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순조 1년(1801년)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1802년(당시 다산의 나이 41세)때 어린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원제는 기이아寄二兒, 두 아들에게 보냄)에 나타난 다산의 독서론;
다산은 편지에서 어린 아들에게 몰락한 남인계 집안으로서 폐족(廢族)의 처지에 잘 대처하고, 가문을 보존해야 함을 역설하고, 이를 위해서는 독서, 곧 학문에 전념하며, 문장에 뛰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먼저, 다산은 본인의 과거와 독서, 문장을 되돌아 보며 자신의 문장은 관학(官學)의 풍을 벗어날 수 없라고 다음과 같이 자평한다.
"나의 시나 문장은 은하수의 물로 세척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거문장(科文)의 기미를 씻을 수 없고, 그 중에 잘된 것이라 할 지라도 관각체(館閣體)의 기미를 벗어날 수 없다"
15세가 되어서 서울에 올라가 유학(遊學)하였으나 방랑하기만 하여 터득한 것이 없었다. 20세에는 비로소 과거 공부에 전심하였는데, 태학(太學)에 들어간 뒤로는 또 변려문(한문체의 하나로 주로 4자 및 6자의 댓구를 많이 쓰는 문체로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 229-589 때 성행했던 문체)에 골몰하였고, 뒤이어 규장각(奎章閣)에 예속되었는데 하찮은 문장학에 머리를 썩인 지가 10년 가까이 되었으며, 그 후에 또 교서관(校書官)의 일에 분주하였다. 곡산(谷山: 황해도지방)에 부임해서는 백성 다스리는 일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신헌조, 민명혁 두분의 탄핵(다산이 37세때 형조참으로 있을때 서학西學의 일로 탄핵을 받은 사건)을 받았고, 이듬에는 정조께서 승하하시는 슬픔을 만나게 되었다.
경향 각지로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지난 봄에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거의 하루도 독서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시나 문장은 은하수의 물로 세척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거문장(科文)의 기미를 씻을 수 없고, 그 중에 잘된 것이라 할 지라도 관각체(館閣體, 홍문관, 예문관에 종사하던 학자들이 주로 썼던 고문古文을 사용한 문장체)의 기미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내 수염과 머리는 이미 백발이 희끗희끗해졌고 정력 또한 이미 쇠약해졌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독서/학문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먼저 경학(고전 경서)를 철저히 읽고 정치/경제학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마쳐야 비로서 본격적인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에 근거한 옛 선배들이 글을 두루 읽어야 한다는 충고. 실사구시의 학자다운 자세이다.
문장은 반드시 먼저 경학(經學)으로써 근기를 확고히 세운뒤에 사서(史書)를 섭력해서 정치의 득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적인 학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들의 경제(經濟)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고서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비로서 독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혹 한개 낀 아침과 달 밝은 밤, 짙은 녹음과 가랑비 내리는 것을 보면 시상이 떠 오르고 구상이 일어나서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동하는 시가(詩家)이다. 나의 이 말을 오활하다고 여기지 말라.
수십 년 이래로 대개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문학을 크게 배척하여 모든 선현의 문집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데,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고 선배의 문집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의 학문이 고금을 꿰뚫었다할지라도 자연 조잡하게 될 것이다. 시집은 서둘러 볼 필요가 없으나, 상소문, 차자(箚字-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 또는 상관이 하관에게 보내는 공문서), 묘문(墓文), 편지 등을 읽어 모름지기 안목을 넓혀야 한다- 출처 :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 엮음, 사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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