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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29, 2013

[Scrap] 사회경제관계망으로 부터 퇴출, 해고는 곧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광고업에 종사한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은 자신이 먹을 음식의 식재료를 직접 재배하지 않는다. 직접 옷을 만들거나 집을 짓지도 않는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손수 만들거나 수리하지 않는다. 전력을 생산하지 않으며 직접 유정을 뚫지도 않는다. 청소를 하거나 정원을 돌봐야 할 때도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그 일을 맡긴다. 식사를 할 때도 직접 음식을 만들기보다 식당에 가서 시켜 먹는 일이 많다. 대신에 이 사람은 광고와 관련된 특정 서비스를 담당한다. 이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는 개별적 차원에서 유용성을 따기지는 곤란하다. 그저 광고회사라고 하는 복잡한 전체 조직 구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담당하는 광고 서비스의 결과물을 직접 소비하지 않는다. 다만 화폐 경제의 체제하에서 간접적으로 자신이 생산한 서비스를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물품이나 서비스와 교환한다. 
여기서 예로 든 광고업 종사자는 자신이 상당히 독립적인 일을 한다고 느낀다. 사실 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과거 농경사회와 비교한다면 독립 정도가 아니라 고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전 사회에서보다 훨씬 의존적으로 현재의 사회경제 체제에 결부되어 있다고 느낀다. 
경제가 발달한 사회에서 생산성이 크게 증가한 것은 전문화와 거래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함 속에는 어떤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즉, 이 체계가 붕괴하면 생산성 향상에 제동이 걸리면서 심각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현대인이 갑자기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이나 대부분의 사람이 농업에 종사했던 100여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실업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것으로서 자급자족 경제인 농경사회에서는 실업이란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 출처 : 『Gold; The Once and Future Money 과거 그리고 미래의 화폐, 골드』 Nathan Lewis, 이은주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옛 농경사회에서는 그 체계에는 의존적이었지만, 사실 어찌보면 현대보다는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혼자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훨씬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극도로 전문화 세분화되면서 공동체, 사회적 관계에서는 독립적(윗 글에서 표현했듯이 고립)되어 있지만, 오히려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먹고 살기위해서는 오히려 그러한 사회관계망에 더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만일 그러한 사회관계망으로 부터 이탈 혹은 추방된다면 그 옛날과는 다르게 곧 바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참혹함. 그런면에서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곧 죽음이다라는 말은 사실명제이다. 

[Scrap] NARA에서 찾은 6.25전쟁의 기억 中


최연소 북한군 포로(김준환). 대구. 1951/01/23

가재도구를 지고 손자와 함께 피란길에 나선 노부부. 전주. 1951/03/01

마산에서 피란을 떠나 장생포 피란민촌에 도착한 한 가족 1950/10

어느 북한군 전사의 수첩에서 나온 사진
(사진 뒷면의 기록 : 김용준, 리영록, 김기원, 김용생, 김두형, 주중환 여섯 동무가 568연대 직속 경비소대 사격장 밑에서)

- 출처 : 『한국전쟁 II. 1050-1953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 사진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서 찾은 6.25전쟁의 기억. 박도엮음』

[Scrap] 일제 식민지 시절의 신문기사/신문광고


I. 사진관 광고

천연당 사진관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8/02/08. 사진사 김규진과 향원당의 공동명의로된 광고. 여성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 사진사 향원당을 전면에 내세웠다.
"본당에서 사진값을 특감하여 소본(小本)에 오십전, 중본(中本)에 일환,
대본(大本)에 사환으로 지졍하고 부인사진은 처소를 각별엄숙하고.."


II. 박열부부 괴사진/과문서 사건

아나키스트 박열(朴烈)부부 사건. 아나키스트 박열은 사상적 동지였던 일본인 아내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 조선이름 박문자)와 함께 대역사건(천황제를 거부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었는데,,, 후미코와 함께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일본제국내에서 발칵 뒤집은 커다란 정치적인 사건이 되었던 사건.
"박열과 이미 옥중에서 자살한 그의 애처 박문자에 대하여 작년 7월 29일 이레 게재 금지로 되었던 괴문서 사건은... 해금하기를 정식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괴문서의 내용은 하나는 박열과 박문자가 서로 붓안고 있는 사진에 대하여 박열부부를 너무 우대하였다는 것이오, 또 하나는 경탄할 만한 다섯 가지의 '신괴문'이라고 한 문서로 첫째는 예심정에서 박열부부가 삼십분동안이나 타테마쓰(立松) 판사를 가운데 앉히고 같이 있는 것이오, 둘째는 그 후 재판이 확정된 다음에 박열부부가 박열의 독방에 두어 시간 동안이나 같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그 후 문자는 회임을 하여 당국은 선후책에 부심하였다는 것이오, 그 후 문자가 죽은 시체에는 이상스런 점이 있었다고 하여 여론을 일으키려던 것이더라"
- <법정에서 태연 포옹, 감방에서 양인 동거, 박열부처 괴사진 괴문서 내용,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의 사인도 불명>, 동아일보, 1927/01/21 


III. 동반 자살한, 동성애인 김용주와 홍옥임의 자살

"4월 8일 오후 4시 45분경 영등포역에서 오류동 쪽으로 2.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인천을 떠나 영등포역으로 들어오는 제 428호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20세 전후의 여자 두명이 발견되었다. 현장에는 유서 한 장 발견되지 않았으며 '둘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만 놓여 있었다. 신원 조사 결과 한 명은 창성동에 사는 세전(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교수인 의사 홍석후의 장녀 홍혹임(19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종로 2정목에서 덕흥서림을 운영하던 김동진의 딸로 여고 재학 중에 연하의 심종익에게 시집간 김용주(21세)로 판명되었다. 쾌활한 성격의 홍옥임은 세전에 다니는 한 남학생과 사귀다가 실연한 후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김용주는 자신을 돌봐주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는 남편에 대한 원한과 기혼자여서 다시 학교도 다닐 수없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하나뿐인 친구가 동성의 애인 관계로 발전했다. 둘은 결국 뜻을 합해 죽기를 결심하고 "인생의 생활은 헛됩니다. 헛된 인생의 그날그날이 시들합니다. 그리하여 여식은 이승의 길을 떠나 저승으로 영원한 죽음의 길을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부모에게 남긴 채 자살을 결행한 것이었다" - 동아일보 1931/04/10



IV. 사진 결혼...

태평양을 격(隔)하여 사진으로 결혼 - 매일신보, 1915/03/06

[상의] 사진결혼을 하여도 좋을까요? - 조선일보, 1926/08/13

하와이 사진 신부들의 모습 
하와이 노동자들과 사진 결혼으로 하와이로 떠난 여인들..


V. 포르노그라피 광고

1920년 중반부터 포르노그래피 인쇄물들과 사진이 대량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신문지면에 광고문구도 다양화..

"여(女)의 나체미의 신연구",,, 
"풍만하고 염려(艶麗)한 세계의 나체 미인 사진들",,, 
"염려한 나체 미인 사진 분양"...

'비밀사진' 광고 - 동아일보, 1924/05/08

'미인 나체 사진' 광고 - 동아일보, 1930/03/11

'이백명의 일본 여학생 요금 받고 나체 촬영' - 조선일보 1927/05/14
일본에서 200명의 여학생이 시내 모 사진관에서 한번에 30원씩 받고 나체 사진을 찍었는데, 남성복을 입거나 나체, 여러 모양의 포즈로 촬영을 하여 풍기를 문란시켰다는 기사 
- 출처 : 『경성, 사진에 박히다』, 이경민, 산책자

[Scrap]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한용운의 사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수형기록표,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한용운의 수형기록표, 1929년 

- 출처 : 『경성, 사진에 박히다』, 이경민, 산책자


[Scrap] "문제는 사진이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근대인들은 그림이나 글보다도 더욱 확실한 표상 매체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사진은 그러한 요청에 의해 탄생되었다. 사진이 이 시기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핵심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근대의 모습이란 '사진으로 표상된' 이미지를 통해서 출현하며, 그 이미지로 근대를 이해하고 설명한다. 문제는 사진이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계적이고 자동발생적인 재현방식에 따라 외계의 사물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진에 대해 정확하고 틀림없는 표상 매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누가 재현했느냐에 따라 사진의 사태는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이미지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왜곡된 경우가 많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투명하지 않다. 따라서 사진으로 재현된 이미지 이면에 작동하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주목하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근대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다 보면 다양한 영역에서 생산되 사진들과 만날 수 있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학술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대중문화적인 맥락 등에서 많은 사진들이 생산되었으며, 이 사진들로 근대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 중에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의 인식이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기생 사진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면서 '기생만들기'에 참여한 다양한 담론들과 재현 주체들을 밝히고자 했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 사진을 바라보는 기본입장... 여기서 '재현의 정치학'은 실재와 재현의 관계만을 묻는 기존의 재현 이론을 넘어 그 재현을 누가 했는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재현했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그동안 사진은 어떤 매체보다도 현실 유사성이 강하기 때문에 실재와 얼마나 닮았는가에 큰 관심을 두어왔다. 그러나 사진이 실재와 닮아 보이면 보일수록 그 뒤에 숨어 있는 재현 주체는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사진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재현 주체를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며, 재현 주체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읽어내야 한다."

- 출처 : 『경성, 사진에 박히다』, 이경민, 산책자


* 어떤 측면에서, 저자의 이야기, 인식틀은,,, 근대 인식의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からたにこうじん)의 "풍경의 발견"이라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


Sunday, November 24, 2013

[동영상]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유(다큐멘터리)


 2010년 12월 12일 독일 ZDF 방송



[Scrap] 한겨레 21 : 이 극단의 전향, 그 지독한 자기애 [2012.06.07. 제914호]

기사원문 :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2210.html

동부승지에 임명된 정약용이 정조에게 글을 올렸다. 동부승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수석비서관이다. 임직을 고사하는 곡진한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을 취하였으되, 실상은 ‘사상 전향서’였다. 글의 시작부터 절절함이 묻어났다.
“신(臣)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천주교)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저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정약용의 살아남기 위한 전향 혹은 배교

소를 올린 데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왕의 친위세력인 시파를 견제하려고 무리의 신성(晨星) 격인 정약용 가계의 천주교 이력을 집요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정약용으로선 자신의 정치생명을 두고두고 위협할지 모를 ‘사상 문제’를 차제에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전향을 공인받기 위한 정약용의 필설은 실로 필사적이었다.

“애당초 그것(천주교)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성장한 뒤에는 그것을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분명히 하고 분변(分辨)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임금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當世)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왓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으며 죽어서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임(遞任·벼슬을 갈아냄)하시고 내쫓으소서.”(이상 <조선왕조실록> 정조 46권, 21년(1797년) 6월21일 두 번째 기사)

정약용의 사례에 ‘전향’이란 용어를 적용하는 게 적절한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전향은 ‘사회주의자(급진주의자)가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포기하고 체제가 공인하는 사상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본어 ‘덴코’(轉向)에서 유래했다. 이 정의를 따른다면, 정약용의 행위는 ‘전향’보다는 ‘배교’(背敎)라 이르는 게 합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눈여겨볼 지점은 있다. 갈아치우는 대상이 사상이든 종교든, 그 행위가 과거의 급진적 신념(정약용 시대에 천주교는 체제의 존립을 뒤흔들 수 있는 불온사상이었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형태로 드러나고, 그 부정이 외부의 강압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배교 과정에서 나타난 일련의 메커니즘은 일제강점기 이래 악명을 떨친 전향정책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변주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사상적 공안 국면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한 보수신문 지면에 등장한 새누리당 초선 국회의원 하태경의 발언이다.

“주사파 출신 국회의원 한두 사람 날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과거 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종북 파동을 고백운동으로 바꿔나가야 한다.”(5월30일 <문화일보> 인터뷰)

하태경은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주사파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된 경험이 있는 ‘전향 486’이다. 그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종북 논란’이 본격화하기 한참 전인 지난 3월28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통진당에 과거 북한과 연결된 지하조직원 출신이 5명 이상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당시 이력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 이석기를 겨냥해선 “과거 북한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된 지하조직 민(족민주)혁(명)당의 서열 5위 안에 드는 핵심 고위직”이라고 ‘폭로’해 이념 논란에 불을 지폈다.
» 주사파 운동권에서 반북 뉴라이트로 전향한 김영환, 최홍재, 한기홍씨(왼쪽부터). 이들의 변신을 ‘전향’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애초 이들이 추구한 ‘부강한 민족국가’라는 이상은 좌파의 일반적 사고와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했던 까닭이다.

‘2세대 전향자’ 입을 빌린 정치적 겁박


하태경을 필두로, 한동안 잠잠하던 주사파 출신 486 전향자들이 공세의 전면에 등장했다. 계기는 4·11 총선 직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동이었다. 새누리당 지역구 낙선자인 최홍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한기홍,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구해우 등이 나섰다. 이들은 모두 세칭 일류대 출신으로 1980~90년대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학생운동 조직의 지도부에서 활동한 뒤 1990년대 말 극단적 반북주의자로 변신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가장 맹렬하게 공격하며 북한 체제 전복론 등을 펼쳐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통합진보당 내부 취재에 어려움을 겪어온 보수매체들은 5월 초부터 이들 전향 주사파의 고백과 전언을 소스 삼아 대대적인 ‘이념 공세’에 나섰다. 논란의 초점은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부정 경선’과 ‘패권주의’에서 당권파를 위시한 통합진보당 민족해방(NL)파의 북한 인식과 이념 문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과장과 예단도 있었지만, 직접 체험에 근거한 전향자들의 구체적 진술은 일반 국민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주사파 운동권에 정통한 내부자가 아니라면 쉽게 접하기 힘든 고급 정보인데다, 진술의 신빙성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보수신문과 종합편성채널 등은 앞다퉈 그들의 전언을 소개했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일심회 등 1990년대 말, 2000년대 중반의 주사파 조직사건에까지 많은 지면과 꼭지를 할애해가며 ‘종북파’에 대한 공포와 경각심을 조장했다.

5월28일 <중앙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KAL기 폭파도/ 북 지령 따라 왜곡/ 그것이 주사파다’였다. 기사에는 ‘자민통 보스였던 구해우씨가 본 통합진보당 종북파’라는 문패 아래 ‘의혹 키우고 국민 현혹시켜/ 배후는 오직 북한 노동당/ 이석기도 무대 등장인물일 뿐’이란 중간 제목이 달렸다. 기사에서 구씨는 통합진보당 인사뿐 아니라 민주통합당 소속인 안희정 충남지사의 학생운동 시절 행적까지 언급했다.

<조선일보>는 5월24일 ‘이정희·김재연의 중간세대인 1996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종철씨의 주사파 고백’이란 제목으로 ‘2세대 전향자’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자신이 주사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술하는 차원을 넘어, 486 전향자들보다 더 극단적인 폭로와 전망을 쏟아냈다. “주사파들에겐 종북이란 말이 오히려 약하다. 이들은 수령론·후계자론·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대한민국을 북한처럼 만들자는 사람들이다. 북한이 무너지기 전까지 절대 종북세력은 바뀌지 않는다.”

전향자들의 고백 퍼레이드가 취하려는 목표는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그들은 비전향자들의 뼈를 깎는 반성이나 통합진보당의 민주적·사상적 혁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점은 이종철의 이어지는 발언에서 한층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런 사람(종북파) 10명 정도가 국회에 들어가면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통진당이 섞인 야권 연대가 선거를 이긴다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북한 김정은 왕조와 공동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권자를 향해 ‘이래도 야권 연대 지지하겠느냐?’는 정치적 겁박이었다.
»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 신지호 전 의원은 새누리당에 몸담고 있는 대표적인 민중민주(PD) 계열 출신 전향자들이다. 세간에는 이들을 입신을 위해 사상을 저버린 ‘출세형 전향자’의 표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김문수, PD 계열 전향의 극단


<사유의 악보>를 쓴 작곡가 겸 철학자 최정우씨가 5월28일 트위터를 통해 이 문제를 짚었다. “신문 전체가 ‘개심’의 변을 새삼 고백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부흥회장’이다. 자본과 파렴치와 추한 종교적 열정이 한 신문 안에서 이렇게 완벽히 만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자신의 트위터에서 전향자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환기한 터였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좌냐 우냐’가 아니라 ‘행태의 극단성’에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은 극우에서 전향을 해서 극좌로 갔다가 다시 극우로 돌아온다. 그들이 가진 진짜 이념은 ‘극단성’이다.”(5월27일 트윗) 진 교수는 이미 올해 초 <씨네21>에 쓴 칼럼 ‘전향의 정치학’에서 최초의 주사 팸플릿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에 대해 “그가 반성할 것은 ‘좌’라는 방향이 아니라 극단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를 반성한 채 그 극단성을 그대로 갖고 ‘우’로 갔고, 그 결과 극우가 됐다”고 논평했다.

이런 변신의 극단성은 전향 주사파들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다수의 좌파들이 동구권 붕괴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목도하고 가시적·비가시적으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순치해나갔지만, 유독 정치권에 진출한 좌파 중엔 변신의 폭을 극단적으로 가져나간 자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민중민주(PD) 계열 전향자로 꼽히는 경기지사 김문수가 그런 경우다. 1970년대 서울대를 중퇴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체제 변혁을 위한 정치투쟁을 강조하며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 운동가들을 경제주의·개량주의로 몰아세운 급진주의자였다. 1990년 장기표의 권유로 민중당 창당에 참여해 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사이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와 소련의 해체(1991년)를 목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변화는 대개의 좌파들이 그렇듯 이념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점진적 자기갱신 쯤으로 여겨졌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에서 의회주의 좌파로의 변신 말이다.

» 이재오 의원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19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이 2%의 지지율도 얻지 못해 해산된 뒤 그는 좌절했다. 1994년 민정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 민중당 선배인 이재오와 함께 입당했다. 말 그대로 전향이었다. 그가 든 전향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민중당의 실패. 15대부터 내리 3선을 하고, 경기지사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충실한 말과 행동으로 전향의 이름값을 지불해왔다. 한때의 동지들을 앞장서 공격하며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고, 국가보안법을 옹호했다. 새로 편입된 집단 안에서 전향의 진실성을 인정받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의 행보는 전향 동료 이재오가 유독 박정희와 ‘유신독재’에 대한 증오심만은 거두지 못하는 것과도 묘한 비교를 이뤘다.

전향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변신의 극단성은 보통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 욕구’의 산물로 설명되곤 한다. 변신에 따른 심리적 불안정을 메우려고 과거의 대극에 있는 신념·사상을 취하게 되고, 자신이 속했던 집단에 대해서도 한층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 앞서 사회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전향을 경험한 일본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1930~40년대 일본 공산당 지도부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포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천황제 파시즘의 열광적 지지자가 됐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핵심으로 꼽히는 라이어넬 트릴링, 어빙 크리스톨도 젊은 시절엔 극좌 트로츠키주의자였다. ‘네오콘의 한국판’이란 비아냥을 듣는 뉴라이트 역시 핵심 이데올로그들은 전향 주사파다.

주사파나 뉴라이트나 공히 부국강병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이들 행위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고 꼬집는다. “사람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좋아하는 행위 자체다. 그 행위가 나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 대상이 나에게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할 때, 그 대상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아나선다. 주저 없이 신념과 사상을 갈아치우는 사람들, 그들의 행위를 추동하는 것은 결국 ‘자기애’다.”

물론 이 교수는 주사파의 극적 변신을 전향으로 규정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이것은 주사파를 과연 ‘좌파’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적 주제와 관련된다. 그가 볼 때 ‘주사파=좌파’는 일종의 착시다. 한국에선 보수 우파가 민족·국가를 방기하다 보니, 민족주의자가 졸지에 좌파가 돼버렸다는 논리다. “그들이 희구한 것은 정상국가, 곧 민족국가였다. 자주적 통일국가는 결국 부강한 국가, 열강과 당당히 힘을 겨룰 수 있는 국가다. 그 가능성을 북한에서 찾았던 이들의 일부가 실상을 확인한 뒤 뉴라이트로 돌아섰다. 그들은 여전히 이상적 민족국가를 추구하고 있다. 뉴라이트의 선진화론이 대표적이다. 그게 과연 전향일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주사파의 변신은 총체적 자기부정이라기보다 즉자적인 ‘노선 선회’에 가깝다.

하지만 ‘전향’에 대해 엄격한 ‘개념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전향을 “근대 세계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특성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 세계는 복수의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공간인데,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판별할 절대적 준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개인들이 상황과 인식 조건의 변화에 따라 신념 체계를 바꾸는 것은 예외적이기보다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전향을 대하는 시각이 어떻든, 타인에게 전향을 강요하는 행위가 심각한 반인간적 폭력이란 점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택광 교수는 “전향하라는 것은 사실상 주체성을 바꾸라는 것으로 결코 용인돼선 안 될 행위”라고 말한다. 특정 사상이나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개인의 인격 구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만큼, 억압이나 강요로 그것을 바꾸려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김홍중 교수는 전향 논란에 자리잡은 ‘(나의) 진정성 대 (너의) 비진정성’의 대립 도식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전향자든 비전향자든 자신의 태도만이 진실되고 순정한 것이란 인식을 버리지 않는 한 ‘진정성의 폭력’은 언제든 타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 형제의 비극을 새삼 재론하게 되는 이유다.


» 신지호 전 의원 <한겨레> 강창광 기자
약종의 죽음에 끝내 침묵한 약용

정약용의 고백과 참회에도 반대파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위장 전향’을 의심하는 시선도 여전했다. 1800년 강력한 후견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약용은 다시 한번 옥사(신유박해)에 휘말린다. 1801년 그는 형인 약전·약종과 함께 혹독한 추국을 당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는 과거의 행적과 사상을 거듭해 부정하며, 배교를 거부한 형 약종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영세를 준 매형 이승훈을 저주했다. 심지어 천주교도 색출법을 자청해 조언하고, 처조카 황사영을 발고하기도 했다.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약종이 처형되고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정약용과 약전 형제는 남도로 긴 유배길을 떠나는 내내 형제와 일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약종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침묵했다. 신념을 버리고 핏줄을 배신하면서까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19년의 유배가 풀린 뒤 고향에 돌아와 쓴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그 유장한 문체의 심연 너머로 속절없는 처연함이 묻어난다. 그가 남긴 명(銘)의 일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 하였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의 분운(紛云)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영화] 러시안 소설(The Russian Novel, 2012, 한국)


신연식감독/감신효, 경성환... ;

사실 약간은 졸리는 영화...

영화 도입부의 이야기...

"낚시터에서 낚시꾼이 밤새 낚시를 하고 있었다.
왠일인지 낚시꾼은 밤새 낚시를 한 물고기를 잡았다 풀어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새 낚시꾼을 바라보던 또 다른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낚시꾼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낚시꾼은 또 다른 낚시꾼에게 대답했다.
어제 잡다 놓친 그 놈을 잡느라 이 고생이라고..."


Saturday, November 23, 2013

[Scrap] 다산 정약용의 독서론


다산 정약용이 순조 1년(1801년)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1802년(당시 다산의 나이 41세)때 어린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원제는 기이아寄二兒, 두 아들에게 보냄)에 나타난 다산의 독서론;

다산은 편지에서 어린 아들에게 몰락한 남인계 집안으로서 폐족(廢族)의 처지에 잘 대처하고, 가문을 보존해야 함을 역설하고, 이를 위해서는 독서, 곧 학문에 전념하며, 문장에 뛰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먼저, 다산은 본인의 과거와 독서, 문장을 되돌아 보며 자신의 문장은 관학(官學)의 풍을 벗어날 수 없라고 다음과 같이 자평한다.

"나의 시나 문장은 은하수의 물로 세척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거문장(科文)의 기미를 씻을 수 없고, 그 중에 잘된 것이라 할 지라도 관각체(館閣體)의 기미를 벗어날 수 없다"

15세가 되어서 서울에 올라가 유학(遊學)하였으나 방랑하기만 하여 터득한 것이 없었다. 20세에는 비로소 과거 공부에 전심하였는데, 태학(太學)에 들어간 뒤로는 또 변려문(한문체의 하나로 주로 4자 및 6자의 댓구를 많이 쓰는 문체로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 229-589 때 성행했던 문체)에 골몰하였고, 뒤이어 규장각(奎章閣)에 예속되었는데 하찮은 문장학에 머리를 썩인 지가 10년 가까이 되었으며, 그 후에 또 교서관(校書官)의 일에 분주하였다. 곡산(谷山: 황해도지방)에 부임해서는 백성 다스리는 일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신헌조, 민명혁 두분의 탄핵(다산이 37세때 형조참으로 있을때 서학西學의 일로 탄핵을 받은 사건)을 받았고, 이듬에는 정조께서 승하하시는 슬픔을 만나게 되었다. 
경향 각지로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지난 봄에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거의 하루도 독서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시나 문장은 은하수의 물로 세척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거문장(科文)의 기미를 씻을 수 없고, 그 중에 잘된 것이라 할 지라도 관각체(館閣體, 홍문관, 예문관에 종사하던 학자들이 주로 썼던 고문古文을 사용한 문장체)의 기미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내 수염과 머리는 이미 백발이 희끗희끗해졌고 정력 또한 이미 쇠약해졌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독서/학문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먼저 경학(고전 경서)를 철저히 읽고 정치/경제학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마쳐야 비로서 본격적인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에 근거한 옛 선배들이 글을 두루 읽어야 한다는 충고. 실사구시의 학자다운 자세이다.
문장은 반드시 먼저 경학(經學)으로써 근기를 확고히 세운뒤에 사서(史書)를 섭력해서 정치의 득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들의 경제(經濟)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비로서 독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혹 한개 낀 아침과 달 밝은 밤, 짙은 녹음과 가랑비 내리는 것을 보면 시상이 떠 오르고 구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시가(詩家)이다. 나의 이 말을 오활하다고 여기지 말라. 
수십 년 이래로 대개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문학을 크게 배척하여 모든 선현의 문집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데,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고 선배의 문집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의 학문이 고금을 꿰뚫었다할지라도 자연 조잡하게 될 것이다. 시집은 서둘러 볼 필요가 없으나, 상소문, 차자(箚字-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 또는 상관이 하관에게 보내는 공문서), 묘문(墓文), 편지 등을 읽어 모름지기 안목을 넓혀야 한다
 - 출처 :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 엮음, 사군자

[Scrap] 가족의 죽음에 대한 옛 선조들의 슬픔을 담은 글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며 - 추사 김정희
이 글의 원제는 부인예안이씨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으로, 추사 김정희가 55세인 헌종 6년(1840년) 가을부터 제주도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추사가 유배지에 있던 1841년 11월에 병약한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부인의 부고는 다음달이 되어서야 추사에게 전달되었다. 귀양살이 때문에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하고 장례를 치르지 못한 추사가 통곡하는 마음으로 아래의 제문을 지어 집으로 보냈다. 

아아, 나는 차꼬(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형구)가 앞에 있고 옥에 갇히고 섬으로 귀양을 왔으나 아직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져서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이 어쩐 까닭인가.

아아, 대체로 사람마다 모두 죽음이 있거늘 홀로 부인만 죽임이 있지 않을 수 있으리오. 다만 죽을 수 없는데 죽었기 때문에 죽어서 지극한 슬픔을 품었을 것이고 기막한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장차 뿜어지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능히 공자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으리니, 그 원한이 나의 귀양살이의 고통보다 더 심하지 않아서이겠는가?


슬픔이 커서 뿜어지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는다..


사랑하는 딸을 보내며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시집가서 젊은 나이에 죽은 딸을 눈물로 통곡하며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을 절절히 나타내는 제문이다. 

1550년(명종 5년) 십일월 경인삭(庚寅朔) 기해일(己亥日)에 아비는 슬픔을 머금고 병을 안은채 상중(이때 김인후는 또다른 거상중居喪中이었다)에 있으면서 떡과 술을 갖추어 멀리 양씨 집에 출가한 내 딸의 영전(靈前)에 보내노라...

네가 병이 들었을 때, 내가 손수 어루만져 주지 못한 것은 상중에 있는 몸이라 네 어린 아이에게 혹시 무슨 탈이 있을까 염려한 탓이다. 그러나 네 병이 위태로워질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단다...

봄볕같이 따스하고 빙옥(氷玉)처럼 맑은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가슴에 가득한 슬픈 설움이 진실로 마음의 병을 격하게 해도, 눈물을 참고 울분을 삼키는 것은 어찌 다른 까닭이 있어서였겠느냐. 상중에 있는 몸인데다가 자친(慈親, 어머니)마저 노쇠하여 병중에 계시니, 정에 치우쳐 산 목숨을 경솔히 하는 것도 감히 못할 짓이다. 이제 또 날이 차고 길조차 멀어 친히 가서 살펴보고 영결(永訣)을 못하게 되니, 아아 슬프구나...

길게 부르짖으며 슬프게 보내는데, 내 정이 어찌 다할소냐. 아아 슬프구나.

- 출처 :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 엮음, 사군자

Thursday, November 21, 2013

"냄새"라는 것의 역사성/문화성/주관성...


지금은 커피 볶고 커피 내리는 향기를 좋게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 이겠지만,,, 커피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커피 냄새 자체가 "악취"로서 취급되기도 하였다.
"이발사인 제임스 파는 스스로 커피라고 부르는 음료를 끓여 판매함으로써 조제할 때 발생하는 악취로 이웃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며, 나아가 이 음료를 준비하기 위해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끊임없이 불을 때 이웃 주민들에게 큰 위험과 두려움을 야기하므로 이에 고발합니다"

- 17세기 영국에서의 공공연한 커피에 대한 탄핵과 고발 中, 『커피 Coffee: The Epic of a Commodity』 by Heinrich Eduard Jacob, 우물이 있는 집
그런걸 보면, 냄새라는 것도 사회/문화/역사적 현상...

일본의 메이지 초기 육식장려운동이 시작되던 시기, 일반 서민들은 고기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코를 막고 눈을 가린채 가게앞을 지나갔다라는 기록도 있던것을 보면(관련 링크),,, "냄새"라는 것의 역사성/문화성/주관성...

Thursday, November 14, 2013

[Scrap] 제왕 맥주


커피에 대한 책, 하인리히 E. 야콥의 『커피의 역사 Coffee: The Epic of a Commodity』라는 책에서는 커피의 경쟁자, 와인과 맥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래는 맥주에 대한 이야기 중 일부 Scrap.

"북부 독일에서 맥주가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로 그 역사가 250년을 넘지 않는다. 더구나 맥주가 배타적으로 독점한 시기를 이야기하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제왕 맥주'는 중세가 막을 내리때까지도, 북부에서 시작한 그 세력을 남부 독일로는 확산시키지 못했다.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제왕 맥주가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북해의 안개 속에 번성한 도시(함부르크)에서 였다. 맥주는 함부르크의 부를 이룬 주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였다... 한세기 전, 메카에서 전해진 커피가 오스만제국을 정복하는 동안 맥주는 함부르크를 기점으로 네덜란드와 유틀란드 반도, 스웨덴, 그리고 러시아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함부르크의 화물선들은 스카게리크와 카테가트 해협을 통과하여, 사운드 해협과 벨트 해협의 바닷길을 헤치며 맥주를 실어 날았다. 그들은 맥주와 함께 또 다른 일용품들을 잔뜩 싣고 있었는데, 이것들 또한 맥주와 잘 어울리는 것들로, 갈증을 배가시키는 소금에 절인 청어 같은 것들이었다. 함부르크의 화물선이 도착하는 항구에서는 어김없이 흥청망청 맥주와 청어의 향연이 벌어졌다. 갈증난 목구멍은 함부르크의 맥주로만 해갈이 되었다. 

(14세기) 북유럽에서는 취하도록 과하게 술을 마시는 풍조가 만연했다. 전투용 도끼와 검으로 무장한 비틀거리는 거인 맥주는 거침없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바이킹들은 항해 중 빙하를 만나면 맥주를 마셔서 온기를 유지하였다. 그들의 항해는 물뿐만 아니라 맥주로 흠씬 젖은 항해였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맥아로 주조된 술 냄새가 진동하였다. 그들의 턱수염은 맥주에 절었고, 큰 술잔은 금새 맥주로 다시 채워졌으며, 맥주 통의 마개는 닫힐 새가 없었다. 

북서부 일대와 북동부 일대 전역이 거대한 맥주창고가 되었다. 당대 사람들의 눈과 혈관 그리고 감각은 맥주에 절어 있었다. 맥주가 그들의 간장, 목소리, 심장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은 맥주 속에서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했다. 함부르크가 덴마크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소요된 예산의 상당 부분을 맥주가 차지했다. 슈트랄준트에서 군대와 해상전투 병력에 보급한 식량의 3분의 2가 맥주에 할당되었고, 뤼베크 해전에서 소요된 2640마르크 중 1140마르크가 맥주에 쓰였다. 한자동맹의 회계기록을 보면 20명의 선원이 평균 57갤런 상당의 맥주를 마신 것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 1400년대 1200명을 대상으로 함부르크의 직업조사에 따르면 460명이 주조업자였으며, 100명 이상이 맥주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당시 직업인 중 45퍼센트가 맥주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맥주소비가 정점에 이르렀던 15, 16, 17 세기에는 지금처럼 맥주를 대중식당이나 주점에서 마시지 않고 집에서만 마셨다. 그런데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 즉 만드는 곳에서 마신다는 점이다.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누렸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필요에 따라 맥주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맥주를 마실 수..."

 - 출처 : 『커피의 역사 Coffee: The Epic of a Commodity』 by Heinrich Eduard Jacob, 박은영옮김, 우물이 있는 집

Wednesday, November 13, 2013

[Scrap] 15~18세기 수녀원에 얽힌 뒷 역사


"정욕적인 여성들의 표본이라고 비난을 받는 범주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하게도 원래 가장 전형적인 순결의 표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 즉 수녀들이다. 수녀들의 정욕이나 엄청난 방종에 대한 보고와 묘사는 거대한 도서관을 하나 만들고도 남을 정도이다. 이 주제에 관한 자료는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존재하지만, 종개개혁 시긴인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더욱 많이 등장한다. 종교개혁 시기의 견해로는 유명한 가일러 폰 카이저스베르크의 것이 특히 탁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예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소녀들이 많았다. 육욕을 채우기에는 거기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 어떤 사람이 딸을 수도원으로 보내야 할지 그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이 말이 딸을 '유곽'으로 보내는 것, 즉 직업적인 창녀를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했다. 금박 제조업자였던 안토니 크로이처(Antoni Kreutzer)의 뉘른베르크 연대기 원고에는 "어린 수녀가 수도원에서 나와 어디론가 달려가네. 그곳은 유곽이지"라고 적혀 있다. 이런 기록은 수 없이 많다. 더 늦은 시기인 17세기와 18세기의 것들도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완벽하게 같다. 

그러자 이런 묘사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이 등장했다. 첫째로, 이런 묘사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편파적인 비방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비방은 루터파,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자와 반교회적인 무신론자들이 양심도 없이 사용한 검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를 철저하게 찬양하던 사람들이 주장한 반박의 요지이다. 교회를 이 정도로 무조건 찬양하지 않던 사람들, 즉 불쾌한 어떤 사실을 "그건 거짓말이야!"라는 판결로 간단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약간 다르게 설명했다. 이들은 이렇게 흔한 비방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리게 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반화 욕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중립적이라는 역사가들이 자신의 객관성을 드러내기 위해, "공평해야한다"는 틀에 박힌 서론으로 책을 시작하며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객관성이 아니라, 사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수녀원의 도덕 상태는 가일러나 그 외에도 재치있고 시끌벅적한 요한네스 쉐르(Johannes Scherr 1817~1886)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이 묘사한 것과 실제로 같을 때가 많았다. 중세의 많은 수녀원들은 귀족과 명문가들이 즐겨 머무는 평판 나쁜 여관과 다름없었으며, 매일 밤마다 빈 방이 없이 꽉 찬 수녀원들도 있었다. 유럽의 교차로에서 성업 중인 여관들보다 손님이 더 많았던 것이다. 이와 관한 확실한 증거는, 노골적으로 명백하게 묘사한 귀중한 자료인 [짐머 연대기]만 한 번 읽어 보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수녀원들 역시 호색적이고 아주 우수한 사랑의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기교가 뛰어난 비너스 여사제들이 수녀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최근 연구들도 이런 일들이 사실임을 예외 없이 증명한다. 이런 연구에 의하면, 라블레나 아레틴, 카사노바나 로쟁이 대담하게 수녀들의 생활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실적인 무화상이었다. 공쿠르 형제는 1세기 외설의 정수는 수녀들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수녀원에 들어간 사람들의 경제 법칙, 그리고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짧은 기간내에 수녀원들이 말 그대로 우후죽순처럼 생긴 원인에 지극히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수도원이 철저하게 신실한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며, 그래서 이들은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관능적 향락을 버리길 원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류이다. 물론 이런 오류는 무척 자주 일어난다. 널리 통용되는 이런 가정은 많은 여성들을 수도원으로 쫓아보내는 진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세속의 즐거움을 진심으로 거부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가기로 약조한 것이 아니라, 절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갔다. 재산이 분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 또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들이 이들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과 명문가들에게는 가족 중 여자 구성원을 수도원으로 보내는 것이 노처녀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이 계급에서 노처녀 문제는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늘 있어 왔다. 이렇듯 지배 계급의 딸들이 수도원에 차고 넘친 현상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지만, 가진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일을 위해서라는 표어를 내보였다. 이 방면의 수도원 역사 연구에서 전형적인 예는 파리와 베네치아 인데, 이 두 도시는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줄 것이다. 18세기에 베네치아에는 수녀원이 서른다섯 개 이상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가족회의 결정에 의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된 귀족층 젊은 여성들로 가득했다. 예전에 이 도시에 있던 수녀원의 숫자는 이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지키려고 한 현상에 비례하여 수녀원의 숫자도 증가했다는 점이다. 

경건함이나 세속적인 욕망의 포기는 전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그저 의식적으로 쓴 가면에 불과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여기에 상응하는 내적 원인 때문이었으므로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사치스럽게 자란 이런 여성들에게 적합한 형태는, 편안하게 오락을 즐기며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한 물론 가장 편안한 오락은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사, 즉 오락만을 위한 사랑이었다. 수녀복을 입은 사랑의 예술가들이 이런 오락을 발전시켰다. 18세기의 베네치아 수녀들은 옷이나 몸짓 등 전체적인 행동에서 세련된 교태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네치아의 수녀들은 거리에서 언제나 호색적인 동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얘, 너 왜 우리 수도회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지?" 
"뭐 하러 길을 빙 돌아가겠어요? 저는 수녀님들도 언젠가는 어차피 우리 쪽으로 오리라는 걸 잘 알거든요"
순결하지 못한 수녀들의 생활에 대한 프랑스 캐리커쳐, 몰로슈, 1871년


종교성과 섞인 여성의 관능에 대한 풍자적 부식 동판화, 
벨기에 캐리컬처, 펠리시앙 롭스

 출처 : 『캐리커쳐로 본 여성 풍속사 Die Frau in der Karikatur』, 
Eduard Fuchs, 전은경옮김, 미래M&B


[Scrap] 순결위원회



역시 금지는 욕망과 어둠을 새록 새록 만들어 낸다,,,
(오스트리아) 빈은 늘 방종한 관습으로 악명이 높았고, 이 악명은 사실 타당했다. 이곳에서 가정의 정신이나 가정생활은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파괴 되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시 말해서 이웃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인 양 사랑하라"가 가장 중요한 '빈의 원칙'이었다. 
빈에서 풍기가 가장 문란했던 시기는 아마 '순결위원회'를 창설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했던 시대였을 터인데,,, 이 제도는 가정을 완전히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 제도는 가정에 불행을 몰고 왔으며, 문자 그대로 간통을 배양했다. 관능적인 즐거움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금지되자 사람들은 안전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는 거리의 가로등불 아래에서나 무도회장의 불빛 속에서보다 사랑 행위의 속도가 더 빠른 법이다. 풍기 경찰은 가정의 비밀에 대한 뒷조사도 할 수 있었으므로, 유혹과 간통은 낙태나 영아 살해라는 범죄를 몰고 왔다.  
출처 : 『캐리커쳐로 본 여성 풍속사 Die Frau in der Karikatur』, Eduard Fuchs, 전은경옮김, 미래M&B

Tuesday, November 12, 2013

[Scrap] 닭점,,,

[Scrap] 기도하는 여인들


예나 지금이나,,, 솔로들의 슬픔이란,,,ㅠㅠ

"너도 남자가 없고, 나도 없어. 우리 둘 모두 없으니, 다른 여자들도 없어야 해. 그러니 사육제 기간의 온갖 유혹에 대항할 모임을 만들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기도하자. 난 작으니까 돌아다니면서 이 모임에 필요한 돈을 걷을 테니, 키 큰 너는 그 종이를 풀로 붙여!"

 - 출처 : 『캐리커쳐로 본 여성 풍속사 Die Frau in der Karikatur』, Eduard Fuchs, 전은경옮김, 미래M&B

[Scrap] 부활절 그리고 달걀


책(『이 고기는 먹지마라? - 음식 터부의 문화사』 프레데릭 J 시문스, 김병화옮김, 돌베개)라는 책에서 달걀 기피 혹은 섭취와 관련된 글을 읽다가,,,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주는 이유가 궁금해서 웹을 검색해 보았다. 왜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줄까? 하는 궁금증.

아래는 웹에서 찾은 문서 Scrap.

부활절 ; 레저렉션 데이? or 이스터 데이? 

"부활절의 영문 명칭은 리저렉션 데이로, 흔히 알려져 있는 이스터 데이와는 다른데, 이 이스터데이가 튜튼족과 앵글로섹슨족에서 숭배하던 봄의 여신 오스타라, 혹은 에오스트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원은 고대 바벨론까지 이어지며, 고대 바벨론에는 거대한 달걀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은 어느 날 유프라테스 강에 굉장히 큰 달걀 하나가 떨어졌는데, 이것을 물고기들이 강 밖으로 굴려냈고, 비둘기들이 품어 부화시켰고, 여기서 부화한 여신이 아스타르테, 이스터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달걀은 이스터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스터 여신 숭배사상이 주변 국가로 전파되면서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변형됐지만 달걀이 생명의 탄생, 봄, 풍요, 다산을 상징하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 출처 : by treehouse http://aha.zum.com/view/pVZ7W/lt774

달걀이 기독교 교회에서 부활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이유

"그러면 성경에는 부활절 달걀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가? 부활절 달걀에 대한 성경 문헌 상의 근거는 있는가? 사실, 그런 근거는 없다. 성경 어디에도 부활절과 달걀을 연결지을 만한 근거는 없다. 부활절 달걀의 풍습은 비성서적인 교회 전통의 하나로 보는 게 더 맞다. 기독교의 교회는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교회의 의례와 의식에는 성서와는 관련이 없으면서도 교회의 전통으로 유입된 풍습이 많이 있다. 이교도의 풍습이라서 교회의 전통과 정반대되는 전통에 속한 풍습도 많이 유입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이교도 전통과 교회의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 달걀도 시간과 전통의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중략)

교회의 전통이라는 것은 성경의 전통보다 크다. 한편으로 교회는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성서적 근거 이상의 풍습과 의례와 습속을 중핵으로 하여 엉성한 경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출처 : by edi [아이디어 공작소] http://edtree.tistory.com/263

Monday, November 11, 2013

[영화] 숨(Breath, Souffle), 2007,


숨, Breath, Souffle, 2007, 
김기덕 감독/장첸(Chang Chen 张震)/박지아/하정우
영화 중에 사형수로 나오는 장진이란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대만 배우 장첸(张震) 이었구나. 엇그제 본 [성탄매괘(Christmas Rose)]에도 나왔던,,,  검색해 보니, 익히 내가 본 영화에서도 많이 나왔었다. 그땐 관심이 없어서 몰랐었는데... 초한지에서는 한신役, 적벽대전에서는 손권役으로 나오고...  그리고 박지아라는 배우를 또 여기서 보게 되었네. 하정우의 옛 모습도 풋풋... 

아무튼,,, 이 영화는 2007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작품으로 출품되었는데, 당시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인듯. 나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 정평이 나 있고, 또 본 영화의 줄거리와 평(評)이야 인터넷 찾아보면 현란한 글들이 많으니 검색해 보면 줄줄이 나올 것이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Skip...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참 인상적이다.
같은 방의 동료들이 달라들어 곧 사형집행될 "사형수 장진"의 숨을 거두는 장면. 물론 법적, 현실적으로 따지자면야 이것도 엄연한 살인이긴 하지만... 각설하고,,, "숨이 막혀 죽는다는 것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죽는 방법의 소망이다"라는 評도 있더이다.

Sunday, November 10, 2013

2013/11/10 관악산 산보

어제 산보 시작 도중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여 다시 산보를 나섰다. 햇살은 따스해 보이나 산을 걷다보니 생각보다 바람이 불고 기온도 낮아져 이제 슬슬 겨울차비를 해야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저기 연주대를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

뒤돌아 보니 관악문쪽에서도 사람들이 바위를 타고 있다

연주대 정상에 올라

여전히 새끼, 아니 이제는 제법 큰, 고양이들이
등산객들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고 있다

저멀리 산과 서울의 풍경들

연주대 밑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에 들렀다
수능밑이라 그런지 수능기원 등(燈)이 빼곡히 놓여있다

암자의 바위 벽면에 동전을 놓아두고 각자의 소원을 빌던 흔적들

산을 내려오는데 소나무 하나가 어부정한 자세로 자라고 있다
아마 태풍이나 어떠한 이유로 넘어지면서 뿌리가 거의 뽑힌채로
다시 땅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