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 대한민국 이발관의 역사/민속사
고종의 머리카락을 자른 사람은 정3품으로 황태자 및 귀족 자제를 가르쳤던 안종호 대감이었다. 안종호 대감은 1905년경에 청진동 인근에 '최신이발관'을 개설하였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이용원의 시초이다. 최신이발관 다음으로 광화문에 '중앙이발관'이 생겼다. 이들 이발관은 두 손으로 작동하는 양수 바리캉과 나무 의자 한두 개를 놓고 영업을 하였다. 당시 정보는 단발령을 장려하기 위해 이발관 개설을 뒷받침하고 초기에는 세금도 없었다고 한다. 고객은 대부분 관리 또는 일본 순검들이었고 일반 대중들은 이발관 앞을 피해 다녔으며 이발사를 천시하였다고 한다. 1925년에 황해도 황주에 이발 조합이 생기는 것을 보면, 1920년대에 들어서서는 사람들이 단발령을 좋든 싫든 받아들였고 이발사가 전문 직업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발관이 면허제로 바뀐 것은 1923년이다. 당시 일본인 야마모토라는 사람이 강습회를 하고 그해 가을에 처음으로 국가가 이용사 자격시험을 실시 하였다. 시험 출제는 주방주 의학박사의 『위생독본』에서 출제되었으며, 생리해부학, 소독법, 면접시험, 실기 시험등.... 1925년 이후에는 이발사와 관련한 신문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당시 이발사 면허 시험은 관할 경찰서에서 주로 보았으며 필기와 실기 시험을 2~3일에 걸쳐 실시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발과 관련한 전문 교육기관이 없었다. 이발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기술을 익히고 『위생독본』을 독학해서 자격을 취득하였다.
60~70년대에는 이발관과 미용실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미용실에서는 파마를 위주로 하는 손님만을 받고 이발 또는 커트가 필요한 손님은 이발관을 이용하였다. 지광식이 1960년대에 이발관을 할 때 교동시장내에는 미용실이 1곳 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기가 안 좋아 교동시장내 다른 점포들은 거의 문을 닫은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미용실이 유일하게 3곳으로 늘었다.
(당시) 파마를 하는 방식은 '불파마'였다. 불파마는 파마 약과 파미 기구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 사용한 방식이다. 로트(인두)에 머리카락을 돌돌 감고 약을 바른 뒤 쇠로 만든 집게를 양쪽으로 벌려 그 속에 발갛게 달군 돌덩이를 넣고 머리를 말은 로트를 맞물려 주는 것으로, 쇠 집게를 로트로 말은 숫자대로 머리에 꽂고 있어야 했다. 돌이 식으면 다시 달군 돌을 집게 속에 넣고 파마가 될때까지 있어야 했으므로 자칫하면 머리에 화상을 입을 수 있고 머리카락이 탈 수도 있었다.
불파마는 1923년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안에 미용실을 연 오엽주씨가 일본에서 처음 도입하였다고 한다. 불파마를 했다고 해서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술집 여자냐는 질책을 받고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지만, 해방직후 불파마 값은 쌀 한가마니 값에 상당할 정도로 비싸서 고위직 인사의 부인이나 개화된 집안의 여성 등 특수층이 아니면 염두를 낼 수 없었다.
- 『교동도의 시계수리공과 이발사』, 오창현/이성곤,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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