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적인 여성들의 표본이라고 비난을 받는 범주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하게도 원래 가장 전형적인 순결의 표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 즉 수녀들이다. 수녀들의 정욕이나 엄청난 방종에 대한 보고와 묘사는 거대한 도서관을 하나 만들고도 남을 정도이다. 이 주제에 관한 자료는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존재하지만, 종개개혁 시긴인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더욱 많이 등장한다. 종교개혁 시기의 견해로는 유명한 가일러 폰 카이저스베르크의 것이 특히 탁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예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소녀들이 많았다. 육욕을 채우기에는 거기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 어떤 사람이 딸을 수도원으로 보내야 할지 그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이 말이 딸을 '유곽'으로 보내는 것, 즉 직업적인 창녀를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했다. 금박 제조업자였던 안토니 크로이처(Antoni Kreutzer)의 뉘른베르크 연대기 원고에는 "어린 수녀가 수도원에서 나와 어디론가 달려가네. 그곳은 유곽이지"라고 적혀 있다. 이런 기록은 수 없이 많다. 더 늦은 시기인 17세기와 18세기의 것들도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완벽하게 같다.
그러자 이런 묘사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이 등장했다. 첫째로, 이런 묘사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편파적인 비방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비방은 루터파,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주의자와 반교회적인 무신론자들이 양심도 없이 사용한 검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를 철저하게 찬양하던 사람들이 주장한 반박의 요지이다. 교회를 이 정도로 무조건 찬양하지 않던 사람들, 즉 불쾌한 어떤 사실을 "그건 거짓말이야!"라는 판결로 간단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약간 다르게 설명했다. 이들은 이렇게 흔한 비방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리게 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반화 욕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중립적이라는 역사가들이 자신의 객관성을 드러내기 위해, "공평해야한다"는 틀에 박힌 서론으로 책을 시작하며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객관성이 아니라, 사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수녀원의 도덕 상태는 가일러나 그 외에도 재치있고 시끌벅적한 요한네스 쉐르(Johannes Scherr 1817~1886)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이 묘사한 것과 실제로 같을 때가 많았다. 중세의 많은 수녀원들은 귀족과 명문가들이 즐겨 머무는 평판 나쁜 여관과 다름없었으며, 매일 밤마다 빈 방이 없이 꽉 찬 수녀원들도 있었다. 유럽의 교차로에서 성업 중인 여관들보다 손님이 더 많았던 것이다. 이와 관한 확실한 증거는, 노골적으로 명백하게 묘사한 귀중한 자료인 [짐머 연대기]만 한 번 읽어 보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수녀원들 역시 호색적이고 아주 우수한 사랑의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기교가 뛰어난 비너스 여사제들이 수녀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최근 연구들도 이런 일들이 사실임을 예외 없이 증명한다. 이런 연구에 의하면, 라블레나 아레틴, 카사노바나 로쟁이 대담하게 수녀들의 생활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실적인 무화상이었다. 공쿠르 형제는 1세기 외설의 정수는 수녀들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수녀원에 들어간 사람들의 경제 법칙, 그리고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짧은 기간내에 수녀원들이 말 그대로 우후죽순처럼 생긴 원인에 지극히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수도원이 철저하게 신실한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며, 그래서 이들은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관능적 향락을 버리길 원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류이다. 물론 이런 오류는 무척 자주 일어난다. 널리 통용되는 이런 가정은 많은 여성들을 수도원으로 쫓아보내는 진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세속의 즐거움을 진심으로 거부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가기로 약조한 것이 아니라, 절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갔다. 재산이 분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 또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들이 이들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과 명문가들에게는 가족 중 여자 구성원을 수도원으로 보내는 것이 노처녀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이 계급에서 노처녀 문제는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늘 있어 왔다. 이렇듯 지배 계급의 딸들이 수도원에 차고 넘친 현상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지만, 가진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일을 위해서라는 표어를 내보였다. 이 방면의 수도원 역사 연구에서 전형적인 예는 파리와 베네치아 인데, 이 두 도시는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줄 것이다. 18세기에 베네치아에는 수녀원이 서른다섯 개 이상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가족회의 결정에 의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된 귀족층 젊은 여성들로 가득했다. 예전에 이 도시에 있던 수녀원의 숫자는 이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지키려고 한 현상에 비례하여 수녀원의 숫자도 증가했다는 점이다.
경건함이나 세속적인 욕망의 포기는 전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그저 의식적으로 쓴 가면에 불과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여기에 상응하는 내적 원인 때문이었으므로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사치스럽게 자란 이런 여성들에게 적합한 형태는, 편안하게 오락을 즐기며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한 물론 가장 편안한 오락은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사, 즉 오락만을 위한 사랑이었다. 수녀복을 입은 사랑의 예술가들이 이런 오락을 발전시켰다. 18세기의 베네치아 수녀들은 옷이나 몸짓 등 전체적인 행동에서 세련된 교태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네치아의 수녀들은 거리에서 언제나 호색적인 동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얘, 너 왜 우리 수도회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지?"
"뭐 하러 길을 빙 돌아가겠어요? 저는 수녀님들도 언젠가는 어차피 우리 쪽으로 오리라는 걸 잘 알거든요"
순결하지 못한 수녀들의 생활에 대한 프랑스 캐리커쳐, 몰로슈, 1871년
종교성과 섞인 여성의 관능에 대한 풍자적 부식 동판화,
벨기에 캐리컬처, 펠리시앙 롭스
출처 : 『캐리커쳐로 본 여성 풍속사 Die Frau in der Karikatur』,
Eduard Fuchs, 전은경옮김, 미래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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