원적인 진리의 말씀)은 그들에게 하나의 이데아(IDEA)가 되고 서로 자기 것이 정통임을 주장하는 혈전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 유대교 vs. 가톨릭(구교) vs. 프로테스탄트(신교) vs. 이슬람 등등... 그리고 그 하부의 무수한 교단간의 싸움이 예수 사후 이천년간 인류/종교역사를 피로 물들여 왔듯이.

니체는 염세주의자이다. 현재를 부정하고 부질없는 이데아를 찾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리고자 하는... ; 지금의 교회(들)가 진정한 교회라고 믿으면 나름 마음의 평온을 얻을 텐데,,, 그에게도 뭔지 모를 “마음속의 가시”가 있었던 걸까?

Sunday, December 23, 2012

2012/12/23 선자령(仙子嶺)

매서운 추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자 동서울버스터미널로 가서 7시 40분 횡계행 버스를 타고 출발. 버스는 약 두시간 반을 달려 장평에 도착했다. 장평에서 오분간 쉬었다가 진부를 거쳐 횡계로... 선자령은 지난 겨울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방문.

성에낀 버스 창문 너머...

횡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옛 대관령 휴게소로... 택시비는 7,500원 가량 나온다.

대관령휴게소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법 많다. 산악회에서 관광버스로 단체 산행을 온 사람들이 대부분. 시간이 10시 30분이 넘어서 아점을 겸해서 먹고 오르자는 생각에 휴게소에서 황태해장국 한 그릇 시켜 먹고 나와 아이젠을 신고 출발. 날씨가 워낙 추워서 바닥이 꽁꽁 얼었다.

산악회 단체 산행객들이 많아, 긴 줄을 형성하면서 이동. 양떼목장방향으로 해서 오르는데 바람도 심하게 불고 칼바람의 메서움이 장난이 아니다. 잠시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돌풍에 몸이 휘청할 정도.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살을 에는 듯 하다. 약 두어 시간을 오르니 풍력발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관령 선자령 부근의 풍력 발전기 모습들...



선자령 밑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눈밭에 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으며 쉬고 있다. 
바람도 거세고 체감 온도도 영하 15도 이하는 될텐테,,, 
그래도 이런 재미로 산보를 하나 보다.


여기에서 조금 오르면 선자령 정상... 
정상에 오를 수록 바람의 강도와 살을 에는 듯한 냉혹함이 더 해 간다.

바람을 헤치며 올라선 선자령(仙子嶺)

선자령 정상에서 바라다본 풍경


선자령 정상에서 찍은 동영상... 

내려오면서 보는 풍력발전기
오늘은 내려오는 방향을 위의 사진에 나온 방향으로 잡았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길이 잘 나있어서 한번 새로운 곳으로 가보자라는 생각에 길을 잡았다.

가다보니 중간에 보현사라는 쪽으로 빠지는 내리막길이 있어서 내려가는데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1시간을 넘게 내려오다 보니 보현사라는 절이 보인다.

보현사에 도착해 시간을 보려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폰을 꺼냈더니 폰에서 경고문이 뜬다. "쿨~다운" 시키라고... 날이 너무 추워서 폰이 얼어서 제대로 작동을 못 한 것. 쿨다운이 아니라 웜업(Warm-up)이 필요해.


보현사에서 버스타는 곳을 찾기 위해 큰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좀 걷다보니 마을 아주머니들이 걸어 오길래 강릉시내가는 버스가 있냐고 했더니 2시10분 차는 이미 떠났고 다음 버스는 4시 10분에 있다고... 4~5km 좀더 걸어가면 성산이라는 곳에 가면 버스가 있다고 해서 추위에 떨면서 버스를 기다리기도 뭐 해서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걷기로 했다.

길을 걷다 마주친 소나무. 멋있게 자랐다.
 
여기 마을엔 당집과 당나무가 있네...
조금 더 내려와서 아랫마을을 지나는데,,, 
여기도 소나무 숲에 당집이 있다.
요즘 당집이 있는 걸 못 봤는데 여기엔 마을 마다 있는 듯...
 
한 참을 걸어 길을 가다 보니 어느 집에서 키우는 염소인지 나를 빤히 바라다 본다. 추운 겨울 아스팔트 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는 내가 신기했나 보다.

염소가 있는 집의 앞을 지나니 건물의 입구 바위에 "삶의 근원을 생각하고 곧게 행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염소가 사는 건물이 무슨 교회인 것 같은데,,, 통심원(한자로 크게 쓰여 있고, 성산혜주교회라고 한글로 조그맣게 쓰여져 있다)

추위와 피곤함에 두어 시간을 걸어 겨우 성산면에 도착.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차는 오질 않아 오들오들 추위에 떨며 기진맥진. 손은 얼어서 무감각해지고... 겨우겨우 시내버스타고 강릉 시내로 가서 17시30분 강릉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집으로 귀환. 오늘 같은 날은 고생, 고생, 쌩고생... 따땃한 아랫목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하루였다.

Saturday, December 22, 2012

선거,,, Demographic,,, 그리고 지역주의

페이스북에서 링크된 "18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는 글(http://www.82cook.com/entiz/read.php?bn=16&cn&num=163280&page=1&searchtype=search&search1=4&keys=31418) ← 여기 게시판에 성지순례 한참임ㅋㅋㅋ

4년전에 작성된 18대 대통령 선거 분석/예언인데,,, 뭐 대단한 선거공학적, 혹은 학문적 분석이나 그런건 아니더라도,,, Demographic 측면에서 나름 근거있게 설명한 글 이었고, 실제로 2012년 대선에서도 그렇게 결과가 나왔다. 2012년 대선의 지역별 유권수 구성과 후보 득표율 보니,,, 어떤면에서 보면 암울한...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 보수 혹은 진보의 대립? 군대? 돈? 전과?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지역]입니다. 한국정치를 경제 보수/진보 이런걸로 백날 분석해봐야 50%도 제대로 분석이 안됩니다. 그럼 지역으로 분석해보면.. 약 90%이상 분석이 가능합니다....

인구분포를 보면 뭔가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우리는 보통 선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함께 취급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절대 함께 취급될수 없습니다. 다른 지역 다 합쳐도 다시 말해서 전라도와 강원도 충청도 제주까지 전부 다 합쳐도 경상도의 인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숨겨진 한국 선거의 가장 큰 비밀이고 이게 한국선거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상도의 인구가 엄청나게 많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역들을 다 합쳐도 상대가 안될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뭔가 좀 감이 오시는지요? 전라도에서 아무리 95% 이상 지지해도 인구수가 작기 때문에 선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는 대가리수가 많은 쪽이 유리합니다. 그럼 한국에서 가장 대가리수가 많은 곳은? 바로 경상도입니다. 그리고 그 경상도에서 꾸준히 지지해주는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입니다...

다시 말하지요. 한국 정치는 무조건 지역! 입니다. 경제따위 중요하지않습니다. 여자냐? 아니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역?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리? 중요하지않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그딴거 안따집니다. 그딴거 따질려고 했으면 이미 1997년에 따졌겠죠. 아참 박근혜가 박정희 딸인것..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가도 당선될겁니다. 저 경상도 출신이거든요(본적은 경북 영천임) 누가 나가도 됩니다. 70원 몽준이가 나가도 역시 당선됩니다. 정동영씨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가도 당선됩니다. 이명박이 또 선거에 나가도 역시 당선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다시 대선에 나가도 역시 뽑아줍니다...  "

그래서 2012년 18대 대선결과를 가지고 새나라당-민주당의 양당 경쟁체계라는 가정하에 잠시 시뮬레이션 해보니,,, 흠... 맞다. 이러한 지역과 세대(특히 58개띠로 대표되는 세대)의 혼합적인 demographic이 이번 대선을 결정.

[2012년 지역별 유권자수 구성 & 약간은 느슨한,,, 양당 득표율 시뮬레이션]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2판의 저자 서문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1841, Ludwig Feuerbach, 종로서적, 박순경 옮김, 1982년(1990년 인쇄본) -

[ 제 2판의 저자 서문 ]

이 책의 제 1판이 출판된 이래 이 책에 대한 불합리하고도 불성실한 판단은 나에겐 조금도 불쾌한 감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이외의 판단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또 온당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과는 다른 어떤 판단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신과 세상의 감정을 다치게 하였다.

나는 서문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독신적瀆神的 대담함'이 있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 역시 기독교의 고전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다만 참된 것, 고전적인 것, 위대한 것만이 사유될 가치가 있으며 참되지 않은 것, 왜소한 것, 비고전적인 것은 풍자극 혹은 익살극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객체로서 확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근세의 무성격적이고 안이한 에피쿠로스적 기독교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직 순결한 처녀였던 시대에로 돌아가야 하였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직 하늘나라의 신랑의 가시 관冠속에 이교적인 비너스의 장미와 미루테나무를 엮어 넣지 않은 시대였다. 당시 그리스도의 신부는 지상적인 재물에는 궁핍하였으나, 그러나 초자연적인 사랑의 비밀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는 지나치게 풍요로왔으며 또한 지나치게 행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근대의 겉치레 기독교도들에 의해 얼버무려지고 거부된 참된 기독교를 과거의 암흑으로부터 밝음에로 이끌어 낸다는 독신적인 대담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참된 기독교를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극점Nonplusultra으로서 주장하는, 칭찬할 만하고 이성적인 의도로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나는 그와는 반대로 참된 기독교를 더 높고 더 일반적인 원리에로 환원하려는 "바보같은" 짓이기도 하고 또 "악마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독신적인 대담함 때문에 당연하게도 근대의 기독교도들, 특히 신학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사변철학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소箇所, 그들의 본래적인 명예에 관계되는 점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 공격에서 나는 사변철학이 사변철학과 종교 사이에 설정한 외적인 일치를 무자비하게 부셔 버렸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변철학이 종교와 조화시키기 위하여 종교로부터 진실하고도 본질적인 내용을 빼어 버린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리나 나는 또 동시에 실증철학의 우상인 원형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본질적으로 살과 피는 인격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실증철학을 극히 운명적인 빛 속으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흔치 않은 저서 내용으로 인하여 보통의 전문 철학자들은 심하게 모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종교의 어두운 본질에 관해서 행한 극히 비정치적인 계몽으로 인하여 정치가들의 불쾌감조차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계몽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종교를 인간을 예속시키고 억압하기 위해서는 가장 상책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며 또 종교를 정치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비위도 거슬렸던 것이다. 종교를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은 그렇기 때문에 산업이나 정치의 영역에서는 확실히 벗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빛과 자유의 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현대의 예의에 대해서 엄청나고도 용서받기 어려울 위반을 하였던 것이다. 원래 나는 모든 사물을 각각 알맞는 명칭으로 부를 때, 고려해 보지 않은 언어 사용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상류사회"의 경향, 즉 인습적인 환상이나 비진리에 대해 무관심하며 무감동한 경향은 현대의 지배적이면서도 정상적인 경향이다. 말하자면, 현대는 단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이것은 자명한 일이다)뿐만 아니라 종교적 및 학문적인 사건도 역시 그런 식으로 취급되고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현대의 불행이다. 겉보임은 현대의 본질이다. 우리의 정치도 겉보임뿐이고 우리의 도덕도 겉보임뿐이며 우리의 종교도 겉보임뿐이고 우리의 학문도 겉보임뿐이다.

지금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낯 두꺼운" 교양이 없는 사람이고, 교양이 없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진리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부도덕한 것이다. 기독교의 기만적인 부인-이것은 기독교의 긍정이라는 겉보임을 드러내고 있다-은 도덕적이며, 물론 권위 있는 것이며 명예로운 것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도덕적인 부인 다시 말하면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공언하는 부인Verneinung은 부도덕하며 또한 악명 높은 것이다. 자의는 기독교를 희롱하는데 기독교의 한 편의 근본 신조는 이것을 외관상으로 존립시키고는 있지만 이 자의의 희롱은 도덕적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신조를 폐기하는 것이 왜 다른 편의 신조를 외관상으로 존립시키는 것인가 하는 까닭은, 루터Luther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하나의 신조를 폐기하는 자는 적어도 원리적으로 모든 신조를 포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각주 ; 루터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명백하고 순수한게 전부를 완벽하게 믿든가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성령은 한 편은 진실이며 다른 편은 허위라고 가르치거나 혹은 믿게 하였음을 틀림없다는 것은 분리되지도 않고 분할되지도 않는다... 종鐘의 한곳이 깨지면 종은 이미 조금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현대의 신앙의 종소리는 음악적인 감관을 얼마나 모욕하는 것인가! 물론 그 종은 또 얼마나 망가져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기독교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진지한 태도는 부도덕한 것이다. 서투른 중도이폐中途而廢는 도덕적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그리고 확신하는 철저성은 부도덕한 것이다. 야무지지 못한 모순은 도덕적이지만 그러나 시종 논리일관된 엄격한 태도는 부도덕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은 아무것도 완결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 들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이지만, 천재는 자기의 문제를 정돈하고 철저하게 규명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도덕적인 것은 단지 허위뿐이다. 왜냐하면 허위는 진리의 해악 혹은-지금은 이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해악의 진리를 회피하며 은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진리는 단지 부도덕성뿐만 아니라 또한 비학문성이기도 하다. 즉 진리는 학문의 한계이다. 독일의 라인강의 운행의 자유가 바다에 이르는 동안 한한것과 같이 독일의 학문의 자유는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에 한한 것이다(각주 ; 1815년 비엔나 선언 속에 관련된 애매한 서식은, 그것이 그 후에 독일과 네덜란드사이의 분규를 반복하는 단서가 되었다). 학문이 진리에 도달하여 진리가 되는 곳에서 학문은 과학이 되는 것을 중지하고 경찰의 대상이 된다. 즉 경찰은 진리와 학문의 경계인 것이다.

진리는 인간이며 추상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다. 진리는 삶이다. 진리는 종이 위에 쓰여 있는 사상, 자기에게 일치하는 전 실존을 종이 위에서 발견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펜에서 직접 피로 이행한다든가, 이성에서 인간에로 이행한다든가 하는 사상은 이미 아무런 학문적인 진리도 아니다. 학문이란,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단지 나태한 이성의 무해하기는 하나 무용한 놀이 도구에 불과하다. 학문은 단지 생활이나 인간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은 사물을 취급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학문은 물론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닌 사물을 취급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것 없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뇌 속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마음에서는 활동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즉 진리를 망각하고 절조를 잃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간단히 말하면 무성격이 순수한 학자에게 진정으로 추천할 만한 필요한 특성인 것이다. 적어도 필연적으로 현대의 까다로운 문제와 접촉하고 있는 학문의 학자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침범하기 어려운 진리에의 사랑과 결연한 성격을 가진 학자, 바로 그 때문에 단 한번에 정곡을 찌르는 학자, 해악을 근절하며 위기나 결정적인 순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학자, 그러한 학자는 이미 학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학자는 일종의 헤로스트라토스Herostrat(기원전 365년에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하여 아르테미스의 신전을 불 태운 희랍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그를 단두대에 세우라.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항쇄項鎖(목에 쇠사슬을 묶어)하여 기둥에 매달아라! 단지 항쇄하여 기둥에 매달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단두대 위에서의 죽음은 오늘날의 "기독교적 국법"에 따르면 비정치적이며 "비기독교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쇄하여 기둥에 매다는 죽음은 매우 정치적이며 기독교적인 죽음이다. 왜냐하면 항쇄하여 기둥에 매다는 죽음은 음험하며 기만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죽음이기는 하지만 죽음으로 보이지 않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까다로운 모든 문제에 관해서는 겉보임, 순수한 겉보임을 중히 여기는 것은 현대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적이며 환상적인 장담을 잘하는 기독교의 시대가 기독교의 본질에 접할 때 그와 같이 감정을 다쳤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매우 심하게 변모해서 쓸모없게 되었으므로 기독교의 공적으로 학식있는 대표자들, 즉 신학자들조차 기독교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며 혹은 적어도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의 눈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단지 신학자들이, 예를 들면 신앙, 기적, 섭리, 세계의 무의미성에 대해 나에게 부여한 비난과 내가 나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는-특히 바로 이때문에 인용문에 의해 현저하게 증대시킨 제 2판- 증언과를 비교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학자들의 이러한 비난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그 자체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한 나의 저서에 대한 신학자들의 "분격"은 단지 기독교의 참된 내용(그러나 이것은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에 대한 분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아니다! 현대는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 사이의 대립과 같은 낡은, 지금은 매우 적은 대립(최근에는 구두 수선공이나 재단사까지도 그와 같은 대립을 초월해 있는)이 분명한 권태로부터이긴 하지만 정열에 몰리어 또다시 불붙게 된 시대이며, 이혼에 관한 논쟁은 엄숙하며 특히 중대한 사건으로서 취급한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시대이다. 그런데 나의 저서는 역사적 문서를 근거로 하여 단지 잡혼雜婚, 즉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일반 결혼도 참된 기독교에는 모순된다는 것을 증명하여, 참된 기독교도는 성령에 있어서의 생식-이것은 즉 기독교에의 개종이며 하늘나라의 백성이긴 하지만 지상의 백성이 아닌 우리 모두가 참된 기독교도가 되도록 마음을 쓰는 것은 "기독교적 정부", 기독교의 목사, 기독교의 설교자의 의무는 아닌가?-이외의 다른 생식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는 저서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있어서 그와 같은 저서가 사람들을 격앙시키는 시대착오라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아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저서에 관한 그리고 나의 저서에 반대해서 생긴 소란도 역시 나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오히려 아주 조용히 나의 저서를 다시 한번 가장 엄밀한 역사적-철학적 비판을 가하여 형식상의 결함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제거하고 새로운 발전, 예증, 매우 적절하게 논박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를 더하여 풍부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아마도 완전히 장님이 아니라면, 내가 하나하나 역사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나의 분석의 사상 과정을 중단하고 그것에 지주支柱를 더해가는 지금 나의 저서가 기독교를 상상의 동양적인 상형언어로 부터 바르고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충실하고 또한 옳은 번역을 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며, 또한 만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인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의 저서는 기독교의 수수께끼를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 비유하지 않고 표현하면 기독교의 수수께끼를 경험적-철학적, 혹은 역사적-철학적 분석, 해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서론에서 전제한 일반적인 명제는 자신이 증명한 아 프리오리(a priori)한 명제도 아니며 또 사변思辯의 산물도 아니다. 그 명제들은 종교의 분석으로부터 비로소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명제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이 저서의 근본 사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실은 인간의 종교적 본질 및 의식-의 사실상 나타남이 사상에로 이식된 것, 즉 일반적인 표현에 의해서 파악되고, 그것에 의해 이해된 것이다. 나의 저서의 사상은 단지 전제로부터의 결론이자 귀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전제는 그 스스로가 재차 사상이 아니라 대상적인-혹은 살아 있는 혹은 역사적-사실인 것이다. 즉 그 전제는 외계에 묵직하게 실존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이고 비물질적이고 자기-만족족인 사변, 즉 사변의 소재를 그 자체에서 끌어내는 사변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

나는 좀더 잘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머리에서 자신의 눈을 빼내는 철학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사유하기 위하여 감관感官, 무엇보다도 눈을 사용한다. 즉, 나의 사상을 언제나 감관의 활동을 매개로하여서만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는 재료에 기초를 둔다. 나는 사상으로부터 대상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대상으로부터 사상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오직 두뇌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다. 나는 다만 실천철학의 영역에 있어서만 관념론다(이상주의자)이다. 즉 나는 여기에서 현재나 과거의 제한을 인류나 미래의 제한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많은 일들-그렇다. 많은 일들이다-이 근시안적이고 소심한 실제가들에 의해서 오늘날 상상의 비약,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념, 단순한 망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내일, 즉 다음 세기-개인의 의미에서의 수세기는 인류의 의미와 생활에 있어서는 수일이다-에는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

간단히 말하면, "이념"이란 나에게 있어서는 단지 역사적 미래에 대한 신앙, 진리와 덕의 승리에 대한 신앙이며, 단지 정책적이며 도덕적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래의 이른 철학의 영역에 있어서 나는 바로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Hegel 철학과는 정반대로, 위에서 언급한 의미의 현실주의, 유물론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사변철학의 근본문제, 즉 "자기의 것은 모두 스스로가 휴대한다"라는 격언을 유감스럽게도 나는 나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가 없다. 나는 많은 사물들을 내 외부에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주머니 혹은 머리속에 넣어서 나와 함께 운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여기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나의 것이다.

나는 단지 정신적인 자연 과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 과학자는 기구나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그와 같은 정신적 자연과학자로서서 나의 책을 썼던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새로운 철학의 원리 이외의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원리는 실천적으로 이미 검증된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특수한 대상(그러나 이 특수한 대상은 일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에 비추어, 다시 말하면 종교에 비추어 서술되고, 발전되고, 관철된 원리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철학이며 인간의 참된, 현실적인, 전체적인 본질에 상응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물론 이 철학은 바로 그 때문에 초인간적, 초자연적 즉 반인간적, 반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상극하는 철학이다.

환원하면 이 철학은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진리는 제시하는데 유일한 기관은 "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손과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철학은 펜이라고 하는 운하를 통하여 실제의 실존을 종이 위에 실존에로 환원하기 위하여 사실의 사상思想을 사실 그 자체와 동일화하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분리한다. 그러나 이 철학은 바로 이와 같이 사실과 사실의 사상과를 분리하는 것에 의해서 사실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추상적 이성의 대상과 같은 사물(das Ding)이 아니라 현실적-전체적인 인간의 대상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전체적-현실적인 사물인 사물을 참된 사물로서 승인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고립된 오성悟性, 즉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절대적으로 이름없는 오성에서가 아니라 인간, 물론 사변철학이나 기독교가 생각해낸 인간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 지주를 구하기 때문에, 또한 본질도 이름도 없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철학은 실체에 있어서나 언어에 있어서 둘 다 철학의 본질을 철학의 부정 속에서 인정한다. 즉 이 철학은 피와 살이 된 철학, 인간이 된 철학만이 참된 철학이라고 확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철학은 철학의 가상假象속에 철학의 본질을 인정하는 모든 조야하고 강단에서 이식된 두뇌들에 있어서는 전혀 철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자기 최고의 승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스피노자Spinoza의 실체, 칸트Kant나 피히테Fichte의 자아, 쉘링Schelling의 절대적 동일성, 헤겔Hegel의 절대정신을, 즉 간단히 말하면 단지 사유된 혹은 상상된 추상적인 본질을 원리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본질 혹은 오히려 무엇보다도 더 현실적인 본질, 가장 참된 실재적인 존재 즉 인간을, 그러므로 가장 적극적인 실제 원리를 그것의 원리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철학은 사상을 사상의 반대물로부터 즉 물질, 실재, 감각으로부터 산출하여 이것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서 규정하기 전에 대상에 대해서는 처음에 감각을 통해서, 즉 수동적-수용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이와 같은 철학의 견본이다. 따라서 나의 저서는 비록 다른 관점에서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참된 성과가 살과 피로 된 것이라고하더라도 사변철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산물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오히려 사변철학의 직접적인 반대물, 아니 사변철학의 해소인 것이다. 사변철학이 종교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은 사변철학 자체가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사변철학이 그것을 종교보다는 훨씬 잘 표현하였던 것이다. 사변철학은 종교에 의해서 규정되는 일 없이 종교를 규정한다. 사변철학은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로 하여금 종교자체를 말하게 한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을 종교의 경청자 혹은 통역인으로 만들 뿐이고 종교의 후견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며 올바르게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노력이었다.

비록 종교 혹은 신학이 이것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신을 거부하고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을 인간이 되게 하고, 다음에 인간적으로 형성되어 인간적으로 느끼고, 인간적으로 사념思念하는 신을 종교의 열애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기독교의 비밀을 누설하였을 뿐이며, 나는 단지 신학의 모순이 가득찬 망상을 제거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의미의 신성모독을 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신앙심이 없는 무신론적인 것이라면 무신론은 – 적어도 이 저서의 의미에 있어서의 무신론은 – 종교 그 자체의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 그 자체는 실은 표면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근저根底에 있어서, 그리고 또 본래 사념이나 상상에 있어서가 아니라 심정이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의 진리성과 신성과는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에게 나의 저서의 역사적 및 합리적 논증이 허위임을 증명해야 한다. 즉, 그것들을 반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바라컨대 법률적인 가해 혹은 신학적인 비가悲歌, 혹은 진부한 사변적 산문, 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련함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물론 나 자신이 지금까지 극히 철저하게 반박하지 못하였던 그런 근거에 의해서 반박해 주기 바란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오직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뿐이며 종교의 인간저인 본질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 1부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 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동이란 것이 증명되어 있으며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혹은 오히려 방법이 반대일 뿐이다. 즉, 제 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종교의 진리에로 드러내는 일이며, 제 2부는 종교를 종교가 갖는 모순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제 1부는 발전이며 제 2부는 논쟁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사례의 성질상 잔잔하며 후자는 생명적이다. 발전은 조용하게 전진하지만 투쟁은 급속하게 전진한다. 왜냐하면 발전은 단계마다 자족하지만 투쟁은 오직 최후의 목표에 도달해야만 만족하기 때문이다. 발전은 주저하지만 투쟁은 과감하다. 발전은 빛을 필요로 하지만 투쟁은 불이다. 그러므로 양부兩府는 이미 형식적인 관계에서 서로 다르다.

그와 같이 나는 제 1부에서 신학의 참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의 본질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의 술어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 혹은 본질과 인간적인 주어 혹은 본질 사이에도 역시 아무 구별도 없다는 것, 양자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여기서 “따라서”라고 말을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신학적인 술어의 경우에는, 특히 술어가 주어의 우연적인 특성, 우연성이 아니라 주어의 본질을 표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술어와 주어 사이에는 아무 구별도 없으며 술어를 주어의 위치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분석론 혹은 포르피리우스Porphyrius의 서론만이라도 이런 관점에서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제 2부에서 나는 이와 반대로, 신학적인 술어와 인간학적인 술어 사이에 만들어진 혹은 오히려 만들어져야 할 구별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 현저한 일례가 있다. 제 1부에서 나는 “종교에 있어서” 신의 아들은 실제의 아들이라는 것, 인간이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서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신적인 관계로서 파악하고 긍정하는 종교의 본질 혹은 진리를 찾아 내는 것이다. 제 2부에서는 이와 반대로, 신의 아들은 자연적-인간적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자연이나 이성에 모순되는 전적으로 다른 방법, 따라서 몰의미적이고 몰오성적 방법에 있어서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참으로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 신의 아들은 확실히 자연적-인간적 의미에 있어서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종교의 자체 반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감관이나 오성을 그와 같이 부인하는 것 속에 종교의 비진리성과 부정적 측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 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직접 증명”이며 제 2부는 “간접 증명”이다. 그러므로 제 2부는 필연적으로 제 1부로 환원된다. 제 2부는 어떤 독립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제 2부는 다만 제 1부에서의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제 1부에서 해석된 종교가 정당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제 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 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제 1부에서 내가 “주로” 종교를 취급한다고 말한 까닭은 제 2부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제 1부에서 신학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또 내가 제2부에서 신학을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대로 단지 보통의 신학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얼핏 보고도 알 수 있는 것, 사변적인 신학 혹은 철학도 취급하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잘 앍 ㅗ있는 보통 신학의 하찮은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나는 도처에서 대상의 취급을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엄밀하며, 가장 필연적인 규정에 한정하면서 사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성체의 경우에 문제를 단지 두 개에 한정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단지 두 개의 성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루터전집」, 1792년 라이프찌히 출판, 제 17부 558 페이지를 참조) 따라서 나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규정에 한정하여 그 대상을 신학의 제한된 범주를 넘어서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학을 취급한다고해서 신학자들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처에서 무엇이 제 1 원인 인가를 확립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인물이 아니라 원리를, 개인이 아니라 종족Gattung을, 악평 수첩의 새상이 아니라 역사의 대상을 취급하는 것이다.

만일 나의 저서가 제 2부만을 포함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확실히 이 책에는 단지 부정적인 경향이 있을 뿐이라는 비난을 해도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즉, “종교는 無이며 무의미하다”고 하는 명제가 이 책의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특징짓는다 해도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신은 무이며, 삼위일체는 무이며, 신의 말씀은 무이다”라는 등등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수월하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단지 신이나 삼위일체나 신의 말씀은 신학의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외래의 비밀이 아니라 토착의 비밀, 인간성의 비밀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종교가 자연이나 인류의 외관적이며 피상적인 본질을 자연이나 인류의 참된 내적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이나 인류의 비의秘義적 본질을 특수한 다른 존재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나는 종교가 신에 대해, 예를 들면 신의 말씀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규정(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의미에 있어서는 결코 부정적이 아닌 규정)에 있어서는 단지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정의 혹은 대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의 저서에 의하면 종교가 무의미, 무, 순수한 환상이다라는 비난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근거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나의 저서에 의하면 내가 종교를 환원하는 곳, 내가 종교의 참된 대상이나 내용이라고 증명하는 것, 인간 혹은 인간학도 역시 무의미, 무, 순수한 환상이라고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내가 인간학에 허무적인 호은 종속적인 의의만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학에 허무적인 혹은 종속적인 의의가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단지 인간학의 위에 그리고 인간학에 대립해서 신학이 설정될 때만 그러한 것이다. 나는 신학을 인간학에로 끌어 내림으로써 오히려 인간학을 신학에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신을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의해 인간을 신으로 만든 것과 같은 것이다 – 물론 또 다시 인간으로부터 격리된 초월적이며 환상적인 신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인간학이라는 말을 헤겔 철학 혹은 대체로 지금까지의 철학이 생각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높은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 속에서도 무無 속에 혹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현실성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꿈 속에서 실제의 사물을 현실성과 필연성의 빛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자의의 매혹적인 가상 속에서 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 및 사변철학 혹은 신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는 것, 혹은 오히려 내부로 향하고 있는 종교의 눈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표상 혹은 상상에 있어서의 대상을 현실성에 있는 대상에로 전화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러나, 물론 사상事象 보다는 심상을 선택하고, 원본보다는 복사본을 선택하고, 현실성보다는 표상을 선택하고, 본질보다는 가상을 선택하는 현대에 있어서 이런 전화轉化는 환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파멸이고 혹은 적어도 믿음이 없는 무모한 독신瀆神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에 있어서 신성한 것은 오직 환상뿐이며 진리는 비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인의 눈 속에서는 진리가 감소하고 환상이 증대함에 따라 신성함은 상승한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 최고도의 환상은 또한 최고도의 신성함이기도 한 것이다. 종교는 소멸해 버렸고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조차 종교 대신에 종교의 외관인 교회가 나타나서 적어도 무지하며 판단력이 없는 대중에게 신앙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아직 존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직도 천년 전과 꼭 같이 기독교 교회가 존립하고 있으며 오늘날 여전히 신앙의 외면적 징표가 성행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실제로는 믿어지고 있지 않는 것도 아직 겉보기에는 존중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미 그 자체 내에서 참디ㅗ게 신성하지 않는 것은, 더욱 적어도 신성하게 보이는 것이다.(현대의 신앙은 나와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된 바와 같이 단지 겉치레인 신앙,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믿고 있지 않는 신앙, 결단하지 못하는 소심한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히 성례에 관한 나의 분석에 대해 외관과 환상의 시대인 현대가 종교적 분격을 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호의가 아니라 진리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적나라한 진리만을 목표로 하는 한 저술가에게서 그가 공허한 가상을 존경한다든가 혹은 그것을 가장하도록 바라서는 안된다. 이 가상의 대상이 그 자체 종교의 극점, 즉 종교적인 것이 비종교적인 것에로 급변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나는 성례에 관한 나의 분석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위에 특히 결론에서 서술한 성례에 관한 분석의 본래적인 의미에 관하여 나는 단지 나의 저서의 본질적인 내용, 본래의 주제를 나의 저서의 실천적인 의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감성적인 한 예를 들어 분명하게 한다는것 만을 주의해 두겠다. 그리고 또 나는 여기서 나의 분석이나 사상의 진실성의 증인으로서 감관을 불러 내어 내 저서 전체를 통해서 오성을 향해 강의한 것을 눈을 향해, 아니 촉각이나 미각을 향해 논증한다는 것만을 주의해 두겠다. 즉 세례의 물 및 성찬의 포도주나 빵은 자연적인 힘이나 의의로 해석될 때에 초자연주의적이고 환상적인 의의로 해석할 때보다도 활동력이 무한히 많은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종교의 대상은 나의 저서의 의미에 있어서, 인간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파악될 때에 신학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 보다도 이론이나 실천의 대상으로서 무한히 더 효과적이고 질적인 대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이나 포도주나 빵 속에서 이들 자연적인 물질과 구별되는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전해지는 혹은 오히려 전해져야 하는 것은 단지 표상이나 상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일 뿐이고 진리나 현실성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이 종교의 대상 일반도 역시, 즉 자연이나 인류와 구별된 신적 본질도, 다시 말하면 신적 본질의 규정인 오성이나 사랑이 자연이나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는 것고 같은 오성이나 사랑과는 다른 무엇인가이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나타내게 될 때에 이들 규정 역시 표상이나 상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일 뿐이며 진리나 현실성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화의 교훈에 따라서 신학이나 사변철학이 하는 것과 같이 현실성의 규정이나 힘을 –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존재나 사물을 – 이것들로 부터 구별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즉 추상적인 존재의 자의적인 기호나 매개물이나 상징이나 술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이 독립해서 가지고 있는 의의에 있어서, 그것들의 성질과 동일한 의의에 있어서, 그것들로 하여금 그것들 자체가 되도록 하는 규정성과 동일한 의의에 있어서 받아들이고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여 비로소 우리는 현실적인 이론과 실천에 도달하기 위한 열쇠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효력없는 세례의 물 대신에 실제의 물의 선행善行을 존중한다. 그것이 얼마나 “물다운가!” 그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가! 그렇다. 매우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Luther는 자신의 자연적인 인간적 감각에 기초하여 독신 생활의 겉보임만을 신성한 환상에 결혼 생활을 대립시켰지만 그 결혼 생활도 역시 당시는 매우 평범한 진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나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실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또한 나의 저서의 “신성하지 않은” 정신의 매개물, 비유, 예,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나의 분석의 대상인 세례의 물도 역시 본래의 물인 동시에 비유적인 혹은 상징적인 물인 것이다. 포도주와 빵의 경우도 같은 것이다. 악의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목욕, 먹는 일, 마시는 일이 나의 저서의 총계이며 적극적인 성과일거라고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끌어 내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밖에 할 말이 없다. 만일 종교의 전내용이 성례안에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또한 성례나 성찬때에 수행되는 동작 혹은 행위 이외에는 종교적 동작 혹은 행위가 없다면 그 때에는 확실히 나의 저서의 전내용과 적극적인 성과란 목욕, 먹는 일, 마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저서는 사상事象에 충실하며 대상에 가장 엄밀하게 적합한 종교의 역사적-철학적 분석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자기환멸, 종교의 자체 의식”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철학적 분석은 기독교의 단순한 역사적인 분석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다우메르Daumer 같은 역사가는 성찬이 옛날, 사물을 제물로 하는 제의에서 유례한 의식이며 예전에는 포도주와 빵 대신에 실제의 인육과 피가 쓰여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과 반대로 나는 다닞 성찬의 기독교적인 의의, 기독교에 있어서의 허가되어 있는 의의를 나의 분석이나 환원의 객체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어떤 교의 혹은 제도가 기독교에 있어서(물론 오늘의 기독교에 있어서가 아니라 옛날의 참된 기독교에 있어서),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 있는지 아닌지에는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의의는 그 교의 혹은 제도가 기독교적인 것인 한 또한 그 교의 혹은 제도의 참된 기원이기 도 하다는 근본 명제를 준봉하는 것이다. 혹은 역사가는, 예를 들면 뤼쩰베르거Luezelberger와 같이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순전히 모순과 불합리로 해소된다는 것, 그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 그리스도는 결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일반적으로 성서가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와는 반대로 현실적이고 자연적인 그리스도는 만들어진 혹은 생성된 초자연주의적인 그리스도와 그별되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종교적인 그리스도를 가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 초인간적인 존재자는 초자연적인 인간적 심정의 산물이나 목적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이런 혹은 저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없는가, 일반적으로 기적이란 생길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묻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기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것을 선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서 실제의 사건으로 말하여진 기적의 실례를 토대로 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럿에 의해서, 기적의 가능성 혹은 현실성 혹은 필연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 자체가 이들 모든 문제의 가능성을 폐기하는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반기독교적 역사가들과 나와의 상위에 대해서는 이것만을 말해 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시트라우스Strauss와 브루노바우어Bruno Bauer와 함께 불려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관계에 관해서 나는 여기에서 오직 제목만을 보기만 하여도 알 수 있는 대상의 구별 속에 이미 우리의 저작의 구별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 만을 지적해 둘 뿐이다.  바우어는 그의 비판 대상으로서 복음서적 역사, 즉 성서적 기독교 혹은 오히려 성서적 신학을 가지고 있다. 시트라우스는 기독교적 신앙론과 예수의 생애(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 신앙론의 제목 안에 포함할 수 있다)를, 따라서 교의적 기독교 혹은 오히려 교의적 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다. 나는 기독교 일반, 즉 기독교적 종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며 결국, 단지 기독교적 철학 혹은 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로 기독교를 단지 이론적 혹은 교의학적 객체로서뿐만 아니라, 즉 다만 신학으로서뿐만 아니라 종교로서 취급한 사람을 인용한 것이다. 나의 주요한 대상은 인간의 직접적 객체, 직접적 본질인 “기독교”이고, “종교”이다. 학실과 철학은 나에게 있어선 단지 인간 안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끌어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또한 나의 저서가 전혀 나의 의도나 기대와는 반대로 일반 대중에게 읽혔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언제나 학자나 특별한 전문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나의 참된 교육의 방법이나 저작법의 척도로서 택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런 혹은 저런 체계를 설립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을 진리의 척도로서 관찰하였으며, 처음부터 철학자의 최고의 숙련은 철학자의 자기부인自己否認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숙련된 철학자는 인간으로서도 저작자로서도 자기가 철학자라는 것을 과시해서는 안 되며, 다시 말하면 단지 본질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철학자이지만 형식에서 볼 때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조용한 철학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소리를 높이거나 혹은 소란스러운 철학자가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저서의 경우에도 모든 나의 저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상이 허용되는 한 최고의 명석성, 단순성, 규정성을 나 자신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원래 교양이 있고 사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요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저서는 학자-자명한 일이기는 하지만, 단지 진리를 사랑하고 판단력 있는 학자, 유학 무학의 천한 사람의 심성이나 선입견을 초월한 학자-에 의해서 인정되고 완전히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저서는 아무리 철저하게 독립적인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빈번하게 이런 혹은 저런 역사적 현상을 염두에 두고 논하고 그 현상을 명백하게 지명하는 일 조차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과의 관계는 단지 학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나는 감정의 입장의 필연적 귀결을 전개하는 제 1장에서는 야코비Jacobi와 실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라는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제 2장에서는 주로 칸트주의, 회의론, 자연신론, 유물론, 범신론을 언급한다. 그리고 또 나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자연관과, 물리학적 혹은 자연 철학적 자연관 사이의 모순을 증명한 “종교의 입장”의 장에서는 정통파에 있어서의 철학, 그리고 특히 데카르트Descartes나 라이프니쯔Leibniz의 철학(이들 철학에 있어서 이 모순은 특별히 특징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있다)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의 역사적 전제와 매개의 단계를 모르는 독자에게는 나의 논증이나 사상의 연결점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주장이 그런 사람에게 종종 순수하게 허구인 것 같이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은 여전히 매우 확고한 토대위에 서 있는 것이다. 내 저서의 대상은 보편적인 인간적 흥미에 대한 것이다. 더우기 나의 저서의 근본사상은 언젠가는 확실히 인류의 재산이 될 것이다(그러나 그것도 확실히 그들 근본사상이 여기서 언표되고 혹은 현재의 세대에서 언표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에 있어서 나의 근본사상에 대립해 있는 것은 단지 공허하고, 무력한 인간의 본질에 모순되는 환상이나 선입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대상을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사건(철학의 객체로서)으로서만 취급하였고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종교나 신학이나 사변철학의 착오를 정정하면서 당연히 종교, 신학, 사변철학이 쓰고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사변하는 것 같이 보일 것임에 틀림없고, 혹은 이것과 같은 것이지만 신학화하는 것 같이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사변철학을 분석할 뿐이다. 즉 신학을 인간학에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철학에 적합한-학문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원리를 구체적으로 ㅍ함하고 있으며 또한 적용시킨 것이다. 그렇다. 나의 저서는 이 원리를 단지 원리를 산출하는, 그리고 바로 종교의 핵심으로부터 산출한다는 것에 의해서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은 미리 말해 둔 것 같이 이미 옛날의 가톨릭적 스토아 철학이나 현대의 프로테스탄트적 스토아 철학과는 달라서, 그것의 종교와의 일치를 그것이 기독교의 교의학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에 의하여 증명한다는 것과 같은 유혹에 빠질 수는 없으며 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철학은 오히려 종교의 본질안에서 산출되는 것으로서 종교의 본질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에 철학으로서의 성질과 종교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발생을 논하고, 따라서 설명적이고 논증적인 저서는 형식상 이와 같은 성상性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일반 독자를 위해서는 부적당한 저서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저서의 겉보기에 증명 불충분한 주장을 고려하여 보충으로 나의 前 저서, 특히 「P. Bayle, 철학사와 인류사에의 한 기여」와 「철학과 기독교」를 독자들이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나는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예리한 필치로 기독교의 역사적 해결을 묘사하였고 기독교는 단지 인류의 이성으로부터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으로 부터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나는 기독교가 이미 화재-생명보험제도, 철도, 기관차, 미술관, 사관학교, 공업학교, 극장, 박물표본실에 가장 예리하게 모순되는 하나의 고정관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브루크베르크, 1843년 2월 14일


[기독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  - 제 1 장 일반적 인간의 본질 (1/2)
http://uquehan.blogspot.kr/2012/12/das-wesen-des-christentum-1-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