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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ly 29, 2010

디지털 시티의 슬럼가들…

July 29 2010, 3:18 AM 

오랜만에 옛 잔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고퍼(gopher), 유즈넷(Usenet)…
말그대로 슬럼화된 디지털 스페이스의 잔재를 보다.

월드와이드웹에 대한 보이콧!!
귀중한 통신자산을 보호하자라는 윗트(!) 있는 구호가 웃음을 짓게 한다.

Internet Gopher Information Client v2.0.13
Root gopher server : gopher.slums.net
---> 1. Pentagon Plans to Atomize the USSR/
2. How to Program in BASIC/
3. Academic Departments/
4. ASCII Art of Cows/
5. Obsolete Computing Services/
6. 1992 Yukon Telephone Directory/
7. One or Two Other Internet Resources/
8. Boycott the WWW! Save Precious Bandwidth!/

Press ? for Help, q to Q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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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osted on 2009-11-03 21:39:14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 vs. 우주적인 거미

동양 고전의 말씀.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天網恢恢 疎而不漏)  vs. "나는 우주적인 거미와 싸운다" (도덕의 계보, 니체) ; 인과성의 그물... 영원한 거미, 이성의 거미줄 

“하늘 안에는 더 이상 어떠한 이성의 거미(reason-spider)와 거미줄이 없다는 것. 너(하늘)는 신적인 우연들을 위한 무도장이라는 것, 너는 나에게 신의 주사위와 주사위 놀이꾼을 위한 신의 탁자라는 것"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니체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 ; 순진무구한 우연에 대한 긍정.
한번 던저진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며, 그 던저짐 위에서 이루어지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필연은 정확히 존재가 생성을 긍정하며, 하나는 다수를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우연을 긍정한다  - 니체와 철학,  G. Deleuze
.
.
.
그런 의미에서 스팅(Sting)의 노래는 아무래도 니체를 닮지 않았을까?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numbers lead a dance
- Shape Of My Heart, by Sting

2008-11-26 00:59:17

[시대단상] 동아일보, 노트북의 Spec을 결정하다

2010-01-08 23:09:59

해킹을 통한 "노트북 도청" 이라는 나름 센세이셔널한 낚시로 한 번 때려준다...

몽매한 대중에게 불안감을 조장한 뒤, 여기저기 찔러서 - 소위 전문가, 보안업체, 정부관계자 등을 동원하여 - 대책이라는 것을 촉구...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때린다 : "노트북에 도청 방지 버튼 장착" 추진.

먹혔다... 한 건 올렸다. 본질적인 혹은, 우리나라 검찰들이 애용하는 '실체적 진실'은 중요치 않다.

노트북 도청/해킹시연의, 조금은 어설프고 조잡한 기술적 측면은 그냥 넘어가자... 문제는 표면적인 현상의 침소봉대 수준을 넘어선, 본질로 부터의 이탈과 찌라시적인 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상업적인, 혹세무민 저널리즘의 위대한 정신이여... 노트북 보안을 위하여 하드웨어의 Spec.을 설계하여 제시하는 대한민국 언론의 위대함이여...

동아일보.... 이 참에 완벽한 해킹을 방지할 수 있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아키텍쳐를 설계하거나 IT 보안 전문 컨설팅업으로 방향선회하는 건 어떨지...


The future is google-able ??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2004년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The future is not google-able" 
- Talk at A Clean Well-Lighted Place for Books, San Francisco, CA, February 5, 2004

언뜻 보기에는 쉬운듯 하면서도 어렵고도 어려운 화두(話頭)이다 ; 미래’의 문제는 구글의 영역이 아니라는 언명?

Google search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Key-in 하고 Enter를 누르면 답을 찾을 수 있는 e-nabled 된 세상임에도 - 물론 내가 원하는 정보와 답을 찾기 위해 다수의 Scroll과 Click 은 최소한의 예의?

그런데 위리엄 깁슨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구글(Google)에서 “Future Search”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Search tomorrow’s web, today! Google Australia has introduced a new feature, enabling you to search content on the internet before it is created. 

>>>
Google Launches Future Search
by Michael Arrington on March 31, 2008 

Google Australia launched Gday today, a new search engine that allows users to search a day in advance of real time:

The core technology that powers gDay™ is MATE™ (Machine Automated Temporal Extrapolation).

Using MATE’s™ machine learning and artificial intelligence techniques developed in Google’s Sydney offices, we can construct elements of the future.

Google spiders crawl publicly available web information and our index of historic, cached web content. Using a mashup of numerous factors such as recurrence plots, fuzzy measure analysis, online betting odds and the weather forecast from the iGoogle weather gadget, we can create a sophisticated model of what the internet will look like 24 hours from now.

We can use this technique to predict almost anything on the web – tomorrow’s share price movements, sports results or news events. Plus, using language regression analysis, Google can even predict the actual wording of blogs and newspaper columns, 24 hours before they’re written! 

To rank these future pages in order of relevance, gDay™ uses a statistical extrapolation of a page’s future PageRank, called SageRank.

gDay™ and MATE™ were developed in Google’s Sydney R&D centre.
<<<

뭔가 이건 ??  구글의 Future Search를 통해 내일의 주식시세, 스포츠 경기의 결과, 더 나아가 내 블로그에 올릴 포스트와 신문기사의 내용까지 알아낼 수 있다니…

구글(Google)의 깜찍한 개그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진짜로 “The future is google-able”의 세상이 온 것인가?

>>> 헐~ 만우절 농담... 사악(?)한 구글...

2008-11-29 02:44:53


Wednesday, July 28, 2010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 해가 셋이나 떴으니...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와온臥溫 에서  -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딸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캔자스의 Dust In The Wind…

풍진[風塵]과도 같은 삶의 무상함에 대한 자기 독백

아!! 찰나의 순간은 꿈과 함께 지나가 버리고
바람속의 먼지 티끌과 같은 삶 이여…

망망대해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처럼
진토로 썩어 돌아갈 우리네 생 이여…

세상부귀에 집착하지 말지어다.
저 하늘과 땅 이외는 영원한 것은 없으니…
[ Dust In The Wind – Kansas ]

I close my eyes.Only for a moment, And the moment's gone.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Same old song.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o see.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It slips away, All your money wouldn't another minute buy.

Dust in the wind.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Transfer_from_textcube, 2009092523:39


[Scrap] Ludwig Feuerbach

[ 其 一 ]

종(鐘)의 한 곳이 깨지면 종은 이미 조금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현대의 신앙의 종소리는 음악적인 감관을 얼마나 모욕하는 것인가? 물론 그 종은 또 얼마나 망가져 있는 것인가!
 - 기독교의 본질,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43년.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흐가 살던 당시 기독교의 현실(교회가 종교를 대체해 버리고, 겉치레와 혹세무민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인데 약 17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 其 二 ]

"교회가 종교를 대체하였다"라는 말의 이면에 전제되는 것 :
 타락하지 않고 본래의 정신을 간직한 순수한 종교의 원형.

그 종교의 원형, 본래의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Ludwig Feuerbach는 말한다.

"종교/신 자체가 인간으로 환원되어야 하고,
 또 종교 그 자체의 비밀은 바로 무신론이라는 사실..."

[시대단상] MBC = Myung Bak Communications?

엄기영 사장이 결국 쫓겨났다. 세상 돌아가는게 씁쓸하다.

방통위, 방문진...
이명박 정권의 방송/언론  전위대들이 확보한 승리의 깃발들이
하나 둘씩 죽창에 꿰어져 황량한 우파의 하늘아래 나부끼고 있다.

이런게 바로 조선일보가 일컫던 '깃발부대'의 참모습이지 않을까?

참 대단한 일을 하고있다.

"삽질"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업적.
"언론의 정화 작업!!"

정권 바뀔때 마다 다시 싹 쓸어 버리고
청소작업 해야하는데 청소비용이 만만치 않겠다.

[2010-02-08 21:03:56]

[시대단상] This is the city life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의 모닝 콜…
짧은 순간의 게으름을 위해 시끄러운 소리를 다시 잠재워버린다

비몽사몽에 번쩍 눈을 뜨고는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한다.
매일 아침 의식처럼 치뤄지는 일인데도 숙련도의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귀찮다. 샤워는 생략하고 대충 머리를 감고는 작업복으로 갈아 입는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가방 챙겨 들어 문을 나선다.
아침부터 싸이(Psy)의 노래가 염장을 지른다.
아침엔 우유한잔 간밤엔 소주 한잔
쫓기는 사람처럼 멈추지 않는 시계바늘처럼
꽉 막힌 거리를 꽉 채운 자동차 경적소리
학생들 한숨 소리 this is the city life
.....
한 손엔 휴대전화 따라가기엔 힘겨운 변화
집이란 잠 자는 곳 직장이란 탐하는 곳
회색 빛의 빌딩들 회색 빛의 저 하늘 회색얼굴의 사람들
.....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아침공기를 맡으며 지하철로 향한다
담배 한 모금을 통한 짜릿한 아침 운기조식의 유혹을 느끼지만
걸으면서 길거리에서 담배 피지 않겠다라는 나름의 원칙으로 참아 본다.

지하로 연결된 세계..
이쪽 구멍을 통해 저쪽 구멍으로 나오는 것이
땅속 구멍을 파고 사는 두더지나 미어캣 등의 습성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지하로 향하는 길, [우측보행]의 스티커가 뇌리를 투사해 들어 온다.

걷는 것에 대한 통제...
질서와 규율, 아름답고 효율적인 세상의 창조라는 숭고한 이상 !
좌측에서 우측으로라는 통제의 방향 변경

"저희 공사는 정부의 시책에 부합하고자 역사 내에서의 우측보행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라는 지하철 안내 방송..

[2009-11-10 10:35:04]

One source-multiple copies ; 복제되는 뉴스들…

어제는 오랜만에 집에서 9시 뉴스를 보았다.

KBS.. 약 20여분간을 보다가 별 내용도 없고 지겨워서 MBC로 돌렸다. 스포츠 중계 때문인지 MBC 뉴스데스크의 방영 시간이 좀 늦었다. 그래서 시간차를 두고 두 방송국의 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뉴스라는 것이 간판만 KBS, MBC 일 뿐이지 기사의 편집 순서, 내용이 똑 같다. 순간 기가 막혀 버린다. 기사의 꺼리(대상/주제)는 같을 지라도 뉴스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각자의 관점이나 방점,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라도 있는 것이 당연지사일 터 인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 해야 하나?

어느 한쪽이 거져 먹으려고 남의 회사에서 만들어 놓은 뉴스 프로그램 베껴다가 재 방송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동일한 소스(혹은 News Provider)로부터 똑 같은 뉴스 컨텐츠 공급받아 각각의 회사 로고만 따로 박고 아나운서들이 그냥 대본만 읽어 나가는 것인지…

[2009-03-09 13:47:09]

종합소견, 그리고 딜레마...

종합소견 Summary & Recommendation ;
“초음파 검사에서 담낭내 작은 용종이 보입니다. 용종은 대개 담낭의 안쪽벽에서 안으로 돌출된 다양한 형태의 점막융기를 말하며, 1cm 미만은 임상적인 의의가 없으므로 약 6개월 후 초음파를 통한 추적검사만을 요합니다” 
“중성지방이 높습니다. 중성지방이 높은 경우 동맥경화증의 위험이 높습니다. 정상체중유지, 규칙적인 운동을 하시고 술, 단음식 피하시고 전문의와 상담하여 추적관찰하십시오”
거리가 먼 것 : 규칙적인 운동
가까운 것 : 술, 담배, 감당하지 못할 고칼로리/고지방/고단백의 식사와 설탕에 찌든 간식거리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복부 지방의 팽창력…

딜레마란…    
건강을 위해 “술, 담배 끊고 운동하세요” 라는 권고를 따라야 하는 건지,
아님,,, 술 담배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운동해야 하는 건지의 문제 ??

Transfer_from_textcube| 2009111012:14

악마는 구체성속에 존재한다

악마는 구체성속에 존재한다(Evil exists in the concrete) 라는 말이 있듯 현실에서 구체적인 고통은 세상의 전부로 다가온다..

내가 처한 상황, 고통의 압박은 ‘추상성'의 궁극인 신(神)의 존재를 밀어내 버린다.

자살에 대한 소고


"Suicide is ultimately the only authentic act"

죽음에의 순수한 충동으로부터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 혹은 넘치는 책임감,
그리고 상처당한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복수의 칼날…

Transfer_from_textcube | 2009102122:32

월하파천무

"두견접동 벗을 삼아 북망산천 유랑가세" 
 -천제황의 무협만화 <월하파천무> 중

죽음에 대한 얽매이지 않고 관망적인 태도라면 [회심곡]에서 바라본 죽음은 미련과 집착이다.
애고답답 섫은지고 이를 어이 하잔말가
불쌍하다 이내일신 인간하직 망극하다
동기간이 많다한들 어느누가 대신가며
일가친척 많다해도 어느누가 동행하랴
구사당에 하직하고 신사당에 허배하고
대문밖을 썩나서서 적삼내의 손에들고
혼백불러 초혼하니 없던 곡성 낭자하다 
그 누가 죽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마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여러가지 모습이다.

Transfer_from_hyper_real | 2009112419:30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黨派的'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黨派的' 이다.
敵 혹은 친구를 알고 있을 뿐 비당파성, 관용을 모른다.

반면 사랑은 그 자체가 무신론적이며,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그런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실천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사랑의 모순;
그러한 정신분열적 현상이 기독교에서는
공개적 교의로서의 사랑, 비의적(秘義的)교의로서의 신앙(율법)으로 나타난다.

-  [기독교의 본질],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41 중에서


신은 에너지로 대체되었는가

생명의 근원, 편재성, 삶과 죽음의 주재자…
이런 것들이 신의 특성이라고 한다라면 에너지라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God is replaced by a ubiquitous nexus of energies, the pulse that modulates all materiality”
(신은 모든 사물에 생을 불어 넣는 맥박이라 할 수 있는, 편재된 에너지에 의해 대체되었다)

 - Joe Milutis, Making the World Safe for Fashionable Philosophy!


삶, 그것은... 그것은 겨울날 들소가 내뿜는 한숨에 지나지 않아요

인터넷에서 무협만화를 보는데...
사마달 님의 중에 객잔에서 어느 여인이 부르는 노래이다.
그것은 겨울날 들소가 내뿜는 한숨에 지나지 않아요
그것은 풀밭을 지나는 작은 그늘처럼
해가지면 따라 사라지는 하찮은 바람의 탄식에 불과 한 것을...
내 마음에 든 것은 인생무상, 삶의 허무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글의 표현, 그 생생한 이미지이다.

이 얼마나 절묘하고도, 소름돋도록 생생한 표현인가...
.
.
.
글의 출처가 법구경 인줄 알고 전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法句經은 아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이라는 글도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을 지휘했던 추장 한 사람이 어떤 신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얼마 있지 않아 당신들로부터 떠나갈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알려줄 수가 없다.
삶이 무엇이냐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한 마리의 불나비다.
그것은 겨울날 들소가 내뿜는 한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풀밭을 지나가는 작은 그늘처럼 해가지면 따라서 사라지는 하찮은 것이다.
참으로 그대는 어디쯤 서 있는가.”

'한' 추장이 '어떤' 신부에게 한 말... 죄다 무명씨(無名氏)이다.

아무래도 이건 1970년대 초 인디언 추장이 아닌
백인 테드 페리(Ted Ferry)가 쓴 『시애틀 추장의 편지』 처럼,
'진짜' 인디언 추장이 한 말이 아니고 전혀 엉뚱한 사람의 창작물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진짜 Author가 누구이든 이러한 비유와 묘사를 할 수 있는
그 언어적 상상력과 창조성에 존경을 표한다.

禮에 대해 묻다

지배계급인 공경대부는 예(禮)로서 대하고,
피지배계급인 서인(四民: 士, 農, 工, 商)에 대해서는 형(刑=법)으로 다스린다.

옛 성현이 이야기하는 예(禮),
그 이상향의 주례(周禮)란 과연 무엇인가?

[2008-12-23 06:13:02]

[시대단상] 조선일보 사설 : 나라 品格 갉아먹는 인터넷 속 들쥐들...

조선일보 사설 : 나라 品格 갉아먹는 인터넷 속 들쥐들...
>> 내가 보기엔 품격을 갉아 먹는 인터넷속의 들쥐들보다도
나라를 갉아먹는 벙커속의 들쥐들이 더 무섭다 
그 렇게 주장하는 팩트, 실체적 진실 뭐 하나 제대로 제시하는 것 없고
온갖 추측과 판단을 오도하는 ‘설(說) 만을 유포하는 정부와 언론기업에 맞서
“인터넷 속 들쥐”들이 그 주장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진실을 찾기 위해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10/04/04 12:10

[책] 혁명을 팝니다 The rebel Sell...

혁명을 팝니다 (The rebel Sell)
 - 조지프 히스(Joseph Heath) &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 윤미경 옮김, 마티, 2006년

2006년 장시간의 비행시간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천공항 간이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다.

최근에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또 재미있다.
400페이지가 넘는 조금은 두꺼운 책이지만 골치 아플 내용 없이 죽 읽어 나갈 수 있는 그런 책.

뭐라할까 일종의 좌파에 대한 비판서? 나와 같은 얼치기 쌀롱좌파에게는 그래도 유쾌한 책이다. 비판의 대상은 소위 자파라고 칭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 주의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뭐 굳이 거기에 한정하지 않고 통칭 좌파의 언저리에 있는 다양한 ~주의자, ~론에 대한 비판.. 그렇다고 답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60년대 미국 좌파정치를 지배한 반문화 운동, 반문화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서문을 시작한다. 잠깐 서문의 이야기를 짜집기 해 보면..

>> (60년대 이후 좌파정치를 지배한) 이런 유형의 반문화 정치는 혁명적인 독트린이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소비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주요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반문화적 사고(히피, 문화훼방, 공정무역, 윤리마케팅, 윤리적소비 등등...의 운동)는 현재 자본주의의 진정한 정신이며 지금까지도 그러했다. 바디샵과 스타벅스가 이와 같은 사업모델로 이미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 않나!

히피가 여피가 되었다. 중요한 점은 (소문과는 달리) 히피들이 배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피 이데올로기와 여피 이데올로기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60년대의 반란을 특징짓는 반문화 사상과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요건 사이에는 어떤 긴장도 없었다. 반문화의 가치들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기능적 요건 사이에는 어떤 긴장도 없었다. 반문화는 애초부터 지극히 기업가적이었다. [애드버스터]가 그렇듯이 반문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진정한 정신을 반영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핵심적 개념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환영일지 모르며, 기계들이 우리의 뇌에 감각을 입력시켜 마치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와 서로 교류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 은 "당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회의론적 사고 실험의 업데이트 버전으로 이야기 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매트릭스]는 존재론적 딜레마의 재현을 의도한 영화가 아니라 60년대에 근원을 둔 정치사상,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날(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비공식 지도자인 기 드보르와 그의 사도인 쟝 보드리야드의 작품에서 최고조로 표현된 사상에 대한 은유이다(네오가 흰 토끼를 보게 되는 장면에서 네오가 친구에게 건넨 책이 쟝 보드리야드의 "시뮬라크라와 시뮬레이션" 이다)

모피어스가 매트릭스를 설명하는 대목은 반문화 사상의 완벽한 요약본이다.

"매트릭스는 시스템이야, 네오. 시스템은 우리의 적이지. 시스템 내부에 있을 때 주위를 돌아보면 무엇이 보이지? 사업가, 교사, 변호사, 목수들이지. 우리가 구하려는 게 이 사람들의 정신이야. 하지만 그러기 까지 이 사람들은 여전히 시스템의 일부이고 그래서 우리의 적이지. 이 사람들 대부분이 접속을 끊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길들여져 있고 너무도 무력하게 시스템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걸세" <<

이러한 환영 혹은 사회전체의 백일몽 - 나비의 꿈(장주), 시뮬라크라(쟝 보드리야드), 스펙터클(기 드보르), 환영의 동굴(플라톤), 악령의 기만(데카르트), 또는 이데올로기(마르크스) 등으로 칭해지는... - 으로 부터 깨어나기 위해서는 "빨간약(계몽/의식화)"을 먹어야 한다. (아 계몽주의의 유령이여....) 이러한 속박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정치활동은 쓸모없고 -그건 매트릭스 안에서 정치 제도를 개혁하려 애쓰는 것과 같다 - '인식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체제에 대한 근원적이고 총체적 거부를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반문화 사상이 기대는 사회이론은 허위이다.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지 않으며 스펙터클 속에서 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음모도, 거대한 문화 혹은 체제/시스템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훨씬 더 단조롭다. 있다면 명백히 불공정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제도들이 있을 뿐이다. 진보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반문화에서 분리시킨뒤, 민주적 정치행동이라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 논쟁하고, 조사하고, 연합하고, 법률을 통해 변화를 도모하여 - 신중한 개혁을 통해 이루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위와 같이 몇 줄 혹은 성급한 결론만 요약해버리면 싱겁다. 하지만 책속의 다양한 이야기거리와 생각거리를 천천히 즐기는 것이 책읽는 즐거움 아니겠는가?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10-05-18 22:48:20

해킹(Hacking)에 대한 동양고전의 정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궁구(窮究)하는 자세로 격물치지의 정화를 이루려는 자세..
더나아가 세상 만물의 현상과 질서를 끊임 없이 탐구함으로써
지혜와 지식이 축적되어 진리가 충만하게 된다는 것(대학大學 6장)

 "所謂致知在格物者(소위치지재격물자), 
  言欲致吳之知(언욕치오지지), 
  在卽物而窮其理也(재즉물이궁기리야)"

 "이른바 앎이란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따져 보는 것에 달려 있다.
  즉 내가 아는 것을 투철히 하고자 하려면 만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철저히 따지는 것에 달려 있다"

보들리야르에 대한 뒤늦은 조문(弔問)...

오늘 참으로 오랜 만에 Ctheory.net 에 들렀다가 Arthur Kroker의 “The Spirit of Jean Baudrillard - In Memoriam: 1929-2007” 라는 글을 클릭해서 읽고서야 보들리야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2007년 3월 6일 타계…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
‘실재의 사막(Desert of the real)’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인지, 혹은,  그 ‘실재의 사막’ 속으로 영원히 걸어 들어가 버린 것인지…  삼가 때 늦은 조의를 표합니다. < 2007.05.09 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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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is thought there was always something simultaneously futuristic and ancient: futuristic because his theorization of the culture of simulation ran parallel to the great scientific discoveries of our time, specifically the radical transformation of culture and society under the impact of the speed of light-time and light-space; and ancient because Baudrillard was haunted by the enigma of pataphysics, namely the magical ascent of the reality-principle itself into the language of artifice, seduction and terror.... to make of the referential illusion at the disappearing centre of everything-- sex, consciousness, culture, economy, bodies, terror -- a sure and certain sign of the indeterminacy that haunts life itself.... < Arthur Kroker > 의 조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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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통찰력의 새 지평을 연' 보드리야르 서거에 부쳐… 2007-03-08 오전 10:06:12
최연구/기획위원•프랑스 마르느 라 발레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의 글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70308092524

10년 전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과 벨기에의 물리학자 장 브리크몽은 <지적 사기>라는 책을 통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 보드리야르, 쥘리야 크리스테바,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펠릭스 카타리 등이 집중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프랑스 철학은 겉치레와 수사, 현학을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지적인 사기라는 독설을 퍼부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철학의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프랑스 철학자들은 "과학의 단선적 객관성을 잣대로 인문학을 바라보려는 과학주의자들의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권위주의"라고 반박했다. 이렇게 해서 촉발된 것이 이른바 '과학전쟁'이다. 당시 소칼과 브리크몽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는 우리시대의 올림픽 종목이 돼버렸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현대 프랑스 철학을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난 3월 6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자크 라캉(81년 사망), 질 들뢰즈(95년 사망), 자크 데리다(2004년 사망)에 이어 현대 프랑스 철학의 또 하나의 큰 별이 진 것이다. 프랑스 최고권위의 일간지 르 몽드와 지식인들이 즐겨보는 리베라시옹은 3월 7일자 1면 톱기사로 보드리야르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보드리야르의 비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리베라시옹은 보드리야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1929년 7월 20일 랭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고 브레히트나 맑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던 보드리야르는 1966년 파리 10대학 낭테르의 강단에 서면서 사회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러 학위들을 고려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65년 사회학만이 유일하게 개방적인 학문이었다."사회학을 선택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박사논문이자 첫 번째 저작인 <사물의 체계(1968)>와 1970년에 출간한 <소비의 사회>는 그를 일약 대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현대인의 일상을 소비라는 측면에서 해부한 보드리야르는 현대인들이 물건의 본연의 기능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세와 권위, 즉 기호를 소비한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얻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에서는 독창적인 분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실재가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뮐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이 '시뮐라크르(Simulacre)'인데,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사와 복제에 의한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의 시대라는 그의 독특한 분석과 이론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흐름을 이끌었고 미디어와 예술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81)의 제자로 초기에는 맑시즘을 신봉했으나 1973년 <생산의 거울>이라는 책을 통해 맑시즘과 결별하고 구조주의와 기호학에 관심을 쏟았으며 그 뒤 줄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이론을 전개해 왔다.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 <푸코 잊기>(1977),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1978), <유혹에 대하여>(1979),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 <차가운 기억들 1,2,3>(1987~95), <아메리카>(1986), <악의 투명성>(1990), <완전범죄>(1994), <이타성의 형태들>(1994) 등 50편에 이르는 저작을 남겼고 그의 책의 한국에서도 20여 권이 번역되었다.

그의 포스트모니즘은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지성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걸프전이 한창일 때 그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사일이 정확히 투하돼 목표물이 파괴되는 장면은 실제 아주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안방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속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토모던 현실 속에서는 일상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 한국을 방한했던 보드리야르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제실험은 자연현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시뮐라시옹의 극단적 사례"라고 주장했고, "문화와 예술, 행동양식에서 기호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가리켰던 근대의 시뮐라시옹과 달리 현대의 시뮐라시옹은 급격한 변화와 전이, 도약을 통해 더 이상 재현이 아니라 가상현실로 넘어간다"고 설명하며 '극단적 현실 청산에 대한 두려운 전망'을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자취는 현대사회학과 철학에 큰 족적이 아닐 수 없다.

"소비는 일종의 신화이자 현대사회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며 (…) 충만한 자기예언적인 담론이고 (…) 총체적인 해석체계이자 사회가 스스로를 극도로 향유하는 거울이며, 예견을 통해서 사회가 스스로 성찰하는 유토피아이다."

소비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통찰력을 담은 <소비의 사회>는 그의 학문적 입지를 단숨에 다져놓았다. 이 책의 서문에서 리딩대학교 토크빌연구소 메이어 교수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뒤르카임의 <사회분업론>,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같은 책의 대열에 자리 잡고 있다"고 격찬했다. 모더니티에 대한 분석, 현대사회의 작동기제와 이면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우리시대 지성의 폭을 크게 넓혀놓았고, 무한한 통찰력의 새 지평을 열었다.

'참여하지 않는 지식인', '유토피아적 망상가'라는 그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장 보드리야르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통찰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류의 지적 자산을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간 빈 공간에 그가 우려한 바와 같이 지식인의 무기력과 나태함이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때문에 그가 떠난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 최연구/기획위원•프랑스 마르느 라 발레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보들리야르에 대한 뒤늦은 조문(弔問)...  |2007-10-10 00:26:13

2010/05/07 고향의 풍경


드릅나무.. 드릅을 채취하고 난 후 



소쿠리 가득한 드릅.. 
도시에서 사 먹으려면 네 다섯 개에 2천여원 한다니 금액적으로는 꽤 될 것 같다. 
하지만 팔 것이 아니고 살짝 데쳐서 도시에 사는 자식/손자에게 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은 논에 물 대고 모심을 준비해야 했으나
논에는 여전히 소먹이용 호밀이 자라고 있다. 
올들어 날씨가 하 수상하여 그 탓에 성장이 늦어지고 있다라는... 



집 뒤 텃밭에는 파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집에서 바라다본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


담벼락과 집 벽 사이의 풍경


집 마당의 화단 



집 마당의 아궁이... 
시골 삶에 이것 저것 삶거나 찔게 있으면 이 아궁이를 이용한다.
겨울에는 따뜻한 물을 지펴 세수도 하고...


백발의 할머니는 자식/손자를 위해 드릅이며 갓 캐어낸 쑥을 데치고 계신다



 오랜 세월 속에 삭아져 버린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 장독대




 로렌... 집 뒷켠에서 찰칵...


[아이의 그림] 코끼리, 산타클로스

그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의 표현력 부족때문인지,
나의 상상력 부족때문인지...

   나 : 뭘 그린거니?
   아기 : 코끼리


   나 : 이건 뭐야?
   아기 :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일상의 중력

후다닥 점심을 먹고는 주위를 한 바퀴 돈다
돌고 돌아 결국 종착지는 PC 앞.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얽힌 것처럼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중력...

Transfer_from_textcube | 2009090113:12 

[Scrap] 청산의 그림자에 사람이 있다

"뿔 피리 소리 퍼지고 물결은 아침저녁으로 일렁이며,
  청산의 그림자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있네"
  - 최치원 『계원필경 桂苑筆耕』중의 싯구

청산의 그림자에 사람이 있다라는 말,
개인적으로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적 표현이다...

[Scrap] Hypertext 시대의 책-글쓰기/글읽기의 통합된 공간

Hypertext 시대의 책 ; 글쓰기/글읽기의 융합된 공간.
약20년 전의 글 속에서 현재를 읽는다. 

네트워크 시대에 "저자(Author)"는 공간의 창조자, 연결(Linkage)의 설계자로 변모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문학"의 바깥에 존재하는가, 아님 '문학'의 범주에 포함해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When riding HTTP, soft wired TEXT become meta-text, hypertext per se…
.
.
Artforum NOVEMBER 1991 - by Brian Eno 

WRITING SPACE: THE COMPUTER, HYPERTEXT, AND THE HISTORY OF WRITING
The thesis of Jay David Bolter's book is that the way we organise our writing space is the way we come to organise our thoughts, and in time becomes the way in which we think the world itself must be organised. Bolter, who teaches i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looks at the major phases in the history of writing, from papyrus rolls through medieval manuscripts and on into the era of print. He examines the way in which each of these writing spaces has created its own picture of thinking and of the organisation of thought. "The writing space", he says, "becomes a metaphor, literate culture's root metaphor, for the human mind." Hence the print writing space offers a linear, sequential, and unified writing and reading experience, and encourages us to try to envisage the world in those terms: as a place where logical accretion of cause and effect march forward in a unified plan. The medieval codex, on the other hand, become a forum for discussion and interpretation as successive scribes added their contributions to the texts they were copying. The codex invokes a more negotiable universe - one of pliability, intervention, plurality. Most of this book is dedicated to an appraisal of the most current writing revolution, the computer, and to its implications as a 'root metaphor', Bolter's contention is that the computer/word processor recapitulates all past phases of the history of writing; and, with the idea of 'hypertext', moves writing away from the linear and into a new territory of richly interconnected ideas. Hypertext derives partly from what we know as 'footnoting' in print culture: the process of elaborating on particular ideas contained in the main body of the text. But imagine now a work so rich in footnotes, that there is no longer a single main argument, and the process of reading becomes an active ramble in various directions through a three-dimensional text space. In such a book "the reader calls forth his or her own text out of the network, and each such text belongs to one reader and one particular act of reading." The 'author', then, becomes the person who constructs this possible linkages, but it is in the nature of the system that he or she will never be able to know which particular book any given reader will read. Bolter discusses earlier attempts by such experimental writers as Laurie Sterne, James Joyce, and to modify the writing space of print in order to make it possible for the non-sequential, networked nature of experience to be communicated within its constraints. Joyce is here described as an early creator of hypertexts: unwilling to follow a straightforward narrative thread through the complex web that constitutes human memory, he tried instead to recreate the experience of such a web. In Ulysses andFinnegans Wake he wove a tangle of allusions, cross-references, ellipses, shifts of time, and points of view. The reader is tacitly expected to decode the work, to engage actively in the game of association that it presents, to engage in the process of organising chaotic and multi-layered experience. Borges, on the other hand, wrote in a comparatively traditional manner, but chose to describe new writing spaces: books written and rewritten in countless permutations: books with endlessly branching plots: infinite libraries of random letter-combinations: books about books. Bolter says:

"For Borges, literature is exhausted because it is committed to a conclusive ending, to a single storyline and denouement. To renew literature one would have to write multiply, in a way that embraced possibilities rather than closed them off. Borges can imagine such a fiction, but he cannot produce it... Borges himself never had available to him an electronic space, in which the text can comprise a network of diverging, converging, and parallel times. He could not see that the literature of exhaustion in print by no means exhausts the electronic medium."
An electronic 'book' (if the term still applies) is published as a diskette. In several important ways, it is conceptually different from a printed book, for it is impermanent, ephemeral, a manifestation of energy rather than matter. Most of all, it presupposes interaction, creating a new sense of what it means to be a reader, by diffusing the concept of authorship to all users of the system. The distinction between author and reader actively intervene in the text, adding to, subtracting from, and modifying it from their own keyboards. The idea of 'book' now changes radically: it ceases to be a finite, finished statement and becomes, instead, a space where ideas are continually being gathered together, reassembled, and added to. This suggests the intriguing idea of books that never stop being written, of books that mutate and proliferate and become teeming communities of ideas, a powerful modern version of the medieval codex, with its layer of commentary and addition.

The piece de resistance in this publication is, in fact, Bolter's construction of a hypertext version of the bookWriting Space itself. Slip it into your Mac, and begin to sense the potential of the new writing space. The screen shows a paragraph of text. Certain words or sentences are highlighted. By pointing to one of these, you open up a new window that displays an amplification or extension of that idea. That extension may itself carry highlighted sections inviting further explorations. Then move back out of the network to peruse a window that shows you the overall architecture of the text, pick a re-entry point, and begin reading from a new perspective. Your progress through the electronic text becomes an adventure - a genuinely new reading and thinking experience. I've already modified my copy of the disk: added a few notes here and there, for example, so that I am now to some degree co-author of my particular version of the electronic book called Writing Space. And when I copy that version and pass it on to my friends (as Bolter specifically invites readers to do), they will no doubt make their own modifications and additions. It's conceivable that, after a sufficiently long period, only a small fraction of the material on the disk will have originated from Bolter's keyboard.
The intriguing question of authorship raised by this kind of interaction will keep lawyers employed for several decades. What does authorship mean in new scenarios such as these? If the author becomes someone who 'merely' assembles a network of dots, and then lets you, the reader, join them up (adding and erasing as you go), can he or she be said to be responsible for the shapes that emerge? Should we now describe an author as 'the creator of an ideas space'? And do we then place curators in the same category as we place 'original artists'?

This question is culture-wide, addressing a curatorial spectrum from gallerists (people who identify and distinguish their own particular constellations in the total space of art history, and who thus create original resonances in that space) to rap artists with their samplers (people who fabricate new music out of the total space of existing recorded music). It addresses critics, writers, librarians, political analysts, spin-doctors, news-writers, and educators - anyone whose work is to create patterns in the great fluxes of information. Curatorship is arguably the big new job of our times: it is the task of re-evaluating, filtering, digesting and connecting together. In an age saturated with new artifacts and information, it is perhaps the curator, the connection maker, who is the new storyteller, the meta-author.

Bolter's book may turn out to be primarily about the move away from old concepts of originality. We will stop dividing the world into 'authors' and readers, and start to recognise, instead, a continuum of involvement in the writing process. We will acquire a feel for this continuum through our growing acquaintance with computers, machines that encourage all of us to interact with information. It may well be that Writing Space does for electronic writing what Gutenberg did for print. It is fortunate to have such a detailed and inspiring overview of a new technology this early in its evolution.

망각의 강 너머의 과거와 미래의 심연에 마음을 두지 마라

"망각의 강 너머의 과거와 미래의 심연에 마음을 두지 마라"라는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불가(佛家)의 가르침 중에 三世心都不可得[삼세심도불가득 -금강경(金剛經)]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도무지 얻을 수 없다"

대충 도식화하자면,,,,
  과거 - 집착
  현재 - 분별
  미래 - 욕망
의 미망을 떨쳐 버려야 한다라는 말.

한편 고대 서양의 명상가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비록 당신이 삼천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아니 삼만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삶 이외의 어떠한 것도 잃는 것도 없고, 또 지금 잃어가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래 산 삶도 짧게 산 삶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현재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으며 따라서 우리가 잃는 것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는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기가 갖고 있는 않은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 왜냐하면 그가 갖고 있는 것은 현재 뿐이요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잃어 버릴 수 없으니 인간이 잃는 것은 현재 뿐이기 때문이다.

남방불교의 경전(남전대장경 南傳大藏經=팔리三藏) 중,  소설로도 유명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詩가 있다

...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모든 일에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라
모든 생존에는 걱정 근심이 따르게 되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 처럼 혼자서 가라
...
바람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아~ 번민 많은 인간에게서 어찌 그 우주적인 (이성의) 거미줄을 어찌 쉬이 떨쳐 버릴 수 있겠는가?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10-05-04 23:35:49

Tuesday, July 27, 2010

쟝발장 vs. 몬테크리스토 백작

오늘 술자리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던 주제 :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쟝발장"과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동일인 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 인가? 하는 문제였다...

논쟁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첫번째 주장 ;
"장발장이 감옥에서 탈옥(?) 해서 선행을 베푸는데 그때의 신분이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두번째 주장 ;
"아니다. 장발장과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전혀 다른 별개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라면 두 이야기 / 두 주인공의 명확한 차이,
스토리의 구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큰하고 시끌복잡한 분위기.
그리고 어떤 논거를 가지고 주장할때 그 내용에 대해
다른 사람이 동조할때 언뜻 확실성을 가지고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

집에 있는 아이들 동화책, 문고판 시리즈를 봤는데 내 기억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
전화로 친구, 동생, 배우자에게 전화 걸어 확인하는 사람(들)...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자 어쩌구 저쩌구....
가히 가관!! 하지만 누구나 속시원한 답을 쉽게 얻지는 못하는 ...

더 나아가 장화 홍련과 콩쥐 팥쥐의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어떻게 다른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와 비슷한 고무신 이야기가 콩쥐 팥쥐에도 나오는가?
라는 이야기로의 가지치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뒤죽박죽 이야기들...

"명작" 이라서 너무나  당연하고 익히 알고 있다라는 착각?
그래서 사실은 제대로 읽어 본적은 없다,
또는 어려서 읽어 보긴 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비례하는 기억의 유한성 ?
혹은, Copy & Paste에 익숙한 멘털러티의 단면 ?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2007-10-11 00:54:45

Facism; The panicked nostalgia over the loss of power...

Facism; "The panicked nostalgia over the loss of power, The melancholy of societies without power"
 - Jean Baudrillard

파시즘; "권력을 잃어버림에 대한 무서운 향수... 권력없는 사회가 느끼는 우수..."

Power itself has for a long time produced nothing but the signs of its resemblance.  And at the same time, another figure of power comes into play: that of a collective demand for signs of power - a holy union that is reconstructed around its disappearance. The whole world adheres to it more or less in terror of the collapse of the political. And in the end the game of power becomes nothing but the critical obsession with power - obsession with its death, obsession with its survival, which increases as it disappears. When it has totally disappeared, we will logically be under the total hallucination of power - a haunting memory that is already in evidence everywhere, expressing at once the compulsion to get rid of it (no one wants it anymore, everyone unloads it on everyone else) and the panicked nostalgia over its loss. The melancholy of societies without power: this has already stirred up fascism, that overdose of a strong referential in a society that cannot terminate its mourning.

 - Scrap from [ Simulacra & Simulation] by Jean Baudrillard, 1981

[시대단상] 사진: 김회장 출두 전 리허설, "쇼를 하라"

"쑈"를 해라... 
참으로 시공간적으로 절묘한 사건이다.

[사진]김회장 출두 전 리허설 "쇼를 하라" 
[머니투데이 2007-04-29 17:06]   [머니투데이 최용민 기자]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29일 오후 남대문 경찰서로 출두 시간이 가까워 지자
장희곤 남대문 경찰서장이 간부들과 함께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김회장은 승용차로 의경들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와 경찰서로 바로 들어 갔다.
 
 
 

Transferred from Naver Blog | [사진]김회장 출두 전 리허설 "쇼를 하라" | 2007-10-10 00:16:52

"복수"는 용기있고 힘있는 자의 특권이다...



[2007년 한화 김승연 회장의 사적 린치에 대한 단상]

음... 아무래도 우리의 오래된 속담 중의 하나인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가서 눈 흘긴다"라는 말이 바뀌어야 하겠다.

"청담동에서 빰맞고 북창동에서 복수한다" 라고.  애비의 자식 사랑에 대한 정도가 조폭영화의 복수혈전을 보는듯 하다....

플라이 대디(Fly Dady, Fly)라는 영화...

보통 소시민이자 소심남인 샐러리맨 장가필(이문식 분)의 가족(딸)의 복수를 위한 눈물겨운 부성애와 어떻게 다른가?

한쪽은 돈없고 힘없는 샐러리맨의 힘겹고 눈물겨운 분투라면 다른 하나는 돈과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의 복수?

미국적 영화에서는 가족과 자식을 위한 사랑을 과감하게 보여 준 "영웅"적 행위를 너무 많이 보아왔지만 현실에서는 정작 그런 "영웅"을 목말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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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법률하에서 일체의 사적인 "복수"가 금지되고 국가의 배타적인 형벌권 안에 흡수, 포괄되어버림으로써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사적인 복수가 "범죄"로써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건 결국은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금제"일 뿐이다.


 "복수"는 용기있고 힘있는 자의 특권이다...


[청담동에서 빰맞고 북창동에서 복수한다??] | 2007.04.29 14:16  Transferred from Naver Blog…  

Monday, July 26, 2010

Photo is a power

“neutral” camera… “rendering of reality” even at this stage, a certain “choice” is work, part of reality is enframed and extracted from the spacetime continuum
-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Looking Awry, Slavoj Zizek)
사진은 권력이다라는 말 처럼, 사진이라는 것도 사진을 찍는 사람의 Frame(관점, 당파성, 이데올로기 등)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라는 것. 따라서 “중립적"인 카메라 라고 하는 것의 허구성..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우의 묘비명 -

고대 중국의 가르침과 American pop의 어울림이라…


Confucius; 君者不器 vs. Eagles ; We are all just prisoners here of our own device

지하철에서 한손으로는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펼쳐 들고서  두 귀로는 mp3 player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논어편의 군자불기(君者不器)라는 부분에서  Eagles의 "Hotel California" 중 한 구절이 오버랩 된다.

고대 중국의 가르침과 American pop의 어울림이라…

"군자불기(君者不器)"(공자, 논어)
  틀, 도구에 갇히지 말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vs.

"We are all just prisoners here of our own device"(Eagles, Hotel California)


神, 道, 종교/정치적 신념, 도덕적 가치, 돈, 권력, 조직내에서의 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제도와 도구의 굴레에 얽매여 평생을 지내는 구나
과연 그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서 초월한 존재는 얼마나 되겠는가..


Will to life.. or of various aspects of life


Where they rooted was the bleak of the cement bricks.
Where there is any possibility of living, a life-will was there


He/She comes up on a hard wooden pillars

- 29 August 2009 at Namhan-Sansung (Mountain Fortress of South Seoul)

Sunday, July 25, 2010

[Photo] 구름 불기둥

2010/07/25 어스름녘 산책길에 불그스레 타오르는 구름기둥을 보다

[Scrap] 슬라보예 지젝 ; 사회적 공간의 상대적 지각...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구조인류학]에서 분석한 5대호 종족들 가운데 하나인 위네바고족들이 건물들을 공간적으로 배열하는 유형을 살펴보면, 그 대상이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각기 상당히 다른 그림을 그렸다

한 집단은 중앙의 사원을 둘러싸고 집들이 원 모양으로 조화롭게 둘러싸인 형태로 마을의 평면도를 구상한 반면, 다른 한 집단은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경계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어, 양쪽에 각각 집들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으로 구상했다

정치공간에서의 좌파와 우파... 그들은 정치적인 무대에서 서로 다른 장소들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공간의 배열 자체를 서로 다르게 지각한다

좌파는 그것을 어떤 근본적인 적대감에 의해 본래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영역으로 지각하는 반면, 우파는 그것을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공동체의 유기적인 통일체로 지각한다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장소를 점하고 있다는 점... 거기에는 사회적 관계의 분열, 불평등,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적대감이 존재하며, 결국 서로 다른 두가지 인식은 적대감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상징적 구조를 부과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려는 두개의 상호 배타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의한 <사회적 공간의 지각>...은 결국 관찰자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 [매트릭스], 가해자의 히스테리 또는 새도매저키즘의 징후 

Friday, July 23, 2010

[Photo] "학독"

학독; 요즘에는 분쇄/믹서기로 대체되어
사실상 용도폐기 되어버린,,,
고향집 한켠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과거.
2006:07:08 16:51:31

Monday, July 19, 2010

지구/인류의 종말, 파국에 대한 헐리우드식 공포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고민 vs.
지구/인류의 종말, 파국에 대한 헐리우드식 공포

"As Fredric Jameson perspicaciously remarked, nobody seriously considers possible alternatives to capitalism any longer, whereas popular imagination is persecuted by the visions of the forthcoming 'breakdown of nature', of the stoppage of all life on earth -- it seems easier to imagine the 'end of the world'.."
- [Mapping Ideology] Slavoy Zizek -

Sunday, July 18, 2010

Out there,,, Thailand ; Aug, 2005


한낮의 밝음이 네온사인 불빛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면
여행자의 거리는 새로운 밤을 준비한다
2005/08/02 Tue pm 8:51:14


꽃과 함께 달린다...
난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창밖을 바라다 본다.
그대여,,, 창문밖 세상은 어떠하더이까?

2005/08/03 Wed. pm 5:35:44


기차는 낯선 시골역에 도착하여 잠시 정차하고,,,
하교하는 학생들 한무리가 몰려온다


2005/08/03 Wed. Thailand


나무에 열린 전등...
나무와 전등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2005/08/04 pm 8:09:22


Global presence of merchandising mechanism;
시골 구석구석에까지 펼쳐진 익숙한 상품들의 그물망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태국의 이름 모를 어느 시골 해변에서
2005/08/05 Fri. pm 5:13:06


Coexistence/Symbiosis
꽃과 꿀벌, 그리고 개미의 공존...
2005/08/06 am 11:52:10


Identity;
the blurred distinctions/boundaries.
존재/정체성이란 것의 흐릿함과 그 모호함

2005/08/12 Fri. pm 9:41:52


챠오 쁘라야(Chao Phraya) 강에서 어둠을 맞이하다...
기억과 감흥은 사라지고 이제는 아련한 아쉬움만 남는다
2005/08/14 Sun pm 8:09:44


시골 완행 버스...
아빠는 운전사, 엄마는 차장, 그리고 그 부부의 감독관인 아기.
가족이 운영하는 일터이자 생활터이다.
Family Business :
Father as a driver, Mother as a stewardess,
Baby as a director...
in the local bus at unknown countryside of Thailand
Aug. 2005, Thai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