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니,,, 사실 책의 주제에서 벗어나 이야기이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갈무리해 본다.
남한에서도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흔했던 계와 외상/현물거래의 모습들이다. 사실 내 어릴적, 70~8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은행과 현금거래 시스템이 활발하지 않았다. 시골에서의 금융거래는 주로 "계"라는 것이었고, 친구들끼리의 모임한다고 모임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며 쌀 한되박씩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각주13: 종로 4가 예지상가의 시계수리점을 운영하는 이병수의 경우에는 귀금속으로 등록허가를 받았다. 예지상가가 귀금속 전문상가로 자리 잡을 초창기에는 귀금속을 주로 다루는 사람과 시계를 주로 하는 사람 모두 귀금속으로 등록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업종으로 인식하여 친목계도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귀금속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 그때는 그리고 내가 한참 했을 때는 여기 스물네 군데가 있었어요. 요 동네 근방 근방이. 어떻게 스물네 개를 알았냐면, 우리 친목계를 했어. 우리들끼리만 또. (시계) 수리한 사람은 수리한 사람만 친목계를 하고, 금은 파는 사람은 파는 사람끼리 친목계하고. 그때는 계가 유행했어요. 계를 그렇게 많이 했어. 적금들이고 그런거 없어요. 은행에 안가. 우리끼리. 날계. 하루에 천 원씩이면 천 원씩 모아가지고 열흘 있다 뽑고. 별의별 계가 다 있었어. 우리들끼리만. 그때는 은행 거래를 안 하고. 그러다가 점점 죽어지고 은행으로 발돋움해갖고 지금은 계 없어져 버렸지 뭐"
"원래 이발 요금은 외상이 없어서 인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교동에서는 '볏머리'라는 독특한 외상 방식이 있다. 볏머리는 농사꾼들에게 1년 동안 돈을 받지 않고 머리를 깍아 주다가 추수가 끝나고 탈곡하고 나면 바로 이발비를 대신 받는 것이다. 1년 이발비는 벼의 낟알로 75근을 받는다. 교동에서는 다른 이발사들도 '볏머리'를 하였다고 한다. 지광식은 볏머리 수금을 할 때면 가마를 50장 사 두었다가 친구들과 수금을 다녔다. 수금을 다니다 보면 그 집의 인심을 알 수 있다고 한다. 1년 볏머리를 한다고 하여 1주일에 1회씩 머리를 깍으러 왔다가 막상 벼를 내어 줄 때는 쭉정이 같은 것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년 동안 고생했다고 막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볏머리 이발은 경기가 좋아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 『교동도의 시계수리공과 이발사』, 오창현/이성곤, 국립민속박물관
No comments:
Post a Comment